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하연은 내기에서 이기게 될 거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 않은 이상 호현욱 역시 쉽게 포기할 수 없다.“급할 거 뭐 있어? 아직 반년이나 있잖아. 이번 프로젝트 마지막까지 성공하기 쉽지 않아. 프로젝트 하나 망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호현욱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 눈빛을 흐렸다. 비즈니스 업계에 수년간 발을 담근 그가 어린 계집에게 질 수는 없었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운석 그 자식을 쫓아내야겠어.”“이사님,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호현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말해봐. 무슨 방법인데?”민호는 그 말에 이내 호현욱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호현욱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내 밑에서 몇 년 일하더니 많이 배웠네. 그럼 그대로 진행해.”“네, 이사님.”...저녁, 선샤인 바.하연은 운석을 위한 축하 파티를 열기 위해 회사의 동료들을 모두 불러 보아 현장은 매우 시끌벅적했다.“나 본부장님이 이번 D시 프로젝트를 따낸 걸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나 본부장님 축하해요.”“최 사장님 축하해요.”“자, 그럼 DS 그룹의 점점 더 나아지는 앞날을 위하여!”“...”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하연은 직원들이 편하게 놀지 못할까 봐 적당한 핑계를 대고 먼저 일어섰다.운석은 그런 하연이 걱정되어 발 빠르게 나섰다.“바래다줄게요.”“아니에요. 운석 씨 축하 파티인데 함께 놀아요. 저는 대리 부르면 되니까.”“그럼 문 앞까지 바래다줄게요.”결국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운석과 앞뒤로 나란히 서서 바를 나섰다.“얼른 들어가요. 대리 기사가 곧 도착한대요.”“아니에요. 차에 타는 것까지 보고 갈게요.”하연의 거절에 운석은 괜찮다는 듯 말했다.이번에도 운석의 고집을 꺾지 못한 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그 틈에 운석이 무심코 말을 꺼냈다.“제가 DS에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돼가네요. 시간 참 빨라요. 처음
“가서 저 여자 핸드폰 빼앗아.”말이 떨어지자 양아치처럼 생긴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차 유리를 몽둥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쨍그랑 소리가 들리면서 유리 파편이 하연에게 튀었고, 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이봐, 핸드폰 이리 내!”말을 마친 한 놈이 머리를 차 안으로 쑥 들이밀며 하연의 손에 든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하연은 얼른 그 사람을 피하고는 발로 남자의 머리를 차버렸다. 그 순간 남자의 코로 피 두 줄이 흘러내렸다.“당신들 길 한복판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이게 어디서! 죽으려고!”이윽고 소리치며 또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하지만 그때, 뒤에서 달려오던 검은색 승용차 몇 대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안에서 경호원들이 우르르 내려 놈들을 포위했다.훈련된 용병처럼 신속하게 나타난 경호원들은 평균 185 넘는 키에 커다란 덩치를 가졌다. 그 모습에 센 척하던 청년들도 순식간에 겁을 먹고 줄행랑쳤다.“뭣들 하고 있어? 도망쳐!”하지만 아쉽게도 진작 포위되어 한 놈도 도망갈 수 없었다.심지어 방금 하연에게 센척하던 남자도 너무 놀라 연신 뒷걸음쳤다.그때, 맨 앞에 서 있던 경호원이 빠른 걸음으로 하연 앞에 달려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아가씨, 괜찮으십니까?”하연은 굳은 표정으로 제 몸에 떨어졌던 유리 파편을 툭툭 털어냈다. 분명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했고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아가씨, 이자들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저지른 일의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겁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하연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러면서 양아치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놈들은 그 기세에 눌려 흠칫 몸을 떨었다.“아까 보니 내 핸드폰에 관심이 많은가 봐? 여기 특별한 거 없을 텐데?”하연의 말에 놈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도 그럴 게, 분명 연약한 여자를 처리하면 된다고 했었는데, 왜 지
한씨 가문 첫째네 저택.그 시각, 한유진은 핸드폰을 쥐고 한 곳을 계속 맴돌고 있다, 어찌나 초조했는지 콧잔등에 이미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벽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도 그 양아치 놈들한테서 소식이 없으니 그럴 만도.인내심이 바닥 난 유진은 결국 신발을 챙겨 신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문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오자 유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호식아, 어떻게 됐어?”호식이라 불리는 양아치는 헬멧을 벗고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유진 누나, 미안해요.”그 말에 유진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되물었다.“왜 미안하다는 거야? 설마 실패했어? 그럴 리 없는 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여자 하나 못 처리했다고?”호식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정보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무슨 뜻이야?”“미안해요. 전에 줬던 4천만 원은 돌려줄게요. 하지만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그게 무슨 뜻이야?”유진이 어리둥절해하자 호식이 손을 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돈을 받았으면 일 처리해 주는 게 우리 바닥 룰이라. 우리는 룰대로 하는 거예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뒤에서 양아치 몇 명이 더 나타나 유진을 덥석 잡았다.“호식,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너 최하연 돈 받았어? 그년이 얼마 줬어? 내가 두 배 줄게.”“이건 돈 무제가 아니에요.”호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똘마니들이 유진을 밧줄로 묶었다.“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당장 안 풀어? 나 한씨 가문 사람이야!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심지어 유진이 아무리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 봤지만 양아치들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그때 참다못한 호식이 끝내 입을 열었다.“야, 저 여자 너무 시끄러워. 입 좀 막아.”“호식,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호식...”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테이프로 유진의 입을 막았다.이윽고 유진을 경찰서로 끌고 가더니 호식이 직접 경찰한테 CCTV 증거 자료를 넘겨주었
“정말 겁도 없구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 일은 유진한테도 교훈이 될 테니 차라리 잘 됐다.”“엄마.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 자식이라고 유진 하나뿐인데, 유진이 감옥 가면 저는 어떻게 살라고요!”아들의 애원에도 강영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미 다 큰 어른이니 본인이 한 일에 책임질 줄도 알아야지.”강영숙이 이토록 완강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생각지 못한 한민국은 이를 악물더니 최후의 패를 드러냈다.“만약 유진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저도 죽을 겁니다. 자식 먼저 보내겠으면 모른 척하세요.”그러고는 화가 나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강영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러다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고 서준을 찾아갔다.“서준아, 이 일은 네가 나서서 하연이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 걔가 마음은 약하잖니.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잘 얘기해 봐.”어느새 양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서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강영숙을 바라봤다.“할머니, 이 일은 HT 그룹 법무팀에 맡길게요.”서준은 도저히 하연을 찾아가 부탁할 염치가 없었다. 회사 기밀을 훔치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 만약 핵심 데이터를 빼돌렸다면 회사가 그대로 망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때문에 절대 나설 수 없었다.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고민정은 서준이 도와주겠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이내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역시 너밖에 없어. 숙모는 네가 유진이 모른체하지 않을 줄 알았어. 유진이가 밤새도록 구치소에 갇혀 있었으니 얼른 빼내 줘.”그 말에 서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꼬았다.“큰숙모, 아직 기뻐하긴 일러요. 회사 기밀을 빼돌리는 건 중죄라 적어도 3년은 옥살이해야 해요.”“3년? 안돼!”고민정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준을 잡고 애원했다.“너희 숙부와 내가 자식이라고 유진이밖에 없는 거 알잖아. 유진이 옥살이를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네가 최하연 좀 설득해 봐. 돈이 얼마나 들던 고소만 취하해 주겠
물론 HT 그룹에게 2000억이 큰돈은 아니지만 민혜경한테 그런 돈을 쓸 가치는 없다.“석 달, 난 석 달만 보석해 주면 돼. 석 달이면 가격 반으로 깎을 수 없는지 물어봐. 만약 된다면 바로 송금하고.”“네, 대표님.”...그 시각, 하연은 회사에서 국제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 한참 뒤, 회의가 끝나자 태훈이 하연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HT 그룹 법무팀에서 찾아왔습니다. 한유진 씨가 회사 기밀을 빼돌리려 한 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면서요.”“그 일은 회사 법무팀에 맡기고 나중에 결과만 보고해 줘.”“네, 대표님.”태훈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마침 호현욱과 마주치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사님, 안녕하세요.”호현욱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정 실장,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거 없어. 자네는 최 사장 오른팔이잖아.”하지만 태훈은 여전히 거리를 두려는 듯 예의를 지켰다.“이사님이 여기엔 무슨 일이죠?”“최 사장님 만나러 왔지.”호현욱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최 사장님, 바쁩니까?”상대를 확인한 하연은 서류를 닫고 싱긋 웃었다.“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죠?”호현욱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최 사장님한테 경고 하나 하려고 왔어요.”“무슨 일이기에 이사님이 직접 오셨나요?”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러자 호현욱은 오히려 숨길 거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운석 대표에 관한 일입니다.”호현욱은 일부러 말을 끊고 하연의 반응을 살폈지만 하연은 쉽사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나 본부장님이 왜요?”이에 호현욱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아직 모르나 보네요. 나운석 대표가 우리 회사 회계팀에 실명으로 고발되었더군요.”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대체 무슨 일이죠?”호현욱은 일부
호현욱은 생각지도 못한 하연의 반응에 잠시 놀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이런다고 생각했을 뿐.“억울한지 아닌지는 감사팀이 알아서 조사하겠죠. 현재 나 본부장 사무실에 있다던데, 가 보시지 않을래요?”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그 시각, 운석의 사무실 안에는 정장 차림을 한 감사팀 직원들이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쓸어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운석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아무 일 없는 듯 굴었다.“다 확인했나요? 확인했으면 일에 방해되니 나가주실래요?”운석이 거침없이 말했다.하지만 감사팀 직원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수색하고 있었다.그 태도에 운석은 냉소를 짓더니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 시각, 이제 막 들어온 하연 역시 사무실 안 광경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맨 앞에서 지휘하던 직원이 행동을 멈추고 하연에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저희는 공무 집행 중입니다. 누군가 나운석 씨가 직무를 이용하여 횡령했다고 제보해서요.”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반나절이나 뒤졌을 텐데 뭐라도 나왔나요?”그 말에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지휘를 하던 직원이 운석을 흘긋거리며 대답했다.“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아직은 찾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나운석 씨 명의로 된 계자를 확인할 겁니다.”그때 호현욱이 다가와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최 사장님, 이분들도 공무집행 중인데, 방해하지 마세요. 나 본부장이 횡령하지 않았다면 조사 결과가 증명해 주겠죠. 이분들도 공무원인데, 좋은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겁니다. 물론 나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겠죠.”심기를 거스르는 말에 운석은 벌떡 일어나 호현욱을 향해 소리쳤다.“지금 무슨 헛소리야? 젠장, 누가 횡령했다는 건데? 제대로 말해!”하지만 호현욱은 오히려 느긋하게 대답했다.“나 본부장, 급할 거 뭐 있나? 조사하면 자연스럽
호현욱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윽고 한참 떨어져 있는 회계 오재원에게 눈빛을 보내자 재원은 이내 운석에게 다가왔다.“저희는 지금 나 본부장님 명의로 된 계좌를 확인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운석은 콧방귀를 뀌며 호주머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이윽고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카드를 하나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분명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꺼내 놓는 카드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그도 그럴 게, 운석이 소유하고 있는 카드 중에 몇 장은 전국 상위 5위 안에 드는 은행에서 발급하는 블랙카드였고, 심지어 R국 은행의 골드카드도 있었다.그걸 일일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재원은 넋을 잃었다.“이, 이 카드 모두 본부장님 카드입니까?”운석은 코웃음을 쳤다.“조사하겠다며? 조사해 봐. 그런데 여기 있는 카드 중 아무거나 확인해도 잔액이 몇억은 훨씬 넘을 거야.”재원은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이 카드 모두 진짜 맞나요? 설마 가짜는 아니죠? 모두 본인 명의의 카드여야 합니다.”운석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그럼 내 명의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 봐.”재원은 블랙카드 한 장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카드 단말기에 꽂아 넣었다.“비번이 뭐죠?”“없어.”재원은 그 말이 믿기지 않지만 카드를 꽂아 넣고 보니 운석의 말이 맞았다. 이윽고 잔액을 확인한순간 너무 놀라 단말기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그걸 본 호현욱은 어두운 얼굴로 호통쳤다.“쓸모없는 것! 잔액 하나 확인 못 해? 말해 봐, 카드에 이상 있어?”재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운석의 은행 카드 잔액은 몇백억이었다.그것도 카드 한 장에만.여기에 놓여 있는 카드를 눈대중으로 봐도 열 장은 넘는데, 모든 카드 안에 몇백억씩 있다면 총 몇천억이 있다는 거다.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이사님, 직접 보시는 게 어떠세요?”호현욱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 단말기를 빼앗아 잔액을 확인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나 엿 먹으라고 파놓은 함정인가? 목적이 뭐지? 나를 DS 그룹에서 쫓아내는 건가?”“...”허를 찌르는 운석의 말에 호현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내놓지 못했다.운석은 그런 호현욱을 무시한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 어떻게 할까요?”하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 본부장님은 F국 NW 그룹의 도련님입니다. 전에 제 가족에서 정해 준 약혼자이기도 했고요. 나 본부장님이 DS 그룹에 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호의로 저를 돕기 위헤서고요. 여태껏 실력도 입장했잖아요. D시 프로젝트도 나 본부장님이 따낸 거고. 그러니 오늘 일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현장에 있는 직원들을 빙 둘러보다가 재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에는 비아냥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오재원 씨, 실명으로 횡령을 고발했다던데, 증거는 어디 있죠? 내놓으세요. 만약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무고죄로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재원은 겁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호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모든 준비는 끝냈다며? 증거를 준비했다고 나더러 고발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재원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내 호현욱에게 무릎 꿇었다.“이사님, 살려주세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감옥 가기 싫다고요.”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호현욱은 잿빛이 된 얼굴로 이내 발을 뺐다.“네가 이런 짓을 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이사님, 우리 친척이잖아요. 이대로 제가 죽는 거 지켜볼 겁니까?”그 말에 호현욱은 대경실색하며 설명했다.“최 사장님, 저놈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우리가 친척이긴 하나 아주 먼 친척입니다. 평소에 왕래도 없었는데 지금 저건 나를 모함하려고 저러는 겁니다.”“이사님이 시켰잖아요. 제가 실명을 걸고 신고만 한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저를 희생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