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님과 합작 건에 대해 얘기도 할 겸 승마하러 왔습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하지 않을래요?”“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상혁의 거절에 허승철은 옆에 있는 하연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기회 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죠.”이윽고 상혁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갈까요?”하지만 서준은 오히려 싸늘한 태도로 대답했다.“아니요. 합작 건은 없던 일로 하죠.”갑작스러운 상황에 허승철은 어리둥절했다.“한 대표님, 아까까지는 이런 말씀 없었잖습니까.”“본인 입으로도 그건 아까라면서요.”허승철은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HT 그룹의 위세에 눌려 화도 내지 못했다. 결국 콧방귀를 뀌고는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옆에 있던 서준은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봤다.얼굴을 뚫을 것만 같은 눈빛이 느껴지자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서준은 저도 모르게 하연과 승마장에서 경쟁하던 날을 떠올렸다.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승마 시합을 했었다.그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승마하던 하연의 모습은 지금도 서준의 머릿속에 선명하다“최하연, 같이 승마하지 않을래?”“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제 초대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하연을 보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때 유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유진은 마치 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그런 유진의 뻔뻔함에 하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는 예의를 지켰다.“유진 언니도 승마하러 왔어요?”유진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혼자 타는 건 재미없는데 시합하는 거 어때요?”“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이 거절하자 유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도발했다.“관심 없
유진은 순간 화가 나 독설을 퍼부었다.“하, 기다려 봐. 최하연 오늘 제대로 골탕먹을 테니까.”그 말에 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유진을 덥석 잡았다.“무슨 짓 했어?”그때 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구간에서 하연의 비명이 흘러나왔다.“아!”하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료를 주고 있었는데 설기가 갑자기 뭐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연을 향해 달려들었다.그 기세에 놀라 하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리고 설기가 하연을 덮치려는 순간.“조심해.”때마침 나타난 상혁이 하연을 품에 안은 채 보호했다.설기는 마치 화가 난 듯 세게 버둥대며 당장이라도 마구간을 뛰어나올 것처럼 굴었다.몇 년 동안이나 말을 타온지라 말에 대해 알고 있는 하연은 단번에 이상한 낌새를 챘다.“상혁 오빠, 말에 문제 있어요.”상혁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응. 설기는 성격이 온화해서 이런 적 한 번도 없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준이 달려와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최하연, 괜찮아?”설기는 서준 뒤에 따라오는 유진을 보자 더 세게 날뛰었다.점점 격해지는 설기의 반응에 상혁은 다급히 하연을 보호했다.“조심해.”다음 순간, 설기는 끝내 줄을 끊고 유진에게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유진은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싫어, 오지 마!”화가 난 듯 유진만 쫓는 설기의 기세에 유진은 비틀거리며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설기가 유진에게 달려들어 발로 유진의 등을 차버렸다.곧이어 비명이 들리며 유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설기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또다시 유진을 발로 밟았다.상황을 본 직원들은 너무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고, 상혁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버럭 소리쳤다.“설기야!”하지만 설기는 이성을 읽고 마구 소리쳤다.다행히 제때 도착한 직원이 곧바로 조치하는 바람에 유진을 구출했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유진은 진작 쓰러졌다.하연은 어두운 눈으로 상혁과 눈빛을 교환했고, 상혁은 알아차린 듯 얼른 직원에게 분부했다.“얼른 구급차 불러요.”하연
“최하연은 우리 집과 안 맞는 게 틀림없어.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매번 너한테 이러는 거야? 유진아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엄마가 꼭 책임을 물을 거야.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승마장도 책임을 면치 못 해.”그 말에 유진은 이내 요점을 말했다.“엄마, 그 승마장 사장이 최하연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 분명 한통속일 거예요.”“이거 큰일 날 소리네. 한씨 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고민정은 화가 치밀어 눈까지 충혈되었다. 자식이라곤 유진 하나뿐인데,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꼴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이에 고민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그러다 때마침 나타난 서준과 마주치자 헛웃음을 쳤다.“서준아, 너도 들었지? 이 모든 게 최하연 그 계집이 벌인 짓이래. 너 이번에는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서준은 마치 우스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큰숙모, 본인 딸을 너무 모르시네요.”“그게 무슨 뜻이야?고민정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저도 현장에 있었어요.”그 말을 들은 고민정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너 설마 이번에도 최하연 편을 드는 건 아니지? 최하연이 네 누나한테 이런 짓까지 하고 전에는 네 어머니와 동생한테도 못된 짓 했는데, 대체 네 가족이 누구야?”고민정의 한마디는 망치처럼 서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3년 전 저지른 자신의 잘못들이 한순간 뇌를 서준의 뇌리를 스쳤다.그때 서준은 하연을 고작 집안 장식품이라고 여겼다. 그 3년 동안 하연은 늘 고분고분했고 아내의 본분을 다했으며 아무런 사고도 친 적이 없다.심지어 시어머니의 등쌀과 시누이의 괴롭힘, 다른 친척의 불친절한 태도에도 항상 참아왔다.그때 하연이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텼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그런데 그걸 이혼하고 나서야 발견했다는 게 저절로도 한심했다.“큰숙모, 솔직히 말할게요. 오늘 사고 최하연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 최하연을 찾아가 행패 부린다면 앞으로 경제적으로 일전한 푼
그 말에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어떤 것은 수천 마디 말로도 보상할 수 없다.서준의 태도에 하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꼬리를 말았다.“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예전의 일에 대한 사과야.”“그거라면 넣어둬.”하연은 말하면서 고민정을 바라봤다.“이 일은 끝까지 책임 물을 거니까.”“그래. 그 선택 존중할게.”서준의 태도에 고민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서준아 너 어쩜 또 이 여자 편을 드는 거니? 네 누나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잖아.”“다 큰 어른이 자기가 한 짓에 책임은 져야죠.”“유진이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건 유진아라고!”고민정은 너무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둘이 뭘 하려고 하든 유진이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려봐.”하연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요. 하지만 경찰은 어떨지 모르죠.”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승마장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신고받았습니다. 혹시 한유진 씨가 누구죠?”고민정은 갑자기 나타난 경찰에 무척 당황해했다.“왜 이래요?”맨 앞에 서 있던 경찰은 이내 고민정 앞에 다가가 경찰증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저희는 경찰입니다. 법적으로 한유진 씨 소환하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유진 씨가 누구죠?”그 말을 들은 순간 고민정은 이내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제가 머리가 아파서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요.”‘저런 것도 연기라고 하나?’하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하지만 고민정이 그런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경찰도 도착한 데다 증거도 확실해 유진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하연은 하품을 하며 저를 기다려준 상혁에게 다가갔다.“오빠, 우리 이제 돌아가요.”“응, 밖에 추우니까 이거 걸쳐. 감기 조심해야지.”상혁은 외투를 벗어 하연에게 덮어주며 이내 병원을 떠났다.그때, 둘이 나란히 떠나는 뒷모
상혁은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누가 먼저인지 제대로 알고 말해.”서준의 눈에 순간 의심이 언뜻 지나갔다.“그게 무슨 뜻이지?”상혁은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3년이나 차지했으면 됐잖아. 이번에는 절대 하연이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안 뺏겨.”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뭔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느낌이 들었다.반면 서준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며 경멸 섞인 미소를 날렸다.“주제를 알아야지,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잊었나 본데?”“예전이었다면 한씨 가문이 쥐락펴락했겠지만 지금도 그런지 어디 한번 해보던가.”상혁의 여유로운 말투와 달리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준은 고개를 살짝 들고 상혁을 바라봤다. 이토록 상대 같은 상대를 만난 게 오랜만인지라 오히려 피가 끓어올랐다.“나랑 해보자 이건가? 난 주구한테 져본 적이 없어. 최하연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내 사람으로 만들 거야. 내가 부상혁 당신 제대로 인간 만들어줄게.”상혁은 서준의 도발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사람이 능력도 없으면서 설치면 안 되지.”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하연을 바라봤다.그때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최하연, 나랑 같이 가자.”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연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한서준, 난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예전에는 당신한테 그나마 작은 감정이라도 남아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감정마저 사라졌어.”말을 마친 하연은 상혁을 바라봤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상혁은 하연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하연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어린 시절의 약속은 그저 소꿉장난에 불과하니까.상혁은 눈을 내리깔며 실망감을 감추려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은 상혁에게 다가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상혁 오빠, 우리 집에 가요.”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상혁은 앞을 내다보며 핸들을 꽉 잡더니 애써 감정을 주체했다.“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 나를 영원히 오빠로만 대하고 싶다고 해도 괜찮아. 절대 본인을 희생하지도, 싫어하는 선택을 하지도 마.”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상혁이라는 걸 하연도 알고 있다.이 감정만큼은 절대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만큼은 용기 내어 한 발짝 내디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알았어요, 상혁 오빠.”상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내일 D시 프로젝트 책임자가 DS로 찾아갈 거야. 얼른 계약해 버리자.”갑자기 바뀐 화제에 반 박자 느리게 반응한 하연은 싱긋 웃었다.“그래요. 부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다음날FL 그룹 책임자는 아침 일찍 DS 그룹에 도착했다.그리고 오전 10시, 두 회사는 계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했다.“부 대표님, 앞으로 우리 한 가족인데 서로 도웁시다.”하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상혁은 하연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했다.“당연하죠. D시 프로젝트는 주기도 길고 투자도 많은 사업인데, 언제 같이 현장 답사나 하지 않을래요?”그러지 않아도 하연은 진작 계획을 세워 두었다.“다음 주가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비서한테 시간 조율하라고 할게요. 부 대표님은 시간 괜찮아요?”잠깐 스케줄을 되짚어보던 상혁은 이내 대답했다.“될 것 같네요.”그 대화를 끝으로 사무실을 나서자 하연은 곧장 참지 못하고 말했다.“상혁 오빠 진지한 모습 너무 멋있던데요?”“너야말로 말솜씨가 점점 더 늘었더라? 앞으로 더 열심히 해.”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이윽고 상혁을 직접 회사 아래까지 바래다주었다. 아래에 도착하자 상혁은 이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이제 들어가.”“그래요, 그럼 다음 주에 봐요.”하연은 말하면서 상혁을 향해 손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각, 온 정신이 상혁에게 팔려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건 발견하지 못했다.곧이어 들려오는 거슬리는 마찰음에 고개를 돌린 하연
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하연더러 원위치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하고는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확인해 보니 운전석에 있는 사람은 환자복을 입고 있는 연약한 여자였다. 충격이 컸는지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의식을 잃은 듯 운전대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찬찬히 확인해 본 상혁은 이내 표정이 굳었다.“그 여자야.”하연도 이미 운전석에 앉은 여자를 확인했다.그 여자는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왜 여기에 나타났지? 그럼 방금...”순간 하연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나를 죽이려 했던 건가?”하연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리고 그제야 이 사고가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한유진이 저를 죽이려 한다는 생각에 하연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만약 아까 상혁이 밀어서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상상하기도 무서웠다.상혁도 그걸 알고 있기에 얼른 하연을 품에 안고 위로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그 순간, 신기하게도 하연의 마음은 기적처럼 편안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소방대원 그리고 구급대원까지 이내 현장에 도착하여 사고 현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했다.이번 사고가 DS 그룹 건물 앞에서 발생한 거라 회사 사장인 하연이 책임자로 경찰청에 소환되었다.물론 녹취록을 작성하는 내내 상혁은 늘 하연과 함께했다.모든 조사가 끝난 뒤, 하연은 그제야 상혁의 팔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오빠, 다쳤어요?”상혁은 애써 상처를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이게 어떻게 별거 아니에요? 살이 이렇게 많이 떨어졌는데. 얼른 병원 가요.”원래 거절하려던 상혁은 저를 이토록 걱정해 주는 하연의 모습에 가슴이 따뜻해 고분고분 따랐다. 그리고 한참 뒤, 병원.“의사 선생님, 이 상처 좀 치료해 주세요.”의사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동전 크기만 한 상혁의 상처를 보며 잠깐 할 말을 잃었다.그러다 뭐라도 말하려고 눈을 든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
상혁의 소개에 하연은 다급하게 인사했다.“아, 안녕하세요.”하연의 인사를 받은 성준은 싱긋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짜식, 능력 있네. 그런데 네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아 처치 좀 하면 끝날 일이야. 누가 보면 네가 큰 병 걸린 줄 알겠다?”“괜찮다니 다행이네요. 고마워요.”상혁이 괜찮니 그제야 안심이 됐다.그때, 성준이 거즈와 요오드를 들고 와 상혁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별거 아니에요. 다음번에는 안 다치게 조심해요.”이윽고 치료를 마치고 나니 하연을 보며 말했다.“됐어요. 치료 다 끝났으니 치료비는 저쪽 창구에서 지불하세요.”“네.”하연은 이내 대답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때 성준이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부상혁, 내 기억이 맞다면 너 지금껏 최하연 씨 한 번도 잊지 못했지?”그 목소리는 마치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듯 흥분에 차 있었다.“너 연애 경험이 없어서 아직 여자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모르지? 연애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야.”“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상혁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상혁이 이토록 겸손한 건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라 성준은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이거 이거, 내가 아는 그 대단하신 부상혁 도련님 맞아?”성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가르쳐 줄게. 연애는 말이지, 진심이 전달되어야 해. 물론 여자의 동정심도 이용해 주면 좋고. 그런데 내가 볼 때 하연 씨도 너 엄청 신경 쓰는 것 같던데. 힘내 봐. 그래야 나도 네 결혼 축하주 마시러 가지.”“...”병원에서 나온 상혁의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분명 작은 상처였지만 성준은 작은 상처는 효과 없다며 기어코 붕대까지 감아줬다.상혁은 그게 오버라며 당장 풀려고 했지만 하연이 나서서 제지했다.“오빠, 상처 소독 이제 막 끝났는데 마구 움직이지 마요. 집에 가서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고,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비서 꼭 불러요.”그 순간 상혁은 동작을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