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HT 그룹에게 2000억이 큰돈은 아니지만 민혜경한테 그런 돈을 쓸 가치는 없다.“석 달, 난 석 달만 보석해 주면 돼. 석 달이면 가격 반으로 깎을 수 없는지 물어봐. 만약 된다면 바로 송금하고.”“네, 대표님.”...그 시각, 하연은 회사에서 국제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 한참 뒤, 회의가 끝나자 태훈이 하연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HT 그룹 법무팀에서 찾아왔습니다. 한유진 씨가 회사 기밀을 빼돌리려 한 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면서요.”“그 일은 회사 법무팀에 맡기고 나중에 결과만 보고해 줘.”“네, 대표님.”태훈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마침 호현욱과 마주치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사님, 안녕하세요.”호현욱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정 실장,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거 없어. 자네는 최 사장 오른팔이잖아.”하지만 태훈은 여전히 거리를 두려는 듯 예의를 지켰다.“이사님이 여기엔 무슨 일이죠?”“최 사장님 만나러 왔지.”호현욱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최 사장님, 바쁩니까?”상대를 확인한 하연은 서류를 닫고 싱긋 웃었다.“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죠?”호현욱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최 사장님한테 경고 하나 하려고 왔어요.”“무슨 일이기에 이사님이 직접 오셨나요?”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러자 호현욱은 오히려 숨길 거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운석 대표에 관한 일입니다.”호현욱은 일부러 말을 끊고 하연의 반응을 살폈지만 하연은 쉽사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나 본부장님이 왜요?”이에 호현욱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아직 모르나 보네요. 나운석 대표가 우리 회사 회계팀에 실명으로 고발되었더군요.”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대체 무슨 일이죠?”호현욱은 일부
호현욱은 생각지도 못한 하연의 반응에 잠시 놀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이런다고 생각했을 뿐.“억울한지 아닌지는 감사팀이 알아서 조사하겠죠. 현재 나 본부장 사무실에 있다던데, 가 보시지 않을래요?”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그 시각, 운석의 사무실 안에는 정장 차림을 한 감사팀 직원들이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쓸어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운석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아무 일 없는 듯 굴었다.“다 확인했나요? 확인했으면 일에 방해되니 나가주실래요?”운석이 거침없이 말했다.하지만 감사팀 직원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수색하고 있었다.그 태도에 운석은 냉소를 짓더니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 시각, 이제 막 들어온 하연 역시 사무실 안 광경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맨 앞에서 지휘하던 직원이 행동을 멈추고 하연에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저희는 공무 집행 중입니다. 누군가 나운석 씨가 직무를 이용하여 횡령했다고 제보해서요.”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반나절이나 뒤졌을 텐데 뭐라도 나왔나요?”그 말에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지휘를 하던 직원이 운석을 흘긋거리며 대답했다.“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아직은 찾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나운석 씨 명의로 된 계자를 확인할 겁니다.”그때 호현욱이 다가와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최 사장님, 이분들도 공무집행 중인데, 방해하지 마세요. 나 본부장이 횡령하지 않았다면 조사 결과가 증명해 주겠죠. 이분들도 공무원인데, 좋은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겁니다. 물론 나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겠죠.”심기를 거스르는 말에 운석은 벌떡 일어나 호현욱을 향해 소리쳤다.“지금 무슨 헛소리야? 젠장, 누가 횡령했다는 건데? 제대로 말해!”하지만 호현욱은 오히려 느긋하게 대답했다.“나 본부장, 급할 거 뭐 있나? 조사하면 자연스럽
호현욱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윽고 한참 떨어져 있는 회계 오재원에게 눈빛을 보내자 재원은 이내 운석에게 다가왔다.“저희는 지금 나 본부장님 명의로 된 계좌를 확인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운석은 콧방귀를 뀌며 호주머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이윽고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카드를 하나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분명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꺼내 놓는 카드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그도 그럴 게, 운석이 소유하고 있는 카드 중에 몇 장은 전국 상위 5위 안에 드는 은행에서 발급하는 블랙카드였고, 심지어 R국 은행의 골드카드도 있었다.그걸 일일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재원은 넋을 잃었다.“이, 이 카드 모두 본부장님 카드입니까?”운석은 코웃음을 쳤다.“조사하겠다며? 조사해 봐. 그런데 여기 있는 카드 중 아무거나 확인해도 잔액이 몇억은 훨씬 넘을 거야.”재원은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이 카드 모두 진짜 맞나요? 설마 가짜는 아니죠? 모두 본인 명의의 카드여야 합니다.”운석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그럼 내 명의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 봐.”재원은 블랙카드 한 장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카드 단말기에 꽂아 넣었다.“비번이 뭐죠?”“없어.”재원은 그 말이 믿기지 않지만 카드를 꽂아 넣고 보니 운석의 말이 맞았다. 이윽고 잔액을 확인한순간 너무 놀라 단말기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그걸 본 호현욱은 어두운 얼굴로 호통쳤다.“쓸모없는 것! 잔액 하나 확인 못 해? 말해 봐, 카드에 이상 있어?”재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운석의 은행 카드 잔액은 몇백억이었다.그것도 카드 한 장에만.여기에 놓여 있는 카드를 눈대중으로 봐도 열 장은 넘는데, 모든 카드 안에 몇백억씩 있다면 총 몇천억이 있다는 거다.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이사님, 직접 보시는 게 어떠세요?”호현욱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 단말기를 빼앗아 잔액을 확인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나 엿 먹으라고 파놓은 함정인가? 목적이 뭐지? 나를 DS 그룹에서 쫓아내는 건가?”“...”허를 찌르는 운석의 말에 호현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내놓지 못했다.운석은 그런 호현욱을 무시한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 어떻게 할까요?”하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 본부장님은 F국 NW 그룹의 도련님입니다. 전에 제 가족에서 정해 준 약혼자이기도 했고요. 나 본부장님이 DS 그룹에 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호의로 저를 돕기 위헤서고요. 여태껏 실력도 입장했잖아요. D시 프로젝트도 나 본부장님이 따낸 거고. 그러니 오늘 일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현장에 있는 직원들을 빙 둘러보다가 재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에는 비아냥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오재원 씨, 실명으로 횡령을 고발했다던데, 증거는 어디 있죠? 내놓으세요. 만약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무고죄로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재원은 겁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호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모든 준비는 끝냈다며? 증거를 준비했다고 나더러 고발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재원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내 호현욱에게 무릎 꿇었다.“이사님, 살려주세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감옥 가기 싫다고요.”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호현욱은 잿빛이 된 얼굴로 이내 발을 뺐다.“네가 이런 짓을 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이사님, 우리 친척이잖아요. 이대로 제가 죽는 거 지켜볼 겁니까?”그 말에 호현욱은 대경실색하며 설명했다.“최 사장님, 저놈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우리가 친척이긴 하나 아주 먼 친척입니다. 평소에 왕래도 없었는데 지금 저건 나를 모함하려고 저러는 겁니다.”“이사님이 시켰잖아요. 제가 실명을 걸고 신고만 한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저를 희생
하연과 운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걸 본 현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얼마 뒤 민호를 데려와 하연 앞에 밀어 넘어뜨렸다.“이 개자식! 말해! 네가 했지? 감히 나 본부장이 횡령했다고 모함해?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민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잠깐 당황해하더니 이내 하연의 앞으로 기어가 애원했다.“최 사장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한순간 귀신에 씌었나 봅니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하지만 하연이 아무 감정 없이 저를 내려보자 민호는 곧바로 운석에게 다가갔다.“나 본부장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때 운석이 천천히 몸을 웅크려 앉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용서?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누가 지시했는지 말해.”민호는 겁에 질린 눈으로 호현욱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다시 내리깔며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지시한 사람 없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입니다. 나 본부장님이 큰 프로젝트를 성사해 질투해서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이 말을 운석은 당연히 믿지 않는다.일개 비서인 민호에게 운석의 행보가 걸림돌이 될 리는 없으니까.“나 본부장, 최 사장님, 이 일은 정 비서가 독단적으로 했다고 하니 무슨 벌이든 내리세요.”민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걸 보면 더 이상 물어봐도 캐낼 게 없다는 걸 하연은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짐 싸서 나가세요.”그 말에 민호는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호현욱이 다급히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이 작은 일도 아니고 이대로 놓아준다는 겁니까?”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봤다.“그럼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호현욱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로 자기감정을 애써 숨겼다.“저한테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최 사장님이 이렇게 결정하셨다면 따라야죠. 하지만 정 비서는 제 비서였으니 아랫것 제대로 간수 못한 책임으로 이번 달 인센
운석은 처음으로 나씨 집안 사람으로 태어난 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D시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가 독점하기에는 리스크가 좀 커요. 그래서 말인데, 실력 있는 회사와 협력하여 리스크를 줄이는 게 어때요?”일 얘기를 시작하자 운석의 얼굴에 있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심지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B시의 선도기업 중에 HT 그룹을 제외하면 FL 그룹 실력이 가장 막강해요. 게다가 FL 그룹 부 대표와 연합하면 분명 몇 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하연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그 말은 FL 그룹과 손잡으라는 뜻이에요?”“네, FL 그룹이 최적의 선택이에요. 물론...”운석은 잠깐 말을 끊고 하연을 바라봤다.“또 한 가지 선택이 더 있긴 하죠. 바로 HT 그룹.”“한서준 말이에요?”하연은 반사적으로 되묻더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HT 그룹은 됐어요. FL 그룹으로 하죠.”어찌 됐든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한서준과 다시 엮일 생각은 없었으니까.“네, FL 그룹은 실력이 막강해 두 그룹이 손을 잡으면 분명 좋은 시너지를 낼 거예요. 그럼 제가 나중에 FL 그룹 대표를 한번 만나볼게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신비로운 인물이라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더라고요.”“따로 만나서 얘기할 필요 없어요. FL 그룹 대표는 운석 씨도 알 거예요.”운석은 의아한 듯 하연을 바라봤다.“안다고요?”“그 사람이 바로 BN 그룹 도련님 부상혁이랑 같은 사람이거든요.”“그 사람이라고요?”운석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BN 그룹 부상혁이라면 비즈니스 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다.어린 천재, 하버드 수재, 비즈니스 업계의 귀재... 등 호칭이 모두 상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부상혁은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기만 했을 뿐, 같은 F국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그런데 그 사람이 B시에는 언제 왔지? 게다가 FL 그룹 대표라니?’한참 생각하던 운석은 하연을 바라봤다.“혹시
“정 실장, 오늘 무슨 일정 어떻게 돼?”태훈은 하연과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일정을 보고했다.“오전 10시에 국제 화상 회의가 잡혀 있고, 오후 2시에 기항 그룹 성 대표님과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밤 7시에 MJ 그룹 회장님과 회장 사모님과 모임이 있습니다.”“그래, 알았어.”태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연아, 바빠?”전화 건너편에서 예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난번에 6억으로 드레스 의뢰했던 고객님이 오늘 가게에 들르겠다고 하셔. 너를 콕 집어 만나고 싶다는데, 시간 돼?”하연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물었다.“언제인데?”“물어봤는데 12시 전에는 언제든 괜찮대.”“그래, 알았어.”나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고개 앞에 커피를 대령했다.“김 여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디자이너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네요.”김 여사라 불리는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그때, 가게 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오늘 막 출소한 민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카드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심지어 이미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을 가득 사 들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그동안 살얼음판 같은 감옥에서 지내면서 혜경이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다행히 지금은 다시 나왔다.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본 혜경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이윽고 콧방귀를 뀌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이거, 이거 다 포장해 줘요.”문을 들어서자마자 혜경은 마네킹에 전시되어 있던 신상 옷을 가리키며 거침없이 말했다.웃으며 다가왔던 예나는 입을 열려는 순간 그대로 굳어 웃음기가 싹 가셨다.“민혜경, 내연녀 주제에 벌써 나왔어?”예나가 퉁명스러운 태도로 내연녀라는 말을 내뱉자 혜경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끝내 눌러 참으며 비아냥거렸다.“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지? 당장 가서 옷 가져오지 않고?”그 말에 예나는 팔짱을
“또 나쁜짓하러 나왔어?”하연의 거침없는 비아냥에 혜경의 얼굴은 일순 어두워졌다. 하지만 꾹 눌러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내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아? 서준 씨가 보석금 엄청 많이 들여서 나 빼줬어, 알겠어? 최하연, 서준 씨 마음에는 처음부터 나 하나뿐이었다고. 너는 그저 서준 씨한테 버려진 전처일 뿐이야.”하연은 그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아무 흔들림도 없는 모습으로 팔짱을 꼈다.“그렇다면 밖에서 싸돌아 다니며 사람 해치지 좀 마.”“너!”혜경은 이를 악물며 하연을 매섭게 쏘아봤다.“최하연, 잘 들어. 내가 그동안 겪은 걸 너한테 똑같이 돌려줄 거야.”“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으면 해봐.”하연의 말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민혜경은 이제 막 감옥에서 나온 터라 효과는 배가 되었다.감옥을 생각하니 혜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너 딱 기다려.”혜경은 이를 갈며 경고를 남겼다.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등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들어 혜경을 바라봤다.여자는 무심한 듯 커피를 입에 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언제부터 내연녀가 앞뒤 분간 못하고 이렇게 날뛰는 세상이 됐지?”혜경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바라봤다.낯선 얼굴의 여자는 자기 관리를 무척 잘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지금이야 하연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눈앞의 여자로 화풀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혜경은 이내 여자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그게 당신이랑 뭔 상관이야?”여자의 눈은 순간 어두워졌다.“배운 것 없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남의 남자 뺏은 내연녀 주제에 자각도 없이 기어 나와 본처 앞에서 설치다니. 뻔뻔한 것!”“이년이 어디서! 내가 그 입을 갈가리 찢어줄게.”혜경은 길길이 날뛰면서 여자에게로 달려갔다.하지만 다음 순간 하연이 햬경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민햬경 적당히 해! 여긴 내 구역이야. 저분은 내 고객님이고,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하연은 혜경을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