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릴 거야?”이진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사실 이진이 화판을 가지고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이건은 이미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이진이 직접 화대를 세우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자, 이진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던 이건은 몰래 감탄하고 있었다.이진은 마음을 다잡고 잠시 멈추었다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조용히 움켜쥐었다.“맞아요, 그림을 그릴 거예요. 풍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물론.”이진은 입술을 오므리고는 이건의 시선을 피했다.“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그냥 최근에 우수한 작품들을 보아, 그림에 관심이 생겨 취미 삼아 그려보는 거예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진은 절대로 그림을 대충 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이진은 원래 이건의 앞에서 실력을 선보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산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이진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어 손이 근질근질해졌던 것이다.이 말을 들은 이건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은 채, 이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그리고 긴 다리를 꼬아 나른하게 한쪽에서 지켜보았다.이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눈앞에 보인 장면들을 생동하게 그렸다.그 그림에는 이진의 개성이 짙게 드러났다.이진의 동작만 보았을 때 대충 그리는 것 같았지만, 완성된 그림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했다.멀리서 촬영을 하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중년 여자는, 무심코 이쪽을 쳐다보더니 이진의 화판에 놓인 그림을 보게 되었다.중년 여자는 그 그림과 이진의 붓을 사용하는 습관을 똑똑히 포착한 후, 눈을 번쩍이며 이진에게 다가왔다.“잠시만요!”중년 여자는 큰 소리로 말하며 손에 든 카메라를 놓고, 빠른 걸음으로 이진에게 다가갔다.이진의 얼굴을 똑똑히 본 후, 중년 여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중년 여자의 기억 속의 그 화가는 적어도 30년 이상의 경력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눈앞의 이목구비가 정교한 이진은, 여자의 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젊었다.어쨌든 직접 이진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았기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진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이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헬렌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이 근처의 단골손님인데, 이 부근에 괜찮은 카페가 있더라고요. 한번 가보지 않을래요?”이진은 말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헬렌의 거듭되는 초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몇 번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진은 헬렌이 자신의 신분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다.‘반드시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돼.’카페는 헬렌의 말대로 호텔에서 멀지 않고 환경이 아늑했다.그러기에 대화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헬렌은 커피숍의 단골손님이라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는, 가방에서 그림 한 묶음을 꺼냈다.예외 없이 모두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었다.그중 하나가 바로 니키의 작품이다.그 작품을 본 이진은, 그림들을 뒤져보던 손을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이 그림은 경매에서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은 수집가에게 고가로 팔려갔었는데. 그 수집가가 헬렌일 줄이야.’헬렌은 이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전 니키 씨의 팬으로서, 니키 씨가 그린 그림이라면 모두 수집해 평생 간직하고 싶어요. 그래서 전문 니키 씨의 작품을 수집한 갤러리도 설립했었어요. 제 생애 가장 큰 소원은 니키 씨를 직접 만나보는 거예요.”말을 마친 헬렌은 뜨거운 눈빛으로 이진을 쳐다보았다.이진은 계속 모르는 척하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거두어 헬렌에게 돌려주었다.“헬렌 씨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전 니키 씨가 누구인지도 모르거든요. 그분의 작품도 오늘 처음 보게 된 거예요.”“그래요?”헬렌은 전혀 믿지 않았기에, 이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전 니키 씨의 첫 번째 작품부터 줄곧 지켜봐왔고,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어요.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니키 씨는 이렇게 오랫동안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데다가,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인터넷에는 그녀에 대한 소문이
이건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진은 이미 옷장을 열고 가져온 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채 트렁크에 넣었다.“그렇게 급한 거야?”이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진을 보고 있었다.‘모처럼 쉬러 나온 거라 G시에서 한동안 지낼 줄 알았는데, 왜 이틀 만에 돌아가려 하는 거지? 혹시 중요한 일이 있는 건가?’이진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짐을 싸자, 눈치가 빠른 이건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이건은 그저 머릿속으로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이처럼 단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또 생겼으면 좋겠네.’짐을 챙긴 두 사람은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체크아웃을 했다. 헬렌은 이진의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결국 호텔로 돌아가 이진을 찾으려고 했으나, 이진은 이미 호텔을 떠났다.헬렌은 결국 데스크 직원에게 두 사람의 행방을 물어보았으나, 그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하지만 이럴수록 헬렌은 확신할 수 있었다.‘이진 씨는 틀림없이 니키 씨일 거야! 안 그러면 굳이 자기 행방을 숨길 필요가 있겠어?’ 헬렌은 니키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진의 곁에 있는 남자를 신경 쓰지 못했다.우아하고 용모가 준수한 남자는 딱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그 남자를 알아보는 게 더 빠르겠어.’이런 생각에, 헬렌은 부하들을 시켜 이건의 차량 정보를 조사해 추적하였다.결국 헬렌은 실마리를 통해 정말 유용한 소식을 알아낼 수 있었다.이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이건은 그저 운전에 집중하고 있기만 했다.이건이 알아차렸을 때, 헬렌의 차는 이미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이진 역시 경계심을 가지고 백미러를 통해 뒤에 있는 차량을 지켜보았다.이진은 정말 머리가 아팠다.상대방이 끈질기게 따라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헬렌의 행동은 마치 사생팬 같았다.게다가 이건이 곁에 있기에 이진도 상대방과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다.약점을 잡히는 건 작은 일이지만, 신분은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
이 비서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의 차량을 미행했던 사람이 YS그룹과 협력하려던 사람이었다.이것을 알아차린 이건은 가차 없이 상대방을 블랙리스트에 넣었다.이 일을 알게 된 이진은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이진이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조만간 상대방이 의심을 멈출 것이다.이진의 완벽한 계획에 이건이 따르자, 두 사람은 엄청 호흡이 잘 맞았다.하지만 계획엔 늘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두 사람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AMC그룹의 몇몇 동업자들은 최근 줄곧 해외의 협력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마침 이때, 그들은 오랫동안 계획해온 프로젝트를 겨우 따낼 수 있게 되었다.하지만 이진이 직접 나서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협력에 대한 중시를 표현하기 위해 기자회견도 빠뜨릴 수 없다.이 일을 알게 된 이진은 머리가 아팠다.예전 같았으면,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말 복잡하게 되어버렸다.헬렌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이진의 주위에 매복하여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대표님, 주주들이 모두 회의실에서 대표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전화 너머의 이진이 질질 끌며 대답을 하지 않자, 만만은 어쩔 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기자 회견을 열어야 하지만, 이진이 직접 나타나서는 안 된다.헬렌이 의심을 버리고 이 도시를 떠나기 전까지, 이진은 절대로 자신의 행방을 폭로해서는 안 된다.이진은 잠시 중얼거리더니, 만만이 상상하지도 못한 결정을 내렸다.“협력이든 기자 회견이든 모두 네가 나를 대신해 해결해.”‘내가 나서야 한다고?’만만은 입을 떡 벌리며 물었다.“대표님, 진심이세요?”“어쨌든 너도 내 곁을 오랫동안 따라다녔으니, 이 정도 능력은 있잖아. 혹시 내 안목을 의심하는 거야?”이 결정은 확실히 이진이 급히 내린 것이다.하지만 만만의 믿을 수 없다는 말투는, 이진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이진은 목소리를
“제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해요.”헬렌은 이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처음 만났을 때 이미 말했듯이, 제가 원하는 건 이진 씨가 절 위해 그림을 그려주는 거예요. 제가 이미 당신의 신분을 알아냈는데, 왜 아직도 본인이 니키 씨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으시는 거죠? 혹시 제가 이진 씨의 신분을 까발릴까 봐 걱정하시는 거예요?”“전 분명 니키가 아니라고 말했었어요.”이진은 차가운 눈으로 헬렌은 흘겨보며, 불쾌하다는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이 말을 들은 헬렌은 웃음을 터뜨렸다.“거짓말은 그만하시죠. 당신이 니키 씨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분과 똑같은 습관을 가지고 계시죠? 게다가 절 계속 피하시는 건, 신분이 들통날까 봐 두려우신 거죠?”이진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차린 헬렌은 무고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전 당신의 팬이기에 당신을 좋아하는 것 외에 아무런 악의도 없어요”“하지만 당신은 이미 제 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주셨어요.”이진은 끔쩍도 하지 않고는 갑자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무의식적으로 책상을 두드렸다.“혹시 당신만 니키 씨의 팬이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제가 니키 씨와 그림 습관이 비슷한 건, 제가 그분의 그림을 자주 모방했기 때문이에요.”“당신도 니키 씨의 팬이라는 거예요?”헬렌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그럼요.”이진의 말투는 매우 차분해서 전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니키 씨는 언론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 단 한 번도 얼굴을 공개하지 않으셨죠. 그런 니키 씨가 사람이 그렇게 많은 산에서 그림을 그리진 않겠죠.”이진의 표정과 말투는 모두 자연스러워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헬렌은 침묵을 지키며 이진의 표정을 지켜보았다.니키의 팬인 헬렌은 당연히 니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니키의 오랜 팬으로서 헬렌은 자신의 직감을 매우 믿었다.‘눈앞의 여자는 분명 니키 씨와 똑같은데, 어떻게 니키 씨가 아니겠어?’두 사람이 이야기가 아직 끝나기도
이진은 헬렌의 경악하는 표정을 무시하고 재빨리 카페를 나섰다.“이진 씨!”헬렌이 무의식적으로 쫓아가려던 찰나, 이진의 경고가 떠올라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결국 헬렌은 이진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이진이 걸음을 멈춘 동시에, 검은색 외제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왔다.훤칠한 기럭지에 준수한 얼굴을 가진 남자는 바로 이건이었다.헬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건은 이진의 합법적인 남편인 데다가 두 사람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이진 씨가 니키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건, 혹시 윤이건 씨와 관련이 있는 걸까? 자신이 니키라는 신분을 남편한테 알리고 싶지 않은 건가?’헬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차에 탄 이진은 이건이 혹시라도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다행히 이건은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매우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심지어 이진이 컴퓨터로 기자 회견을 지켜볼지언정 기자 회견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이진은 은근히 한숨을 돌리고는, 눈을 반짝이며 운전대에 놓인 이건의 손을 가볍게 눌렀다.“이건 씨는 제가 무엇을 하든지 모두 지지해 줄 거죠?”“당연하지.”이건은 그녀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다.따분한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이진이기 때문이다.이진의 존재는 이건에게 전부나 다름없다.그러니 이진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이건은 모두 지지할 것이다.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이진은 순식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고는, 평범한 커플처럼 깍지를 낀 채 별장으로 돌아갔다.이진은 그림에 관한 일은 이쯤에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AMC에서 이렇게 행동이 빠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불과 며칠 사이에, AMC는 또 하나의 보석 광고를 따내게 되었던 것이다.그 브랜드는 국제적으로 매우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브랜드 측의 요구도 극히 까다로웠다.하지만 그것은 AMC의 실력을
만만이 이진에게 보낸 디자인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브랜드 관념과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관념에 차이가 있었기에,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었다.이진은 브랜드 측의 수십 년간의 디자인 스타일을 살펴본 후 이 점을 더욱 확신했다.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 이진은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떠올랐다.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제품을 설계하기 위해, 이진은 출장을 구실로 별장을 나섰다.그리고 호텔의 스위트룸에 입주하여 홀로 설계를 하기 시작했다.이진은 뭐든지 완벽하게 해내려는 성격이다.앞으로 며칠간, 이진은 외계와 연락을 끊은 채 디자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만만은 이진과 연락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협력 측에서 재촉을 해오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모든 스트레스를 홀로 무릅쓰게 된 만만은 며칠 사이에 확연히 말랐다. 한편 커다란 회의실 내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만만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회사를 대표하여 말했다.“정민우 씨, 저희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이번 디자인은 분명 당신들의 마음에 들 것입니다.”“정말 장담하시나요?”정민우는 좀처럼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보지 못하자,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만약 저희가 시간을 드렸는데도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설계해 내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누가 부담할 건가요?”“저희는.”만만이 이를 악물고 약속을 하려던 참에, 전화 벨 소리가 울려 분위기를 완화시켰다.전화를 본 만만은 눈을 반짝이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대표님.”“디자인은 이미 네 이메일로 보냈어. 이번엔 문제가 없을 거야.”이진의 침착한 목소리를 듣자 만만은 그제야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다.특히 메일을 열어 이진이 보내온 작품을 본 만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보석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만만조차도 이 디자인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정민우 씨가 이번마저도 만
“대표님.”만만은 묻고 싶었던 것이 가득했으나, 결국 빙빙 돌려서 말했다.“대표님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에요. 요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디자인은.”‘설마 정말 대표님이 직접 설계한 건가? 아니면 대표님이 이렇게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날 리가 없잖아.’이진은 만만이 하려는 말을 대충 짐작하였는지, 만만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요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긴 했어. 조금이라도 빨리 디자인을 완성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밤새 고민을 했었거든. 안 그러면 아직도 디자인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야.”만만이 진짜 묻고자 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다.“또 할 얘기가 있는 거야?”이진은 만만에게 계속 입을 열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이진의 피곤함이 가득 찬 얼굴을 보자, 만만은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보석 디자이너가 대표님이든 말든, 완벽한 디자인을 가져오신 건 정말 대단하신 거야. 게다가 대표님이 진짜 디자이너라 할지라도, 말하지 않으시는 건 분명 따로 이유가 있으실 거야. 난 비서로서 대표님의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돼. 대표님께서 말씀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언젠간 나한테 말해주실 거야.’만만은 이런 생각에 회의실에서 나와 이진에게 빈 공간을 남겨주었다.이진이 겨우 지탱하던 몸은 만만이 떠나자마자 무너지고 말았다.며칠째 불규칙한 식사에 일에 몰두한 것도 모자라, 수면 부족까지 겹쳐 이진의 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이진은 머리가 어지러워 미간을 비비며 얼른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사실이 증명하다시피 몸을 맘대로 써버리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한바탕 검사를 마친 후, 의사는 이진이 과로로 인한 저혈당이라고 말해주었다. 의사는 이진이 안도하는 표정을 보고 부드럽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혈당이 큰 문제는 아니라, 제가 말한 대로 건강을 챙기신다면 곧 나아지실 거예요.”이진도 의사로서 저혈당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사실 이진은 다름 아니라 이
결혼식 날짜는 8월 초로 정해졌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될 예정이다.웨딩드레스 가게에서 청혼한 이건의 이야기는 곧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었다.이건이 바라던 대로,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진이 윤이건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은 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했다.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두 사람은 친한 지인들 외에 회사 직원들만 초대했다.윤이건의 가족들은 보기 드물게 모두 현장에 참석했지만, 이진 쪽은 텅 비어 있었다.한편 이씨 가문은 여전히 다툼이 지속되고 있었다.“이것 봐! 내가 애초에 뭐라 그랬어? 이진 그년이 양심 없는 년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이제 알겠지? 그년은 결혼식처럼 중요한 날조차 아버지인 당신을 부르지 않았어. 이기태, 정말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백윤정은 노발대발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에게는 예전의 자애로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달려들어 이기태를 때리려고 들었다.이기태는 화가 난 마음에 백윤정을 밀어냈다.“좀 저리 꺼져!”‘그래봤자 이진이는 내 친 딸인데,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된 건 모두 백윤정 때문이잖아. 백윤정이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진이를 그렇게 대했겠어? 백윤정이 자꾸 끼어들어 모순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진도 날 이렇게까지 미워하진 않았을 거야.’물론 이기태의 눈에는 그저 이익밖에 없다. 그가 후회하는 건 오직 이진을 통해 이건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뿐이다.지금의 이기태는 백윤정과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매일 싸우기 바빴다.이기태는 결혼식이 끝날 때가 되자 뻔뻔스럽게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이기태 씨, 전에 제가 전화를 끊을 때 했던 말을 잊으신 거예요?”이기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 들려왔다.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더니 그제야 기억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진, 너!”
보통 사람이라면 분명 시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이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이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을 듣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윤이건 씨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시언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리고 힘겹게 한 마디 물었다.“제가 몇 년 더 빨리 나타났다면.”“그래도 결과는 똑같아요.”이진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말을 마친 뒤, 이진은 더 이상 시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건을 향해 걸어갔다.애초에 이진은 시우가 이 연회를 통해 정희와의 결혼 소식을 발표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진은 마침내 시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이진은 이건의 가슴에 기대어 말했다.“이건 씨, 저 해외여행 가고 싶어요.”“해외여행?”이건은 원래 뭔가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이진을 데리고 출국할 생각이었다.이진이 먼저 제기한 이상, 이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진을 껴안고 말했다.“그래,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이를 위해 이건은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모든 일들 미뤘다. 하지만 이건의 원래 계획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YS그룹에는 이건이 직접 처리해야 될 큰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이건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진을 데리고 해외로 여행을 간 것이다.이 소식을 전해 들은 YS그룹의 고위층들은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건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쨌든 프로젝트는 끝내고 가야지.하지만 이건의 대답은 그저 한마디뿐이었다. 결혼식을 마친 후.결혼식을 마친 후, 이건은 분명 이진과의 아이를 돌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그러기에 앞으로 일에 전념하는 시간은 점점 적어질 게 뻔했다.옆에 있던 이진은 한쪽에 놓인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리는 것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너무 충동적인 건 아니겠지? 이건 씨는 날
이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남학생을 꼬드겼다는 건 무슨 말이야?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는 데다가, 시우 씨의 동생인 건 아예 모르던 일이야. 도대체 이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이진은 화를 내며 이건을 노려보았다.“제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다고 그래요. 전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거든요.”“정말이야?”이건은 일부러 장난친 거다. 사실 메시지를 보고 불쾌한 기분이 조금 들었는데, 이진의 반응은 그를 매우 기쁘게 했다.이건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그렇다면 자기 마음속에는 나밖에 없다는 거지?”‘그럼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겠네. 시우 이놈은 겁도 없네, 감히 내 아내더러 자기 사촌 동생을 위로해달라는 거야?’이건은 차갑게 웃으며 이진의 핸드폰을 가지고 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시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진 씨, 제가 보낸 메시지를 보셨나요? 저도 어쩔 수 없어서 연락을 드린 거예요.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밤새 이진 씨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또 뭐 했는데?”이건은 그의 말을 끊은 뒤 질투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네 사촌 동생이 대단한 사랑꾼인가 봐.”‘윤이건?’전화 너머의 시우는 하마터면 심장이 터질 뻔했다.“이건아, 이진 씨 핸드폰이 왜 네 손에 있는 거야? 난.”“나랑 이진이가 부부인 걸 잊은 거야?”이건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내 아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럼 내 아내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직접 가서 위로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동의할지 말지는 둘째 치고, 이진이 정말 간다고 해도 네 동생이 괜찮아질 리는 없어.”마침 뭔가 생각난 이건은 잠시 망설이더니 협박하듯이 말했다.“술에서 깨면 네 동생한테 전해. 어제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이건은 다른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에게 들러붙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이
‘윤이건? 윤이건이 어떻게?’시언은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그와 시우는 사촌 형제이기에, 이건과 시우가 친한 친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이건은 이미 결혼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설마.’시언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건과 이진이 어떤 사이든, 이진이 이건을 얼마나 의지하든, 그는 자신이 이진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시언은 몸 옆에 늘어진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이때 정신을 차린 그는 앞으로 나아가, 이건의 앞길을 막고 환한 미소를 선보였다.“윤 대표님, 전 민시언입니다. 시우 형의 사촌 동생이에요. 시우 형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니 너무 영광입니다. 혹시 이진 씨랑은.”“이건 씨, 나 돌아가고 싶어요.”시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진은 취기를 못 이겨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이건의 차가운 표정은 순식간에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이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이진을 안았다. 그리고 시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진을 조수석에 태웠다. 세심하게 안전벨트를 맨 후 무심코 뒤쪽을 스쳐보자, 시언은 방금 자세를 유지한 채 제 자리에 서 있었다.“이건 씨, 얼른 돌아가요.”이진은 아직도 이건에게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이건은 시선을 돌려 이진의 희고 정교한 얼굴을 보자 계획이 하나 떠올랐다.‘그동안 결혼식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데, 반드시 전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결혼식을 선물해 줄게.’이건이 직접 이진을 데려간 것을 목격한 시언은, 정신을 잃은 듯이 축 처진 채로 시우의 아파트를 찾았다. “민시언?”시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언을 보자 조금 놀란 듯했다.“네가 이곳엔 왜 온 거야?”시언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형, 술 한잔하실 래요?”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났기에 술 한잔하는 것쯤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하지만 시우는 정희와 함께 임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최근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시언의 상
하룻밤 푹 자고 난 뒤, 다음날 아침 이진은 호텔에서 출발해 학교로 갔다.서현도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을 무척 중시하였다. 그녀는 이진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수업을 오후로 미뤘다.카페에 앉은 서현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대표님, 제가 오만해 보이긴 해도, 평범한 작가들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거든요. 제가 쓴 시나리오를 대중들에게 알려, 널리 선보이는 게 제 꿈이에요. 하지만 제가 글을 쓸 때에는 저만의 요구가 있기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서현의 요구는 별로 지나치진 않았다. 그저 세훈이 제기했던 요구처럼 원칙적인 문제에 관한 것들이다. 이 방면의 문제는 서현이 말하지 않아도 이진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이진이 바로 동의하자 서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진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전에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서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너무 지나친 행동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이진 씨처럼 훌륭하신 분을 놓치게 되었을 지도 몰라.’ 세부사항을 토론한 후, 이진은 세훈과 서현을 데리고 원작자를 찾아가 판권을 따냈다.그 후 배우의 캐스팅으로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엄청나게 심혈을 기울였다. 배우들의 캐릭터 소화는 물론, 배우들 사이의 호흡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몇 달 후, 영화는 이건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상영되었다.의 원작 팬이 워낙 많았고, 호기심으로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영화관을 나설 때 모두 영화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개봉 첫날, 전국의 영화관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심지어 대부분 영화관에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상영하였다.개봉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는 수십 년간 1위를 차지했던 영화를 뛰어넘기도 했다.이 영화의 촬영 제작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도 엄청난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그들은 마치 다크호스처럼 갑자기 대중들의 시선 속에 나
이진은 말을 마친 후 정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떠났다.“이진아, 넌 저분이 동의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한참을 걸은 뒤 정희가 호기심에 물었다.이진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현이 딱 봐도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있는 작가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데, 굳이 모욕을 당하면서 저 여자를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내가 연예계에 아는 사람이 꽤나 있는데, 그냥 이서현 말고 다른 작가 소개해 줄까?”“아직은 필요 없어.”이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아마 날 거절하지 않을 거야.”이진이 거절한 이상 정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정희가 포기한 채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앞에서 엄청난 비주얼을 가진 키 큰 남학생이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예쁜 누나들, 어디 가시려는 거예요?”두 사람을 향해 한 말이지만, 남학생은 줄곧 이진을 훔쳐보고 있었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학생, 지금 대시하는 거예요?”생각이 들통난 남학생은 부인하기는커녕 겸연쩍은 듯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누나들은 저희 학교 학생이 아닌 것 같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연락처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두 사람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시려는 거예요? 생각보다 욕심이 많으시네요.”정희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장난을 쳤다.그러자 남학생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용기를 내어 이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누나, 전화번호 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귀찮게 굴진 않을 게요!”‘지금 충분히 귀찮은 것 같은데.’이진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깔끔하게 거절했다.“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네요.”난생처음 대시를 시도해 본 남학생은, 자신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남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옆에 있던 정희는 차마 이대로 지나치기 힘들어, 가방에서 이진의 명함을 한 장 꺼내 남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연락처는
이진은 자신의 가장 진실된 생각을 전한 것은 물론, 판권을 반드시 따내려는 결심으로 원작자를 두 번이나 찾아갔다. 결국 원작자는 그녀에게 한 번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진은 이번 기회를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전에 조사한 자료들을 들고 사람을 찾으러 대학으로 향했다.그녀 스스로 배역을 연구하는 것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이진은 전문적인 작가를 찾아야 했다. 현재 대학교 교수인 이서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출발하기 전에 이진은 특별히 학교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현의 수업시간표를 찾았다. 그리고 교장에게 부탁하여 수업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이진의 신분을 알게 된 교장은, 단번에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두 손 두 발 들어 환영했다.한편 이 일을 알게 된 정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애초에 이진이 연예계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 경제 뉴스밖에 안 보던 이진이 정말 영화를 찍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진심이었던 거야? 왜 갑자기 영화를 찍으려는 거지?’정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진아, 네가 의 판권을 따내 영화로 제작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야?”“내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비행기 탑승 시간이 10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진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너 지금 공항이야?”눈치 빠른 정희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한가하던 정희는 이진을 따라 서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우리 이진이가 갑자기 영화를 찍다니,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어.’정희는 결정을 내린 듯이 말했다.“이진아, 좀만 기다려 금방 갈게!”정희는 줄곧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성격이라, 이진은 핸드폰을 거두고 방금 정희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비행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착륙했다.이진은 택시를 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전에 알아보았던 수업시간표를 따라 강의실을 찾았다. 분명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시간
이진은 별장을 나선 뒤 홀로 국장의 집으로 향했다.공교롭게도 여태껏 이진을 만나보고 싶어 하던 가정의도 국장의 집에 있었다.하지만 연이은 실패로 가정의도 이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이진은 엄청 겸손한 데다가 이건의 아내다. 그녀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외부에 자신의 실력을 알릴 생각이 없다면, 가정의도 더 이상 묻진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자리에 앉은 후, 국장의 건강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기 시작했다.옆에 있던 국장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때때로 몇 마디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이진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많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국장은 모든 의견들을 자세히 기록하였다.모든 이야기를 마친 후, 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모두 이진 씨 덕분이에요. 이진 씨가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가 고질병 때문에 죽을 때까지 고생했을 거예요. 어쩌면 어느 날 갑자기.”“국장님, 곧 괜찮아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이진은 국장의 말을 얼른 끊은 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게다가 할아버지의 친구분이시니, 제가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엔 제가 생각이 짧은 데다가 일 때문에 바쁘다 보니, 줄곧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너무 탓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탓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나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고마워하기도 모자랄 판에 탓할 리가 있겠어?’마을의 개발 프로젝트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이진도 마찬가지로 세훈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이 대표님,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워낙 조건이 후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진심 어린 이야기를 마친 후, 세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저한테 특별한 요구가 하나 있는데, 이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어요.”“어떤 요구죠?”이진은 호기심에 눈썹을 찡긋거렸다.세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께서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괜한 추측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
오 감독은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진에게 사과하기로 한 것이다.이진은 전에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들었던 감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작품마저 몇 개 없는 신인 감독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 감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나처럼 유명한 감독을 마다하고 신인 감독과 합작한다는 거야? 내가 그동안 받은 상이 얼마인데! 이진 그년은 분명 사람 보는 눈이 삐뚤어진 거야! 신인 감독 주제에 얼마나 잘 찍을지 똑똑히 지켜봐야겠어.’오 감독은 불만이 가득했으나 자신의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진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모두 이진이 예상했던 대로다. 전화를 받은 순간, 이진은 만만에게 눈빛을 보내 모 플랫폼에서 생방송을 시작했다.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오 감독은, 애써 웃으며 이진의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이진 씨, 전엔 제가 너무 무례한 행동을 보였던 것 같네요. 의 촬영을 양세훈한테 맡길 생각인 거죠? 제가 양 감독을 소개해 줄 테니, 실시간 검색어의 글들을 내려 주시면.”“글을 내려달라고요?”이진은 오 감독이 뜻밖의 비장 카드라도 쥐고 있는 줄 알았다. 그가 이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지금 말 같지 않은 조건으로 나와 협상하려는 거야?’이진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고는 비꼬듯이 입을 열었다.“오 감독님, 본인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잊으신 거예요? 지금 저한테 조건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사과를 하셔야죠. 제가 양세훈 감독님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만, 제 방식대로 촬영에 참여하도록 설득시킬 것이니, 당신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신,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넘어가지 그래?”오 감독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모욕을 당했기에, 이대로 참고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위선적인 모습을 집어치우더니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내가 굽신거려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모두 윤이건 덕분이라는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마 윤 대표한테 들러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