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패요?”나는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전에 우지훈이 자기가 배씨 가문의 사생아라고 했을 때 옥패가 그 증거라고 했었다. 그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남겨준 것이고 배건호가 자기 어머니에게 사랑의 증표로 준 것이라며 밝혔었다.설마 전에 배인호가 해외로 나간 것이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걸까?그때 나도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었지만 급하게 그에게 연락할 일도 없었다.“응. 이 일은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자. 민설아의 이쪽에서의 배경이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래서 여기에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넌 로아와 승현이 잘 돌보고 있어. 너희 집 경호할 사람들은 내가 보낼게.”배인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걱정하는 그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는 지금 해외에 있었고 이쪽 상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고용해 나와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었다.나도 그 점은 그가 신경 쓰지 않게 꼭 최선을 다할 것이다. 어느 누구 보다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이들의 엄마인 나였다.현재 우리 사이의 대화는 모두 각자가 처리해야 할 일들을 위주로 이어졌다. 분위기도 마치 친구 같았고 어떠한 감정의 얽매임도 없는 이런 느낌이 나는 아주 편했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는 아이들의 일에 대해 그에게 평생 먼저 친아빠라는 걸 밝히지 말라고 한 것이 나는 미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이 그가 나에게 해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전생에 그가 나에게 준 모든 상처를 생각하면 이런 것 들은 모두 당연한 것이었다.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엄마가 언제 돌아왔는지도 몰랐다.방금 나와 배인호의 대화를 엄마는 모두 들은 것 같았다. 안 좋은 표정으로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지영아, 너 빈이 그 아이 입양할 거니?”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네? 엄마 나...”이런 계획은 있었지만 부모님께 말하지는 않았다. 두 분이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로아와 승현이
“이건 그 쪽한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야. 선택 잘해야 해.”나는 정중하게 노민준에게 말했다.그는 사진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숙인 뒤 한참을 고민했다.“알겠어. 다 말할게. 당신은 약속만 지켜 줘.”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노민준의 전 와이프와 아들을 챙겨주는 건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려운 것은 노민준이 민설아에 대해 진술한 뒤 그녀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재판받게 하는 일이었다. 두 번 다시 민설아가 탈출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해외는 민설아의 그라운드였다. 그녀가 치료해 줬던 권력 있는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그녀를 당연히 도와줄 것이다. 해외에서 배인호는 아마도 많은 시간이 거릴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그의 권력을 사용해 민설아에게 벌을 줄 수 있었다.노민준에게서 민설아에 대한 증언을 받기로 야속을 받은 뒤 나는 잠시 서울에 머물기로 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로아와 승현이를 이쪽으로 데려와 달라고 했다. 내가 직접 아이들을 돌보고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회사 일을 처리하셔야 했기에 아빠만 남고 엄마가 돌아가기로 했다.“엄마.”로아와 승현이는 이제 간단한 단어를 말할 수 있었다. 엄마는 아이들이 매일 가장 많이 부르는 호칭이었다.나는 로아를 안아 무릎에 앉혔고 승현이는 매트에서 기어다니며 다양한 자동차 장난감에 관심이 많아 집중하며 놀고 있었다.남자아이들은 자동차, 로봇, 비행기 등 이런 종류의 장난감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에 비해 여자아이들은 부드러운 촉감의 털 인형이나 바비인형들을 좋아했다. 로아는 특히 딸기 그림이 그려진 핑크색 담요를 안고 있는 걸 좋아했다. 로아가 어디에 있든지 담요는 항상 함께 있었다. 지금 내 무릎에 앉아 있으면서도 담요를 꽉 움켜쥐고 있는 작은 손을 풀지 않았다.이때 화면이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여 나는 결국 핸드폰을 들어 귀여운 두 녀석을 찍었다. 그런 다음 친구들 4명이 있는 단톡방에 올린 뒤 엄마에게도 보내드렸다. 엄마도 멀리서 사진으로 남아 귀여운
그 점에 대해 나도 생각해 봤다. 난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기에 입양할 적절한 이유가 없었다. 나에 비해 배인호가 더 적합했다.“좋아요. 인호 씨가 나를 도와 입양하는 것도 괜찮아요. 인호 씨는 그저 나를 대신해서 입양만 해줘요.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대답은 했지만 배인호가 거절할까 봐 내심 걱정되었다. 이건 그가 나를 도와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그의 일이 된 것 같은 상황이라 조금 선을 넘은 것 같았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민설아의 일을 그쪽에서 처리한 뒤 내가 직접 빈이를 입양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하지만 배인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내가 어떤 요구를 해도 별다른 조건 없이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배인호 씨, 귀찮지 않아요? 이 일들 모두 인호 씨가 나 대신 처리해 줘야 해요.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핸드폰에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귀찮다고 생각 안 해.”“왜요? 인호 씨는 이미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잖아요. 내가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설마 로아와 승현이 때문에 그래요?”너무 의외라 조금 집요하게 그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었다.배인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의 추측을 부정했다.“그런 건 아니야. 로아와 승현이가 내 아이들이 아니라고 해도 난 너 대신 네가 원하는 걸 해줬을 거야. 네 비밀을 알기 전부터 난 이미 결정했었고 네 비밀을 안 뒤로는 그 결정이 더 확고해졌어.”배인호의 진심 어린 순간 나의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인정한다. 예전에 그는 정말 싫어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그의 다정한 배려를 얻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나는 다시 태어났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10년 동안 배인호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섬세한 부분에서 나를 감동하게 할 때면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감정이 다시 올라
이우범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현재 그의 집안 상황과 회사일 심지어 그의 부상까지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그가 나의 말을 이렇게까지 잘 들을 줄은 몰랐다. 전에 내가 그와 배인호 사이의 싸움을 말리면서 계속 싸우다가는 두 사람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고 몇 마디 거친 말로 위협했었고 그는 이에 동의했었다.이런 상황인 줄도 모르고 나는 이우범이 날 보러 오지 않아 서운해했었다. 내가 다쳐도 이젠 전처럼 관심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지훈에게서 이우범의 상황을 모두 들은 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움찔거렸다. 마음속에 엄청난 죄책감과 걱정이 몰려왔다.“지금 외국에서 수술받고 있는데 우범이한테 가볼 생각 없어요?”우진훈이 물었다.“어디에 있는데요?”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물었다.우지훈은 나에게 이 사실만 알려주고 다른 건 말할 생각이 없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그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고 나도 다시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이우범의 전화번호를 찾긴 했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어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만약 그가 진심으로 다시 의사를 할 계획이 있는 거라면 그에게 손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었다. 수술을 할 수 없게 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하지만 그에게 전화를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가 죄책감 때문에 그를 보러 가겠다고 대답할까 봐 두려웠다. 겨우 안정된 관계가 또다시 혼란스러워질 것 같아 걱정되었다.나는 이 사실을 정아와 친구들에게 말했고 그녀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세희가 제일 먼저 답장을 주었다.지금 영국에 있대. 내가 가서 만났었어.나는 세희가 영국에 있는지 몰랐다. 십중팔구 이모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우범과 마주친 것일까?이때 세희에게서 전화가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나는 이모건이 다쳐서 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이우범을 우연히 만났다는 것을 알
“아빠 이 일에 대해서는 난 배인호를 믿어요.”나는 진지하게 아빠의 질문에 대답했다. 비록 아빠는 화를 냈지만 배인호가 나를 위해 해준 모든 일을 나는 가슴속에 기억했다.언제는 원한은 명확했다. 빈이의 일에서는 그는 내게 아무런 미안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위해 계속 양보했고 심지어 자기가 다른 남자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숨기며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민설아가 직접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 문제를 이용해 빈이의 양육권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지금 이 상황이 조금 익숙했다. 내가 배인호에게 푹 빠졌을 때 우리 부모님은 반대하셨고 나는 배인호가 반드시 나의 사랑에 감동받을 거라는 말로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것과 같았다.지금 나의 모습이 몇 년 전 멍청하게 굴던 때와 비슷해 보였는지 아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지영아, 너 그때 배인호하고 어떻게 이혼했는지 잊었어? 예전에 배인호가 널 어떻게 대했는지 모두 잊은 거니? 어떻게 그놈을 믿을 수 있어?”부모님은 배인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다. 두 분은 아주 밝은 사람들이었지만 배인호의 일에서만큼은 항상 고집스러웠다. 가끔 이해되면 상관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다시 그에게 빠지는 듯해 보이자 다급하게 말리셨다.“안 잊었어요. 그리고 다시 인호 씨와 만나고 싶은 생각 없어요. 난 그저 인호 씨가 나를 도와서 빈이를 입양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에요. 지금 내 상황으로는 입양은 힘들어요. 그리고 보육원에 민설아가 아는 사람도 있고요. 걸림돌이 많은 상황이에요.”설명했지만 아빠는 더 듣지 않으셨다. 아빠는 이렇게 가다가는 내가 결국 다시 배인호와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대화를 나누다 보니 부녀 사이에 기분이 모두 상했다. 분명 좋은 소식을 내게 전해주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아빠는 결국 나 때문에 화가 나셨고 엄마에게 전화해 고자질까지 했다.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아직도 엄마에게 투덜대고 있는 아빠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렸다. 아빠는 깜짝 놀라며
“우지훈 씨 시간 있으면 정신과나 가봐요.”나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우지훈은 미친 듯이 나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고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차단했다.하지만 나는 이미 영국에 도착한 아빠가 걱정되었다. 만약 이우범을 만났다면 일찍 돌아오시길 바랐다.“괜찮아. 지금 우범이한테 왔어. 근데 너무 걱정되는구나. 우범이 수술 마치고 2, 3일 뒤에 별문제 없으면 그때 돌아가마.”아빠는 나의 전화를 받은 뒤 2, 3일 더 있다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우범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다. 아빠는 마음속으로 항상 이우범에게 미안해하고 계셨다.부모님 모두 한평생 누군가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사신 적이 없었지만 이우범에게는 두 분 모두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이건 나도 마찬가지다.배인호가 나를 도와주는 건 나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했지만 이우범은 내게 아무런 빚을 진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많은 것을 나를 위해 희생했다.아무리 그가 원해서 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양심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그러세요. 오빠 세희 전화번호 알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세희한테 전화하세요. 세희가 아빠를 도와줄 거예요.”나는 아빠에게 당부했다.“그래.”아빠가 대답했다.이우범이 수술을 받은 날 아빠는 내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문자를 보내줬다. 하지만 회복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아빠와 대화를 더 나누려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도우미가 나가서 보더니 내게 다가와 물었다.“아가씨, 배 대표님께서 찾으시는데요.”그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배인호?그가 어떻게 돌아온 거지. 거기다 나에게 말도 없이?“들어오라고 하세요.”나는 도우미에게 말했다. 이틀 동안 배인호와 연락이 없었다. 해외에[서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항상 나에게 알려줬기에 나도 재촉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돌아왔다고 하니 나는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 그는 좀 더 시간이 걸린다고 했었는데 설마... 빈이를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나는 배인호와 더 그 문제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그 문제에 있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하늘의 정해진 운명일 뿐이었다.내가 말아 없자 배인호도 현명하게 이 화제를 중단했다. 더 이상 얘기하면 문제가 더 커질 뿐이었다.“민설아가 전에 사람을 고용해서 널 죽이려고 했다던데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그는 또 다른 문제를 언급했다.이우범이 나 대신 다쳤을 때 그에게 얘기했었지만 그때는 증거가 없었기에 민설아와 관련되었다는 걸 증명할 수 없었다.그 뒤로는 다른 일들이 생겨서 노민준이 민설아가 사주한 일이라고 증언했다는 걸 배인호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뭘 더 논의할 게 있어요? 민설아는 방법을 생각해서 해외로 갔으니 나도 방법을 생각해서 민설아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와야죠.”민설아는 원래 나를 독살하려고 한 사건으로 한국에서 재판받아야 했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해외로 환송되었다. 결국 그녀는 법을 어기고도 법정 제재를 벗어났다.“그 일은 내가 해결하는 게 좋을 거야. 나한테 그렇게 명확하게 선 그을 필요 없어.”배인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의 일 처리 능력이 나보다 훨씬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미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이번 일은 내가 직접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이제 나는 배인호가 적인 것 같기도 하면서 친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이에 모순이 많았고 적이라고 하기에는 협력 관게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나도 알아요. 근데 더 이상 인호 씨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비록 전생에서 배인호가 나에게 미안한 일을 많이 했지만 내가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바로 나와 결혼할 때부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서란을 사랑하게 된 다음에는 아주 솔직하게 내게 말했었고 경제적인 보상도 해주겠다고 했었다.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집요했다.
배인호가 로아를 안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두 아이가 나중에 아빠를 알아보고 아이들 때문에 그와 계속 얽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빠의 사랑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특히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의 사랑을 받는 것은 큰 힘이 있는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기에 아빠가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배인호는 살짝 딸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아를 안고 나서는 승현이보다 더 사랑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목소리가 크면 로아가 놀랄까 봐 더 부드러워졌다.이때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도우미가 다가와 식사하라고 말했다.“내가 로안 안고 밥 먹을게.”배인호는 내게 말했다. 지금 두 아이 모두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자 식탁 의자가 있었다. 승현이는 이미 도우미가 안아 의자에 앉힌 뒤 이유식을 먹여주고 있었다.로아는 조금 어리광이 많았기에 배인호의 품에서 나오기를 거부했다. 배인호는 로아를 무릎에 앉힌 뒤 한 손으로 숟가락을 잡고서는 먹여 주기 시작했다. 그 자세가 꽤 안정적이어서 나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아빠.”로아는 아주 입에 꿀을 바른 것 같았다. 배인호가 두 숟가락 밥을 먹여주니 갑자기 달콤한 목소리로 배인호를 불렀다. 나는 그 한마디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배인호의 표정은 살짝 흥분한 것이 분명했지만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여 로아의 작은 얼굴에 뽀뽀했다.바로 이때 다이닝룸 문이 열리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영아, 엄마가 걱정돼서 왔어. 네 아빠 우범이한테 갔다며 그래서 내가 회사 며칠 쉬기로 하고 왔지...”엄마는 말하며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엄마는 나와 배인호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멈칫했다. 표정이 점점 안 좋게 변해갔다.“엄마.”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