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유진우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폐하께서는 여러 여자를 곁에 두는 게 당연할지 몰라도 저는 일부일처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애정 없는 결혼은 죽음과 다름없는데 저를 포함한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이 말이 나오자 이청성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사뭇 달라진 눈빛으로 유진우를 바라보았다.연경 전체를 놓고 봐도 권력 있는 남자들은 대부분 곁에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있다.나머지 소수는 여자의 집안이 너무 대단해서 감히 대놓고 행동하지 못하거나 몸이 따라가지 못해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였다.유장혁처럼 충분히 잘났으면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남자는 매우 드물었다.“장혁, 청성이 싫은 거냐? 아니면 얘가 너에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거야?”이성민이 떠보듯 물었다. 그의 딸 이청성은 외모나 재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최고의 여자였다.당장 근처에만 해도 따라다니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얼마나 많은 잘난 청년들이 어떻게든 절세미인에게 다가가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지 모른다.유장혁 같은 정상적인 남자가 이렇듯 좋은 일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이청성 씨는 재능도 있고 아름다워서 그에 비해 오히려 제가 부족합니다. 더군다나 제 마음엔 이미 자리 잡은 이가 있으니 또 다른 사람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유진우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자네가 이렇게까지 일편단심일 줄은 몰랐어. 그래, 억지로 강요해봤자 소용없지. 결혼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이성민은 강요하지 않았다.음식도 천천히 음미해야 깊은 맛을 내고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나.아마도 유장혁은 아직 자기 딸의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해 거절하는 것이리라.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테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감사합니다, 폐하.”유진우가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했다.“장혁, 시간이 늦었으니 가서 쉬면서 후계자 문제를 생각해 봐. 난 자네 대답을 기다리지.”
유진우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그럼 형제들 중에 누가 이 나라의 왕이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저를 떠보는 건가요?”이청성은 부드럽게 웃었다.“이것은 아바마마께서 당신에게 준 문제이니 당연히 본인 스스로 답해야죠. 저는 도와줄 방법이 없고 도와줘서도 안 돼요.”“천제감 제자답지 못하네요.”유진우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저었다.황태자 자리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걸린 문제인데 그 부담이 자신에게 떨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무엇보다 그가 누구를 선택하든 놀라운 권력을 거머쥔 다른 여러 황자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었다.그러면 성가신 문제들이 생긴다.“서두를 필요 없어요. 아바마마께서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니 어떤 황자가 더 잠재력이 있는지, 서경왕부의 뜻에 더 부합하는지 지켜볼 수 있지 않나요?”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음... 골치 아프네요.” 유진우는 머리가 아팠다.“아, 한 가지 더 있어요.”그때 유진우가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물었다.“왜 하루 종일 베일을 쓰고 다녀요? 경국지색인데 남들에게 보여줘서는 안 되는 거라도 있나요?”“얼굴로 성가신 일이 많아서 가리는 게 좋아요. 물론 보고 싶으면 잠깐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쪽이 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네요.”이청성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허허...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그쪽 얼굴 한번 못 본다고요? 웃기는 소리!”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정말 보고 싶어요?” 이청성이 다시 물었다.“물론이죠! 설마 머리 세 개 달린 메두사라도 되겠어요?”유진우는 고개를 기울였다.“좋아요, 그러면 그쪽이 직접 베일을 벗겨서 진짜 얼굴을 봐요.”이청성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본인 손으로 베일을 들어 올리고 내 얼굴을 보는 사람이 누구든 그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어요.”“네?”그 말에 방금 내밀었던 유진우의 손이 놀란 듯 금세 움츠러들었다.“됐어요, 안 볼래요.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요.”“한심하네요.” 이청성은 웃음을
“나리, 대황자님께선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유진우는 모르는 척했다.“황자님께서는 세자 전하께서 연경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담소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밤 달빛이 아름다워 술 한잔을 하기에 딱 좋다고 하시네요.” 전현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나리, 다음에 뵙는 게 어떨까요?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네요. 다음에 제가 꼭 찾아뵙겠습니다.” 유진우가 두 손을 맞댄 채 공손하게 말했다.거짓말이 아니었다.오늘 그는 몇 차례 큰 전투를 치렀고 심각한 부상은 회복되지 않았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서 푹 쉬고 싶었다.그런데 이청성이 먼저 찾아오더니 곧이어 이성민이 그를 소환했고 이젠 대황자까지 사람을 보냈다.숨 돌릴 틈을 전혀 주지 않았다.“세자 전하, 주인님께서 이미 술과 음식을 준비해서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세자 전하께서 피곤하시면 주인님과 먼저 만나고 저택에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전현진은 시종일관 미소를 지었다.유진우는 힘없는 얼굴로 상대방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라며 이청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대황자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술과 음식까지 다 준비했는데 얼굴은 비춰야죠. 타요. 내가 같이 가줄게요.”“감사합니다, 공주님, 세자 전하. 두 분 얼른 가시죠.”전현진은 곧바로 허리를 굽히며 안내했다.“그쪽 때문에 못 살겠네요.”유진우는 이청성을 노려보며 힘없이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지금 이 기세를 보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거절하면 대황자의 심기를 건드려 불필요한 문제를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그도 성가신 게 제일 싫었다.“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어요? 오늘 밤 대황자를 만나고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이청성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그럴지도 모르죠.”유진우는 대꾸할 힘도 없어서 마차에 등을 기댄 채 흐릿한 정신으로 무거워지는 눈꺼풀과 싸우고 있었다.감히 정말로 잠들 엄
“오라버니...”그 순간 이청성과 유진우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두 사람을 본 이문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청성아, 오랜만이야.”곧 그의 시선이 유진우에게로 향했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이쪽이 장혁인가? 10년 만에 보니 몰라보게 달라졌네. 못 알아볼 뻔했어.”“소인 대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유진우는 고개를 숙여 경례했다.“형제끼리 그렇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잖아.”이문재는 곧바로 손을 뻗어 유진우의 굽힌 상체를 들어 올렸다.“자자, 두 사람 다 앉아. 격식 차리지 말고 내 집이라고 생각해.”“감사합니다. 전하.”“고마워요. 오라버니.”유진우와 이청성은 감사의 인사를 하고 차례로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장혁, 늦은 밤에 초대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길 바라.” 이문재가 먼저 나서서 상대를 배려하며 사과를 건넸다.“전하, 천만에요.”유진우가 싱긋 웃었다.“전하의 저택에 손님으로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이문재는 입을 벙긋하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옆에 있던 이청성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청성아, 최근에 내 저택에 귀한 보석이 새로 도착했으니 가서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도록 해.”이청성은 유진우를 힐끗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성의를 봐서 나도 마다하지 않을게요.”상대방이 일부러 자신을 내보낸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거절할 수 없었다.“전현진, 공주를 보물창고로 데려가게.” 이문재가 손짓했다.“공주마마, 따라오십시오.”전현진은 허리를 굽히며 이청성을 데리고 재빨리 대청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이 나간 뒤 이문재는 유진우에게 차 한 잔을 따라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장혁, 사실 내가 늦은 밤에 자네를 부른 것은 내 마음속 의혹에 대해 자네가 대답해 주길 바라서야.”“전하, 말씀하세요.” 유진우가 태연하게 말했다.“듣기론 방금 아바마마를 뵈었다고? 아바마마께선 무슨 말씀 없으셨나?”이문재가 떠보듯 물었다.
황옥주는 무림의 3대 성물 중 하나로 천영 구슬과 함께 수많은 사람이 탐내는 가장 귀한 보물이었다.황옥주는 신비한 힘을 지녀 다양하게 쓰였다.모든 환상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포메이션도 부술 수 있다.예를 들어 실수로 환영에 들어갔거나 포메이션에 갇혔을 때 황옥주로 즉시 빈틈을 찾아낼 수 있다.그뿐만 아니라 황옥주는 상대와의 대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적의 약점이나 필살기 등 모든 공격 수단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심지어 보물을 찾고 감정하는 것에도 독특한 기능이 있었는데 보물이 맞는지, 그 가치는 얼마인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황옥주를 한눈에 알아본 유진우는 황태자 저택에 이런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역시 장혁이야. 눈썰미가 좋네.”이문재가 웃으며 말했다.“이건 황옥주가 맞아. 내가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 자네와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되었으니 선물로 이걸 주지.”“절대 안 됩니다!”유진우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이렇게 귀한 물건은 제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부디 거두어 주세요.”“보물은 영웅에게 줘야 그 쓸모를 다하지. 내 손에 있으면 먼지만 쌓이고 전혀 쓸모가 없어. 너에게 줘야 진정한 힘을 발휘할 거야. 예의 차리지 말고 받아.”이문재가 보물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전하,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보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유진우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내가 너보다 몇 살이나 더 먹었고 항상 너를 동생처럼 대했는데, 형이 동생에게 선물을 주는 게 뭐 어때서?”이문재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직접 보물 상자를 유진우의 품에 밀어 넣고는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받아, 또 거절하면 화낼 거야.”“이건...” 유진우는 딜레마에 빠진 표정이었다.“장혁, 이 황옥주가 많은 도움을 줄 거야.”이문재가 문득 비밀스럽게 말했다.“용맥이 파괴되어 용원의 기가 다섯 갈래로 천지에 흩어져 있는데 그걸 다 찾는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해서 고생하며 돌아다니는 건 더더욱 견디지 못해. 게다가 나는 문인인데 수행에 필요한 용원의 기를 찾아서 뭐 하겠어. 망설이지 말고 받아. 너는 장차 서경왕이 되어 나라의 기둥이 될 몸이야. 네가 강해져야 나라도 번창하지. 내게 왕위를 물려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훗날 너와 함께 천하를 다스리며 영광을 누리겠다.”미소를 지으며 유진우의 어깨를 토닥이던 이문재의 마지막 한마디에 담긴 의미는 매우 분명했다.자기가 건넨 선물을 받았으니 왕좌에 오르는 걸 도우라는 거다.“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인 감사히 받겠습니다.”이렇게까지 말하니 유진우도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용원의 기를 찾는 데 황옥주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용원의 기로 내공을 빠르게 끌어올릴 수 있고 심지어 단번에 랜드 신선의 경지에 발을 들일 수도 있었다.무사에게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인 유혹이었다.양심에 어긋나더라도 그는 이 선물을 받아들여야만 했다.두 사람은 대청 안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동맹을 맺은 거나 다름없었다.이청성이 보물을 다 고르고 다시 문 안으로 들어온 뒤에야 유진우는 자리를 떠났다.너무 졸려서 인사를 나눌 겨를이 없었고 지금 당장 집에 가서 푹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이문재의 저택을 나섰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새벽 1시였다.유진우는 너무 졸려서 눈도 뜨지 못하고 하품을 연발했다.차에 타자 이청성은 유진우의 품에 안긴 보물 상자를 흘깃 쳐다보며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보아하니 이미 오라버니와 거래를 달성했나 보네요?”“어쩔 수 없죠. 너무 큰 걸 줘서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천재도 재물에 넘어갈 때가 있네요.”이청성의 말투는 다소 장난스러웠다.“큰 오라버니를 왕위에 올리기로 약속하면 다른 황자들이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길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당연히 알죠. 그래서 비밀리에만 도우면서 대놓고 편드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너
“무슨 일이죠?”유진우는 멍한 상태에서 코끝으로 은은한 향기를 느꼈다.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이청성의 품에 안겨 있었다.이청성은 헐렁한 옷을 걸쳐 언뜻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직접 닿고 보니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분명한 몸이 숨겨져 있었다.“지금 뭐 해요?”이청성은 부끄럽고 화가 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마차가 멈추니까 몸을 가누지 못해서 그만...” 유진우는 조금 당황했다.“충분히 만졌죠? 빨리 손 치워요!” 이청성이 새침하게 말했다.“미안해요.”유진우는 화들짝 놀라서 바로 손을 뗐다.역시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반응이 평소보다 느려진다.“밖에 무슨 일이죠?” 이청성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마마, 누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마부가 대답했다.“한밤중에 길을 막다니, 자객인가요?”이청성이 마차의 커튼을 걷어 올리고 먼저 발을 내디뎠다.유진우는 얼굴을 툭툭 치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 뒤따라 마차에서 내렸다.이때 앞쪽 교차로에서 중무장한 호위병들이 나타났다.은빛 갑옷을 입은 호위대는 날카로운 눈빛과 강력한 아우라를 풍기는 게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이 분명했다.“은갑병? 저 사람들이 왜 여기에...”이청성은 의아했다.“은갑병? 무슨 사람들이죠?”유진우가 호기심에 물었다.“제 둘째 오라버니인 이광우의 호위병이에요.”이청성이 설명했다.“둘째 오라버니는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익혔고 용맹하고 사나워서 전장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죠. 그래서 자신의 밑으로 유명한 호위병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어요.”“이황자의 사람이라고요?”유진우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전 이황자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왜 군사들을 보내 저를 잡으러 온 거죠?”“잡는 게 아니라 모시러 왔겠죠.”이청성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고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눈앞에 은갑병 중 건장한 장군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장군은 유진우와 이청성에게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무사 윤조, 공주마마와 세자
“제가 돌아가야 한다면요?” 유진우의 얼굴이 차가워졌다.“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이니 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말아 주십시오.”윤조는 꼿꼿하게 선 채 조금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의 뒤에는 수백 명의 은갑병이 비장하게 서 있었다.기세를 봐서 유진우가 제 발로 가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 갈 기세였다.“세자 전하,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죠. 친구 한 명 더 사귀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이청성이 유진우를 툭 건드리며 귀띔했다.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기에 졸리고 피곤해도 참고 견뎌야 했다.대황자의 거처에 갔으면서 이황자에게 가지 않으면 그의 체면을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이황자의 강압적인 성격을 봐선 아무런 패악질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그래요. 그럼 윤 장군이 길을 안내하세요.”유진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더 반기를 들지 않았다.통쾌하게 거절하는 건 한순간이지만 이후에 끊이지 않는 문제가 생길 거다.“감사합니다, 세자 전하! 가시죠.”윤조는 비켜서서 정중하게 유진우와 이청성을 차로 에스코트했다.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차는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 입구에 멈췄다.대황자 저택의 화려함에 비하면 이황자 저택은 훨씬 더 위엄이 있었다.전쟁의 신 동상, 무술 경기장, 무기가 전시된 무기고까지 있었다.유진우 일행은 차에서 내려 윤조를 따라 들어갔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군사들이 끊임없이 늘어져 있어서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많은 장벽을 통과한 후 두 사람은 마침내 대청에 도착했다.그 시각 대청 안에서는 갑옷을 입은 여러 장군이 한 젊은 남자와 군사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에게서 왕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이황자 이광우였다!이광우는 유진우와 이청성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대화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어서 와요. 환영합니다. 우리 장혁 군과 청성이가 이렇게 와줘서 너무 기쁘네요.”“이황자님을 뵙습니다.”이청성이 허리를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
“맞아, 천우는 정말 훌륭한 아이지.”“흑용군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녔고 내 젊은 시절보다도 강해. 군사적 능력도 아주 뛰어나고.”“장수들이 늘 천우의 공적을 보고하곤 했어. 그 녀석의 성장을 지켜봐 왔고 이런 아들을 둔 게 난 자랑스러워.” 유만수가 흐뭇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쁨이 스며들었다.왕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아들을 이토록 신경 쓰고 있었다니.“의진아, 천우는 뛰어난 아이임이 분명해. 훌륭한 장군이 되어 서경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겠지. 하지만 서경왕은... 아직은 될 수 없어.” 유만수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자 이의진은 당황하며 의아해했다.“시간이 있었다면 천우를 왕으로 키웠겠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어.” 유만수가 고개를 저었다.“어르신...” 이의진이 말을 꺼내다 멈췄다.결과를 짐작했으나 입 밖으로 내기가 두려웠다.“장혁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유만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품이든, 무력이든, 책략이든, 군사적 재능이든, 장혁이가 최적임자야. 나보다도 더 적합하지.”“제가 알기로는 장혁이는 무림 세계를 좋아하고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요...” 이의진이 조심스레 말했다.“그렇지. 하지만 좋아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야. 그게 책임이지.”유만수가 엄숙하게 말했다. “대의를 위해, 서경 백성을 위해, 천하를 위해 그 녀석이 이 짐을 져주리라 믿어.”“어르신께서는 왜 장혁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시나요?”“물론 강요하진 않을 거야. 천우에게도 마찬가지고. 둘 다 내 아들이니 공정하게 경쟁하게 할 테지만 장혁이가 최선의 선택임을 네가 알았으면 해.” 유만수가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알겠어요.” 이의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기 싫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유장혁이 유천우보다 뛰어나고 서경왕에 더 적합했다.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어머니로서 아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그래서 이 왕위는 자신을 위
홍복홍이 대답하고 빠르게 떠났다. 도살자인 그는 서경이 태평해진 뒤로 오랫동안 살육을 하지 않았으나 오늘 안송진의 소행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서게 되었다. 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안씨 가문 전체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창명은 죽음으로 죄를 갚았으니 서민으로 강등하여 매장을 허락하라. 소씨 가문의 죄인들은 법대로 처리하되 무고한 이들은 살려주어라.” 유만수가 다시 명했다.석태혁이 소창명의 시신을 들고 떠나자 곧 대청에는 유만수와 이의진 둘만 남았다.“콜록콜록...”사람들이 떠나자 유만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순간, 그의 온몸이 휘청거렸다.“어르신! 괜찮으세요?”이의진이 놀라 급히 앞으로 나와 그를 부축했다.“괜찮아, 다 고질 병이야.”유만수는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으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피를 토하시다니... 당장 의원을 부를게요!”이의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하지만 떠나려는 그녀를 유만수가 붙잡았다. “놀랄 것 없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알아. 의원을 불러봤자 약이나 더 먹을 뿐, 소용없어.”“어르신...”이의진이 더 말하려 했으나 유만수가 끊었다. “됐다, 걱정 마. 당장 죽진 않을 테니 앉아서 나랑 얘기나 해.”이의진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의진아, 이 세월 너를 고생시켰구나. 연경에서 편히 살 수 있었는데 나를 따라 이 땅에 와서 매일 고생하니, 내가 참 미안해.”유만수가 부드럽게 말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은 세상의 영웅이시니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요.”이의진이 유만수의 손을 잡았다.“영웅은 무슨, 보시다시피 이제 늙은이일 뿐이지.”유만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아무리 변하셔도 제 마음속엔 여전히 비할 데 없는 분이세요!” 이의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유만수를 우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부탁해 혼인을 성사시켰다. 당시 유만수에게는 진소연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
이제 안송진은 이성을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유만수를 도와 서경을 질서정연하게 다스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서경의 오늘날 발전은 자신의 공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그저 직위를 이용해 재미를 좀 봤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권세가 있으면 마음껏 누려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면 관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게다가 천한 백성 몇 명의 목숨이 순무직인 자신과 비교가 되나? 예로부터 권세가들 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나?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고 오히려 유만수가 어리석다고만 생각했다.“안송진,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는가?”유만수가 고개를 저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 자식의 흉행을 눈감아주고 백성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겼으며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자네 행동이 예전의 살인강도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저도 공을 세웠습니다! 서경의 이 번영을 이룩한 것도 저고, 모든 백성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도 접니다. 하찮은 목숨 몇 개쯤 없앤 게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안송진이 분노에 차 외쳤다.“안송진, 자네 공은 인정하네. 하지만 공이 과를 덮지는 못하지. 지네가 세운 공적이 악행을 저지를 구실이 될 순 없고 목숨을 보장받을 방패도 될 수 없어!”유만수가 호통쳤다. “우리가 관직에 있는 건 백성을 위해서지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만약 모든 이가 자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서경은 조만간 멸망할 거야!”“안 대인,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대인께서 법을 크게 어기셨으니 순순히 죄를 인정하세요!”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안송진이 붉은 눈으로 계속 고함쳤다. 죽음 앞에서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인정하지 않아도 소용없어. 이제 증거가 명백하니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없을 거야.”유만수가 말하며 홍복홍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서경의 율법에 따르면 안송진의 죄
소창명과 안송진이 침묵했다. 두 사람은 죄책감에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권력과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있었다. 큰 권력을 쥐고 세상을 좌지우지할 때 그들은 본래의 뜻을 잊고 자신들이 한때 가장 혐오했던 모습으로 타락해버렸다.후회하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어떤 일은 한번 잘못되면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니까.“소창명, 안송진, 이런 큰 죄를 지은 자네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유만수가 문득 물었다.“소인은 죄가 깊음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죽음으로 죄를 갚겠습니다. 다만 어르신께서 소씨 가문만은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소창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무고한 이들은 추궁하지 않겠다. 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자는 죽어 마땅해.” 유만수가 등을 돌렸다.“어르신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소창명은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엎드려 공손히 세 번 절을 했다. “어르신을 모시게 된 것은 평생의 영광이었습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떳떳하게 살겠습니다!”“어르신께서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소인은 이제 속죄하러 가겠습니다!”말이 끝나자마자 소창명은 친위병의 칼을 빼앗아 자신의 목을 그었다. 순식간에 대청에 피가 튀었고 소창명은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뒤로 쓰러졌다.“소 대인!”소창명이 이렇게 과감할 줄은 몰랐던 안송진은 깜짝 놀랐다. 자결을 말하자마자 실행에 옮기다니,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고 전장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당연히 죽음을 각오할 수 없었다. 소창명처럼 한마디에 자결하는 건 그로서는 정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배짱이 없었으니까.“꽤 체면 있게 갔군.”유만수는 한숨을 쉬며 복잡한 심정을 드러냈다. 옛 부하들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 또 한 명이 가니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안송진, 이제 자네 차례야.”유만수의 시선이 온몸을 떨고 있는 안송진에게로 향했다.“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안송진은 겁에 질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은
‘참수형에 처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안송진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이 순간에야 그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보통의 죄라면 기껏해야 연봉을 깎거나 꾸지람을 듣는 정도였을 것이고 조금 더 심해봐야 강등이나 권한 축소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도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순무직인 그를 어찌 이리 쉽게 처형한단 말인가?“어르신! 어르신, 억울하옵니다!”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안송진은 당황한 나머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비록 제가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까지 바쳐야 할 만큼 큰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관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흥!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 아닌가?” 유만수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어르신! 소인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안송진이 울상을 지었다.“이 여러 해 동안 자네가 저지른 추잡한 짓들, 설마 잊진 않았겠지?”유만수가 따져 물었다.“소인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송진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좋다! 그럼 알려주지!”유만수는 책상 위에서 편지 뭉치를 집어 들어 다시 안송진의 발치에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밀사들을 통해 수집한 증거야. 자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자네 가문이 도대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안송진이 편지들을 주워 읽어보더니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는 죄목이 하나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유만수가 이렇게나 많은 증거를 모아놓았던 것이다.이 확실한 증거들을 보며 안송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르신! 소인이 어리석었습니다! 소인이 죽어 마땅합니다! 하오나 소인이 수년간 어르신을 충심으로 모셨던 정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안송진은 이제 더 이상의 고집 없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은덕을 베풀어 주소서!”소창명 역시 지지 않고 머
중앙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안송진은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서경왕 유만수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서 있었고 그의 표정은 매우 불쾌해 보였다. 왕비는 한쪽에 서서 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인도살자 홍복홍은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친위대장 석태혁은 더욱 심각했는데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언제든 검을 뽑을 태세였다.물론 가장 놀라운 것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소창명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는데 큰 재앙이 닥친 듯한 모습이었다.“왕께 인사를 올립니다!”잠시 멈칫한 후, 안송진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보통 때라면 유만수가 일어나라고 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안 가주, 내가 왜 한밤중에 자네를 불렀는지 아는가?”유만수는 똑같은 말로 운을 뗐다.“모르옵니다. 어르신께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안송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모른다면 직접 보게!” 유만수는 더 말하지 않고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골라 안송진의 발치에 던졌다.안송진이 자세히 보더니 순간 안색이 변했다.“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안송진은 편지를 들고 바로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마치 큰 억울함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어르신, 이 고발장은 절대 위조된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가 고의로 저를 모함한 것입니다! 부디 자세히 살피시옵소서!”이 말을 들은 옆에서 무릎 꿇고 있던 소창명의 눈가가 씰룩거렸다.‘이봐, 그 수법은 내가 이미 써봤는데 전혀 통하지 않아. 차라리 다른 말을 해보지 그래.’“위조라고? 모함이라고?”유만수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보아하니 자네도 소창명과 마찬가지로 관 뚜껑이 닫혀야 정신을 차리겠군.”“어르신! 제 자식이 비록 쓸모없긴 하지만 절대로 이런 죄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며 더군다나 무슨 영웅회 같은 패거리를 만들 리도 없습니다.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안송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