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진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봉연주가 눈앞의 유진우를 싫어한다는 건 확실했다.“우리 남궁 가문이 언제부터 개나 소나 다 들였어? 이 녀석은 또 뭐야?”“오빠, 진우 오빠는 내 친구예요.”남궁은설이 다급하게 설명했다.“친구?”남궁진혁은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은설아, 네 신분이라면 아무나 네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보험이나 파는 사회의 저소득층 인물이라면 그들의 시중을 들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은설 씨 사촌 오빠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유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무엄하다!”남궁유나가 두 눈을 부릅뜨고 욕설을 퍼부었다.“네까짓 게 뭔데 함부로 입을 놀려? 감히 우리 오빠를 모욕해? 확 거저!”그러더니 채찍을 들고 다짜고짜 때리려 했다. 그 모습에 남궁진혁이 말리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유진우라고 했지? 당신을 건드린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날 모함하는 거지?”“모함?”유진우가 코웃음을 쳤다.“당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 거 아니야.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수작질 부렸고. 그래서 은설 씨가 말에서 떨어졌잖아. 정말 아무도 못 봤을 줄 알았어?”“지...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남궁진혁의 표정이 확 굳어졌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추태를 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내 마음을 진정했다. 표정 관리가 어찌나 빠른지 옆 사람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당신이 잘 알 거야. 고작 말 한 마리 때문에 자기 사촌 여동생까지 다치게 해? 양심을 개한테나 줘버렸어?”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남궁진혁이 버럭 화를 냈다.“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가만 안 둬!”“빌어먹을 놈이! 명령하는데 지금 당장 우리 오빠한테 사과해. 안 하면 본때를 보여주는 수가 있어.”남궁유나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뭐야?”유진우가 들고 있는 검은 침을 본 순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금 전 말의 머리에서 침이 튀어나오는 걸 똑똑히 보았고 게다가 피까지 묻어있었다. 누군가 손을 쓴 게 확실했다.“말도 안 돼. 저 자식의 말이 다 사실이었어?”경악도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남궁진혁에게 향했다. 그가 뭐라 설명할지 궁금했다.“증거가 떡하니 있는데도 발뺌할 거야?”유진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침이 남궁진혁의 발밑에 떨어졌다.“무슨 뜻이야? 지금 날 의심해?”남궁진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당당하게 말했다.“누구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은설이 해치는 일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계속 아닌 척해 봐.”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당신 여동생이 방금 당신이 추풍을 만졌다고 인정까지 했어.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내가 추풍을 만지긴 했지만 저 침이 내 거라는 증거는 없잖아.”남궁진혁이 조리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우리가 오기 전에 다른 사람이 미리 손을 썼을 수도 있지.”“맞아! 은설의 원수가 얼마나 많아. 자주 납치당하고 암살도 당할 뻔했잖아. 그러니까 누군가 말에 손을 쓴 것도 전혀 이상할 거 없지.”남궁유나가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어디 계속 변명해 봐.”유진우가 피식 웃었다.“은설이 넌 날 잘 알잖아. 내가 널 해칠 것 같아?”남궁진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진혁 오빠가 날 얼마나 예뻐하는데 절대 해칠 리가 없죠. 분명 오해일 거예요.”남궁은설이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나쁜 일이라곤 한 적 없는 착한 사촌 오빠이기에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들었어? 나랑 은설이 우애가 얼마나 깊은지 봤지? 당신이 뭔데 이간질이야?”남궁진혁이 싸늘하게 말했다.“은설 씨,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앞으로 아무나 믿지 말아요.”유진우가 귀띔했다. 침 하나로 남궁진혁의 죄를 단정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은설이 조금만 더 경계심을 가진다면 그걸로도
“너 이 녀석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남궁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달리 방법이 없는 척했다.“다들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다른 거 더 걸고 다시 시합하는 건 어때요? 이긴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요.”봉연주가 제안했다.“난 괜찮은데 은설이 다시 시합하겠는지 모르겠네요.”남궁유나는 거절하지 않고 도발 섞인 눈빛으로 남궁은설을 쳐다보았다.“은설이 방금 다쳤는데 어떻게 또 말을 타?”남궁진혁은 일부러 안타까운 척했다.“은설이가 안 되면 다른 사람 바꿔도 돼요. 쟤 친구가 저렇게나 많은데 아무나 다 상관없어요.”남궁유나는 고개를 들고 한 무리 사람들을 훑어보았다.“저기, 나랑 붙을 사람 있어? 한 게임당 20억, 지면 돈 내고 이기면 추풍이 데려가고, 어때?”그 말에 한솔과 유연지 일행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한 게임당 20억은 판이 너무 컸다.그들의 승마 기술이 남궁은설보다 부족한 건 둘째치고 가장 큰 문제는 추풍이 이미 다친 상태라 당분간은 뛸 수가 없다는 것이다.마장 전체에도 흑룡과 시합할 수 있는 명품 말이 더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누가 나가든 다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 격이고 승산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아무도 못 하겠어? 쓸모없는 것들.”남궁유나는 그들을 한껏 경멸했다. 사람들은 난감하면서 화가 났지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은설아, 난 이미 기회 줬어. 그런데 너희들이 실력이 안 되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어.”남궁유나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나랑 시합해!”참다못한 남궁은설이 이를 깨물고 일어섰다. 조금 전 꽤 심하게 넘어진 터라 걸음걸이마저 비틀거렸고 컨디션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은설 씨 다쳤으니까 내가 할게요.”유진우가 손을 내밀어 남궁은설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진우 오빠 승마도 할 줄 알아요?”남궁은설이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조금 알아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흥, 조금 아는 정도면 그냥 얌전히 있을 것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지금 미니말을 골랐어?”“미니말로 명품 말 흑룡이랑 경마하려고?”“세상에나! 저 자식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미친 건가?”유진우가 미니말을 데리고 나온 순간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미니말은 말 그대로 앙증맞고 귀여운 데다가 성격도 온순하여 어린아이거나 노인들이 주로 타는 말이었다. 네 다리가 짧아 키도 1m가 채 안 되기에 그저 오락으로 즐겼다.미니말과 달리 흑룡은 키가 족히 150cm 정도 되었고 네 다리가 길쭉길쭉할 뿐만 아니라 근육도 고르게 발달하여 질주하기 시작하면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어떤 면으로 보나 미니말보다 압도적으로 우세였다.나란히 서 있는 두 말을 보고 있자니 건장한 사내와 세 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아예 비교할 가치도 없었고 시합하기도 전에 승패는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이봐, 지금 개그 해? 미니말로 나랑 경마하겠다고?”남궁유나는 가차 없이 비웃었다. 바보를 본 적은 있지만 이토록 어리석은 자는 또 처음이었다.좋은 말이라고 해도 흑룡과 비교할 수 없는데 미니말은 오죽하겠는가?“하하... 말도 고를 줄 모르는 놈이 경마하겠다고?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어.”봉연주는 배꼽 빠져라 웃었다.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미니말을 고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고생을 사서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어이, 미쳤어? 애들이 타는 말을 왜 골라? 산책하게?”유연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난 또 얼마나 잘하나 했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구나. 그렇게도 주목받고 싶었어?”한솔은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다.“그냥 졌다고 하면 안 돼? 넌 창피하지 않을지 몰라도 우린 창피해 죽겠단 말이야.”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진우를 경멸했다.미니말과 명품 말이 뛴다면 그건 경기가 아니라 굴욕이었다.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혹시 관리인님이 미니말 선택하도록 일부러 부추긴 건 아니죠?”남궁은설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마구간에 좋은 순종 말이 얼마나
사람들의 시선이 삽시간에 이청아에게 쏠렸다. 새침하고 도도한 그녀는 마장에 들어온 순간부터 말을 아꼈다. 뭐든지 다 거절할 것만 같은 모습에 아무도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다.그런데 갑자기 나서서 유진우를 돕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청아 언니, 왜 저 자식을 돕는 건데요?”봉연주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새침하고 도도한 이청아의 이런 행동은 평소답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그냥 궁금해서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시합을 이기려는지.”이청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그 한마디는 생각도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고 무의식적으로 이 낯선 사람을 지키려 했다. 정말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대표님이 이렇게도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네요. 쟤는 참 운도 좋아요.”남궁진혁이 예의 바르게 웃었다.“이 대표님 체면을 봐서 질 기회를 줄게. 타!”남궁유나는 흑룡 등에 올라타 유진우를 아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았다. 20억을 가져다 바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재미도 있고.유진우는 의미심장하게 이청아를 쳐다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미니말에 올라탔다.두 말이 나란히 서 있을 때 유진우의 머리는 남궁유나의 어깨 정도까지 왔고 거의 머리 두 개 정도 차이가 났다.“흥, 저 자식이 진짜 탔네? 제 주제도 모르는 것!”“여자 돈으로 도박하다니, 어쩜 저렇게 뻔뻔해?”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수군거리며 유진우를 경멸했다. 질 게 뻔한 시합에 무리해서 나가는 건 굴욕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준비...”두 사람이 준비를 마친 후 심판을 맡은 남궁진혁이 큰소리로 외쳤다.“시작!”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룡은 바로 쏜살같이 질주하기 시작했는데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그런데 그와 달리 유진우는 아주 차분한 얼굴로 고삐를 잡고 미니말 등에 탄 채 유유자적하게 걸어갔다. 그 모습은 경마가 아니라 산책이었다.“저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그
“빨리 와... 쫓아와 봐! 빨리... 더 빨리.”남궁유나는 흑룡을 타고 가다 서다 반복하면서 계속 돌아보며 비웃었다. 유진우 따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고 마음껏 조롱했다. 심지어 흑룡을 탄 채 미니말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상대 말의 카리스마에 미니말은 놀라 부들부들 떨었고 속도도 더 늦어졌다.“하하... 이게 무슨 경마야? 그냥 개 산책시키는 거잖아.”“그러니까 말이야. 유나가 저렇게 조롱하는데 화도 안 나나? 창피해서, 원.”남궁유나의 친구들은 유진우를 마음껏 조롱했다.“기술도 없는 데다가 말까지 좋은 말이 아닌데 남궁유나한테 도전했어? 제 주제를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유연지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했다.“그냥 무능한 놈이야. 저런 놈이 이긴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한솔이 코웃음을 쳤다.“사내대장부가 돼서는 여자한테 놀아나다니. 나였으면 쥐구멍에 들어갔어. 어떻게 얼굴 들고 다녀?”봉연주도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전에 따귀를 맞았던 일 때문에 마음속 분노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남궁유나가 제대로 화풀이해주고 있었다.“대표님, 저런 쓸모가 없는 놈은 동정할 가치도 없어요.”남궁진혁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20억인데요, 뭐. 재미라 생각하면 되죠.”이청아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렇긴 해요.”남궁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궁유나에게 큰소리로 외쳤다.“유나야, 장난 그만하고 얼른 끝내. 슬슬 지루하단 말이야.”“알았어요.”대답을 마친 남궁유나가 유진우를 돌아보았다.“이봐, 난 먼저 갈게. 뒤에서 천천히 따라와.”두 다리로 흑룡의 배를 차자 흑룡이 스피드를 올리며 결승점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진우는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유유자적하게 산책하듯 했다.그런데 다들 승패가 갈렸다고 생각하던 그때 질주하던 흑룡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앞다리를 높게 쳐들었다.우쭐거리던 남궁유나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곤두박질치고 말았다.“무슨 상황이야? 실수한 거야?”갑작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말도 안 돼. 미니말이 명품 말을 이겼다고?”“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가능해?”“유나 대체 뭘 한 거야? 쭉 질주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꾸물거려?”유진우가 승리를 거두자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경기 시작 전, 그들은 남궁유나가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사실 경마 과정에서도 흑룡이 압도적으로 잘 뛰었다.그런데 마지막 100m를 남겨두고 흑룡이 갑자기 뛰지 않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파업? 성질을 부리는 건가?“이겼어, 이겼어. 진우 오빠가 이겼어!”잠깐 넋을 놓았던 남궁은설이 환호하면서 펄쩍 뛰었다. 미니말을 고른 유진우가 승리를 거둘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세상에 이런 일이!“쟤는 참 운도 좋아. 그냥 저렇게 이겼네?”유연지는 불만이 가득했다.“젠장, 뭐야? 미니말이 어떻게 이긴 거야?”한솔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고 질투도 났다.‘이렇게 쉽게 이길 줄 알았으면 내가 나갔지. 내 위세도 떨치고 은설이 마음도 얻었을 텐데. 이런 일석이조의 기회를 놓치다니...’“어떻게 이럴 수가... 계속 걸어만 다녔는데도 이겼어?”봉연주는 화가 나서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유진우가 지면 제대로 모욕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유진우가 이겨버렸다.“이상하네요.”이청아의 아름다운 두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유진우는 마치 이 모든 걸 진작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매우 차분했다.“유나 초반에 너무 끌었어. 진작 달렸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결국에는 제 발등을 찍은 거지.”눈살을 찌푸린 남궁진혁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달리다가 멈추지만 않았어도 식은 죽 먹기로 이길 경기였다. 이젠 진 바람에 명성도 잃게 되었다. 명품 말이 미니말에게 졌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는가 말이다.“네 그 명품 말도 별거 아니네, 뭐.”유진우는 결승점을 통과
“대박!”휙 날아간 남궁유나를 보며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흑룡이 갑자기 발길질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아주 먼 곳에서도 뼈 부러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유나야!”남궁진혁이 소리를 지르며 남궁유나 앞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그녀의 몸을 뒤집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남궁유나의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궁진혁은 머리가 쭈뼛 섰고 놀란 나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가 의술을 알긴 해도 탈골된 뼈만 이어줄 정도이지 이런 상처는 치료할 능력이 아예 없었다.“당장 의사 불러!”남궁진혁은 정신을 차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도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잠시 후, 중상을 입은 남궁유나는 실려 나갔고 남궁진혁 일행도 부랴부랴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가기 전 남궁진혁은 유진우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마치 깊은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발길질에 대여섯 미터나 날아갔어. 저 얼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이게 다 본인 탓이지, 뭐. 졌으면 졌지, 흑룡을 왜 때려? 자업자득이야.”“지금 보니까 미니말도 괜찮네. 적어도 발로 얼굴을 차진 못하잖아.”남궁은설의 옆에 있던 친구들이 수군거렸다.진작 남궁유나가 눈에 거슬렸지만 신분 때문에 덤비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젠 말에 걷어차여 처참한 꼴이 되었으니 고소해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은설 씨, 추풍이 돌려줄게요.”유진우는 이겨서 얻은 추풍을 다시 남궁은설의 옆에 데려다주었다.“고마워요, 진우 오빠. 오빠는 정말 대단해요.”남궁은설은 달콤하게 웃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정이 들대로 든 추풍을 잃었다가 다시 옆에 둘 수 있어서 너무도 기뻤다.“흥,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한솔이 비아냥거렸다.“맞아. 아까 그 판 나라도 이겼어.”유연지가 맞장구를 쳤다.“그럼 아까 왜 안 나섰는데요?”유진우가 되물었다.“그건...”말문이 막힌 유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
“맞아, 천우는 정말 훌륭한 아이지.”“흑용군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녔고 내 젊은 시절보다도 강해. 군사적 능력도 아주 뛰어나고.”“장수들이 늘 천우의 공적을 보고하곤 했어. 그 녀석의 성장을 지켜봐 왔고 이런 아들을 둔 게 난 자랑스러워.” 유만수가 흐뭇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이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쁨이 스며들었다.왕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아들을 이토록 신경 쓰고 있었다니.“의진아, 천우는 뛰어난 아이임이 분명해. 훌륭한 장군이 되어 서경을 위해 공을 세울 수 있겠지. 하지만 서경왕은... 아직은 될 수 없어.” 유만수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자 이의진은 당황하며 의아해했다.“시간이 있었다면 천우를 왕으로 키웠겠지만 이제는 그럴 여유가 없어.” 유만수가 고개를 저었다.“어르신...” 이의진이 말을 꺼내다 멈췄다.결과를 짐작했으나 입 밖으로 내기가 두려웠다.“장혁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유만수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품이든, 무력이든, 책략이든, 군사적 재능이든, 장혁이가 최적임자야. 나보다도 더 적합하지.”“제가 알기로는 장혁이는 무림 세계를 좋아하고 조정 일에는 관심이 없는데요...” 이의진이 조심스레 말했다.“그렇지. 하지만 좋아하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야. 그게 책임이지.”유만수가 엄숙하게 말했다. “대의를 위해, 서경 백성을 위해, 천하를 위해 그 녀석이 이 짐을 져주리라 믿어.”“어르신께서는 왜 장혁이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시나요?”“물론 강요하진 않을 거야. 천우에게도 마찬가지고. 둘 다 내 아들이니 공정하게 경쟁하게 할 테지만 장혁이가 최선의 선택임을 네가 알았으면 해.” 유만수가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알겠어요.” 이의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기 싫었지만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유장혁이 유천우보다 뛰어나고 서경왕에 더 적합했다.하지만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어머니로서 아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그래서 이 왕위는 자신을 위
홍복홍이 대답하고 빠르게 떠났다. 도살자인 그는 서경이 태평해진 뒤로 오랫동안 살육을 하지 않았으나 오늘 안송진의 소행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서게 되었다. 이 어리석은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안씨 가문 전체를 화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소창명은 죽음으로 죄를 갚았으니 서민으로 강등하여 매장을 허락하라. 소씨 가문의 죄인들은 법대로 처리하되 무고한 이들은 살려주어라.” 유만수가 다시 명했다.석태혁이 소창명의 시신을 들고 떠나자 곧 대청에는 유만수와 이의진 둘만 남았다.“콜록콜록...”사람들이 떠나자 유만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순간, 그의 온몸이 휘청거렸다.“어르신! 괜찮으세요?”이의진이 놀라 급히 앞으로 나와 그를 부축했다.“괜찮아, 다 고질 병이야.”유만수는 고개를 저으며 손수건으로 입가의 피를 닦았다.“피를 토하시다니... 당장 의원을 부를게요!”이의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하지만 떠나려는 그녀를 유만수가 붙잡았다. “놀랄 것 없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알아. 의원을 불러봤자 약이나 더 먹을 뿐, 소용없어.”“어르신...”이의진이 더 말하려 했으나 유만수가 끊었다. “됐다, 걱정 마. 당장 죽진 않을 테니 앉아서 나랑 얘기나 해.”이의진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의진아, 이 세월 너를 고생시켰구나. 연경에서 편히 살 수 있었는데 나를 따라 이 땅에 와서 매일 고생하니, 내가 참 미안해.”유만수가 부드럽게 말했다.“무슨 말씀이세요... 어르신은 세상의 영웅이시니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해요.”이의진이 유만수의 손을 잡았다.“영웅은 무슨, 보시다시피 이제 늙은이일 뿐이지.”유만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아무리 변하셔도 제 마음속엔 여전히 비할 데 없는 분이세요!” 이의진이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유만수를 우상으로 여겼고 심지어 뻔뻔스럽게 오빠에게 부탁해 혼인을 성사시켰다. 당시 유만수에게는 진소연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
이제 안송진은 이성을 잃고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유만수를 도와 서경을 질서정연하게 다스린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서경의 오늘날 발전은 자신의 공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그저 직위를 이용해 재미를 좀 봤을 뿐인데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권세가 있으면 마음껏 누려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면 관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게다가 천한 백성 몇 명의 목숨이 순무직인 자신과 비교가 되나? 예로부터 권세가들 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나? 그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고 오히려 유만수가 어리석다고만 생각했다.“안송진,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는가?”유만수가 고개를 저으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네 자식의 흉행을 눈감아주고 백성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겼으며 천리에 어긋나는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자네 행동이 예전의 살인강도와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저도 공을 세웠습니다! 서경의 이 번영을 이룩한 것도 저고, 모든 백성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도 접니다. 하찮은 목숨 몇 개쯤 없앤 게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안송진이 분노에 차 외쳤다.“안송진, 자네 공은 인정하네. 하지만 공이 과를 덮지는 못하지. 지네가 세운 공적이 악행을 저지를 구실이 될 순 없고 목숨을 보장받을 방패도 될 수 없어!”유만수가 호통쳤다. “우리가 관직에 있는 건 백성을 위해서지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만약 모든 이가 자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서경은 조만간 멸망할 거야!”“안 대인,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대인께서 법을 크게 어기셨으니 순순히 죄를 인정하세요!”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안송진이 붉은 눈으로 계속 고함쳤다. 죽음 앞에서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인정하지 않아도 소용없어. 이제 증거가 명백하니 아무리 발뺌해도 소용없을 거야.”유만수가 말하며 홍복홍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서경의 율법에 따르면 안송진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