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들어가요.”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안 좋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서준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군말없이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두 사람이 말했던 고객, 허승철이 뒤늦게 도착했다.“한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일할 때의 서준은 흠잡을 곳이 없다. 지금 역시 의젓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허승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괜찮습니다. 오래 전부터 승마를 좋아한다고 들어 일부러 승마장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는데, 오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겠네요.”“저를 너무 추켜세우네요. 한 대표님의 승마술도 기가 막혀다던데 오늘 제대로 겨루어 봅시다.”두 사람은 말하면서 승마장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승마에 관심이 없는 유진은 아예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저기요, 과일 주스 좀 가져다 줘요.”종업원에게 주스를 주문한 유진은 소파에 앉아 승마장을 빙 둘러봤다. 그러다 익숙한 사람에게 시선이 멈추더니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섰다.곧이어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하연을 노려봤다.“최하연이 여긴 어쩐 일이지?”유진은 서준이 있는 곳을 이내 살피더니 하연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고객님, 주문하신 주스 나왔습니다.주스를 내려놓고 떠나려는 종업원을 유진은 다급히 불러 세웠다.“잠깐!”이윽고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종업원에게 건네더니 상혁을 가리키며 물었다.“저 남자는 누구예요?”종업원은 유진의 시선을 따라 확인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저분은 저희 사장님입니다.”“사장님?”유진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하연이 승마장 사장과 붙어먹는다니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사장님 이름이 뭐예요?”종업원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유진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종업원을 돌려보냈다.하지만 시선을 하연에게서 떼지 못했다. 지난 번 일이 하연이
허승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님과 합작 건에 대해 얘기도 할 겸 승마하러 왔습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하지 않을래요?”“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상혁의 거절에 허승철은 옆에 있는 하연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기회 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죠.”이윽고 상혁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갈까요?”하지만 서준은 오히려 싸늘한 태도로 대답했다.“아니요. 합작 건은 없던 일로 하죠.”갑작스러운 상황에 허승철은 어리둥절했다.“한 대표님, 아까까지는 이런 말씀 없었잖습니까.”“본인 입으로도 그건 아까라면서요.”허승철은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HT 그룹의 위세에 눌려 화도 내지 못했다. 결국 콧방귀를 뀌고는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옆에 있던 서준은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봤다.얼굴을 뚫을 것만 같은 눈빛이 느껴지자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서준은 저도 모르게 하연과 승마장에서 경쟁하던 날을 떠올렸다.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승마 시합을 했었다.그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승마하던 하연의 모습은 지금도 서준의 머릿속에 선명하다“최하연, 같이 승마하지 않을래?”“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제 초대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하연을 보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때 유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유진은 마치 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그런 유진의 뻔뻔함에 하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는 예의를 지켰다.“유진 언니도 승마하러 왔어요?”유진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혼자 타는 건 재미없는데 시합하는 거 어때요?”“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이 거절하자 유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도발했다.“관심 없
유진은 순간 화가 나 독설을 퍼부었다.“하, 기다려 봐. 최하연 오늘 제대로 골탕먹을 테니까.”그 말에 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유진을 덥석 잡았다.“무슨 짓 했어?”그때 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구간에서 하연의 비명이 흘러나왔다.“아!”하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료를 주고 있었는데 설기가 갑자기 뭐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연을 향해 달려들었다.그 기세에 놀라 하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리고 설기가 하연을 덮치려는 순간.“조심해.”때마침 나타난 상혁이 하연을 품에 안은 채 보호했다.설기는 마치 화가 난 듯 세게 버둥대며 당장이라도 마구간을 뛰어나올 것처럼 굴었다.몇 년 동안이나 말을 타온지라 말에 대해 알고 있는 하연은 단번에 이상한 낌새를 챘다.“상혁 오빠, 말에 문제 있어요.”상혁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응. 설기는 성격이 온화해서 이런 적 한 번도 없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준이 달려와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최하연, 괜찮아?”설기는 서준 뒤에 따라오는 유진을 보자 더 세게 날뛰었다.점점 격해지는 설기의 반응에 상혁은 다급히 하연을 보호했다.“조심해.”다음 순간, 설기는 끝내 줄을 끊고 유진에게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유진은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싫어, 오지 마!”화가 난 듯 유진만 쫓는 설기의 기세에 유진은 비틀거리며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설기가 유진에게 달려들어 발로 유진의 등을 차버렸다.곧이어 비명이 들리며 유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설기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또다시 유진을 발로 밟았다.상황을 본 직원들은 너무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고, 상혁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버럭 소리쳤다.“설기야!”하지만 설기는 이성을 읽고 마구 소리쳤다.다행히 제때 도착한 직원이 곧바로 조치하는 바람에 유진을 구출했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유진은 진작 쓰러졌다.하연은 어두운 눈으로 상혁과 눈빛을 교환했고, 상혁은 알아차린 듯 얼른 직원에게 분부했다.“얼른 구급차 불러요.”하연
“최하연은 우리 집과 안 맞는 게 틀림없어.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매번 너한테 이러는 거야? 유진아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엄마가 꼭 책임을 물을 거야.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승마장도 책임을 면치 못 해.”그 말에 유진은 이내 요점을 말했다.“엄마, 그 승마장 사장이 최하연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 분명 한통속일 거예요.”“이거 큰일 날 소리네. 한씨 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고민정은 화가 치밀어 눈까지 충혈되었다. 자식이라곤 유진 하나뿐인데,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꼴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이에 고민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그러다 때마침 나타난 서준과 마주치자 헛웃음을 쳤다.“서준아, 너도 들었지? 이 모든 게 최하연 그 계집이 벌인 짓이래. 너 이번에는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서준은 마치 우스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큰숙모, 본인 딸을 너무 모르시네요.”“그게 무슨 뜻이야?고민정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저도 현장에 있었어요.”그 말을 들은 고민정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너 설마 이번에도 최하연 편을 드는 건 아니지? 최하연이 네 누나한테 이런 짓까지 하고 전에는 네 어머니와 동생한테도 못된 짓 했는데, 대체 네 가족이 누구야?”고민정의 한마디는 망치처럼 서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3년 전 저지른 자신의 잘못들이 한순간 뇌를 서준의 뇌리를 스쳤다.그때 서준은 하연을 고작 집안 장식품이라고 여겼다. 그 3년 동안 하연은 늘 고분고분했고 아내의 본분을 다했으며 아무런 사고도 친 적이 없다.심지어 시어머니의 등쌀과 시누이의 괴롭힘, 다른 친척의 불친절한 태도에도 항상 참아왔다.그때 하연이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텼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그런데 그걸 이혼하고 나서야 발견했다는 게 저절로도 한심했다.“큰숙모, 솔직히 말할게요. 오늘 사고 최하연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 최하연을 찾아가 행패 부린다면 앞으로 경제적으로 일전한 푼
그 말에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어떤 것은 수천 마디 말로도 보상할 수 없다.서준의 태도에 하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꼬리를 말았다.“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예전의 일에 대한 사과야.”“그거라면 넣어둬.”하연은 말하면서 고민정을 바라봤다.“이 일은 끝까지 책임 물을 거니까.”“그래. 그 선택 존중할게.”서준의 태도에 고민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서준아 너 어쩜 또 이 여자 편을 드는 거니? 네 누나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잖아.”“다 큰 어른이 자기가 한 짓에 책임은 져야죠.”“유진이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건 유진아라고!”고민정은 너무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둘이 뭘 하려고 하든 유진이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려봐.”하연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요. 하지만 경찰은 어떨지 모르죠.”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승마장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신고받았습니다. 혹시 한유진 씨가 누구죠?”고민정은 갑자기 나타난 경찰에 무척 당황해했다.“왜 이래요?”맨 앞에 서 있던 경찰은 이내 고민정 앞에 다가가 경찰증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저희는 경찰입니다. 법적으로 한유진 씨 소환하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유진 씨가 누구죠?”그 말을 들은 순간 고민정은 이내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제가 머리가 아파서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요.”‘저런 것도 연기라고 하나?’하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하지만 고민정이 그런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경찰도 도착한 데다 증거도 확실해 유진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하연은 하품을 하며 저를 기다려준 상혁에게 다가갔다.“오빠, 우리 이제 돌아가요.”“응, 밖에 추우니까 이거 걸쳐. 감기 조심해야지.”상혁은 외투를 벗어 하연에게 덮어주며 이내 병원을 떠났다.그때, 둘이 나란히 떠나는 뒷모
상혁은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누가 먼저인지 제대로 알고 말해.”서준의 눈에 순간 의심이 언뜻 지나갔다.“그게 무슨 뜻이지?”상혁은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3년이나 차지했으면 됐잖아. 이번에는 절대 하연이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안 뺏겨.”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뭔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느낌이 들었다.반면 서준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며 경멸 섞인 미소를 날렸다.“주제를 알아야지,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잊었나 본데?”“예전이었다면 한씨 가문이 쥐락펴락했겠지만 지금도 그런지 어디 한번 해보던가.”상혁의 여유로운 말투와 달리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준은 고개를 살짝 들고 상혁을 바라봤다. 이토록 상대 같은 상대를 만난 게 오랜만인지라 오히려 피가 끓어올랐다.“나랑 해보자 이건가? 난 주구한테 져본 적이 없어. 최하연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내 사람으로 만들 거야. 내가 부상혁 당신 제대로 인간 만들어줄게.”상혁은 서준의 도발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사람이 능력도 없으면서 설치면 안 되지.”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하연을 바라봤다.그때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최하연, 나랑 같이 가자.”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연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한서준, 난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예전에는 당신한테 그나마 작은 감정이라도 남아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감정마저 사라졌어.”말을 마친 하연은 상혁을 바라봤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상혁은 하연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하연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어린 시절의 약속은 그저 소꿉장난에 불과하니까.상혁은 눈을 내리깔며 실망감을 감추려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은 상혁에게 다가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상혁 오빠, 우리 집에 가요.”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상혁은 앞을 내다보며 핸들을 꽉 잡더니 애써 감정을 주체했다.“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 나를 영원히 오빠로만 대하고 싶다고 해도 괜찮아. 절대 본인을 희생하지도, 싫어하는 선택을 하지도 마.”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상혁이라는 걸 하연도 알고 있다.이 감정만큼은 절대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용기 내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상혁 오빠.”상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내일 D시 프로젝트 책임자가 DS로 찾아갈 거야. 얼른 계약해 버리자.”갑자기 바뀐 화제에 반 박자 느리게 반응한 하연은 싱긋 웃었다.“그래요. 부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다음날FL 그룹 책임자는 아침 일찍 DS 그룹에 도착했다.그리고 오전 10시, 두 회사는 계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부 대표님, 앞으로 우리 한 가족인데 서로 도웁시다.”하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상혁은 하연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당연하죠. D시 프로젝트는 주기도 길고 투자도 많은 사업인데, 언제 같이 현장 답사나 하지 않을래요?”그러지 않아도 하연은 진작 계획을 세워 두었다.“다음 주가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비서한테 시간 조율하라고 할게요. 부 대표님은 시간 괜찮아요?”잠깐 스케줄을 되짚어보던 상혁은 이내 대답했다.“될 것 같네요.”그 대화를 끝으로 사무실을 나서자 하연은 곧장 참지 못하고 말했다.“상혁 오빠 진지한 모습 너무 멋있던데요?”“너야말로 말솜씨가 점점 더 늘었더라? 앞으로 더 열심히 해.”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이윽고 상혁을 직접 회사 아래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래에 도착하자 상혁은 이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이제 들어가.”“그래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하연은 말하면서 상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각, 온 정신이 상혁에게 팔려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곧이어 들려오는 거슬리는 마찰음에 고개를 돌린 하연
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하연더러 원위치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확인해 보니 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연약한 여자였다. 충격이 컸는지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의식을 잃은 듯 운전대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찬찬히 확인해 본 상혁은 이내 표정이 굳었다.“그 여자야.”하연도 이미 운전석에 앉은 여자를 확인했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왜 여기에 나타났지? 그럼 방금...”순간 하연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나를 죽이려 했던 건가?”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리고 그제야 이 사고가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한유진이 저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하연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만약 아까 상혁이 밀어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상상하기도 무서웠다.상혁도 그걸 알고 있기에 얼른 하연을 품에 안고 위로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그 순간, 신기하게도 하연의 마음은 기적처럼 편안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소방대원 그리고 구급대원까지 이내 현장에 도착하여 사고 현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했다.이번 사고가 DS 그룹 건물 앞에서 발생한 거라 회사 사장인 하연이 책임자로 경찰청에 소환되었다.물론 녹취록을 작성하는 내내 상혁은 늘 하연과 함께했다.모든 조사가 끝난 뒤, 하연은 그제야 상혁의 팔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오빠, 다쳤어요?”상혁은 애써 상처를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이게 어떻게 별거 아니에요? 살이 이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얼른 병원 가요.”원래 거절하려던 상혁은 저를 이토록 걱정해 주는 하연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 고분고분 따랐다. 그리고 한참 뒤, 병원.“의사 선생님, 이 상처 좀 치료해 주세요.”의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동전 크기만 한 상혁의 상처를 보며 잠깐 할 말을 잃었다.그러다 뭐라도 말하려고 눈을 든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
가정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다영은 손에 힘을 주며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였다. “정말이야?” 가정부는 몸을 잔뜩 웅크리며 떨었다. “정말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가정부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 신문을 내밀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가정부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영은 신문을 펼쳤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부남준의 충격적인 스캔들이었다. 각종 유명 유흥지에서 여성들과 어울리는 사진들,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장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남준 씨가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거짓말이야!” 신문을 쥐고 있는 다영의 손의 힘에 의해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는 결국 신문을 찢어버렸다. 그때, 송혜선이 아래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다영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송혜선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이럴 수가 없어!’ 송혜선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영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집어 송혜선에게 내밀었다. 송혜선은 대충 훑어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남준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회사 권력을 잡기 위해 정지철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송혜선은 감히 정다영을 건드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지철은 구속됐고, 정씨 가문도 몰락했으니, 다영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다면, 송혜선은 진작에 다영을 내쫓았을 것이다. 다영에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이런 신문 기사 하나에 휘둘리지 마라, 다영아.” 송혜선은 태연하게 다영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넌 남준이의 약혼녀야. 네가 남준이를 의심하면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하연을 품에 안았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가 좋아하는 요리들 준비해뒀어.” 하연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맛있는 저녁이 되겠네.” 상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톡 하고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하연이,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는 못 참는구나.” 식탁 위에는 하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다. 마늘 버터 가리비, 새우찜, 전복찜, 킹크랩, 탕수육까지. 하연은 만족스럽게 식사를 즐겼고, 상혁은 그녀 옆에서 직접 새우를 까서 접시에 올려주었다. “부 대표님의 또 다른 재능이 새우 까기였나 봐요?” 하연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상혁은 마지막 한 마리를 까서 그녀 앞에 내밀며 미소 지었다. “너만을 위한 서비스야.” “그럼 나는 정말 행운아네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새우를 한입에 넣었다. 그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원신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부 대표님, 그 사진들 보낸 사람이 정다영 씨였습니다.]상혁은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으려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나서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남자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이건 예상 밖이군.’ 그러나 그는 곧 차분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남준이는 요즘 뭐 하고 다니지?]원신민의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부남준 상무님은 최근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여성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상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진 확보 가능해?][어렵지 않습니다.][서여은 편집장 요즘 기사거리가 부족하다던데, 도와줘야겠어.] 메시지를 받은 원신민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 대표님, 한 방에 끝내버리는구나.’ [알겠습니다, 대표님.]상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어요?” “작은 일 좀 정리했어.” 그는
하연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이현의 말이 그동안 떠돌던 소문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내렸어요?” 이현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감회가 어린 듯 말했다. “예전엔 내가 사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거죠.” 그는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겠지.’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듯한 이 말들 속에는,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체면을 지키면서도 이별의 뜻이 담겨 있는 방식이었다. 이현은 한때 상혁과 정면 승부를 벌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하연을 자신의 곁으로 다시 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이현과 하연을 번번이 엇갈리게 만들었고, 끝없이 스쳐 지나가게 했다. 이현의 모든 집착과 미련은, 하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게 하연이 선택한 행복이라면, 이현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축복해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애초에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계속 가게 운영하는 게 더 어울렸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죠.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았으니까. 이제라도 진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겠어요.” 하연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들으며, 친구로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당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현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아요.” 그 순간, 오랫동안 이현의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가 스르르 사라지는 기분이들었다. 심지어 그 한때의 집착과 미련도 함께 흩어져 갔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준비해 온 선물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새해가 지나면 하연 씨 약혼식이 있을 테니, 나는 참석하지 않겠지만, 이 약혼 선물만큼은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약혼 선물’이라는 말이 하연의 귀에 맴돌았다. 이것이 하연이 이현과 함께 들려온 남
“하연이,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할 거예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너는 항상 우리 하연이만 생각하는구나.” 최동신은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긴 하지. 집안 가정부들은 어릴 때부터 하연이를 봐왔으니,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고 이곳이 하연이가 편하긴 할 거야.” “아침부터 나갔다던데, 너랑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그럼 얘가 어디 간 거지?” 최동신은 가정부를 불러 말했다. “하연 아가씨한테 전화 좀 걸어보게.” “어르신, 이미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십니다.” 최동신은 미간을 좁혔다. “무음으로 해놔서 못 들었나...” 하지만 최동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였다. 상혁은 화면을 열어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짙어졌다. 최동신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상혁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야?” 상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금 평정을 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업무 관련한 일이라서요.” 최동신은 배려 깊게 말했다. “일이 우선이지. 얼른 가봐라.” 최씨 가문의 본가를 나서며, 상혁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문자 메시지 하단에 찍힌 ‘TW카페’ 네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평일 오전의 TW 카페는 한산했다. 한 시간 전. 다시 ‘한명준’이 된 손이현은 급히 카페로 향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창가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여자에게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자아냈다. 이현의 발걸음도 순간 멈췄다. 그는 한동안 하연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숨을 고르던 중, 직원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몇 분이세요?” 이현은 가볍게 손짓했다. “약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하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했나요?” 하연은 시선을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이게 뭐야?” 송혜선은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선만큼은 솔직했다. 하지만 사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사진을 낚아채고 하나하나 넘겨봤다. 사진마다 담긴 장면이 송혜선을 점점 흥분하게 만들었다. ‘흥, 최씨 가문의 귀한 딸이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다니,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사진 속 남자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고고한 분위기, 남다른 기품까지...비록 사진에는 전부 뒷모습만 담겨 있었지만, 남자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송혜선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모든 사진을 훑어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이 정도는 그냥 친한 남녀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 아닐까? 선을 넘은 정황은 없잖아. 겉보기엔 별 문제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정다영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그녀는 오래전부터 하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설 탐정을 통해 추적해왔다. 그리고 사진 속 ‘한명준’이라는 남자와 하연 이 둘 사이에는 단순한 친분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님, 이 남자가 누군지 아세요?” 다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바로 B시 한씨 가문의 사람이란다.” “B시 한씨 가문?” 송혜선은 순간적으로 하연의 전 남편이 한씨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분명 들은 바에 따르면 한씨 가문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최하연의 전남편은 감옥에 간 걸로 아는데, 또 다른 한씨 가문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하여튼 복잡한 사연이 많았어.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단다.” 다영은 하연과 ‘한명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 일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까.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우리가 부상혁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는 겁니다.” ‘남자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