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저 충분히 의심해도 되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윤이건의 날타로운 턱 선이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옅은 미소를 띤 입꼬리가 보였다. 게다가 남자의 셔츠에 축축한 흔적이 있는 게 아니겠는가!

방금 전 자기가 자던 자세를 떠올린 이진은 지금이라도 당장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그래? 잠 제대로 못 잤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던데…….”

윤이건의 조소 섞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자 이진은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서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망치기 전 윤이건에게 이미 손목이 붙들리고 말았다.

“도망치는 것 말고 좀더 창의적인 방법은 없어?”

“그게 윤이건 씨랑 뭔 상관인데요? 그리고 도망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그랬죠!”

이진은 고개를 홱 돌려 윤이건을 째려봤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 이를 갈며 손을 뿌리치려고 마구마구 흔들어 움직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의 힘 때문에 의자에 털썩 앉고 말았다.

“이…….”

하지만 욕지거리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오려던 그때 윤이건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자기야, 우리 지금 비행기 안이야. 도망쳐 봤자 갈 곳도 없잖아.”

이진은 눈을 계속 깜박깜박거리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솔직히 양심적으로 말하면 남자의 생김새는 두말할 것 없이 잘생겼지만 아쉽게도 입만 열면 깨는 게 문제였다.

이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이건 씨도 우리가 비행기에 있다는 걸 아시는 모양이죠?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행동 하지 마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하지만 말하다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윤이건의 입가에 걸린 미소도 점점 어색해졌다.

둘뿐인 일등석에서 누가 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걸 이진도 알아차렸는지 입을 닫고 상대를 천천히 밀어냈지만 또다시 윤이건에게 손이 잡히고 말았다.

“이진 씨, 우리 아직 합법적인 부부인데 남이 오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나?”

‘합법적인 부부이긴 개뿔.’

이진은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눈앞의 이 사람이 왜 날이 갈수록 이렇게 낯두꺼워지는지 의문이었다.

다행히 비행기가 곧 착륙하고 내리자마자 호텔로 도망가 이 남자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이진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호텔 프런트 데스크에서 체크인할 때 그녀는 또다시 자기 주위를 맴도는 윤이건을 보게 됐다.

게다가 아예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손까지 흔드는 게 아니겠는가.

“자기야.”

남자의 호칭을 듣는 순간 이진은 또 다시 낯빛이 어두워졌다.

“윤 대표님, 일정을 일부러 이렇게 짜셨어요? 제가 충분히 의심해도 되는 상황 인거죠?”

“난 그것보다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고 싶은데.”

윤이건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이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카드 번호와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빤히 들여봤다. 그리고 상대방이 묵는 층도 12층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끝내 폭발했다.

“케빈, 나 호텔 옮길래!”

‘같은 호텔인 것도 모자라 같은 층이라니 이건 너무 말이 안 돼!’

“보스, 지금 호텔 옮기는 건 너무 늦은 것 같아요. 게다가 주최 측에서 이미…….”

“그러면 층수라도!”

이진이 갑작스러운 태도에 케빈은 의아했지만 호텔 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겨우 방을 바꾸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그날 밤 이진은 또다시 윤이건과 마주칠까 봐 저녁식사 시간에도 방 밖을 나오지 않고 룸서비스를 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윤이건은 아예 그녀 방을 찾아왔다.

그날 밤, 이진이 잘 준비를 할 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케빈인 줄 알고 묻지도 않고 문을 열었지만 하필 윤이건이 문 앞에 서있었다.

낮에 본 모습과는 대조되게 그는 조금 나른한 모습이었고 정장과 셔츠 대신 편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보니 방금 샤워를 마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각 이진은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고 가늘고 하얀 목선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갓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얼굴에 물기가 촉촉했다.

윤이건은 그제야 이진이 일이 없는 날엔 생얼로 있기를 즐긴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슬을 머금은 연꽃 같았다.

“윤 대표님, 참 힘이 넘쳐나시나 보네요. 잠은 안 주무세요?”

“지금 나 걱정하는 건가?”

‘이젠 하다 하다 자뻑까지.’

이진은 방 문에 기대 윤이건이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전 지금 제가 걱정될 뿐이에요. 내일 컨디션이 안 좋을까 봐.”

그 말을 들은 윤이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솔직히 그는 이진과 실랑이를 벌일 생각이 없었고 내일 그녀가 무사히 시합을 끝마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자기가 안전한가 보러 왔을 뿐이야.”

윤이건은 눈을 곱고 느리게 깜박거리며 그윽하고 야릇한 눈빛으로 이진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위험하면서도 다가가고 싶을 정도로 섹시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홀랑 넘어갔겠지만 이진한테는 오히려 반대로 작용될 뿐이었다.

“윤 대표님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전 아주 편하고 좋을 겁니다.”

이진은 눈을 홉뜨더니 이내 몸을 돌려 문을 닫아버렸다.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하마터면 윤이건의 코가 깨질 뻔했다.

문전 박대를 당한 윤이건은 차가운 눈으로 굳게 닫힌 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순간 예전에는 왜 이진이 이렇게 대담한 여자인지 알지 못했는지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