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지금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막 회사에 합류했으니 조금이라도 실적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 늙은이들은 틀림없이 나를 따르려 하지 않을 거야.’ “호 이사님이 방금 그렇게 몰아붙인 것도, 사실 제가 대표 자리에 앉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만약 제가 이번에 물러서면 앞으로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또 괴롭힘을 당할지 모르니, 차라리 이참에 먼저 제 발언권을 장악하는 것이 나아요.” “하지만 지금 한 내기는 너무 위험합니다. 호 이사님은 대표님이 30%의 실적 향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내기를 한 거예요.” 하연이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에요. 이미 벌어진 일이니 최선을 다해 한번 해봐야죠!” 정기태는 시종일관 하연을 지지했다. “대표님 걱정 마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해요.” 이사회에서 일었던 일이 곧 DS그룹 전체에 퍼졌고 모두가 이 일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나운석도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과 함께 깜짝 놀랐다. “정말이에요? 나의 여신님이 원래 이렇게 강경했나요?” “그렇지 않아요. 최 사장님은 원래 카리스마가 넘쳤어요. 그래서 이사회를 차지하고 있는 그 늙은이들도 말문이 막혔다고요.’ 나운석은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내 여신님! 정말 멋져요!” “다만... 30%의 실적 향상은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최 대표님이 위험한 내기를 한 거예요.” 나운석은 눈썹을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이걸 가리켜 남과 다른 혁신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연은 나운석이 하고 싶지만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했고, 그래서 나운석은 하연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거 어떡하지? 여신님에 대한 내 사랑이 더욱 깊어져 버렸어.”
DS그룹으로 돌아온 나운석은 제일 먼저 하연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여신님, 이제 여신님의 신분이 세상에 공개되었으니 우리 부모님의 뜻대로 결혼하는 것이 좋겠어요.” 하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재혼 생각이 없어요.” “그럼 여신님이 언제든 결혼하고 싶으면 내게 알려줘요. 난 언제든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나운석의 말에 조금 골치가 아픈 하연이 마지못해 말했다. “운석 씨, 우리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요. 이 말은 제가 이미 한 적이 있잖아요. 왜 이렇게 제게 집착하는 거예요?” “뭐가 안 어울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빨리 결론짓지 마요. 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거절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운석이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그럼 운석 씨는 저에 대해 잘 알아요?” 하연이 되묻자 순간 나운석은 당황해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함께 지내면서 천천히 알아가도 늦지 않잖아요. 아직 시간은 많다고요.” 당황했던 나운석이 무슨 결심을 한 듯 다시 말했다. “제가 여신님에 대해 잘 몰라서 거절하는 거라면, 그럼 제가 지금부터 여신님에 대해 천천히 알아가 볼게요.” 하연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째서 저 사람과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지?’ “그건 아니에요. 결혼은 감정적인 토대가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결혼이 가장 단단하다고요.” “좋아요, 그럼 반드시 여신님이 저를 사랑하게 될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나운석이 단호히 말했다. 표정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진지함이 가득했다.하연이 다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나운석이 오히려 한 발 앞서 말했다. “전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안심해요! 제가 여신님을 좋아해도 절대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여신님이 저 때문에 아무런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할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앞으로 더 오래갈 테니까요.” 나운석은 말을 마치고 얼굴에 큰 웃음을 띠며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신님
“지금 전화해 보겠습니다.” 비서가 휴대폰을 꺼내자 호현욱이 제지했다. “됐어. 좀 더 기다리자고.” 거의 한 시간쯤 지나서 서준과 비서인 구동후가 천천히 들어왔다. “한 대표님! 전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호현욱은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적극적으로 맞이했다. 서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조금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호 이사님, 오래 기다리셨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근데 임 대표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으니 얘기나 좀 나누면서 기다리죠.” 말하면서 호현욱은 직접 서준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한 대표님, 앉으세요!” 서준은 긴 다리 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한 대표님, 오늘 이렇게 약속에 나와주셔서 저 호현욱에게 큰 영광입니다.” “호 이사님!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셨는데, 용건을 바로 말하시지요.” 옆에서 구동후가 직접 말했다. 호현욱은 멋쩍은 듯 웃었다. “한 대표님은 정말 혜안이 있으시군요. 오늘 제가 대표님을 뵙자고 한 것은 확실히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서준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음, 호 이사님은 DS그룹의 이사이시니, 이치대로라면 HT그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신데, 말씀하실 부탁이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호현욱는 숨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대표님도 알시다시피 저희 DS그룹의 새로 부임한 대표가 최하연, 바로 대표님의 전 아내입니다.” 하연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 서준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손가락으로 리듬감 있게 탁자를 두드렸다. 그는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호현욱의 의도를 대충 짐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호현욱의 말을 들었다. “최 대표가 정말 대단하게도 부임하자마자 그룹의 실적을 30% 올리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저는 그녀가 젊은 나이에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의 쓴 맛을 보여줘 기억에 오래 남겨주고 싶습니다.” “그래서요?” 서준은 눈을
하연의 입가에 헛웃음이 일었다. “보아하니 호 이사님은 그다지 저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연은 말을 이렇게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룸 안으로 들어섰다. 하연에게 현장을 들킬 줄을 예상 못한 호현욱은 갑자기 약점을 잡힌 듯 어색한 모습을 했다. 하지만 호현욱도 나이를 그냥 먹은 것은 아니었는지, 잠시 후 평소와 같은 상태로 회복되었다. “최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 신 건가요?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과 함께 호현욱은 일어나 하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하연은 기세 좋게 앉았고, 눈을 드는 순간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잠시 서로의 눈빛이 교차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한데 뒤엉켰다. “공교롭게도 한 대표도 있었네!” 하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두 분을 방해했나 봅니다.” “방해랄 것 까지야. 공교롭게 최 대표 얘기가 나온 거뿐이야. 전에 HT그룹에서 일했었는데, 그 뒤로 DS그룹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고? 호 이사님이 지금 나에게 최 대표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칭찬하고 있었어. 이사회에서 1년 안에 30% 실적 향상을 하겠다고 했다지? 최 대표, 맞아? ” “저도 그냥 한 말이니, 대표님께서도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호 이사는 서준과 하연의 사이가 물과 불 같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보물을 잘못 건드린 것처럼 실수한 것 같았다. 방금 하연은 서준과 호현욱의 대화를 입구에서 똑똑히 들었는데, 호현욱은 책장 넘기는 것보다 더 빨리 표정을 바꾸며 시치미를 뗐다. 하연은 호현욱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서준과 약속을 했을 줄은 몰랐다. ‘서준 씨가 호 이사와 손을 잡고 나를 상대하려고 하는 걸까?’ 하연은 생각이 많았지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응, 그런 일이 있었어. 거기다 난 호 이사님과 내기도 했지.”화제를 돌리며 하연의 시선이 호현욱에게 향했다. “호 이사님, 기왕 저희의 내기가 이렇게 밖으로 드러난 이상, 이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어쨌든 오늘 일은 제가 신세를 진 것이니 나중에 제가 임 대표님을 도울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성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 마디 타일렀다.“호현욱은 생각보다 교활한 사람이에요. 그동안 업계에서 일하면서 많은 인맥과 계략을 쌓아온 사람이라 상대하기 쉽진 않을 거예요. 최 사장님께서 앞으로 좀 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네,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성재는 하연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귓가의 잔머리를 발견한 성재는 손을 내밀어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려고 했다.“임 대표님!”서준의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성재의 동작을 멈추게 만들었다. 성재는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내밀던 손을 거두고 하연에게 말했다.“잔머리가 불편해 보여서요.”“네?”하연은 그제야 눈치챘다. 서준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성큼성큼 걸어가 하연의 옆에 서서 성재의 시선을 막았다.“임 대표님께서 곧 약혼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미리 이 자리에서 약혼을 축하드리도록 하죠.”약혼은 성재의 가족들이 정한 것인데 성재는 줄곧 동의한 적도 외계에 입장을 밝힌 적도 없었다. 그런데 서준이가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니.“아직 제대로 결정 난 일은 아니니 축하를 받긴 너무 이른 것 같네요.”성재는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하연을 힐끗 보더니 계속 말했다.“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한 대표님을 제 결혼식에 초대하도록 하죠.”서준은 그의 말 뜻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재가 하연을 좋아한다는 것을.서준은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연은 줄곧 서준을 무시하였다. 그가 하연을 따라 나왔는데도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최 사장님,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죠.”성재는 화가 잔뜩 난 서준의 눈빛을 무시한 채 몸을 돌려 하연에게 말했다.“괜찮아요, 저도 차를 가지고 왔어요.”“그럼 제가 주차장까지 바래다 드리죠.
이와 동시에 SG호텔의 룸에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호현욱은 화가 나다 못해 룸에 있는 모든 물건을 깡그리 깨뜨렸다.“최하연, 네년이 감히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해?”호현욱이 앞에 있는 의자를 세게 걷어차자 의자는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호현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디.‘이 일은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 내가 이쯤에서 그만둔다면 앞으로 평생 최하연 그년한테 지게 될 거야.’호현욱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최하연 그년을 DS 그룹에서 내쫓아!”호현욱이 전화를 끊고 떠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룸의 문을 두드려왔다.“누구시죠?”호현욱이 경계심을 가지며 묻자 상대는 밖에서 문을 열었다.“호현욱 씨, 저희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호현욱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그쪽 회장님이 누구죠?”“민진현 회장님입니다.”이 이름은 별로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민진현과 전혀 모르는 사이다.“민 회장님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거죠?”“가보시면 아실 겁니다.”호현욱은 잠시 고민하더니 상대를 따라가보기로 했다....밤 11시.SOLO 스탠드바 안은 매우 떠들썩했다. 귀를 찌르는 듯한 음악 소리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시켰다.서준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구석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술잔을 들고 계속해서 술을 마시기만 했다.“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안태현은 다가와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서준은 시종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태현은 서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혹시 전처와 관계있는 일이야?”이 말을 들은 서준은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역시 그 여자 때문일 줄 알았어!”“그 여자 얘기하지 마.”이건 오늘 밤 서준이가 꺼낸 첫 마디다. 태현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계속 물었다.“설마 전처 때문에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거야?”“꺼져!”서준은 화를 내며 말했다. 이에 태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준은 태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익숙한 실루엣을 보게 되었다. 붉은색의 치마를 입은 여자는 바로 최하연이다.‘최하연은 임성준이랑 함께 갔었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어?’하연의 춤사위는 아주 매혹적이었다.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스탠드바에서 가장 주목을 받게 되었다.하연의 웃는 얼굴은 자신감이 넘쳤는데 그녀의 이런 모습은 서준을 설레게 만들었다.서준은 하연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하연이가 이렇게 예쁘게 웃는 건 처음 보네.’서준은 마음이 복잡하여 단숨에 잔속에 남은 술을 다 마셨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잔을 내려놓고 하연을 향해 걸어갔다.“대박! 하연아, 너 정말 너무 예뻐!”정예나는 하연을 향해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역시 오늘 밤에 널 불렀어야 했어. 이 분위기를 타고 제대로 즐겨보자!”하연은 음악소리에 취해 기쁜 마음을 주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예나와 건배를 했다.“마셔!”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웃은 뒤 술잔을 비웠다. 그 술은 하연이가 매우 좋아하던 술이기에 하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원샷을 했다.“예나야,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하연은 컵을 내려놓고 화장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서기도 전에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서준을 보았다.하연은 방금까지 웃던 표정을 감춘 뒤 뒤돌아서서 도망치려고 했다.그녀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서준은 재빨리 하연을 불렀다.“최하연, 거기 멈춰!”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은 뒤 더 빨리 도망쳤다. 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달려가 하연을 화장실 모퉁이에 막았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하연은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서준은 한사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두 시간 전 하연이가 자신을 오해한 것을 떠올리자 서준은 화가 치밀어올라 술기운을 빌어 입을 열었다.“최하연, 나와 호현욱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내가 정말 그딴 놈과 손 잡을 리가 있겠어?”하연은 그의 말을 듣지
한편 한서영은 SOLO 바탠드바 입구에 서서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서영의 곁에 있던 예쁜 여자가 재빨리 물었다.“서영아, 네 오빠가 정말 이곳에 있는 게 확실해?”서영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새언니는 나만 믿어. 우리 오빠는 분명 이 바탠드바 안에 있을 거야.”서영의 옆에 있던 여자는 민혜경이다. 민씨 가문은 혜경을 완전히 포기했기에 민진현은 직접 그녀를 구치소에 보냈다. 최씨 가문이 확실한 증거를 제출한 다음 공개적으로 심사가 가다 오기 전에 혜경은 자신이 임산부라는 것을 핑계로 몸이 아프다며 보석을 받았다.혜경은 서준에게 전화를 걸고 메시지도 보냈지만 서준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고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왔다.서영한테서 서준이가 SOLO 스탠드바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새언니, 우리 들어가자.”서영은 혜경을 데리고 스탠드바 안으로 들어갔다. 혜경은 떠들썩한 분위기와 활기찬 노래들을 듣자 모처럼 활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딘가를 보더니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새언니, 왜 그래?”서영은 호기심에 혜경의 시선을 따라 살펴보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연과 서준을 한눈에 보았다.“저 여자는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이미 이혼했으면서 왜 자꾸 우리 오빠한테 들러붙는 건데!”서영은 화가 난 마음에 앞으로 나가 따지려고 했지만 혜경이 그녀를 막았다.혜경은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서준이가 뺨을 맞고 오히려 웃는 상황을 보았다.혜경은 두 손을 주먹 쥔 채 하연이가 떠나는 것을 보고 곧장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하연은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자리로 돌아간 후 가방을 들고 예나한테 말했다.“재밌게 놀다 가, 난 먼저 가봐야겠어.”예나와 친구들이 밤새 놀 생각으로 바에 온 것이기에 떠나려는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래. 밤 길 조심하고!”하연이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혜경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혜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불길한 예감이 부동건의 마음 한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는 조진숙을 매섭게 응시하며, 진실을 쫓아가려 했다.“빚은 갚아야 하고, 사람을 죽였으면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야지. 이번엔, 저승사자라도 그 애를 못 구해.”조진숙은 단도직입적으로 진실을 꺼내놓았다.“당신이 그 귀하디귀한 막내아들이, 고경수 딸을 죽였어. 그 교통사고, 전부 부남준이 계획한 일이야.”“지금은 모든 증거가 경찰 손에 들어갔고, 고경수 집안도 전부 알아버렸어. 딸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만히 있겠어? 반드시 그 애한테서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겠지.”부동건의 몸이 비틀거렸다.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충격이 가득했다.“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남준에 대한 부동건의 인식은 그저 ‘야망이 좀 있는 아들’일 뿐이었다. 부동건이 동남아시아 사업권을 남준에게 통째로 넘겨준 것도, 송혜선과 남준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해주려 했던 것도, 다 막내아들을 위해서였다. ‘내가 뭘 놓친 거지? 어떻게 그런 짓을...?’“그뿐만이 아냐. 약혼식 당일에 하연이를 납치했다는 사실도 몰랐지? 상혁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으면, 최씨 가문의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망신당했을지 그건 알고 있어?”조진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동건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건... 너무 심각해.’ 그 어떤 상황도 예측하지 못했던 부동건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미친 자식...!”부동건은 책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흔들리는 가슴과 거칠어진 숨결은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하지만 조진숙은 그런 전남편을 보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형사사건이야. 증거도 확실하고, 죄도 여러 개. 법대로라면,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당신의 막내아들 부남준이가 어떤 판결을 받게 될지...”부동건은 몇 걸음 뒷걸음치더니,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엔 절망과 피로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