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가 상혁을 현실로 끌어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상혁은 그제야 자기가 추태를 부렸다는 걸 인지하고는 자는 하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 밖을 나가 업무 보고를 하려는 직원을 막았다.“업무는 회의실에서 얘기합시다.”갑자기 장소를 바꾸는 상혁이 이해되지 않아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쳤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회의실로 따라갔다.곤히 잠들어 있던 하연이 깨어났을 때, 커다란 사무실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탓에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떨어져 허리 숙여 주울 때, 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며 상혁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상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어봤다.“깼어?”하연은 잠들었다는 게 쪽팔리고 미안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저 오래 잤죠?”“그렇게 오라지는 않아.”상혁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하연에게 다가갔다.“나가서 좀 산책할까?”“그래도 돼요?”하연이 놀란 듯 물었다.“당연하지.”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혁과 함께 회사 부근을 산책했다.FL 이제 막 이곳으로 이전한 지 불과 반년도 안 된 그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고, 직원들도 모두 잘 훈련받은 엘리트들뿐이다.하연을 데리고 회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회사 부문과 책임자들을 소개하던 상혁은 어느새 마케팅팀에 도착했다.“임 차장님, 대표님 옆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예요?”그 모습을 본 직원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서희에게 물었다.눈을 들어 확인한 서희는 하연을 보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최 이사님이에요.”“최 이사님? 대표님이 임원 회의 때 대대적으로 소개했다던 그 분이요? 그런데 대표님과는 대체 무슨 사이죠? 엄청 친해 보이네요. 설마 대표님 여친은 아니겠죠?”그 말에 다른 직원이 맞장구쳤다.“딱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언제 여자한테 저렇게 다정한 적 있었어요? 회사 소개도 직접 해주고 있잖아요. 중요한 고객이 왔을 때도 저렇게 인내심 있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듯하네요. 그런데 대표님이 뭐가 아쉽다고 일개 비서를 만나겠어요? 상대를 골라도 최 이사님 같은 명문가 아가씨를 만나죠.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문 앞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들은 서희는 복잡한 마음에 주먹을 그러쥐었고, 눈에는 어느새 그늘이 져 있었다.한편, 상혁과 함께 회사를 대충 둘러본 하연은 회사 운영 방식을 대략적으로 익혔다.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어때? FL 그룹과 협력할지 말지는 잘 생각해 봤어?”하연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생각할 게 뭐 있어요?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는 당연히 우리끼리 해먹어야죠. 이렇게 하리고 해요.”“응, 좋아. 그럼 가능한 내일애 계약 체결하는 거로 해.”“좋아요. 우리 효률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대화하며 복도를 걷던 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이제 업무 얘기도 끝났으니 밖에 나가 스트레스 푸는 게 어때?”“어디 갈 건데요?”의아한 눈으로 묻는 하연을 보며 상혁은 입을 꾹 다물더니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너 어릴 때 승마 좋아했잖아. 승마장에 가보는 건 어때?”“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런데 한동안 못 타서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네요. 가 볼까요?”“그래.”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결국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오늘은 평일이라 승마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상혁과 하연을 본 직원은 얼른 다가와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상대가 아는 것처럼 인사하자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 백마를 데려와요.”상혁의 분부에 직원은 얼른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잠시 뒤 백마를 끌고 나타났다. 백마는 무척이나 예뻐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정말 예쁘네요.”상혁은 끈을 쥐고 하연의 앞에 끌고 와 건네주었다.“한번 타봐.”백마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분고분 다리를 굽혀 몸을 낮췄다.“와, 사람 말도 알아들어요?”하연은 놀
“혼자 들어가요.”유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안 좋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서준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결국 군말없이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두 사람이 말했던 고객, 허승철이 뒤늦게 도착했다.“한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일할 때의 서준은 흠잡을 곳이 없다. 지금 역시 의젓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허승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괜찮습니다. 오래 전부터 승마를 좋아한다고 들어 일부러 승마장으로 약속장소를 잡았는데, 오늘 솜씨를 제대로 볼 수 있겠네요.”“저를 너무 추켜세우네요. 한 대표님의 승마술도 기가 막혀다던데 오늘 제대로 겨루어 봅시다.”두 사람은 말하면서 승마장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승마에 관심이 없는 유진은 아예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했다.“저기요, 과일 주스 좀 가져다 줘요.”종업원에게 주스를 주문한 유진은 소파에 앉아 승마장을 빙 둘러봤다. 그러다 익숙한 사람에게 시선이 멈추더니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섰다.곧이어 원망과 분노가 섞인 눈으로 하연을 노려봤다.“최하연이 여긴 어쩐 일이지?”유진은 서준이 있는 곳을 이내 살피더니 하연과 정반대 방향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고객님, 주문하신 주스 나왔습니다.주스를 내려놓고 떠나려는 종업원을 유진은 다급히 불러 세웠다.“잠깐!”이윽고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종업원에게 건네더니 상혁을 가리키며 물었다.“저 남자는 누구예요?”종업원은 유진의 시선을 따라 확인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저분은 저희 사장님입니다.”“사장님?”유진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하연이 승마장 사장과 붙어먹는다니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사장님 이름이 뭐예요?”종업원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유진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종업원을 돌려보냈다.하지만 시선을 하연에게서 떼지 못했다. 지난 번 일이 하연이
허승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님과 합작 건에 대해 얘기도 할 겸 승마하러 왔습니다. 혹시 저희와 함께하지 않을래요?”“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네요.”상혁의 거절에 허승철은 옆에 있는 하연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기회 되면 다음에 다시 만나죠.”이윽고 상혁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저희는 이만 갈까요?”하지만 서준은 오히려 싸늘한 태도로 대답했다.“아니요. 합작 건은 없던 일로 하죠.”갑작스러운 상황에 허승철은 어리둥절했다.“한 대표님, 아까까지는 이런 말씀 없었잖습니까.”“본인 입으로도 그건 아까라면서요.”허승철은 여전히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HT 그룹의 위세에 눌려 화도 내지 못했다. 결국 콧방귀를 뀌고는 뒤돌아 떠나버렸다.그 옆에 있던 서준은 끝까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연을 빤히 바라봤다.얼굴을 뚫을 것만 같은 눈빛이 느껴지자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서준은 저도 모르게 하연과 승마장에서 경쟁하던 날을 떠올렸다.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승마 시합을 했었다.그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승마하던 하연의 모습은 지금도 서준의 머릿속에 선명하다“최하연, 같이 승마하지 않을래?”“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제 초대를 냉정하게 거절하는 하연을 보자 서준은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때 유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 이런 데서 다 만나네요?”유진은 마치 전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친근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그런 유진의 뻔뻔함에 하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지만 겉으로는 예의를 지켰다.“유진 언니도 승마하러 왔어요?”유진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혼자 타는 건 재미없는데 시합하는 거 어때요?”“미안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이 거절하자 유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도발했다.“관심 없
유진은 순간 화가 나 독설을 퍼부었다.“하, 기다려 봐. 최하연 오늘 제대로 골탕먹을 테니까.”그 말에 서준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유진을 덥석 잡았다.“무슨 짓 했어?”그때 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구간에서 하연의 비명이 흘러나왔다.“아!”하연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료를 주고 있었는데 설기가 갑자기 뭐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연을 향해 달려들었다.그 기세에 놀라 하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리고 설기가 하연을 덮치려는 순간.“조심해.”때마침 나타난 상혁이 하연을 품에 안은 채 보호했다.설기는 마치 화가 난 듯 세게 버둥대며 당장이라도 마구간을 뛰어나올 것처럼 굴었다.몇 년 동안이나 말을 타온지라 말에 대해 알고 있는 하연은 단번에 이상한 낌새를 챘다.“상혁 오빠, 말에 문제 있어요.”상혁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응. 설기는 성격이 온화해서 이런 적 한 번도 없어.”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준이 달려와 걱정스러운 태도로 물었다.“최하연, 괜찮아?”설기는 서준 뒤에 따라오는 유진을 보자 더 세게 날뛰었다.점점 격해지는 설기의 반응에 상혁은 다급히 하연을 보호했다.“조심해.”다음 순간, 설기는 끝내 줄을 끊고 유진에게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유진은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싫어, 오지 마!”화가 난 듯 유진만 쫓는 설기의 기세에 유진은 비틀거리며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설기가 유진에게 달려들어 발로 유진의 등을 차버렸다.곧이어 비명이 들리며 유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설기는 동작을 멈추지 않고 또다시 유진을 발로 밟았다.상황을 본 직원들은 너무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고, 상혁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버럭 소리쳤다.“설기야!”하지만 설기는 이성을 읽고 마구 소리쳤다.다행히 제때 도착한 직원이 곧바로 조치하는 바람에 유진을 구출했지만, 이미 충격을 받은 유진은 진작 쓰러졌다.하연은 어두운 눈으로 상혁과 눈빛을 교환했고, 상혁은 알아차린 듯 얼른 직원에게 분부했다.“얼른 구급차 불러요.”하연
“최하연은 우리 집과 안 맞는 게 틀림없어. 우리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매번 너한테 이러는 거야? 유진아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엄마가 꼭 책임을 물을 거야. 네가 이렇게 다쳤는데, 승마장도 책임을 면치 못 해.”그 말에 유진은 이내 요점을 말했다.“엄마, 그 승마장 사장이 최하연이 지금 만나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 분명 한통속일 거예요.”“이거 큰일 날 소리네. 한씨 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고민정은 화가 치밀어 눈까지 충혈되었다. 자식이라곤 유진 하나뿐인데,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고 온 꼴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이에 고민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그러다 때마침 나타난 서준과 마주치자 헛웃음을 쳤다.“서준아, 너도 들었지? 이 모든 게 최하연 그 계집이 벌인 짓이래. 너 이번에는 절대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서준은 마치 우스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큰숙모, 본인 딸을 너무 모르시네요.”“그게 무슨 뜻이야?고민정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저도 현장에 있었어요.”그 말을 들은 고민정은 깜짝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너 설마 이번에도 최하연 편을 드는 건 아니지? 최하연이 네 누나한테 이런 짓까지 하고 전에는 네 어머니와 동생한테도 못된 짓 했는데, 대체 네 가족이 누구야?”고민정의 한마디는 망치처럼 서준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3년 전 저지른 자신의 잘못들이 한순간 뇌를 서준의 뇌리를 스쳤다.그때 서준은 하연을 고작 집안 장식품이라고 여겼다. 그 3년 동안 하연은 늘 고분고분했고 아내의 본분을 다했으며 아무런 사고도 친 적이 없다.심지어 시어머니의 등쌀과 시누이의 괴롭힘, 다른 친척의 불친절한 태도에도 항상 참아왔다.그때 하연이 대체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텼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그런데 그걸 이혼하고 나서야 발견했다는 게 저절로도 한심했다.“큰숙모, 솔직히 말할게요. 오늘 사고 최하연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 최하연을 찾아가 행패 부린다면 앞으로 경제적으로 일전한 푼
그 말에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어떤 것은 수천 마디 말로도 보상할 수 없다.서준의 태도에 하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입꼬리를 말았다.“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해?”서준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예전의 일에 대한 사과야.”“그거라면 넣어둬.”하연은 말하면서 고민정을 바라봤다.“이 일은 끝까지 책임 물을 거니까.”“그래. 그 선택 존중할게.”서준의 태도에 고민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서준아 너 어쩜 또 이 여자 편을 드는 거니? 네 누나가 아직 병상에 누워있잖아.”“다 큰 어른이 자기가 한 짓에 책임은 져야죠.”“유진이 대체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지금 병상에 누워 있는 건 유진아라고!”고민정은 너무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둘이 뭘 하려고 하든 유진이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려봐.”하연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요. 하지만 경찰은 어떨지 모르죠.”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승마장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신고받았습니다. 혹시 한유진 씨가 누구죠?”고민정은 갑자기 나타난 경찰에 무척 당황해했다.“왜 이래요?”맨 앞에 서 있던 경찰은 이내 고민정 앞에 다가가 경찰증을 보여주며 상황을 설명했다.“저희는 경찰입니다. 법적으로 한유진 씨 소환하는 거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한유진 씨가 누구죠?”그 말을 들은 순간 고민정은 이내 비틀거리며 제 이마를 짚었다.“제가 머리가 아파서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요.”‘저런 것도 연기라고 하나?’하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하지만 고민정이 그런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경찰도 도착한 데다 증거도 확실해 유진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하연은 하품을 하며 저를 기다려준 상혁에게 다가갔다.“오빠, 우리 이제 돌아가요.”“응, 밖에 추우니까 이거 걸쳐. 감기 조심해야지.”상혁은 외투를 벗어 하연에게 덮어주며 이내 병원을 떠났다.그때, 둘이 나란히 떠나는 뒷모
상혁은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누가 먼저인지 제대로 알고 말해.”서준의 눈에 순간 의심이 언뜻 지나갔다.“그게 무슨 뜻이지?”상혁은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3년이나 차지했으면 됐잖아. 이번에는 절대 하연이 당신 같은 사람한테 안 뺏겨.”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은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뭔가 중요한 걸 놓쳤다는 느낌이 들었다.반면 서준은 그 말에 콧방귀를 뀌며 경멸 섞인 미소를 날렸다.“주제를 알아야지, 여기가 누구 구역인지 잊었나 본데?”“예전이었다면 한씨 가문이 쥐락펴락했겠지만 지금도 그런지 어디 한번 해보던가.”상혁의 여유로운 말투와 달리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서준은 고개를 살짝 들고 상혁을 바라봤다. 이토록 상대 같은 상대를 만난 게 오랜만인지라 오히려 피가 끓어올랐다.“나랑 해보자 이건가? 난 주구한테 져본 적이 없어. 최하연은 내가 무슨 수를 쓰든 내 사람으로 만들 거야. 내가 부상혁 당신 제대로 인간 만들어줄게.”상혁은 서준의 도발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사람이 능력도 없으면서 설치면 안 되지.”말을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하연을 바라봤다.그때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최하연, 나랑 같이 가자.”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연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다.“한서준, 난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예전에는 당신한테 그나마 작은 감정이라도 남아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감정마저 사라졌어.”말을 마친 하연은 상혁을 바라봤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상혁은 하연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는 하연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어린 시절의 약속은 그저 소꿉장난에 불과하니까.상혁은 눈을 내리깔며 실망감을 감추려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은 상혁에게 다가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상혁 오빠, 우리 집에 가요.”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