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은 하연이 떠난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되물었다.“민혜경, 일부러 이랬어? 하연이 여기 있는 줄 알면서 일부러 나 불러내 이런 모습 보인 거냐고?”“서준 씨, 오해야.”“됐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아니까. 내가 너 행패 부리라고 빼내 준 거 아니야. 경고하는데, 최하연한테 가까이하지 마. 내 말 거역하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감옥에 처넣어 줄 테니까.”“...”혜경은 화가 치밀어 서준의 팔짱을 꽉 붙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가차 없이 햬경을 밀쳐냈다.“그만해. 가식적인 태도 역겨우니까. 카드도 이미 줬잖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말을 마친 서준은 혜경의 낯빛도 헤아리지 않고 결연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갔다.차 안.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민혜경 잘 감시하라고 했잖아. 요즘 어때?”“아직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계속 감시해. 움직임만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네, 대표님.”전화를 끊은 서준은 핸드폰을 옆으로 내팽개쳤다.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서준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방금 전 하연의 싸늘한 태도를 돌이켜 보니, 이제는 하연을 잡을 기회가 영영 사라진 듯싶었다....“하연아, 나 귀국했어.”이제 막 화상회의를 마친 하연은 상혁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상혁 오빠, 벌써 B시에 도착했어요?”그 시각, 전화 건너편에서 상혁은 눈을 들어 휘황찬란한 DS 그룹 건물을 바라봤다.“응, 도착했어. 나랑 합작 건으로 할 얘기 있다며?”“내 배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요?”“나 네 회사 아래에 있어.”하연은 놀란 듯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이 보였다.“기다려요,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이내 서류 뭉치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상혁은 하연을 보자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
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로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우선 이렇게 주세요. 더 필요하면 따로 주문할게요.”종업원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물컵을 내려놓았다.“제가 파와 생강을 안 먹는 거 어떻게 알아요?”이건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서준도 모르는 일이다.‘그런데 상혁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네 첫째 오빠가 말해줬어.”“하민 오빠요?”상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솔직히 이 모든 건 그동안 상혁이 관찰해서 알아낸 결과다.하연은 그런 상혁의 말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최하연, 정말 너였어?”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곧이어 한설매가 하연의 앞에 나타나 하연과 상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서준의 작은 고모인 한설매는 줄곧 하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씨 집안에서 나간 뒤 이렇게 훌륭한 남자와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사람 무슨 사이야?”한설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물어봤다.하연은 원래 한씨 집안 사람에게 호감이 없는데 늘 말 많은 한설매는 더욱 싫어했다.“그게 한설매 씨와 무슨 상관이죠?”한설매는 지난번에 하연에게 거절당하고 난 뒤부터 늘 마음에 새겨뒀는데, 하연이 이렇게 되묻자 결국 폭발했다.“왜? 이혼하더니 이제는 곁에 몸 파는 남자를 두는 거야? 서준이보다 한참 못 해 보이는데 사람 보는 눈이 영 없네.”만약 한설매가 저를 욕했다면 하연은 아마 대꾸도 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하필이면 상혁을 건드렸기에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누가 미친개를 함부로 풀어놨지? 아무 데서나 이빨을 드러내네.”“지금 나더러 개라는 거야?”“아니에요?”한설매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하연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남편이 아직도 일 찾고 있죠? 제가 이 바닥에 말해두면 앞으로 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상대를 잡으려면 급소를 때리라고 했던가?남편의 얘기가 나오자
지난번 일 때문에 대표의 비서에서 마케팅팀 차장으로 강등된 서희는 여태껏 불만을 품고 있다.심지어 사적으로 상혁을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매번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그러다 결국 상혁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해줄 사람이 바로 하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대표님, 안녕하세요.”서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상혁에게 인사하고는 이내 하연을 향해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최 이사님, 안녕하세요.”하연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는 상혁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그 뒤로 서희가 서류 뭉치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결재 부탁드립니다.”서희의 말에 상혁은 자리에 앉아 펜을 휘날리며 멋있는 사인을 하나하나 하기 시작했다.상혁이 회사에 없는 동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하연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그러다 심심했는지 잡지를 꺼내 보다가 상혁이 일을 끝마칠 때쯤 피곤을 못 이기고 소파에 기대 잠들어 버렸다.상혁은 서류를 내려놓고 살금살금 다가가 하연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이 순간만큼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상혁은 곤히 잠들고 있는 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점점 옛 생각 잠겼다.7살 때, 상혁의 소원은 늘 양 갈래 머리를 한 옆집 동생을 보는 거였다.그때 옆집에 여동생이 있다는 게 부러워 상혁은 계속 조진숙에게 떼를 쓰기 일쑤였다.“엄마, 엄마도 여동생 하나 만들어주면 안 돼요?”“엄마, 저 여동생 갖고 싶어요.”“여동생이 있으면 제가 잘 돌보고 지켜줄게요.”“...”사실 조진숙도 예쁜 딸을 원했지만 상혁을 낳으며 몸이 많이 상한 탓에 임신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상혁아, 엄마가 예쁜 인형 사줄게. 그걸 동생으로 여기면 안 될까?”마지못해 이런 말로 상혁은 설득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화가 난 듯 조진숙을 밀쳐냈다.“인형 싫어요. 여동생 가질래요!”아들의 고집에 조진숙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갔지만 여동생을 갖고 싶다는 상혁의 마음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정확한 날짜는 기억 나지 않지
상혁 오빠라는 말 한마디에 상혁의 마음은 옥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상혁이 망아지를 끌며 정원을 돌고 있는 사이, 하연은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쉴 새 없이 질문했다.“상혁 오빠, 망아지가 왜 말을 안 해요?”“왜 하늘은 파래요?”“왜 새는 날 수 있어요?”“왜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요?”“...”어린 하연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물었지만 상혁은 귀찮아하기는커녕 인내심 있게 하나하나 대답했다.“와, 상혁 오빠 짱! 어떻게 뭐든 다 알아요?”하연은 우상을 보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상혁을 봤다. 그 반응에 상혁은 으쓱해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연이 너무 귀여워.’“하연아, 너 오빠 동생만 할 수 있어?”“안 돼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꺼내 숫자를 세기 시작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저 오빠 세 명 있어요. 상혁 오빠까지 하면 4명이에요.”그 말을 듣는 순간 상혁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질투심이 밀려왔다.“오빠 셋이나 있어? 난 동생이 너 하나뿐인데.”그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하연이 상혁의 손을 잡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그럼 오빠가 제 남편 해요.”상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비록 아직 7살이지만 상혁은 다른 꼬마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었다.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는 커서 결혼해야 한다든가.결혼하면 아기가 태어난다는가.심지어는 여보, 자기 등 애칭으로 상대를 부른다든가.그리고 결혼하면 상대와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까지.‘하지만 엄마가 분명 쉽게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속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던 상혁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내가 남편이 됐으면 해?”“오빠가 말했는데 여자애는 커서 남편을 한 명만 둘 수 있댔어요. 그러니까 상혀규 오빠가 제 남편이 되어줄래요?”하연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을 한참 듣던 상혁은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이렇게 되면 이 귀여운 여동생과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으니.“그래.”“그럼 우리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그래, 약속.”작
똑똑-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가 상혁을 현실로 끌어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상혁은 그제야 자기가 추태를 부렸다는 걸 인지하고는 자는 하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 밖을 나가 업무 보고를 하려는 직원을 막았다.“업무는 회의실에서 얘기합시다.”갑자기 장소를 바꾸는 상혁이 이해되지 않아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쳤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회의실로 따라갔다.곤히 잠들어 있던 하연이 깨어났을 때, 커다란 사무실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탓에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떨어져 허리 숙여 주울 때, 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며 상혁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상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어봤다.“깼어?”하연은 잠들었다는 게 쪽팔리고 미안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저 오래 잤죠?”“그렇게 오라지는 않아.”상혁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하연에게 다가갔다.“나가서 좀 산책할까?”“그래도 돼요?”하연이 놀란 듯 물었다.“당연하지.”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혁과 함께 회사 부근을 산책했다.FL 이제 막 이곳으로 이전한 지 불과 반년도 안 된 그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고, 직원들도 모두 잘 훈련받은 엘리트들뿐이다.하연을 데리고 회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회사 부문과 책임자들을 소개하던 상혁은 어느새 마케팅팀에 도착했다.“임 차장님, 대표님 옆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예요?”그 모습을 본 직원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서희에게 물었다.눈을 들어 확인한 서희는 하연을 보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최 이사님이에요.”“최 이사님? 대표님이 임원 회의 때 대대적으로 소개했다던 그 분이요? 그런데 대표님과는 대체 무슨 사이죠? 엄청 친해 보이네요. 설마 대표님 여친은 아니겠죠?”그 말에 다른 직원이 맞장구쳤다.“딱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언제 여자한테 저렇게 다정한 적 있었어요? 회사 소개도 직접 해주고 있잖아요. 중요한 고객이 왔을 때도 저렇게 인내심 있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듯하네요. 그런데 대표님이 뭐가 아쉽다고 일개 비서를 만나겠어요? 상대를 골라도 최 이사님 같은 명문가 아가씨를 만나죠.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문 앞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들은 서희는 복잡한 마음에 주먹을 그러쥐었고, 눈에는 어느새 그늘이 져 있었다.한편, 상혁과 함께 회사를 대충 둘러본 하연은 회사 운영 방식을 대략적으로 익혔다.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어때? FL 그룹과 협력할지 말지는 잘 생각해 봤어?”하연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생각할 게 뭐 있어요?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는 당연히 우리끼리 해먹어야죠. 이렇게 하리고 해요.”“응, 좋아. 그럼 가능한 내일애 계약 체결하는 거로 해.”“좋아요. 우리 효률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대화하며 복도를 걷던 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이제 업무 얘기도 끝났으니 밖에 나가 스트레스 푸는 게 어때?”“어디 갈 건데요?”의아한 눈으로 묻는 하연을 보며 상혁은 입을 꾹 다물더니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너 어릴 때 승마 좋아했잖아. 승마장에 가보는 건 어때?”“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런데 한동안 못 타서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네요. 가 볼까요?”“그래.”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결국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오늘은 평일이라 승마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상혁과 하연을 본 직원은 얼른 다가와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상대가 아는 것처럼 인사하자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 백마를 데려와요.”상혁의 분부에 직원은 얼른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잠시 뒤 백마를 끌고 나타났다. 백마는 무척이나 예뻐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정말 예쁘네요.”상혁은 끈을 쥐고 하연의 앞에 끌고 와 건네주었다.“한번 타봐.”백마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분고분 다리를 굽혀 몸을 낮췄다.“와, 사람 말도 알아들어요?”하연은 놀
“혼자 들어가요.”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안 좋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서준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군말없이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두 사람이 말했던 고객, 허승철이 뒤늦게 도착했다.“한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일할 때의 서준은 흠잡을 곳이 없다. 지금 역시 의젓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허승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괜찮습니다. 오래 전부터 승마를 좋아한다고 들어 일부러 승마장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는데, 오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겠네요.”“저를 너무 추켜세우네요. 한 대표님의 승마술도 기가 막혀다던데 오늘 제대로 겨루어 봅시다.”두 사람은 말하면서 승마장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승마에 관심이 없는 유진은 아예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저기요, 과일 주스 좀 가져다 줘요.”종업원에게 주스를 주문한 유진은 소파에 앉아 승마장을 빙 둘러봤다. 그러다 익숙한 사람에게 시선이 멈추더니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섰다.곧이어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하연을 노려봤다.“최하연이 여긴 어쩐 일이지?”유진은 서준이 있는 곳을 이내 살피더니 하연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고객님, 주문하신 주스 나왔습니다.주스를 내려놓고 떠나려는 종업원을 유진은 다급히 불러 세웠다.“잠깐!”이윽고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종업원에게 건네더니 상혁을 가리키며 물었다.“저 남자는 누구예요?”종업원은 유진의 시선을 따라 확인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저분은 저희 사장님입니다.”“사장님?”유진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하연이 승마장 사장과 붙어먹는다니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사장님 이름이 뭐예요?”종업원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유진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종업원을 돌려보냈다.하지만 시선을 하연에게서 떼지 못했다. 지난 번 일이 하연이
허승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님과 합작 건에 대해 얘기도 할 겸 승마하러 왔습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하지 않을래요?”“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상혁의 거절에 허승철은 옆에 있는 하연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기회 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죠.”이윽고 상혁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갈까요?”하지만 서준은 오히려 싸늘한 태도로 대답했다.“아니요. 합작 건은 없던 일로 하죠.”갑작스러운 상황에 허승철은 어리둥절했다.“한 대표님, 아까까지는 이런 말씀 없었잖습니까.”“본인 입으로도 그건 아까라면서요.”허승철은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HT 그룹의 위세에 눌려 화도 내지 못했다. 결국 콧방귀를 뀌고는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옆에 있던 서준은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봤다.얼굴을 뚫을 것만 같은 눈빛이 느껴지자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서준은 저도 모르게 하연과 승마장에서 경쟁하던 날을 떠올렸다.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승마 시합을 했었다.그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승마하던 하연의 모습은 지금도 서준의 머릿속에 선명하다“최하연, 같이 승마하지 않을래?”“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제 초대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하연을 보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때 유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유진은 마치 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그런 유진의 뻔뻔함에 하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는 예의를 지켰다.“유진 언니도 승마하러 왔어요?”유진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혼자 타는 건 재미없는데 시합하는 거 어때요?”“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이 거절하자 유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도발했다.“관심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