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건의 이런 행동이 이진은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각을 잃었다고 해도 만둣국 하나에 스타 셰프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식사가 끝난 뒤 이진은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그러면서 갑자기 윤이건이 집사더러 만둣국 조리법을 기록하게 하던 생각이 나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그때,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사도우미가 다급하게 달아가 문을 여는 모습에 이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어렵사리 찾아온 휴가가 누군가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드라마를 잠시 멈추고 일어서는 순간 눈앞에서 유연서가 걸어왔다.“이진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유연서의 마음에도 없는 한마디에 이진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충 대답했다.하지만 그때.“연서 아가씨, 얼른 앉으세요. 제가 바로 과일 내다 드릴게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방금 문을 열어준 가사도우미가 유연서를 보자 활짝 웃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마치 집안 안주인을 반기 듯이.“고마워요, 아주머니.”이에 유연서는 당연하다는 듯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이진의 반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 모습에는 손님이라는 거리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진은 그 상황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보아하니 지난 3년간 그녀는 많은 것을 놓친 듯싶었다.적어도 그녀가 집에 있을 때 유연서를 마주친 적은 없었으니까.그런데 손님이 손님 자각이 없으니 그녀도 거리낄 게 없었다.아예 다리를 꼰 채 방금 멈췄던 드라마를 다시 재생했다.“이건 오빠는 집에 있어요?”흔하디흔한 레퍼토리에 이진은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진 씨만 있는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전에 제 수술 해준 거 고마워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의사로서 응당해야 할 일인데요 뭘.”쌀쌀맞은 대답에 눈빛은 여전히 티브이에만 고정되어 있었다.이진은 솔직히 눈앞의 유연서가 순진한 척 연기하는 여우 같은 여자든 뭐든 딱히 관심 없었다. 별로 마주치지도 않는 데다 마주치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짐작하긴 했으나 가사도우미한테까지 이런 무례한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게 화가 나 웃음이 나왔다.“아주머니, 지금 그런 태도로 저한테 말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말을 마친 이진은 낮은 한숨을 내뱉고는 티브이를 꺼버렸다.그저 조용히 드라마나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게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이진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싸늘한 눈으로 유연서와 아주머니를 번갈아 훑어봤다. 그 모습에 방금 전 무례를 범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아주머니도 조금 수그러들었다.“어찌 됐든 연서 아가씨는 손님이잖아요. 작은 사모님께서 그런 일을 저지르시면 안 되죠.”“지금 저더러 작은 사모님이라고 하셨죠?”이진은 팔짱을 낀 채로 가볍게 입을 열면서 눈앞의 두 사람을 다시 한번 훑었다.솔직히 이런 더러운 꼼수에 놀아난다는 게 같잖고 설명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이 일을 이대로 넘길 마음은 없었다.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말이 나온 순간 아주머니는 흠칫 몸을 떨었고 작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원래 자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유연서는 입술을 깨물었다.“유연서 씨가 이 집에서 어떤 지위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은 저예요.”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눈앞의 여자가 이제 더 이상 3년 전 그저 고분고분하던 여자가 아니라는 걸 잊고 있었다니.“제가 주인이니 방금 전 일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는 있겠죠? 미안하지만 두 사람 당장 이 집에서 나가주세요.”“나가달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이런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아주머니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아주머니 해고됐다고요. 그리고 유연서 씨…….”이진의 눈빛은 유연서 쪽으로 향했다.“여기는 그쪽 환영하지 않아요.”저택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사이 아주머니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게다가 유연서도 이진이 이렇게 제멋대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아주머니, 미안해요.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유연서는 윤이건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게 아니다. 그저 그 상대가 자기라는 이 상황을 처음 겪을 뿐.유연서는 착한 사람 코스프레라도 해서 아주머니의 호감을 얻으면 앞으로 유용하게 쓰일 거란 생각에 나섰지만 눈앞의 상황에 더 이상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매번 그녀의 말이라면 껌뻑 죽던 윤이건의 그녀의 간단한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거였다.‘이건 오빠가 이러는 건 처음인데. 설마 이진 때문인가?’유연서의 눈빛은 이진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 재밌는 구경거리를 감상하기라도 하는 듯한 이진의 태도를 보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솔직히 윤이건이 아주머니를 해고한 건 그녀 본인의 문제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윤씨 저택 하인들은 이진에게 태도가 나쁘다기보다는 무시하는 데에 가까웠다.물론 이진은 그런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윤이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역시나 아주머니가 해고된 뒤로 저택 안 사람들이 이진을 대하는 태도는 아예 180도 바뀌었다. 진심에서 우러러 나온 행동이든 아니든 그들은 적어도 이진을 윤씨 가문 작은 사모님으로 대했다.그날 밤 유연서는 윤씨 저택에 남아 식사하게 되었다.그녀는 윤이건이 요청한 스타 셰프를 보는 순간 깊은 감동을 받았다.속으로는 자기가 퇴원한 걸 축하하기 위해 준비한 거라고 확신했다.하지만 후각을 자극하는 맛나는 산해진미 사이 낀 만둣국은 그야말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2층에서 내려온 이진은 주인 석에 놓인 만둣국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요했다.그녀는 흘깃 윤이건을 스쳐봤지만 그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순간 속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만둣국 외의 모든 음식은 단지 들러리라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그리고 사람들이 모였을 때, 윤이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만둣국으로 손을 뻗었다.이진은 옆에 앉아 수프를 음미했지만 솔직히 곁눈질로 계속 윤이건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수프가 너
저녁식사 내내 유연서는 밥이 코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분명 평소에는 먹기도 어려운 귀한 음식들이었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고무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그리고 겨우 식사가 끝나자 유연서는 윤이건을 따라 2층 서재로 향했다.이진도 마침 휴식할 생각에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도중에 하필이면 유연서와 마주치게 되었다. 마치 주권이라도 행다하는 듯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경계하는 유연서를 보자 그녀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대체 정신 연령에 어느 단계에 멈췄는지 의문이었다.한편, 서재. 테이블 앞에 앉아 유연서를 빤히 쳐다보는 윤이건의 표정은 약간 멍해있다.유연서의 화상이 그저 뜨거운 물에 데인 상처라는 걸 안 순간부터 유연서에 대한 그의 마음은 조금씩 변했다.“이건 오빠, 전에 나 회사 출근하라고 하던 건 어떻게 됐어? 나 앞으로 무슨 일하면 돼?”유연서의 말에 윤이건은 흠칫 놀랐다.그때 그가 이 요구를 동의한 건 그저 이진을 얼른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뇌를 거치지도 않고 한 약속이었다.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너무 뜬금없는 부탁에 동의했다 싶었다.“내가 내일 인사팀에 얘기해 놓을게. 잠시 동안은 먼저 비서 일을 맡으면 돼.”그 말에 유연서는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비서는 아무래도 윤이건의 옆에 붙어있기에 그를 매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그러면 오늘 시간도 늦었는데…….”“응, 내가 기사님한테 말해뒀어. 너 안전하게 집까지 모시라고.”솔직히 오늘 밤 집에 머물고 싶다는 뜻으로 말을 꺼낸 거였는데 윤이건은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건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투였다.그리고 곧바로 비서를 불러오는 걸 보자 유연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음날, 유연서가 YS 그룹에 출근도장을 찍은 뒤 신입 비서가 왔다는 소문이 인사팀에서부터 회사 전체에 퍼졌다.“갑자기 회사에 사람을 꽂는 일이 흔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비서직은 처음 있는 일 아니에요?”“그것뿐인 줄 알아요? 그 유연서라는 신입 회사 출근할 때도
대답 대신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케빈을 보자 이진은 가볍게 웃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향한 곳은 당연히 YS 그룹이었다.솔직히 웃긴 건, 일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그녀가 YS 그룹에 발을 들여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마침 유연서는 서류 뭉치를 들고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윤이건을 찾으러 가려던 그때 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부탁 좀 할게요. 혹시 프로젝트 매니저님께 연락해 줄 수 있어요? 일적으로 얘기할 게 있어서요.”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진이었다.그녀는 그 시각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프런트 데스크 직원과 얘기하고 있었다.“이진 씨?”이진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려 할 때 이 비서가 마침 그녀에게 다가왔다.“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윤 대표님 찾으러 오셨어요? 제가 보고드릴까요?”비서가 당연하다는 듯 꺼낸 윤이건의 이름을 듣자 이진은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그녀가 오늘 YS 그룹에 온 건 일 때문이지 다른 목적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윤이건이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것마저 모르길 바랐다.하지만 거절의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비서는 당연히 그녀가 동의한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윤이건에게 보고하려고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을 그때, 그 앞에서 유연서와 마주치게 되었다.“이 비서님, 방금 보니 이진 언니가 온 것 같던데 혹시 이건 오빠 찾으러 왔대요? 저 마침 이건 오빠 찾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제가 대신 보고드릴까요?”잠시 망설이며 난처해하는 이 비서를 보자 유연서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날카로운 말투로 따져 물었다.“왜요? 혹시 제가 그렇게 간단한 일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그 말에 이 비서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그는 윤이건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온 부하이기에 당연히 유연서가 자기 대표한테 어떤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문에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거절하지 못했다.“
직원의 말에 이진은 화가 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솔직히 말해서 이 회사에 좋은 분위기랄 것도 없어 보이는데요?”이진은 화를 참을 생각이 없었다. 참아야 할 이유도 없었고.눈썹을 치켜뜬 채 빤히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했다.그 아우라만으로 프런트 데스크 직원은 이미 잔뜩 겁을 먹고 유연서를 바라봤다.그리고 상대의 눈빛을 받은 유연서는 그녀를 속으로 쓸모없는 년이라고 욕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어째 됐건 이런 상황에서 좋은 사람인 척 분위기를 풀어야 했으니 말이다.“이진 씨, 프런트 데스크 직원과 이렇게 싸울 필요는 없지 않나요? 속이 너무 좁은 거 아니에요?”“그렇다면 유연서 씨 뜻은 같 잖은 사람한테 무시 당해도 그저 웃어넘겨야 한다 그 말이에요?”이진의 눈빛은 유연서의 웃는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 가식적인 웃음만 보면 온몸에 소름 돋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진 씨, 그건 너무 억지 아니에요? 여기 YS 그룹이에요.”“그래서요?”이진은 이를 갈며 겨우겨우 잇새로 한 마디를 토해냈다. 마지막 남은 인내심도 이젠 모두 바닥났다.“그러니 윤 대표님 마음 하나 돌리겠다고 이렇게 찾아와 직원에게 진상 부리는 짓은 삼가 주셨으면 해서요.”‘돌고 돌아 또 윤이건이었어?’이진은 너무 어이없이 이젠 체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유연서의 일편단심에 감탄했다.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방금 꺼내다 만 명함을 다시 꺼내 프런트 데스크 위에 올려놓았다.“저 AMC 대표 이진입니다. YS 그룹에 찾아온 건 프로젝트 매니저님을 찾아온 거고요.”이진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홀에 있는 프런트 직원들은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하나둘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유연서의 낯빛도 이미 새하얗게 질렸다.‘저 여자 의사 아니었어? 그런데 그 베일에 싸인 회사 대표라니?’하지만 이내 주먹을 힘껏 그러쥐며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히더니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이진 씨, 명함은 진
회사 대표의 말에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아무리 아니라고 한들 대표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높은 분을 몰라뵙고…….”방금까지 큰소리치던 직원은 이미 얼굴이 잿빛이 되어 목소리마저 떨렸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이진이 계약서를 다시 손에 들며 입을 열었다.“황 매니저님…….”담담한 한마디에 깃든 뜻은 아주 명확했다.이진의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와 싸늘한 눈빛을 보자 윤이건의 눈에는 일순 감탄의 빛이 언뜻 지나갔다.하지만 눈빛이 황 매니저를 향했을 때 미간에는 싸늘한 기색이 맴돌았다.“잔금 모두 메워요.”이진은 윤이건을 힐끗 바라봤다. ‘뭐 아예 쓸모없지는 않네.’지금껏 그렇게 오랫동안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차라리 대표실로 직접 찾아가 직접 해결하는 게 더 효율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홀에는 일순 침묵이 흘렀다.옆에서 구경하던 직원들은 윤이건을 보자 하나둘 제 자리로 돌아갔다. 대표님에게 찍혀 보너스를 받지 못하면 안 되니까.하지만 황 매니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진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보아하니 이번 사태가 간단한 건 아닌 듯싶었다.역시나 황 매니저가 휘청거리더니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돈이 모자랍니다…….”“뭐라고요?”매니저의 말에 윤이건은 화가 난 듯 언성을 높였고 이진은 곧바로 계약서를 덮었다.이것도 사실 예상했던 일이었다.그렇지 않다면 YS 그룹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계약금을 연체할 배짱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대표님, 죄송합니다. 이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몇 분 전만 해도 위세를 떨던 매니저는 고양이 앞에 놓인 쥐처럼 벌벌 떨었다.더욱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굴었다.“인사팀에 가서 퇴사 수속 밟으세요! 앞으로 YS 그룹의 그 어떤 계열사도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그 결정에 황 매니저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물론 업계에서 매장된 수준은 아
“이번 일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에요?”YS 사무실 내에서 이진은 소파에 앉아 담담한 눈빛으로 윤이건을 바라봤다.“프로젝트 매니저 건은 빠른 시간 내에 조사해 볼 거고 연체된 비용은 즉시 보충할게.”이에 윤이건은 차 두 잔을 따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이진을 슬쩍 훑었다.처음 보는 이진의 오피스룩 차림에 윤이건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약간의 카리스마가 섞여 있는 동시 여전히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있었다.“좋아요. 그러면 소식 기다릴게요.”하지만 이진은 윤이건이 건넨 찻잔 둘레를 슬쩍 만지더니 입에는 대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이건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서서더니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점심 같이할래?”“윤 대표님, 우리처럼 작은 회사의 돈도 연체했으면서 밥얘기가 나오나요? 저는 돈이 없을뿐더러 먹고 싶은 마음까지 없어서요.”이진의 이 한마디 덕에 이틀 뒤 이 일은 그나마 해결되었다.이진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그때, 케빈이 활짝 웃는 모습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왜 그래? 복권이라도 주웠어? 아니면 여자 친구를 주었나?”케빈이 그 자리에 굳는 모습에 이진은 피식 웃었다.“보스는 항상 보면 저만 놀린다니가요!”말하는 동시 케빈은 손에 든 계약서와 수표 한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보스, 그 프로젝트 매니저는 이미 감방 갔대요. 투자 비용을 글쎄 개인 용도로 감춰놨더라고요.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에 있어요.”하지만 수표를 힐끗 보니 연체된 금액보다 돈이 더 많은 게 아니겠는가?그리고 고개를 들어 케빈을 보는 순간 그가 오늘 왜 유독 기뻐하는지 알아차렸다.“나머지 연체 금액은 윤 대표님이 다 메웠어요. 그리고 전에 계속 돈을 연체해 프로젝트에 지장을 줬다고 조금 더 보내줬어요.”‘일 처리 하난 참 빠르단 말이지.’수표를 손에 쥔 이진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다.‘오늘 저녁 고기 국수나 해줄까? 이젠 파트너 관계도 됐겠다 너무 싸늘하게 대할 필요는 없으니까.’“아 참, 이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