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모님…….”2층에서 내려오는 사이 메이드들을 지나칠 때마다 이진은 꼭 이 호칭을 한 번씩 들었다. 발로 생각을 해도 그들이 누구 명령을 따랐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메이드들한테 화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주방에서 달걀 프라이를 하면서 그 달걀을 윤이건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미쳤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왜? 어제 안고만 자서 실망했나?”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진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프라이팬에 있는 달걀프라이를 떨굴 뻔했다.“이봐요! 좀 그렇게 갑자기 사람 뒤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돼요?”몸을 돌리자 눈앞에 보이는 윤이건의 얼굴에 이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분명 둘 다 원했던 이혼이었는데 그 당사자가 하루 이틀 미루며 이혼서류에 사인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매번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해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자기야 섭섭하네. 내가 뒤에 있는 게 나빠 아니면 자기가 나 없는 틈에 내 흉을 보는 게 더 나빠?”윤이건은 이진을 빤히 쳐다봤다.널찍한 잠옷 차림에 대충 묶어 맨 머리 그리고 화장기 하나 없는 뽀얗고 맑은 피부.그는 이진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껏 이렇게 맑고 깨끗한 사람도 본 적 없었다.게다가 그녀가 턱을 쳐들고 앙큼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방금 다 들었잖아요. 그러면 뒤에서 흉본 게 아니죠.”‘음, 성격도 까칠하네.’윤이건의 행동에 짜증이 난 이진은 홱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무의식 적으로 달걀 프라이 하나를 더 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결국 두 사람의 아침이 준비됐다.식탁에 앉은 윤이건은 화가 난 듯 샌드위치를 사각사각 써는 이진을 보자 피식 웃었다.그리고 포크와 칼로 천천히 샌드위치 모퉁이를 베어 입에 넣었다.하지만 약 2초 정도 흐른 뒤 갑자기 멈칫 동작을 멈췄다.“왜요? 입에 넣고 나서야 제가 독이라도 탔을까 겁나세요? 반
객실로 도망쳐 온 이진은 이미 정리된 침대 위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그리고 뭐라도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더니 이내 옷 벗는 소리와 물줄기 소리가 쏴아아 흘러나왔다.저녁 내내 남자의 품에서 잤다는 생각만 하면 이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방금 남자의 손이 턱에 닿았다는 게 너무 싫었다.한참 뒤 욕실에서 나온 이진의 턱은 이미 벌겋게 되어 있었다. 남자의 스킨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샤워 덕에 조금 진정을 되찾아 그나마 다행이었다.이진은 짐을 대충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케빈에게 전화를 했다.물론 다시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지만 앞으로 3개월 동안 더 이 곳에서 지내려면 짐은 정리해야 했다. 그러던 끝에 전화 건너편에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무슨 일이에요?”“전에 말했던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일정 앞당길 수 있어?”“보스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그거 말하는 거예요? 전에 거절했잖아요?”“일정 잡고 티켓 예약해 줘.”케빈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진은 명령조로 말했다.건너편의 케빈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명령을 받들고 전화를 끊었다.사실 전에는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 그녀는 전혀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콩쿠르 사이트에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이영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씩 올라갔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그 시각 윤이건의 비서가 스케줄 일정과 비행기 시간을 그의 핸드폰으로 보내왔다.“윤 대표님, 이번에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대표님께서 후원자로 참석하셔야 합니다.”…….이틀 뒤, 이진이 비행기 일등석에 탄 순간 익숙한 얼굴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윤 대표님은 참 이상하게 어딜 가나 항상 보이네요.”이진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하지만 이진을 보는 순간 놀란 건 윤이건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이 탑승한 비행기는 중간에 경유하는 곳이
이진은 끝내 체념했다. ‘이 사람 진짜 미친 건가?’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방이 미쳤다는 사실이 불쌍하다거나 그의 미친 짓에 함께 동참할 생각은 없었다.“윤 대표님이 이야기에 이렇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네요. 그런데 제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기도 하고 좀 피곤해서요.”말을 마친 이진은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거짓 웃음을 짓더니 의자를 뒤로 젖혀 누워버렸다.윤이건은 눈 앞에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그는 단 한번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말해본 적도 없었고 더욱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당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이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그리고 그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손에 든 순간 액정에 뜬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고 전화를 받았다.“윤 대표님…….”“이영 씨, 무슨 일이죠?”한번도 이영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그는 일부러 이진에게 들려주기 위해 다정하게 이름 세 글자를 불렀다.하지만 그 상황을 알리 없는 전화 건너편의 이영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이건 오빠…….”아예 대담하게 호칭을 바꾸면서도 긴장되긴 했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하지만 윤이건은 그 호칭을 들은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이건 오빠, 오빠가 이번 피아노 콩쿠르 후원자라는 거 알아요. 혹시 제가 그 콩쿠르에 나간다는 거 알고 있어요?”솔직히 이영이 콩쿠르에 나가는지 윤이건은 몰랐다. 혹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하지만 목적을 위해 전화를 끊으려는 충동을 눌러 참았다.“그래요, 알아요.”“그러면 혹시 저한테 힘 좀 실어주면 안 돼요? 저한테 이번 콩쿠르가 엄청 중요해서요.”현재 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이영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예전 같았으면 윤이건한테 전화를 걸면 윤이건은 아예 받지 않거나 그녀 혼자 한참 동안 떠들어댈 때 대충 몇 마디 하다가 인사도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라 새로워서 그런지 윤이건은 이진한테 더욱 이끌렸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뻗어 이진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순간 온기가 그의 손에 느껴졌다.지난번 병원에서 이진 허리에 있는 흉터를 보는 순간 그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그리고 일부러 물에 데인 화상과 불에 탄 화상에 대해 알아봤다. 물론 이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그가 한참 동안 기억 속에 빠져 있을 때, 이진이 잠꼬대를 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놓인 손을 꽉 붙잡았다.그 감촉에 윤이건의 눈은 한층 어두워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복잡한 심정을 애써 숨겼다. 이혼서류에 사인을 하고 난 뒤 180도로 변해 있는 이 여자를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대체 나한테 뭘 더 숨기고 있는 거야?”이진한테 잡힌 손을 천천히 빼낸 그는 이진의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 주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요즘 들어 그는 종종 어릴 적 겪었던 그 화재 현장을 꿈에서 본다.코를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와 활활 타오르며 일렁거리는 불길 속에서 그는 여기서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그 순간 그보다도 더 마른 어린 여자애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화재 현장에서 몸을 피했다. 그러던 그때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불길이 세게 번졌고 귓가에 귓가에서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아!”윤이건은 그때 어린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얼마간 지난 뒤 두 사람은 겨우 불길 속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때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서 어둑어둑했지만 윤이건은 여자애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연기 때문에 군데군데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예뻤다.“너 이름이 뭐야…….”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물었지만 그는 아쉽게도 여자아이의 대답을 듣기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병원에 누워 있었고 그 여자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윤이건의 날타로운 턱 선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옅은 미소를 띤 입꼬리가 보였다. 게다가 남자의 셔츠에 축축한 흔적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방금 전 자기가 자던 자세를 떠올린 이진은 지금이라도 당장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왜 그래? 잠 제대로 못 잤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윤이건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이진은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망치기 전 윤이건에게 이미 손목이 붙들리고 말았다.“도망치는 것 말고 좀더 창의적인 방법은 없어?”“그게 윤이건 씨랑 뭔 상관인데요? 그리고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그랬죠!”이진은 고개를 홱 돌려 윤이건을 째려봤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 이를 갈며 손을 뿌리치려고 마구마구 흔들어 움직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의 힘 때문에 의자에 털썩 앉고 말았다.“이…….”하지만 욕지거리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려던 그때 윤이건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자기야, 우리 지금 비행기 안이야.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잖아.”이진은 눈을 계속 깜박깜박거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하면 남자의 생김새는 두말할 것 없이 잘생겼지만 아쉽게도 입만 열면 깨는 게 문제였다.이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윤이건 씨도 우리가 비행기에 있다는 걸 아시는 모양이죠?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행동 하지 마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하지만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윤이건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점점 어색해졌다.둘뿐인 일등석에서 누가 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걸 이진도 알아차렸는지 입을 닫고 상대를 천천히 밀어냈지만 또다시 윤이건에게 손이 잡히고 말았다.“이진 씨, 우리 아직 합법적인 부부인데 남이 오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나?”‘합법적인 부부이긴 개뿔.’이진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눈앞의 이 사람이 왜 날이 갈수록 이렇게 낯두
다음날.피아노 콩쿠르 현장에서 이영은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하지만 준비라고 하기보다는 다른 남자의 대시를 받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지도. 그녀의 신분과 외모 덕에 남자의 관심을 받지 않는 게 더욱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렇게 대접받는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아무리 자기에게 대시해오는 사람들은 모두 성에 차지 않았지만.그런데 이영이 무대 화장을 끝냈을 무렵, 익숙한 실루엣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로 다가갔다.“이건 오빠, 정말 와줬네요.”그녀의 기억 속에 윤이건은 이런 행사에 참가한 적이 극히 드물다. 하지만 어제의 약속도 있었겠다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 걸 보니 당연히 자기를 위해 온 거라고 생각했다.순간 이 남자가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생각에 몹시 흥분됐다. 게다가 윤이건이 왔으니 자기가 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오늘 있을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연 중 하나다. 이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다면 상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었다.때문에 이영은 이 기회에 윤이건에게 더 접근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진이 문쪽에서 천천히 걸어들어왔다.그 순간 이영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저 년이 여긴 왜 왔지?’그녀의 기억 속에 이진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콩쿠르에 참가한다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윤이건을 본 순간 이영은 뭔가 생각난 듯 콧방귀를 뀌더니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이진에게 다가갔다.“언니, 이혼해서 속상한 건 알겠는데 여기까지 쫓아와서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까지는 없잖아.”일부러 강조하는 양 마지막 한 마디를 천천히 말한 이영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쪽으로 눈길을 보내오자 씩 웃었다.하지만 이진은 그녀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니겠는가?“이영아, 네 머릿속엔 온통 남자 생각 아니면 남자에 관한 일뿐인가 보네.”이진은 팔짱을 낀 채 이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네가 그
심사위원 석 중앙 자리에 앉아 이영을 보며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진이었다. 그리고 윤이건은 그녀의 옆의 귀빈 석에 따로 자리했다. 이영이 경악했다면 윤이건은 이진을 보는 순간 놀랐다고 하는 게 맞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는 상대방이 피아노에 관해 얘기한 걸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다음으로 이영 참가자를 모시겠습니다.”사회자의 말에 이영은 그제야 흠칫 놀란 듯 현실로 돌아왔다.입술을 깨물며 이진을 째려보는 그녀의 눈에서는 당장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저 년은 왜 매번 나보다 잘난 건데!’하지만 귀빈석에 앉아 있는 윤이건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영은 눈 딱 감고 무대 위에 올랐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윤이건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이영은 어색하게 미소를 쥐어 짜냈다.그리고 심사위원 석에서 마침 그 모습을 본 이진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연주 도중 이영은 두 구간이나 실수한 것도 모자라 박자와 음마저 모두 무너져 그야말로 연주라 할 수 없는 연주를 선보였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이진은 끝내 참지 못하겠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이영 씨, 그만하시죠.”“뭐?”연주 소리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뚝 끊겼다.이영은 아직까지 자기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에 자아도취하고 있었는데 이진의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기교를 너무 많이 욱여넣다 보니 밸런스가 깨지고 그 기교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음과 리듬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다 무너져 형편없네요.”개인감정을 배제하더라도 이영의 실력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실력이었다.“이진! 네가 뭔데 날 무대에서 내쫓는데.”이성을 잃은 이영은 무대 위라는 것도 잊었는지 발끈했고 그 모습을 본 관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수군대며 비웃느라 바빴다. 자기를 떠받들던 관중들의 웃음소리에 이영은 주먹을 그러쥐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넌 무슨 자격으로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데!”그리고 그 한 마디에 관
이진이었어?그렇다면 그가 지금껏 은혜를 베풀어온 상대조차 틀렸다는 말 아닌가?전화를 끊은 윤이건은 복잡한 마음으로 현장에 돌아왔다.그리고 때마침 이진의 연주도 끝이 났다.물론 자의로 무대에 오른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음악을 할 때마다 늘 음악 속에 푹 빠지곤 한다.무대 아래에서 들려오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에 이진은 입가에 살짝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고개를 드는 순간 마침 귀빈석에 앉아 있는 윤이건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시비라도 거는 듯이.“이제 무대는 다시 우리 참가자 여러분께 맡기도록 하겠습니다.”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진행을 시작했고 이진은 싱긋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무대 위에 서 있는 이영은 아예 보지 못한 듯 슥 지나쳤다.2시간 동안의 경연이 진행된 후 곧바로 결과가 발표됐고 이영은 당연히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뭐 실력 문제라 결과가 이렇게 된 건 큰 문제가 없었지만 참가자 신분으로 공공연히 심사위원에게 시비를 건 행위를 사람들은 당연히 고깝게 보지 않았다.게다가 전에 이영 주위를 맴돌던 남자들은 이 시각 이진의 사인을 받기 위해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이진 씨, 연주 정말 잘 들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시던데요.”“이진 씨,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요?”“이진 씨, 혹시…….”미소로 응대하느라 이진의 얼굴이 거의 굳어질 즘 썰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다 빠져나갔다. 하지만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 하던 그때 윤이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간도 늦었는데 같이 식사나 하는 게 어때?”이진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그 옆을 슥 지나쳤다.그 모습에 윤이건은 화가 나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지구 전체를 둘러봐도 아마 이런 태도로 그를 대하는 여자는 이진 외에 없을 거다.하지만 며칠 지내보니 윤이건은 이진에게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진이 곁을 지날 때 그녀의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