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처음부터 나 엿 먹으라고 파놓은 함정인가? 목적이 뭐지? 나를 DS 그룹에서 쫓아내는 건가?”“...”허를 찌르는 운석의 말에 호현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내놓지 못했다.운석은 그런 호현욱을 무시한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 어떻게 할까요?”하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 본부장님은 F국 NW 그룹의 도련님입니다. 전에 제 가족에서 정해 준 약혼자이기도 했고요. 나 본부장님이 DS 그룹에 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호의로 저를 돕기 위헤서고요. 여태껏 실력도 입장했잖아요. D시 프로젝트도 나 본부장님이 따낸 거고. 그러니 오늘 일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현장에 있는 직원들을 빙 둘러보다가 재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에는 비아냥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오재원 씨, 실명으로 횡령을 고발했다던데, 증거는 어디 있죠? 내놓으세요. 만약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무고죄로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재원은 겁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호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모든 준비는 끝냈다며? 증거를 준비했다고 나더러 고발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재원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내 호현욱에게 무릎 꿇었다.“이사님, 살려주세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감옥 가기 싫다고요.”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호현욱은 잿빛이 된 얼굴로 이내 발을 뺐다.“네가 이런 짓을 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이사님, 우리 친척이잖아요. 이대로 제가 죽는 거 지켜볼 겁니까?”그 말에 호현욱은 대경실색하며 설명했다.“최 사장님, 저놈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우리가 친척이긴 하나 아주 먼 친척입니다. 평소에 왕래도 없었는데 지금 저건 나를 모함하려고 저러는 겁니다.”“이사님이 시켰잖아요. 제가 실명을 걸고 신고만 한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저를 희생
하연과 운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걸 본 현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얼마 뒤 민호를 데려와 하연 앞에 밀어 넘어뜨렸다.“이 개자식! 말해! 네가 했지? 감히 나 본부장이 횡령했다고 모함해?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민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잠깐 당황해하더니 이내 하연의 앞으로 기어가 애원했다.“최 사장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한순간 귀신에 씌었나 봅니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하지만 하연이 아무 감정 없이 저를 내려보자 민호는 곧바로 운석에게 다가갔다.“나 본부장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때 운석이 천천히 몸을 웅크려 앉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용서?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누가 지시했는지 말해.”민호는 겁에 질린 눈으로 호현욱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다시 내리깔며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지시한 사람 없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입니다. 나 본부장님이 큰 프로젝트를 성사해 질투해서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이 말을 운석은 당연히 믿지 않는다.일개 비서인 민호에게 운석의 행보가 걸림돌이 될 리는 없으니까.“나 본부장, 최 사장님, 이 일은 정 비서가 독단적으로 했다고 하니 무슨 벌이든 내리세요.”민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걸 보면 더 이상 물어봐도 캐낼 게 없다는 걸 하연은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짐 싸서 나가세요.”그 말에 민호는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호현욱이 다급히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이 작은 일도 아니고 이대로 놓아준다는 겁니까?”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봤다.“그럼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호현욱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로 자기감정을 애써 숨겼다.“저한테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최 사장님이 이렇게 결정하셨다면 따라야죠. 하지만 정 비서는 제 비서였으니 아랫것 제대로 간수 못한 책임으로 이번 달 인센
운석은 처음으로 나씨 집안 사람으로 태어난 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D시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가 독점하기에는 리스크가 좀 커요. 그래서 말인데, 실력 있는 회사와 협력하여 리스크를 줄이는 게 어때요?”일 얘기를 시작하자 운석의 얼굴에 있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심지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B시의 선도기업 중에 HT 그룹을 제외하면 FL 그룹 실력이 가장 막강해요. 게다가 FL 그룹 부 대표와 연합하면 분명 몇 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하연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그 말은 FL 그룹과 손잡으라는 뜻이에요?”“네, FL 그룹이 최적의 선택이에요. 물론...”운석은 잠깐 말을 끊고 하연을 바라봤다.“또 한 가지 선택이 더 있긴 하죠. 바로 HT 그룹.”“한서준 말이에요?”하연은 반사적으로 되묻더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HT 그룹은 됐어요. FL 그룹으로 하죠.”어찌 됐든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한서준과 다시 엮일 생각은 없었으니까.“네, FL 그룹은 실력이 막강해 두 그룹이 손을 잡으면 분명 좋은 시너지를 낼 거예요. 그럼 제가 나중에 FL 그룹 대표를 한번 만나볼게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신비로운 인물이라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더라고요.”“따로 만나서 얘기할 필요 없어요. FL 그룹 대표는 운석 씨도 알 거예요.”운석은 의아한 듯 하연을 바라봤다.“안다고요?”“그 사람이 바로 BN 그룹 도련님 부상혁이랑 같은 사람이거든요.”“그 사람이라고요?”운석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BN 그룹 부상혁이라면 비즈니스 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다.어린 천재, 하버드 수재, 비즈니스 업계의 귀재... 등 호칭이 모두 상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부상혁은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기만 했을 뿐, 같은 F국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그런데 그 사람이 B시에는 언제 왔지? 게다가 FL 그룹 대표라니?’한참 생각하던 운석은 하연을 바라봤다.“혹시
“정 실장, 오늘 무슨 일정 어떻게 돼?”태훈은 하연과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일정을 보고했다.“오전 10시에 국제 화상 회의가 잡혀 있고, 오후 2시에 기항 그룹 성 대표님과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밤 7시에 MJ 그룹 회장님과 회장 사모님과 모임이 있습니다.”“그래, 알았어.”태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연아, 바빠?”전화 건너편에서 예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난번에 6억으로 드레스 의뢰했던 고객님이 오늘 가게에 들르겠다고 하셔. 너를 콕 집어 만나고 싶다는데, 시간 돼?”하연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물었다.“언제인데?”“물어봤는데 12시 전에는 언제든 괜찮대.”“그래, 알았어.”나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고개 앞에 커피를 대령했다.“김 여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디자이너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네요.”김 여사라 불리는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그때, 가게 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오늘 막 출소한 민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카드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심지어 이미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을 가득 사 들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그동안 살얼음판 같은 감옥에서 지내면서 혜경이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다행히 지금은 다시 나왔다.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본 혜경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이윽고 콧방귀를 뀌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이거, 이거 다 포장해 줘요.”문을 들어서자마자 혜경은 마네킹에 전시되어 있던 신상 옷을 가리키며 거침없이 말했다.웃으며 다가왔던 예나는 입을 열려는 순간 그대로 굳어 웃음기가 싹 가셨다.“민혜경, 내연녀 주제에 벌써 나왔어?”예나가 퉁명스러운 태도로 내연녀라는 말을 내뱉자 혜경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끝내 눌러 참으며 비아냥거렸다.“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지? 당장 가서 옷 가져오지 않고?”그 말에 예나는 팔짱을
“또 나쁜짓하러 나왔어?”하연의 거침없는 비아냥에 혜경의 얼굴은 일순 어두워졌다. 하지만 꾹 눌러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내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 서준 씨가 보석금 엄청 많이 들여서 나 빼줬어, 알겠어? 최하연, 서준 씨 마음에는 처음부터 나 하나뿐이었다고. 너는 그저 서준 씨한테 버려진 전처일 뿐이야.”하연은 그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 흔들림도 없는 모습으로 팔짱을 꼈다.“그렇다면 밖에서 싸돌아 다니며 사람 해치지 좀 마.”“너!”혜경은 이를 악물며 하연을 매섭게 쏘아봤다.“최하연, 잘 들어. 내가 그동안 겪은 걸 너한테 똑같이 돌려줄 거야.”“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해봐.”하연의 말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민혜경은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터라 효과는 배가 되었다.감옥을 생각하니 혜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너 딱 기다려.”혜경은 이를 갈며 경고를 남겼다.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등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들어 혜경을 바라봤다.여자는 무심한 듯 커피를 입에 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언제부터 내연녀가 앞뒤 분간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세상이 됐지?”혜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바라봤다.낯선 얼굴의 여자는 자기 관리를 무척 잘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지금이야 하연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눈앞의 여자로 화풀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혜경은 이내 여자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그게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여자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배운 것 없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남의 남자 뺏은 내연녀 주제에 자각도 없이 기어 나와 본처 앞에서 설치다니. 뻔뻔한 것!”“이년이 어디서! 내가 그 입을 갈가리 찢어줄게.”혜경은 길길이 날뛰면서 여자에게로 달려갔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이 햬경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민햬경 적당히 해! 여긴 내 구역이야. 저분은 내 고객님이고,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하연은 혜경을
“전에 B시에서 열렸던 패션쇼의 메인 의상을 디자인한 분 맞죠? 저 그 의상들을 아주 좋게 봤어요. P시에 최하연 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요.”여자는 말하면서 일어나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김선화라고 해요.”“반가워요, 김 여사님. 방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저희 숍에서 고른 옷은 모두 20프로 할인해 줄게요.”그 말에 선화는 싱긋 웃었다.“그냥 양심선언 몇 마디 한 것뿐인데 돈 벌었네요.”“맞춤 제작 드레스를 원한다고요?”선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청자기 주제로 한 드레스와 비슷한 스타일로 제작해 주세요. 참여할 행사가 있어 제일 먼저 하연 씨가 생각나더라고요. 혹시 시간 괜찮아요?”“물론이죠. 치수부터 잴게요.”하연은 선화를 도와 치수를 재고 나서 한참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그러다 떠날 때가 되자 선화가 하연에게 명함 한 장을 내놓았다.“다 만들면 여기로 전화해 줘요. 그럼 수고해 줘요.”“별말씀을요. 조심히 가세요.”선화를 보낸 뒤 예나가 다급하게 하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하연아, 어쩐지 저 여자 낯이 익다고 했는데 이것 봐...”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검색 결과를 확인했다.“선화 씨가 수천만 팬을 보유한 패션 블로거일 줄은 몰랐네.”“그니까. 어쩐지 보는 눈이 있다 했어. 우리 숍 옷을 고를 때도 보니까 아는 게 엄청 많더라고. 패션 블로거라 그런 거였구나.”“응. 이번 옷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줘야겠네.”하연은 예나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인사를 하고 숍을 나섰다.하지만 이제 막 백화점 로비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혜경과 서준을 발견했다.그건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그때,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무의식적으로 혜경을 밀쳐내고 하연에게로 걸어왔다.물론 하연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말이다.“최하연!”그때 서준이 하연을 불러 세웠다.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나를
서준은 하연이 떠난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되물었다.“민혜경, 일부러 이랬어? 하연이 여기 있는 줄 알면서 일부러 나 불러내 이런 모습 보인 거냐고?”“서준 씨, 오해야.”“됐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아니까. 내가 너 행패 부리라고 빼내 준 거 아니야. 경고하는데, 최하연한테 가까이하지 마. 내 말 거역하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감옥에 처넣어 줄 테니까.”“...”혜경은 화가 치밀어 서준의 팔짱을 꽉 붙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가차 없이 햬경을 밀쳐냈다.“그만해. 가식적인 태도 역겨우니까. 카드도 이미 줬잖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말을 마친 서준은 혜경의 낯빛도 헤아리지 않고 결연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갔다.차 안.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민혜경 잘 감시하라고 했잖아. 요즘 어때?”“아직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계속 감시해. 움직임만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네, 대표님.”전화를 끊은 서준은 핸드폰을 옆으로 내팽개쳤다.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서준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방금 전 하연의 싸늘한 태도를 돌이켜 보니, 이제는 하연을 잡을 기회가 영영 사라진 듯싶었다....“하연아, 나 귀국했어.”이제 막 화상회의를 마친 하연은 상혁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상혁 오빠, 벌써 B시에 도착했어요?”그 시각, 전화 건너편에서 상혁은 눈을 들어 휘황찬란한 DS 그룹 건물을 바라봤다.“응, 도착했어. 나랑 합작 건으로 할 얘기 있다며?”“내 배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요?”“나 네 회사 아래에 있어.”하연은 놀란 듯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이 보였다.“기다려요,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이내 서류 뭉치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상혁은 하연을 보자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
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로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우선 이렇게 주세요. 더 필요하면 따로 주문할게요.”종업원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물컵을 내려놓았다.“제가 파와 생강을 안 먹는 거 어떻게 알아요?”이건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서준도 모르는 일이다.‘그런데 상혁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네 첫째 오빠가 말해줬어.”“하민 오빠요?”상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솔직히 이 모든 건 그동안 상혁이 관찰해서 알아낸 결과다.하연은 그런 상혁의 말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최하연, 정말 너였어?”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곧이어 한설매가 하연의 앞에 나타나 하연과 상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서준의 작은 고모인 한설매는 줄곧 하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씨 집안에서 나간 뒤 이렇게 훌륭한 남자와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사람 무슨 사이야?”한설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물어봤다.하연은 원래 한씨 집안 사람에게 호감이 없는데 늘 말 많은 한설매는 더욱 싫어했다.“그게 한설매 씨와 무슨 상관이죠?”한설매는 지난번에 하연에게 거절당하고 난 뒤부터 늘 마음에 새겨뒀는데, 하연이 이렇게 되묻자 결국 폭발했다.“왜? 이혼하더니 이제는 곁에 몸 파는 남자를 두는 거야? 서준이보다 한참 못 해 보이는데 사람 보는 눈이 영 없네.”만약 한설매가 저를 욕했다면 하연은 아마 대꾸도 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하필이면 상혁을 건드렸기에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누가 미친개를 함부로 풀어놨지? 아무 데서나 이빨을 드러내네.”“지금 나더러 개라는 거야?”“아니에요?”한설매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하연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남편이 아직도 일 찾고 있죠? 제가 이 바닥에 말해두면 앞으로 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상대를 잡으려면 급소를 때리라고 했던가?남편의 얘기가 나오자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