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쁜짓하러 나왔어?”하연의 거침없는 비아냥에 혜경의 얼굴은 일순 어두워졌다. 하지만 꾹 눌러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내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 서준 씨가 보석금 엄청 많이 들여서 나 빼줬어, 알겠어? 최하연, 서준 씨 마음에는 처음부터 나 하나뿐이었다고. 너는 그저 서준 씨한테 버려진 전처일 뿐이야.”하연은 그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 흔들림도 없는 모습으로 팔짱을 꼈다.“그렇다면 밖에서 싸돌아 다니며 사람 해치지 좀 마.”“너!”혜경은 이를 악물며 하연을 매섭게 쏘아봤다.“최하연, 잘 들어. 내가 그동안 겪은 걸 너한테 똑같이 돌려줄 거야.”“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해봐.”하연의 말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민혜경은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터라 효과는 배가 되었다.감옥을 생각하니 혜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너 딱 기다려.”혜경은 이를 갈며 경고를 남겼다.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등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들어 혜경을 바라봤다.여자는 무심한 듯 커피를 입에 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언제부터 내연녀가 앞뒤 분간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세상이 됐지?”혜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바라봤다.낯선 얼굴의 여자는 자기 관리를 무척 잘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지금이야 하연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눈앞의 여자로 화풀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혜경은 이내 여자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그게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여자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배운 것 없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남의 남자 뺏은 내연녀 주제에 자각도 없이 기어 나와 본처 앞에서 설치다니. 뻔뻔한 것!”“이년이 어디서! 내가 그 입을 갈가리 찢어줄게.”혜경은 길길이 날뛰면서 여자에게로 달려갔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이 햬경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민햬경 적당히 해! 여긴 내 구역이야. 저분은 내 고객님이고,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하연은 혜경을
“전에 B시에서 열렸던 패션쇼의 메인 의상을 디자인한 분 맞죠? 저 그 의상들을 아주 좋게 봤어요. P시에 최하연 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요.”여자는 말하면서 일어나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가워요, 김선화라고 해요.”“반가워요, 김 여사님. 방금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저희 숍에서 고른 옷은 모두 20프로 할인해 줄게요.”그 말에 선화는 싱긋 웃었다.“그냥 양심선언 몇 마디 한 것뿐인데 돈 벌었네요.”“맞춤 제작 드레스를 원한다고요?”선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청자기 주제로 한 드레스와 비슷한 스타일로 제작해 주세요. 참여할 행사가 있어 제일 먼저 하연 씨가 생각나더라고요. 혹시 시간 괜찮아요?”“물론이죠. 치수부터 잴게요.”하연은 선화를 도와 치수를 재고 나서 한참 동안 이야기 꽃을 피웠다.그러다 떠날 때가 되자 선화가 하연에게 명함 한 장을 내놓았다.“다 만들면 여기로 전화해 줘요. 그럼 수고해 줘요.”“별말씀을요. 조심히 가세요.”선화를 보낸 뒤 예나가 다급하게 하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하연아, 어쩐지 저 여자 낯이 익다고 했는데 이것 봐...”하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검색 결과를 확인했다.“선화 씨가 수천만 팬을 보유한 패션 블로거일 줄은 몰랐네.”“그니까. 어쩐지 보는 눈이 있다 했어. 우리 숍 옷을 고를 때도 보니까 아는 게 엄청 많더라고. 패션 블로거라 그런 거였구나.”“응. 이번 옷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줘야겠네.”하연은 예나와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인사를 하고 숍을 나섰다.하지만 이제 막 백화점 로비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혜경과 서준을 발견했다.그건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그때, 서준이 눈을 반짝이며 무의식적으로 혜경을 밀쳐내고 하연에게로 걸어왔다.물론 하연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지만 말이다.“최하연!”그때 서준이 하연을 불러 세웠다.이윽고 빠른 걸음으로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나를
서준은 하연이 떠난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되물었다.“민혜경, 일부러 이랬어? 하연이 여기 있는 줄 알면서 일부러 나 불러내 이런 모습 보인 거냐고?”“서준 씨, 오해야.”“됐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아니까. 내가 너 행패 부리라고 빼내 준 거 아니야. 경고하는데, 최하연한테 가까이하지 마. 내 말 거역하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감옥에 처넣어 줄 테니까.”“...”혜경은 화가 치밀어 서준의 팔짱을 꽉 붙잡으려 했지만 서준은 가차 없이 햬경을 밀쳐냈다.“그만해. 가식적인 태도 역겨우니까. 카드도 이미 줬잖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사.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말을 마친 서준은 혜경의 낯빛도 헤아리지 않고 결연한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갔다.차 안.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민혜경 잘 감시하라고 했잖아. 요즘 어때?”“아직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계속 감시해. 움직임만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네, 대표님.”전화를 끊은 서준은 핸드폰을 옆으로 내팽개쳤다.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서준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방금 전 하연의 싸늘한 태도를 돌이켜 보니, 이제는 하연을 잡을 기회가 영영 사라진 듯싶었다....“하연아, 나 귀국했어.”이제 막 화상회의를 마친 하연은 상혁이 보낸 메시지를 보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상혁 오빠, 벌써 B시에 도착했어요?”그 시각, 전화 건너편에서 상혁은 눈을 들어 휘황찬란한 DS 그룹 건물을 바라봤다.“응, 도착했어. 나랑 합작 건으로 할 얘기 있다며?”“내 배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요?”“나 네 회사 아래에 있어.”하연은 놀란 듯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낯익은 검은색 롤스로이스 팬텀이 보였다.“기다려요, 제가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이내 서류 뭉치를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상혁은 하연을 보자 얼른 앞으로 다가갔다.“
그에 반해 상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로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우선 이렇게 주세요. 더 필요하면 따로 주문할게요.”종업원이 떠나자 하연은 그제야 물컵을 내려놓았다.“제가 파와 생강을 안 먹는 거 어떻게 알아요?”이건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서준도 모르는 일이다.‘그런데 상혁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상혁은 눈을 들어 하연을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네 첫째 오빠가 말해줬어.”“하민 오빠요?”상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솔직히 이 모든 건 그동안 상혁이 관찰해서 알아낸 결과다.하연은 그런 상혁의 말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최하연, 정말 너였어?”그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곧이어 한설매가 하연의 앞에 나타나 하연과 상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서준의 작은 고모인 한설매는 줄곧 하연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한씨 집안에서 나간 뒤 이렇게 훌륭한 남자와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두 사람 무슨 사이야?”한설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물어봤다.하연은 원래 한씨 집안 사람에게 호감이 없는데 늘 말 많은 한설매는 더욱 싫어했다.“그게 한설매 씨와 무슨 상관이죠?”한설매는 지난번에 하연에게 거절당하고 난 뒤부터 늘 마음에 새겨뒀는데, 하연이 이렇게 되묻자 결국 폭발했다.“왜? 이혼하더니 이제는 곁에 몸 파는 남자를 두는 거야? 서준이보다 한참 못 해 보이는데 사람 보는 눈이 영 없네.”만약 한설매가 저를 욕했다면 하연은 아마 대꾸도 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하필이면 상혁을 건드렸기에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누가 미친개를 함부로 풀어놨지? 아무 데서나 이빨을 드러내네.”“지금 나더러 개라는 거야?”“아니에요?”한설매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하연은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남편이 아직도 일 찾고 있죠? 제가 이 바닥에 말해두면 앞으로 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상대를 잡으려면 급소를 때리라고 했던가?남편의 얘기가 나오자
지난번 일 때문에 대표의 비서에서 마케팅팀 차장으로 강등된 서희는 여태껏 불만을 품고 있다.심지어 사적으로 상혁을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매번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그러다 결국 상혁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역할을 해줄 사람이 바로 하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대표님, 안녕하세요.”서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상혁에게 인사하고는 이내 하연을 향해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최 이사님, 안녕하세요.”하연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고는 상혁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그 뒤로 서희가 서류 뭉치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대표님, 결재 부탁드립니다.”서희의 말에 상혁은 자리에 앉아 펜을 휘날리며 멋있는 사인을 하나하나 하기 시작했다.상혁이 회사에 없는 동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하연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그러다 심심했는지 잡지를 꺼내 보다가 상혁이 일을 끝마칠 때쯤 피곤을 못 이기고 소파에 기대 잠들어 버렸다.상혁은 서류를 내려놓고 살금살금 다가가 하연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이 순간만큼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상혁은 곤히 잠들고 있는 하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점점 옛 생각 잠겼다.7살 때, 상혁의 소원은 늘 양 갈래 머리를 한 옆집 동생을 보는 거였다.그때 옆집에 여동생이 있다는 게 부러워 상혁은 계속 조진숙에게 떼를 쓰기 일쑤였다.“엄마, 엄마도 여동생 하나 만들어주면 안 돼요?”“엄마, 저 여동생 갖고 싶어요.”“여동생이 있으면 제가 잘 돌보고 지켜줄게요.”“...”사실 조진숙도 예쁜 딸을 원했지만 상혁을 낳으며 몸이 많이 상한 탓에 임신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상혁아, 엄마가 예쁜 인형 사줄게. 그걸 동생으로 여기면 안 될까?”마지못해 이런 말로 상혁은 설득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화가 난 듯 조진숙을 밀쳐냈다.“인형 싫어요. 여동생 가질래요!”아들의 고집에 조진숙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갔지만 여동생을 갖고 싶다는 상혁의 마음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정확한 날짜는 기억 나지 않지
상혁 오빠라는 말 한마디에 상혁의 마음은 옥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상혁이 망아지를 끌며 정원을 돌고 있는 사이, 하연은 동글동글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쉴 새 없이 질문했다.“상혁 오빠, 망아지가 왜 말을 안 해요?”“왜 하늘은 파래요?”“왜 새는 날 수 있어요?”“왜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요?”“...”어린 하연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물었지만 상혁은 귀찮아하기는커녕 인내심 있게 하나하나 대답했다.“와, 상혁 오빠 짱! 어떻게 뭐든 다 알아요?”하연은 우상을 보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상혁을 봤다. 그 반응에 상혁은 으쓱해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연이 너무 귀여워.’“하연아, 너 오빠 동생만 할 수 있어?”“안 돼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고사리 같은 손을 꺼내 숫자를 세기 시작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저 오빠 세 명 있어요. 상혁 오빠까지 하면 4명이에요.”그 말을 듣는 순간 상혁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질투심이 밀려왔다.“오빠 셋이나 있어? 난 동생이 너 하나뿐인데.”그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하연이 상혁의 손을 잡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그럼 오빠가 제 남편 해요.”상혁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비록 아직 7살이지만 상혁은 다른 꼬마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었다.예를 들면 남자와 여자는 커서 결혼해야 한다든가.결혼하면 아기가 태어난다는가.심지어는 여보, 자기 등 애칭으로 상대를 부른다든가.그리고 결혼하면 상대와 평생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까지.‘하지만 엄마가 분명 쉽게 결혼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속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던 상혁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내가 남편이 됐으면 해?”“오빠가 말했는데 여자애는 커서 남편을 한 명만 둘 수 있댔어요. 그러니까 상혀규 오빠가 제 남편이 되어줄래요?”하연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을 한참 듣던 상혁은 괜찮다는 결론을 내렸다.이렇게 되면 이 귀여운 여동생과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으니.“그래.”“그럼 우리 손가락 걸고 약속해요.”“그래, 약속.”작
똑똑-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가 상혁을 현실로 끌어왔다.순간 정신을 차린 상혁은 그제야 자기가 추태를 부렸다는 걸 인지하고는 자는 하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문 밖을 나가 업무 보고를 하려는 직원을 막았다.“업무는 회의실에서 얘기합시다.”갑자기 장소를 바꾸는 상혁이 이해되지 않아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쳤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회의실로 따라갔다.곤히 잠들어 있던 하연이 깨어났을 때, 커다란 사무실은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운 탓에 몸을 덮고 있던 담요가 떨어져 허리 숙여 주울 때, 마침 사무실 문이 열리며 상혁이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상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어봤다.“깼어?”하연은 잠들었다는 게 쪽팔리고 미안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저 오래 잤죠?”“그렇게 오라지는 않아.”상혁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하연에게 다가갔다.“나가서 좀 산책할까?”“그래도 돼요?”하연이 놀란 듯 물었다.“당연하지.”상혁의 대답에 하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혁과 함께 회사 부근을 산책했다.FL 이제 막 이곳으로 이전한 지 불과 반년도 안 된 그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고, 직원들도 모두 잘 훈련받은 엘리트들뿐이다.하연을 데리고 회사 곳곳을 돌아다니며 회사 부문과 책임자들을 소개하던 상혁은 어느새 마케팅팀에 도착했다.“임 차장님, 대표님 옆에 있는 여자분은 누구예요?”그 모습을 본 직원 한 명이 낮은 소리로 서희에게 물었다.눈을 들어 확인한 서희는 하연을 보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졌다.“최 이사님이에요.”“최 이사님? 대표님이 임원 회의 때 대대적으로 소개했다던 그 분이요? 그런데 대표님과는 대체 무슨 사이죠? 엄청 친해 보이네요. 설마 대표님 여친은 아니겠죠?”그 말에 다른 직원이 맞장구쳤다.“딱 보니 그런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언제 여자한테 저렇게 다정한 적 있었어요? 회사 소개도 직접 해주고 있잖아요. 중요한 고객이 왔을 때도 저렇게 인내심 있는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럴듯하네요. 그런데 대표님이 뭐가 아쉽다고 일개 비서를 만나겠어요? 상대를 골라도 최 이사님 같은 명문가 아가씨를 만나죠.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왜 있겠어요.”“...”문 앞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들은 서희는 복잡한 마음에 주먹을 그러쥐었고, 눈에는 어느새 그늘이 져 있었다.한편, 상혁과 함께 회사를 대충 둘러본 하연은 회사 운영 방식을 대략적으로 익혔다.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어때? FL 그룹과 협력할지 말지는 잘 생각해 봤어?”하연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생각할 게 뭐 있어요?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는 당연히 우리끼리 해먹어야죠. 이렇게 하리고 해요.”“응, 좋아. 그럼 가능한 내일애 계약 체결하는 거로 해.”“좋아요. 우리 효률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대화하며 복도를 걷던 그때, 상혁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이제 업무 얘기도 끝났으니 밖에 나가 스트레스 푸는 게 어때?”“어디 갈 건데요?”의아한 눈으로 묻는 하연을 보며 상혁은 입을 꾹 다물더니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너 어릴 때 승마 좋아했잖아. 승마장에 가보는 건 어때?”“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런데 한동안 못 타서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네요. 가 볼까요?”“그래.”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결국 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승마장으로 향했다.오늘은 평일이라 승마장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상혁과 하연을 본 직원은 얼른 다가와 공손한 태도로 인사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상대가 아는 것처럼 인사하자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 백마를 데려와요.”상혁의 분부에 직원은 얼른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잠시 뒤 백마를 끌고 나타났다. 백마는 무척이나 예뻐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정말 예쁘네요.”상혁은 끈을 쥐고 하연의 앞에 끌고 와 건네주었다.“한번 타봐.”백마는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분고분 다리를 굽혀 몸을 낮췄다.“와, 사람 말도 알아들어요?”하연은 놀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