안나는 하연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하더니 이내 모든 신경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부 대표님이 여기까지 친히 오실 줄은 몰랐네요. 환영해요. 먼 길 오셔서 피곤할 텐데 호텔로 안내할게요.” 상혁은 상대의 태도에 눈이 어두워지더니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부탁드릴게요.”눈앞에 세워진 두 대의 밴을 보자 안나는 이내 하연을 그중 하나로 안내했다.“최 사장님, 타세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상혁이 이내 그 뒤를 따라 하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안나에게 말했다.“이사님,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탈게요.”안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감정을 억제했다.“네. 그럼 저희가 뒤에서 따르겠습니다.”차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하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해서 말했다.“상혁 오빠, 안나 이사님이 오빠랑 같은 차 타려고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미녀의 체면을 깎아도 돼요?”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이토록 심각한 표정의 상혁은 처음 보는지라 하연은 애써 웃음을 참더니 농담조로 말했다.“알았어요. 그런데 안나 이사님이 저렇게 예쁜데 정말 안 설레요?”“별 감흥 없어.”무뚝뚝한 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그 때문인지 얼굴을 덮쳐오는 바람도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하지만 호텔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 웃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호텔 인테리어는 7, 8년 정도 된 데다 한눈에 봐도 낡아 보였다.그때 안나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 들어갑시다.”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하연은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안나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이곳은 이 부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예요. 며칠 동안 편안하게 묵었으면 좋겠어요.”‘가장 좋은 호텔?’‘이게?’‘와, 현타 오네.’상혁은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한
“그래서 하나는 부 대표님께 드리는 겁니다.”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 든 안나는 매력적인 눈으로 상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카드키를 쥐어 주며 윙크를 날렸다.“제 방은 바로 옆방이니 언제든지 환영해요. 깊이 있는 교류를 해도 좋고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엉덩이를 흔들며 떠나갔다.상혁은 카드키를 힐끗 보더니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이윽고 하연에게 전화하려 할 때, 하연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오더니 상혁을 보자마자 그대로 내팽개치고는 상혁의 품에 폭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상혁 오빠, 쥐... 엄청 큰 쥐가 있어요.”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도 떨고 있었다.놀란 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연을 보자 상혁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마침 잘됐네, 그럼 여기서 지내.”하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쥐가 뭐라고, 괜찮아.”상혁의 위로에도 하연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엄청 큰 쥐였어요.”말하면서 상혁의 품에서 떨어진 하연은 그제야 상혁의 방이 제 방과 천지 차이라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울고 싶은 마음마저 생겨났다.“이건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됐어. 안방은 네가 써, 난 소파에서 잘게.”하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고, 상혁은 하연에게 슬리퍼를 챙겨주고 캐리어를 안으로 옮겨 주었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하연은 이내 침대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에 몸을 맡기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와, 침대 너무 넓고 편하다!”몸을 돌려 옆에 있는 베개를 품에 꼭 안으니 한시도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이에 하연은 한참 누워 있다가 느릿느릿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니 졸음이 쏟아져 하연은 하품을 하며 헤어드라이기를 챙겨 나왔다. 그 시각, 상혁은 노트북을 끌어안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하연을 보자 이내 노트북을 덮고 헤어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 졸려서 눈꺼풀과 싸우고 있는 하
이 방에 저와 상혁 두 사람뿐이라는 걸 떠올리자 하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답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상혁 오빠가 나를 방까지 안아갔나 보네.’“아! 최하연, 정말 미쳤어!”하연은 쪽팔리고 화가 나서 중얼거리더니 상혁을 화장실에서 쫓아냈다.하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밀려 나가더니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하연이 씻고 나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상혁은 이미 방에 없었다. 그제야 히연은 숨을 푹 내쉬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뒤, 식사를 반쯤 끝냈을 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당연히 상혁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오빠, 카드키 안 챙겼어요?”하지만 말소리는 이내 뚝 끊겼다.그도 그럴 게, 하연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상혁이 아니라 놀란 표정을 한 안나였으니까.안나는 하연을 삿대질하며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설... 설마 어제 여기 있었어요?”“무슨 문제 있나요?”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는 하연의 모습에 안나는 화가 치밀었다.“부 대표님은 어디 있죠?”하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여기 없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이제 곧 출발해야 하니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가시 돋친 말투로 말한 안나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떠나버렸다. 그 뒤에 혼자 남겨진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하연이 아래층에 도착하자 일행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태훈이 제일 먼저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잘 주무셨어요?”“응. 다 도착했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상혁을 돌아봤다. 이윽고 어제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뻔뻔하게 손을 흔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나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지만 상혁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기에 아까처럼 하연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부 대표님, 오늘 오전 회의가 잡혀 있어 회의하고 나서 오후에 현지 조사를 진행할
“우연의 일치일 거예요. 성만 같겠죠.”“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최 사장이 어딜 봐서 명문가 아가씨 같아 보여?”안나는 내친김에 하연을 보며 지아의 의견에 맞장구쳤다.“됐어, 오늘 목표는 최 사장이 아니야.”지아는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걱정하지 마세요. 이사님 목표는 부 대표님이잖아요.”“맞아.”안나가 순순히 인정하자 지아가 말을 이었다.“부 대표님 꼭 낚아채세요.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어디 가서 만나요? 저런 남자를 낚아채면 그야말로 사는 세상이 달라진다고요.”안나는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남자는 가끔 청순한 걸 좋아하지만 결국에는 섹시한 걸 못 거절해. 그러니 부 대표도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 돼 있어.”말을 마친 안나는 자신만만하게 사람들 뒤를 따랐다.일행을 실은 차는 곧바로 HY 그룹으로 향했다. D시 최고의 기업인 HY 그룹은 인테리어부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심지어 대문 앞에는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드리워 있었다.모든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현장에는 열렬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직원들이 하연과 상혁을 둘러싼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부 대표님, 회의실은 22층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안나가 상혁한테 살갑게 말하는 사이, 하연이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했으나 지아가 막아섰다.“최 사장님, 우리는 다음 걸 탑시다.”하연은 그 말에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상혁 역시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하연이 아직 오르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고 태훈에게 물었다.“최 사장은 안 탔어요?”“최 사장님은 미처 못 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확인할까요?”태훈이 대답하자 옆에 있던 안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이제 더는 못 타요. 괜찮아요. 제 비서도 못 탔는걸요. 이따가 최 사장님을 위층으로 안내할 거예요.”안나의 말에 상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행과 함께 22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HY 그룹 대표가 상혁 일행을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눈으로 한기를 내뿜었다.“일개 비서가 이렇게 기고만장해서야. HY 그룹의 성의를 좀처럼 보기 힘드네요. 하지만 충고 하나 하자면 본인이 한 일에 대한 뒷감당은 본인이 져야 해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떠났다.하지만 지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그도 그럴 게, 하연이 그저 저한테 겁을 주려고 그런 말을 내뱉았다고 생각했으니까.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안 보고 안 겪은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지아는 하연을 그저 힘없고 권력 없는 일개 나부랭이로 취급했다.하연은 HY 건물에서 나온 뒤 곧장 차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게임을 시작했다.그 시각, 회의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테이블 앞에 앉아 미간을 구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혁 때문에 회의실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상혁이 이러는 이유를 알 리 없는 HY 대표 주자철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부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상혁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벌써 20분이나 흘렀는데 하연은 왜 안 오는 거지?’그때 태훈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보고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이 없어졌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하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회사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그때 안나가 다급히 따라나섰다.“부 대표님,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 가시나요?”상혁은 안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걸었다. 한 번도 이렇게 소란을 피운 적이 없고 더욱이 제 전화를 끊은 적 없던 하연의 이상한 반응에 상혁의 미간은 팍 구겨졌다.‘오늘 대체 왜 이러지?’“혹시 최 사장님 봤어요?”상혁의 물음에 안나는 그제야 방금 전 지아를 시켜 하연을 막으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상혁이 이렇게까지 하연의 일에 예민할 줄은 생각도 못 해 괜히 마음이 찔렸다.“저도 부 대표님과 함께 올라왔는데 어떻게 봤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부상혁과 최하연이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그 시각.똑똑-차창 박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눈을 들어 확인한 하연은 밖에서 기다리는 상혁을 발견했다.하지만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시선을 거두고 물 흐르듯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하더니 몇 초 만에 상대를 KO 시켰다.이윽고 액정에 뜬 승리라는 문구를 보자 그제야 핸드폰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상혁 오빠.”입을 삐죽 내민 하연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그 모습에 상혁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 차에서 게임을 하는 거야?”하연은 두 손을 쫙 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왜긴 왜겠어요? 누군가 저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으니 못 들어갔죠.”그 말에 상혁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보아하니 우리와 협력할 마음이 없나 보네. 그렇다면 우리도 계속할 필요 없지.”말을 마친 상혁은 차에 타더니 이내 기사더러 출발하라고 명했다.차가 시동을 걸고 곧바로 출발하자 하연은 왠지 자기가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오빠, 이번 프로젝트 2천억짜리인데,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사업이 너만 중요할까?”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상혁을 보며 하연은 싱긋 웃었다.순간 공기 속에 달콤한 분위기가 섞이기 시작했다.“그렇게 말하니 저는 기분 좋은데, 운석 씨가 마음 아파하겠네요. 이 프로젝트는 운석 씨가 따낸 거거든요.”상혁은 순간 질투심이 솟아났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발했다.“프로젝트는 나도 때낼 수 있어. 2천억짜리 프로젝트를 원하면 얼마든 따내 줄게. 하지만 다음부터 내 앞에서 다른 놈 얘기 꺼내지 마.”‘와, 남자다. 카리스마 쩌네.’하연은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오빠 너무 난폭한 거 아니에요? 좀 쪼잔한 것 같기도 하고.”“사랑하는 여자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남자든 쪼잔해져.”하연은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사랑하
태훈 일행이 떠나자 주자철은 끝내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떤 자식이 최 사장님 심기를 건드렸어? 당장 나와!”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날벼락을 맞은 듯한 사람들의 표정과 이토록 화내는 회사 대표를 보자 안나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그때.“대표님, 방금 CCTV를 확인했더니 누군가 최 사장님을 막고 회의실 밖에 세워뒀습니다.”비서의 보고에 주자철은 버럭 소리쳤다.“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감히 최 사장님을 막았어?”비서는 이내 지아를 가리켰다.“지아?”충격을 받은 사람 중, 누군가 이내 지아를 미는 바람에 지아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픈 걸 상관할 새도 없이 다급하게 사정했다.“대표님,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주자철은 발로 지아의 어깨를 세게 걷어찼다.“그냥 뭐? 그분이 B시 DS 그룹 최 사장님이라는 거 몰라서 그래? 그런 눈치도 없이 회사 생활 어떻게 해?”“대표님,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헤 주세요. 제발.”지아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한 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하지만 단단히 화난 주자철은 그 자리에서 명령했다.“나한테 비는 게 뭔 소용이야? 당장 가서 최 사장님께 빌어! 최 사장님 화를 풀어드리지 못 해 이 프로젝트가 물 건너 가면 앞으로 출근할 필요 없어.”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로 최 사장님을 찾아가 용서를 구할게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후다닥 일어나 냅다 밖으로 뛰쳐나갔다.그걸 본 주자철은 이를 악물며 지아를 속으로 수천수만 번 욕했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가서 일하지 않고!”사람들은 저한테 불똥이라도 튈까 두려워 순식간에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한편, 호텔에 돌아온 하연은 휴식할 새도 없이 주자철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최 사장님, 오늘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랫사람이 실수로 벌인 짓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상혁의 행동이 어찌나 빨랐는지 DS 그룹과 FL 그룹이 동시에 HY과의 협력을 취소한다고 발표하자마자 HY는 단번에 마비가 되었다.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회사를 보자 안나는 그제야 현실을 직감했지만 여전히 이 모든 게 하연의 짓이라는 건 믿을 수 없었다.이에 핸드폰을 꺼내 지금껏 저와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던 운석에게 전화했다.“나... 나 본부장님?”“네, 안나 이사님, 협력은 잘 되고 있나요?”아직 D시 상황을 모르는 운석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하지만 안나는 운석의 말에 직접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오늘 뭐 하나 확인할 게 있어 전화했어요. 혹시 최 사장님이 무슨 대단한 신분을 갖고 있나요?”그 말을 듣자 운석은 이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왜 그래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그제야 안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사실대로 대답했다.“DS 그룹과 FL 그룹이 HY 그룹과 협력을 취소했어요.”“대체 무슨 일이죠?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겁니다.”흥분해서 따져 묻는 운석의 태도에 안나는 모든 책임을 하연에게 돌렸다.“다 최 사장 때문이에요. 제 비서가 실수로 심기 좀 건드렸다고 바로 협력을 취소한 거 있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수천억대 프로젝트를 이렇게 중단하면 우리더러 죽으라는 것밖에 더 돼요?”“잠깐만요!”운석은 화가 치밀어 안나의 말을 잘랐다.“안나 대표님, 그 말은 지금 최 사장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이에요? 최 사장님이 누구인지 알고 건드려요? 본인 주제를 알아야지. 협력만 중단된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아니, 나 본부장님...”안나는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운석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이렇게 말해줄게요. 당신들이 그 누구, 심지어는 저를 건드려도 괜찮지만 최 사장님만은 건드리면 안 되죠. 그런데 건드렸으니 그 결과는 당신들이 알아서 감수해야죠. 협력 취소는 고작 돈 조금 손해 보는 거로 끝날 텐지만, 만약 최 사장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내가 HY 가만 안 둘 거예요.”말을 마친 운석은 곧바로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