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의 행동이 어찌나 빨랐는지 DS 그룹과 FL 그룹이 동시에 HY과의 협력을 취소한다고 발표하자마자 HY는 단번에 마비가 되었다.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회사를 보자 안나는 그제야 현실을 직감했지만 여전히 이 모든 게 하연의 짓이라는 건 믿을 수 없었다.이에 핸드폰을 꺼내 지금껏 저와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던 운석에게 전화했다.“나... 나 본부장님?”“네, 안나 이사님, 협력은 잘 되고 있나요?”아직 D시 상황을 모르는 운석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하지만 안나는 운석의 말에 직접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오늘 뭐 하나 확인할 게 있어 전화했어요. 혹시 최 사장님이 무슨 대단한 신분을 갖고 있나요?”그 말을 듣자 운석은 이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왜 그래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그제야 안나는 입술을 깨물다가 사실대로 대답했다.“DS 그룹과 FL 그룹이 HY 그룹과 협력을 취소했어요.”“대체 무슨 일이죠?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겁니다.”흥분해서 따져 묻는 운석의 태도에 안나는 모든 책임을 하연에게 돌렸다.“다 최 사장 때문이에요. 제 비서가 실수로 심기 좀 건드렸다고 바로 협력을 취소한 거 있죠? 애들 장난도 아니고, 수천억대 프로젝트를 이렇게 중단하면 우리더러 죽으라는 것밖에 더 돼요?”“잠깐만요!”운석은 화가 치밀어 안나의 말을 잘랐다.“안나 대표님, 그 말은 지금 최 사장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이에요? 최 사장님이 누구인지 알고 건드려요? 본인 주제를 알아야지. 협력만 중단된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아니, 나 본부장님...”안나는 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운석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이렇게 말해줄게요. 당신들이 그 누구, 심지어는 저를 건드려도 괜찮지만 최 사장님만은 건드리면 안 되죠. 그런데 건드렸으니 그 결과는 당신들이 알아서 감수해야죠. 협력 취소는 고작 돈 조금 손해 보는 거로 끝날 텐지만, 만약 최 사장님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내가 HY 가만 안 둘 거예요.”말을 마친 운석은 곧바로
그날 오후, 일찌감치 호텔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IM 그룹 책임자는 하연을 보자마자 공손하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저는 IM 그룹 책임자 강시원입니다. 이게 제 명함입니다. D시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저희 IM을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명함을 받아 들었다.금색으로 된 명함에는 강시원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강 대표님 존함을 익히 들었습니다.”“아유, 별말씀을요.”강시원은 말하면서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 우선 차에 오릅시다.”하연과 상혁이 차에 오르자 차는 이내 출발했다. 강시원은 가이드를 자처하여 열정적으로 D시의 풍경과 문화를 소개했다.그렇게 한참 달리던 차가 겨우 광산에 도착하자 강시원은 아직 흥이 가시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최 사장님, 우리 D시가 작은 곳이긴 하나 광업, 농업, 축산업이 모두 발달했습니다. 오늘은 우선 광산을 방문하고 내일 농장을 구경하러 갑시다.”“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하연은 말하면서 상혁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주위는 온통 황량한 벌판이었고 그 가운데 높은 광산이 놓여 있었다.광산 위에서 노동자들이 바삐 작업하는 중이었고, 일부 노동자들은 갱 안에서 작업하고 있었다.그때 강시원이 하연에게 자상하게 안전모를 건네주었다.“최 사장님, 광산이 위험하여 안전에 유의하셔야 합니다.”이윽고 다른 안전모를 상혁에게 건넸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 우선 1번 탄광부터 확인합시다.”강시원은 상혁과 하연 일행을 거느리고 광산 안으로 들어가 열정적으로 광산의 작동 원리를 하나하나 설명하였다.하연이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광부들을 눈앞에서 직접 실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특히 갱 안에서 광물을 캐는 광부들이 가장 힘들어 보였지만 까무잡잡한 얼굴 때문에 유일하게 보이는 눈에는 형형한 생기가 넘쳐 흘렀다.온몸이 구질구질해졌지만 광부들은 허리를 숙여 열심히 광물을 캐고 있었다.“이분
말을 마친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하연을 주시하던 사람 몇몇이 하연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걸 하연은 당연히 알 리 없었다.한편, 휴게실 안.“부 대표님, D시에서 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2천억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회사는 HY를 제외하면 우리 IM 그룹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계약을 계속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상혁은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물론 현재로서 IM 그룹이 최적의 파트너라지만 상혁은 그걸 티 내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이번 협력이 우리 세 회사에 모두 중요한 거라 아무래도 조심스럽네요. 우선 고찰을 마치고 저희가 따로 위험평가를 진행한 뒤 상세히 얘기해 봅시다.”상혁은 자기의 패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주 수준 높게 대답했다.강시원 역시 비즈니스 업계에서 오랫동안 있은 사람이기에 그걸 모를 리 없다.“지당한 말씁입니다. 협력 건은 나중에 천천히 얘기합시다. 하지만 우리 IM을 선택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혁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강시원은 뒤로한 채 하연이 떠났던 방향으로 걸어갔다.그 상황에 강시혁은 어리둥절해서 다급히 뒤따랐다.“부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최 사장이 떠난 지 한참 되는데 왜 아직도 안 돌아왔죠?”상혁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묻자 강시원은 그제야 상혁이 이러는 이유를 눈치챘다.‘그런데 부 대표님이 최 사장님을 이토록 신경 쓸 줄은 몰랐네. 혹시 만나는 사이인가? 전에 그런 소문 들은 적 없는데?’속으로 중얼거리던 강시원은 이내 상혁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광산이 워낙 커서 최 사장님이 길을 잃은 게 아닐까요?”상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불안감이 밀려왔으니까. 화장실 앞까지 다가간 상혁은 여자 화장실이건 뭐건 상관하지도 않고 안으로 쳐들
상혁은 핸드폰을 꺼내 하연의 위치를 추적했지만 신호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사라진 위치는 바로 광산 안이다.“계속 찾아. 아직 광산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못 찾으면 한 명도 나갈 생각 하지 마!”상혁은 명을 내라지마자 하민에게 전화했다.그로부터 반 시간도 채 안 되는 사이, 하민과 하성이 전용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비행기 몇 대가 하늘에서 내려 멈춰 서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대단한 장면을 많이 봐온 강시원도 이토록 놀라운 장면은 처음 보는지라 하연의 신분에 감탄했다.하민이 데려온 경호원은 모두 엄격한 훈련을 받은 엘리트들이라 일반 경호원들보다 더 노련했고, 심지어 구조견도 파견했다. 전용기에서 내린 하민과 하성은 곧장 상혁과 합류했다.이윽고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 사람을 데리고 흩어져 하연을 찾기 시작했다.“하성, 넌 사람들 데리고 광산 주변 반경 5킬로미터 범위 이내를 샅샅이 뒤져. 무조건 하연이 찾아내야 해.”“알았어, 형.”하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사람을 파견했다.하지만 D시는 B시처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찾기 매우 어려웠다.때문에 광산 주변을 이 잡듯 뒤졌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없었다.속절없이 시간만 흐르자 상혁은 완전히 당황했다.“현재 갱 안을 제외하고 모두 찾았습니다.”강시원은 잔뜩 긴장해서 상황을 보고했다.그 말에 상혁은 오히려 동력이 생겨났다.“그럼 갱 안을 한 곳도 빠짐없이 찾으면 되겠네요.”하지만 강시원은 얼른 상혁을 막아 나섰다.“부 대표님, 갱은 위험합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내려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아무도 책임 못 집니다.”“위험하다고 해도 무조건 찾아야 해요.”옆에 있던 하민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섰다.그러자 하성도 뒤따랐다.“오늘 여기를 모두 뒤져서라도 하연이 무조건 찾아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D시를 아예 폭발시켜 버릴 테니까.”강시원은 너무 놀라 순간 멍해졌다.지금의 그로서는 이 세
“계속 찾아야지. 나머지 두 개의 갱에도 없으면 군의 도움을 받아야겠어.”하민의 분부에 상혁이 먼저 일어나더니 피곤함도 무릅쓰고 9번째 갱에 내려갔다.그리고 하늘은 노력한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새벽 3시에 상혁은 끝내 마지막 갱에서 하연을 발견했다. 하지만 열 몇 시간 동안 탈수한 상태로 산소가 부족한 곳에 있어 하연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상혁이 하연을 업고 갱에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곧바로 하연을 병원으로 옮기며 응급처치를 시작했다.시간이 1분 1초 흐를수록,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는 하민과 하성은 이미 초조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비록 밤새도록 하연을 찾느라 모두 탈진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본인 상태는 뒤로한 채 하연의 상태에만 신경 썼다.“젠장! 누가 하연을 갱안으로 데려간 거야? 잡히기만 해봐, 내가 그놈 껍질을 벗겨낼 거야!”하성이 화를 내며 이를 갈았다.그에 반해 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가 있는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제대로 생가해 봐, 아까 혹시 무슨 상황이었어? 혹시 따로 미움을 산 사람이 있는 거야?”그 말에 눈을 든 상혁은 하민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HY 그룹.”얼마 전에 바로 HY 그룹과의 협력을 취소해 그쪽에서 보복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생각을 정리한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 직원을 시켜 HY 그룹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날이 밝기 전에 HY 그룹 파산시켜.”하지만 하민과 하성은 이 정도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고작 파산으로 하연이 오늘 겪은 고통과 어떻게 비교해?”“이건 시작에 불과해.”상혁의 말에 하민과 하성은 그제야 개입하지 않고 모든 걸 상혁에게 일임했다. 그도 그럴 게, 상혁은 언제나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기에 믿을 수 있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철은 사람들에게 잡혀 비틀거리며 달려와 상혁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이 사라진 건 정말 저희랑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제발 HY 그룹을 그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상혁의 부하가 떠나자 주자철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이윽고 상혁이 손을 휘휘 젓자 다른 부하가 다가와 주자철을 끌어갔다.그 뒤로 한참 동안 꺼지지 않은 응급실 불을 보며 상혁, 하민과 하성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그러다 날이 밝자 응급실의 불은 끝내 꺼졌고, 세 사람은 동시에 응급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를 보자 상혁이 맨 먼저 물었다.“상태가 어떻나요?”의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의식을 회복하기가 어려울 겁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고, 목소리가 떨렸다.“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분이 식물 인간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그럴 리 없어!”하성이 시뻘게진 눈을 한 채 버럭 소리쳤다.“하연이 식물 인간이 되다니. 절대 그럴 리 없어.”이윽고 마치 이 사실이 믿기 힘든 것처럼 연신 부정했다. 이 순간 하성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세 사람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그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의사를 붙잡았다.“무슨 방법이죠? 하연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없어요.”“하... 하지만 그분이 나서줄지가 미지수라.”“그게 누구죠? 어디 있어요? 제가 당장 사람을 시켜 찾아올게요.”하민이 다급히 따져 묻자 의사는 입을 꾹 다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분은 의술이 뛰어나지만 신출귀몰하는 분이라 일반인들은 절대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환자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을 지체하면 아마...”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하성이 다급히 물었다.“골든 타임이 아직 얼마나 남았죠? 하연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게요.”“6시간 남았습니다.”“6시간?”“네. 때문에 정말 어려워
상혁의 심각한 말투에 현승은 장난기 섞인 모습을 거두로 진지하게 물었다.“보스, 무슨 일인데 그래요?”“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간단한 한마디에 현승은 이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그를 보자 덩그러니 남겨진 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도련님, 어디 가는데요?”하지만 현승은 그 여자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 집에 가라는 말을 끝으로 곧장 전용기에 올라탔다.두 시간의 비행 끝에 현승은 겨우 D시 병원에 도착했다.“백... 백 교수님?”“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정말 백 교수님이잖아!”“...”현승은 의료진들의 선망의 눈빛과 흥분 섞인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비행 중에 이미 하연의 검사 보고서를 토대로 수술 방안을 구상한 현승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다시 켜지자 하성이 걱정스레 물었다.“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거 맞아?”“백현승이란 이름 세 글자가 의료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백 교수가 지금껏 실패한 수술이 없거든. 그런데 백 교수마저 실패하면 하연은...”하민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하연의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하민도 생각지 못했으니까.그때 상혁이 하민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 하연만 무사하면 이 일 제대로 갚아줄 거야. 하연이 다치게 한 사람은 한 놈도 용서할 수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뒤에 검은 무리를 달고 안으로 들어왔다.“한 대표님, 가시면 안 됩니다.”“꺼져!”서준은 포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저를 막는 경호원들을 뿌리쳤지만 경호원 역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한 대표님,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최하연 어디 있어?”서준의 물음에 경호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하민이 다가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한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하민을 마주하자 서준은 성질이
“걱정 마세요. 제 손을 거친 수술이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환자분은 이미 고비를 넘겨 곧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상혁이 다가가 현승의 어깨를 두드렸다.“고생했어.”말이 떨어진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승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상혁의 어깨에 기댔다.“보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수술했는데, 고작 고생했단 한마디가 끝이라고요?”그 말에 상혁은 현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테니까.”“이건 보스가 직접 말했어요? 후회하면 안 돼요.”현승은 헤실 웃으며 말하더니 피곤한지 하품을 했다.“에너지 너무 소모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저 먼저 한숨 자고 와서 상은 이따 받을게요.”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경호원이 현승을 휴게실로 안내했다.한편, 수술실에 있던 의사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와, 이게 가능해? 그렇게 오랫동안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바로 괜찮아졌다고?”“이건 의학계의 기적이야.”“역시 이래서 백 교수님 백 교수님 하는 거였네.”“이번 수술을 다음 논문의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겠어. 백 교수님은 내 우상이야.”“...”사람들은 현승의 의술에 혀를 내두르며 열심히 학습했다.고비를 넘긴 하연은 이내 VIP실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 상혁이 계속 곁을 지켰다.한편 병실 입구에서 하민이 하성을 가로막았다.“두 사람한테 시간을 좀 줘.”결국 하성은 마지못 해 입을 삐죽거리며 문 앞에서 중얼거렸다.“저 자식이 앞으로 하연이 배신하면 내가 저 자식 가죽을 벗길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하성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상혁은 믿을 수 있어. 그동안 상혁이 하연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어린애도 다 알 텐데,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일이잖아.”하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하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