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리으리한 호텔 안에서 남녀의 신음 소리가 한참 동안 흘러나왔다.그렇게 한바탕 몸을 섞은 혜경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그러자 나체 상태의 도지환이 혜경을 품에 와락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한동안 못 봤더니 많이 죽었네? 감옥 생활이 고됐나 봐?”혜경은 담배 연기를 후 내뿜었다.“실없긴.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 부른 거야.”“하하, 알지! 방금 건 중요한 일 아니야?”혜경은 어두운 눈으로 담배를 눌러 껐다.“한서준이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물론 아직은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지만.”지환은 혜경의 몸을 쓱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증거도 없는데 겁낼 거 뭐 있어? 조심하면 되지.”혜경은 그런 지환의 손을 탁 쳐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뭐가 됐든, 난 한씨 가문 사모님이 꼭 돼야겠어. 안 되더라도 최하연을 꼭 감옥에 처넣고 말 거야.”지환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미소 짓더니 혜경의 턱을 들어 올렸다.“내 곁에 누워서 다른 놈을 생각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애초에 그렇게 애썼는데도 한서준과 결혼하지 못했으면서,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그것만 생각하면 혜경은 화가 치밀었다.그렇게 애를 썼는데 서준의 마음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가문을 끌어들였으니.심지어 혜경의 할아버지는 아직도 빚을 갚으려고 일하고 있다.그 죄책감 때문에 혜경은 출소했으면서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고.“내가 인생 역전하려면 한서준과 결혼하는 방법밖에 없어.”“하하. 그럼 축하해.”너털웃음을 지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지환을 보자, 혜경은 지환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교 부렸다.“나 안 도와줄 거야?”“내가 어떻게 도와? 남녀 간의 일은 제삼자가 끼어들 수 없어.”“도와주지 못하는 거야? 도와주기 싫은 거야?”혜경은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지환이 어떤 사람인지 혜경이 모를 리 없다. 이에 바싹 자가가 지환의 뺨에 입을 맞췄다.“걱정하지 마. 난 한 사모님 신분만 필요한 거니까. 내 몸은 여전히 자기 거야.”
희망이 보이자 혜경은 눈을 반짝였다.“말해 봐. 혹시 무슨 좋은 수가 떠오른 거야?”지환은 그런 혜경을 제 아래에 가두더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알고 싶으면 나 만족시켜 봐.”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실내에서 또다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다음 날.하연이 짐을 챙겨 출발하려 할 때, 하민에게서 연락이 왔다.“하연아, 너 D시에 간다면서?”‘역시 오빠한테는 뭐든 비밀로 할 수 없다니까.’하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네, 상혁 오빠랑 같이 가요.”“D시에 내 친구가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걔한테 도움받아.”“네, 알았어요. 저 어린애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요.”그건 맞지만 하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 실장도 같이 가?”“네, 회사 직원들은 따로 출발해서 아마 내일에야 만날 수 있을 거예요.”하민은 그제야 안심했다. 태훈과 상혁이 함께라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으니까.하지만 여전히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넌 어릴 때부터 독립심이 강하고 주관도 또렷하니 내가 간섭하지는 않겠는데, 밖에 나가면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야. D시 치안이 좋지 않으니 내가 경호원 더 붙여 줄게, 꼭 안전에 주의해.”“알았어요.”하연은 말하면서 눈을 들어 멀지 않은 곳에서 저를 기다리는 상혁을 흘긋거렸다.“걱정하지 마세요. 상혁 오빠도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이만 끊을게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이내 성큼성큼 상혁에게 다가갔다.“상혁 오빠!”상혁은 하연의 짐을 받아 비서에게 넘겨주고는 하연의 손을 잡고 전용기에 올라탔다.이윽고 5시간의 비행 끝에 두 사람은 무사히 D시 공항에 도착했다. 협력사 측에서 파견한 사람은 이미 현지 공항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때문에 VIP 게이트를 통해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최 사장님, 부 대표님 D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하연은 얼른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상대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HY 그룹에서 왔나요?
안나는 하연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하더니 이내 모든 신경을 상혁에게 쏟아부었다.“부 대표님이 여기까지 친히 오실 줄은 몰랐네요. 환영해요. 먼 길 오셔서 피곤할 텐데 호텔로 안내할게요.” 상혁은 상대의 태도에 눈이 어두워지더니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부탁드릴게요.”눈앞에 세워진 두 대의 밴을 보자 안나는 이내 하연을 그중 하나로 안내했다.“최 사장님, 타세요.”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상혁이 이내 그 뒤를 따라 하연의 옆자리에 앉으며 안나에게 말했다.“이사님,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탈게요.”안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감정을 억제했다.“네. 그럼 저희가 뒤에서 따르겠습니다.”차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하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해서 말했다.“상혁 오빠, 안나 이사님이 오빠랑 같은 차 타려고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미녀의 체면을 깎아도 돼요?”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이토록 심각한 표정의 상혁은 처음 보는지라 하연은 애써 웃음을 참더니 농담조로 말했다.“알았어요. 그런데 안나 이사님이 저렇게 예쁜데 정말 안 설레요?”“별 감흥 없어.”무뚝뚝한 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그 때문인지 얼굴을 덮쳐오는 바람도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하지만 호텔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 웃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호텔 인테리어는 7, 8년 정도 된 데다 한눈에 봐도 낡아 보였다.그때 안나가 차에서 내려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 들어갑시다.”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하연은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안나의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이곳은 이 부근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예요. 며칠 동안 편안하게 묵었으면 좋겠어요.”‘가장 좋은 호텔?’‘이게?’‘와, 현타 오네.’상혁은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한
“그래서 하나는 부 대표님께 드리는 겁니다.”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 든 안나는 매력적인 눈으로 상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카드키를 쥐어 주며 윙크를 날렸다.“제 방은 바로 옆방이니 언제든지 환영해요. 깊이 있는 교류를 해도 좋고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엉덩이를 흔들며 떠나갔다.상혁은 카드키를 힐끗 보더니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이윽고 하연에게 전화하려 할 때, 하연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오더니 상혁을 보자마자 그대로 내팽개치고는 상혁의 품에 폭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상혁 오빠, 쥐... 엄청 큰 쥐가 있어요.”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도 떨고 있었다.놀란 고양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하연을 보자 상혁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마침 잘됐네, 그럼 여기서 지내.”하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쥐가 뭐라고, 괜찮아.”상혁의 위로에도 하연은 흐느끼며 고개를 저었다.“엄청 큰 쥐였어요.”말하면서 상혁의 품에서 떨어진 하연은 그제야 상혁의 방이 제 방과 천지 차이라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울고 싶은 마음마저 생겨났다.“이건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됐어. 안방은 네가 써, 난 소파에서 잘게.”하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고, 상혁은 하연에게 슬리퍼를 챙겨주고 캐리어를 안으로 옮겨 주었다.방에 들어오자마자 하연은 이내 침대로 향했다. 커다란 침대에 몸을 맡기니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나른해졌다.“와, 침대 너무 넓고 편하다!”몸을 돌려 옆에 있는 베개를 품에 꼭 안으니 한시도 침대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이에 하연은 한참 누워 있다가 느릿느릿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니 졸음이 쏟아져 하연은 하품을 하며 헤어드라이기를 챙겨 나왔다. 그 시각, 상혁은 노트북을 끌어안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그러다 하연을 보자 이내 노트북을 덮고 헤어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 졸려서 눈꺼풀과 싸우고 있는 하
이 방에 저와 상혁 두 사람뿐이라는 걸 떠올리자 하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답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상혁 오빠가 나를 방까지 안아갔나 보네.’“아! 최하연, 정말 미쳤어!”하연은 쪽팔리고 화가 나서 중얼거리더니 상혁을 화장실에서 쫓아냈다.하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밀려 나가더니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하연이 씻고 나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상혁은 이미 방에 없었다. 그제야 히연은 숨을 푹 내쉬고 식탁에 앉아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 뒤, 식사를 반쯤 끝냈을 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당연히 상혁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오빠, 카드키 안 챙겼어요?”하지만 말소리는 이내 뚝 끊겼다.그도 그럴 게, 하연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상혁이 아니라 놀란 표정을 한 안나였으니까.안나는 하연을 삿대질하며 분노를 얼굴에 드러냈다.“설... 설마 어제 여기 있었어요?”“무슨 문제 있나요?”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는 하연의 모습에 안나는 화가 치밀었다.“부 대표님은 어디 있죠?”하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여기 없어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이제 곧 출발해야 하니 사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가시 돋친 말투로 말한 안나는 상대방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떠나버렸다. 그 뒤에 혼자 남겨진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하연이 아래층에 도착하자 일행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태훈이 제일 먼저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잘 주무셨어요?”“응. 다 도착했네?”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상혁을 돌아봤다. 이윽고 어제 일은 완전히 잊은 듯 뻔뻔하게 손을 흔들었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나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지만 상혁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 했기에 아까처럼 하연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부 대표님, 오늘 오전 회의가 잡혀 있어 회의하고 나서 오후에 현지 조사를 진행할
“우연의 일치일 거예요. 성만 같겠죠.”“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최 사장이 어딜 봐서 명문가 아가씨 같아 보여?”안나는 내친김에 하연을 보며 지아의 의견에 맞장구쳤다.“됐어, 오늘 목표는 최 사장이 아니야.”지아는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다.“걱정하지 마세요. 이사님 목표는 부 대표님이잖아요.”“맞아.”안나가 순순히 인정하자 지아가 말을 이었다.“부 대표님 꼭 낚아채세요.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어디 가서 만나요? 저런 남자를 낚아채면 그야말로 사는 세상이 달라진다고요.”안나는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당연하지. 남자는 가끔 청순한 걸 좋아하지만 결국에는 섹시한 걸 못 거절해. 그러니 부 대표도 무조건 나한테 넘어오게 돼 있어.”말을 마친 안나는 자신만만하게 사람들 뒤를 따랐다.일행을 실은 차는 곧바로 HY 그룹으로 향했다. D시 최고의 기업인 HY 그룹은 인테리어부터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심지어 대문 앞에는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드리워 있었다.모든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현장에는 열렬한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직원들이 하연과 상혁을 둘러싼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부 대표님, 회의실은 22층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안나가 상혁한테 살갑게 말하는 사이, 하연이 뒤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려고 했으나 지아가 막아섰다.“최 사장님, 우리는 다음 걸 탑시다.”하연은 그 말에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상혁 역시 문이 닫히고 나서야 하연이 아직 오르지 않았다는 걸 발견하고 태훈에게 물었다.“최 사장은 안 탔어요?”“최 사장님은 미처 못 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내려가서 확인할까요?”태훈이 대답하자 옆에 있던 안나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이제 더는 못 타요. 괜찮아요. 제 비서도 못 탔는걸요. 이따가 최 사장님을 위층으로 안내할 거예요.”안나의 말에 상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일행과 함께 22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HY 그룹 대표가 상혁 일행을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눈으로 한기를 내뿜었다.“일개 비서가 이렇게 기고만장해서야. HY 그룹의 성의를 좀처럼 보기 힘드네요. 하지만 충고 하나 하자면 본인이 한 일에 대한 뒷감당은 본인이 져야 해요.”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뒤돌아 떠났다.하지만 지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그도 그럴 게, 하연이 그저 저한테 겁을 주려고 그런 말을 내뱉았다고 생각했으니까.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안 보고 안 겪은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지아는 하연을 그저 힘없고 권력 없는 일개 나부랭이로 취급했다.하연은 HY 건물에서 나온 뒤 곧장 차에 올라타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게임을 시작했다.그 시각, 회의실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테이블 앞에 앉아 미간을 구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혁 때문에 회의실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상혁이 이러는 이유를 알 리 없는 HY 대표 주자철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부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상혁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벌써 20분이나 흘렀는데 하연은 왜 안 오는 거지?’그때 태훈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보고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이 없어졌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하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회사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그때 안나가 다급히 따라나섰다.“부 대표님,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디 가시나요?”상혁은 안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제 갈 길을 걸었다. 한 번도 이렇게 소란을 피운 적이 없고 더욱이 제 전화를 끊은 적 없던 하연의 이상한 반응에 상혁의 미간은 팍 구겨졌다.‘오늘 대체 왜 이러지?’“혹시 최 사장님 봤어요?”상혁의 물음에 안나는 그제야 방금 전 지아를 시켜 하연을 막으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상혁이 이렇게까지 하연의 일에 예민할 줄은 생각도 못 해 괜히 마음이 찔렸다.“저도 부 대표님과 함께 올라왔는데 어떻게 봤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부상혁과 최하연이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그 시각.똑똑-차창 박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눈을 들어 확인한 하연은 밖에서 기다리는 상혁을 발견했다.하지만 하필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시선을 거두고 물 흐르듯 스크린을 몇 번 터치하더니 몇 초 만에 상대를 KO 시켰다.이윽고 액정에 뜬 승리라는 문구를 보자 그제야 핸드폰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상혁 오빠.”입을 삐죽 내민 하연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그 모습에 상혁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무슨 일인데 차에서 게임을 하는 거야?”하연은 두 손을 쫙 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왜긴 왜겠어요? 누군가 저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으니 못 들어갔죠.”그 말에 상혁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보아하니 우리와 협력할 마음이 없나 보네. 그렇다면 우리도 계속할 필요 없지.”말을 마친 상혁은 차에 타더니 이내 기사더러 출발하라고 명했다.차가 시동을 걸고 곧바로 출발하자 하연은 왠지 자기가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은근히 좋았다.“오빠, 이번 프로젝트 2천억짜리인데,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사업이 너만 중요할까?”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상혁을 보며 하연은 싱긋 웃었다.순간 공기 속에 달콤한 분위기가 섞이기 시작했다.“그렇게 말하니 저는 기분 좋은데, 운석 씨가 마음 아파하겠네요. 이 프로젝트는 운석 씨가 따낸 거거든요.”상혁은 순간 질투심이 솟아났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발했다.“프로젝트는 나도 때낼 수 있어. 2천억짜리 프로젝트를 원하면 얼마든 따내 줄게. 하지만 다음부터 내 앞에서 다른 놈 얘기 꺼내지 마.”‘와, 남자다. 카리스마 쩌네.’하연은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오빠 너무 난폭한 거 아니에요? 좀 쪼잔한 것 같기도 하고.”“사랑하는 여자에 관한 일이라면 어떤 남자든 쪼잔해져.”하연은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사랑하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