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춤을 추지 않아서 그런지 음악에 따라 움직이는 내 몸이 조금은 굳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알코올의 힘으로 용기가 생겼고 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천천히 절주에 맞출 수 있었다.누군가가 나를 향해 장미를 던져 왔다. 나는 그 장미를 주워 들었고 사람들의 호응 하에 스웨터의 끝부분을 말아 속옷 아래로 밀어 넣어 하얀 허리를 드러내고는 장미를 청바지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빨간 장미가 하얀 피부와 선명하게 비교되었고 그것은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에 남자들의 흥분된 함성이 들려왔다.나는 모두가 나에게 주목하는 느낌을 되찾았고 그 느낌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알코올이 점점 신경을 마비시켰고 나는 옷을 더 위로 올리려 했다. 놀란 정아와 애들이 다급하게 나를 향해 뛰어왔다.순간 모든 조명이 꺼졌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추던 춤을 멈췄고 까만 그림자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그림자는 이를 갈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이런 젠장. 허지영 너 죽고 싶어 안달 났구나.”배인호였다. 바의 전기를 끊은 것도 그가 시킨 짓일 것이다.‘서란이 옆에 없었나? 배인호가 이렇게 와서 나를 멈춰 세우는데 서란은 막을 생각 안 한 건가?’“인호 씨!”서란의 목소리가 인파속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전화기의 플래시를 켰다. 하지만 그 불빛이 무대를 향하진 않았고 밖으로 향하고 있어 내 쪽은 아직 어둠속이었다.배인호가 한 손으로 내 팔을 잡고 간신히 화를 참아 내고 있었다. 서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가 본능적으로 말했다.“나.”나는 까치발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 배인호의 목을 휘감았고 정확히 그의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하려던 말은 나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묻혔다.그는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알코올의 작용하에 나는 더 대담하게 그의 손을 잡아 내 가슴에 올려놓았다.한 사람이라도 플래시를 이쪽으로 비춘다면 이 뜨거운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스릴 넘치는 환경 속에서도 이상하게 배인호는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오히려 벌을 주듯 나를 거세게 잡았고 더
나는 비닐봉지를 받아서 들었다. 겉보기엔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 못해 보였지만 깨끗하고 싱싱해 보였다. 나는 전혀 싫지 않았고 그녀와 서중석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사람은 밖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집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으니 말이다.“아주머니 고마워요. 이 일은 아주머니도 모르고 있었잖아요. 아주머니 잘못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아이고, 사모님이 착해서 그래요. 원석이 걔가 원래 욱하는 성격이라 전에도 사고 많이 치곤 했었는데 이번에 또 이러니 형수가 돼서 대신 사과하는 거 빼고는 할 게 없네요.”윤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 배인호와 서란 사이의 일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원석 얘기만 할 리가 없었다.윤선은 나와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윤선에게 밥 먹고 가라고 했지만, 그녀가 한사코 거절했다. 윤선이 가기 전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아주머니, 아는 사람 중에 혹시 스무 살 조금 넘은 여자애 있어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성격은 좋은데 여자친구를 못 찾아서 저한테 소개해 달라고 하는데 제가 아는 사람이 있어야죠!”“사모님, 저도 마땅한 사람이 없네요. 제가 있을 수가 있나요?”윤선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주머니 따님 대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친구 많을 텐데. 다들 꽃 같은 나인데 만약 따님분 남자 친구 없으면 소개해 주고 싶거든요. 제 친구 진짜 괜찮은 애예요.”내가 아쉬워하며 말했다.윤선이 말을 하려다 말았고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내 딸 요새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요즘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누군지는 안 알려주려고 하더라고요.”‘서란이 먼저 가족들한테 정보를 흘렸다고?’나는 많이 놀랐다. 그렇게 고분고분한 여자애가 부모님들 목덜미 잡고 쓰러질까 무섭지도 않은 건가?전생에 그녀가 먼저 집에 관계를 공개한 건지 아니면 배인호가 강압적으로 그녀의 부모 앞에 나타
“유치하긴.”배인호가 차갑게 내뱉고는 까만색 패딩으로 갈아입고 비니를 쓰고는 밖으로 나갔다.나도 그 뒤를 따라 목도리를 두르고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눈덩이를 굴렸다.눈은 아주 차가웠고 내 손은 이내 얼어서 빨개졌다. 도우미가 장갑을 가져다줬고 나는 장갑을 끼고 눈덩이를 계속 굴렸다. 배인호는 옆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눈사람 같이 만들자고 했지, 눈사람 만드는 거 봐 달라고는 안 했어요.”나는 뾰로통해서 말했다.“아직도 세 살짜리 애라고 생각해?”배인호가 불쾌한 듯 되물었다.“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이렇게 유치하게 눈사람이나 만들어?”‘이런 젠장, 전생에 서란이랑 눈사람 만들 때도 이렇게 말이 많았던 건가?’화간 난 내가 눈을 한 줌 집어 들어 막무가내로 배인호의 몸에 던졌다.배인호가 맞은 곳을 훌훌 털더니 질세라 눈을 집어 들어 나에게 뿌렸다.우리 둘은 눈싸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인호의 손힘이 더 강했고 나를 명중할 때마다 나는 당황해서 계속 삐끗했다.진 게 마음에 안 든 나는 배인호가 허리를 굽혀 눈을 잡을 때 눈덩이로 거의 머리를 명중했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화난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허.지.영!”“한번 때려보든지!”내가 손가락을 흔들어 그를 도발했고 자지러지게 웃었다.배인호가 농구공만 한 눈덩이를 집어 들더니 머리 위로 올려 복수하려 했다. 나는 기회를 엿보고는 신속하게 거의 품으로 들어갔고 그의 허리를 세게 휘감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때려봐요. 때려죽이면 서란이랑 결혼도 하고 좋잖아요!”눈꽃이 나의 얼굴에, 속눈썹에,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에 떨어졌다. 그는 머리를 숙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나무랄 데 없이 너무나 예뻤다.분위기가 굳어지는 듯했고 나와 배인호의 시선이 뒤엉켰다. 그를 10년이나 사랑했고 여러 번 살을 나눴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애교를 부리고 투정을 부린 건 처음이었다.서란 보다 앞서기 위해 그런 건지 아니면 그 핑계로 가엾은 나를 보상하는 건지 나도 잘 모
나는 예감이 들었다. 서란은 이미 배인호에게 마음이 갔다는 것을 말이다.‘전생보다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 내가 중간에 껴서 그런 걸까?’'좋아요' 를 누르고 싶었지만, 서란이 배인호도 팔로우했으면 내가 일부러 '좋아요' 를 누른 걸 보고 나를 귀찮게 할 것 같았다.‘그만두자. 그들은 원래도 사귈 운명이야.’나는 전화기를 놓아두고 비비를 잘 배치하고는 방으로 가 잠을 청했다. 꿈나라에 들기도 전에 이우범이 내게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수락했다. 화면을 보니 호텔인 듯했다. 이우범이 나무 의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수락한 나를 보고는 물었다.“비비는? 말 잘 들어요? 잘 지내요?”나는 이우범에게 이렇게 자상한 면이 있는 줄 몰랐다. 비비는 이우범의 착한 딸과도 같았고 이우범은 그의 아버지 같았다.그리고 그가 아까 던진 질문은 나를 착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우리는 결혼한 지 오래된 금술 좋은 부부고 아이는 말 크는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괜찮아요. 말 잘 들어요. 혼자 화장실도 가던데?’나는 몸을 돌려 침대에 엎드렸고 약간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다행이네. 괜찮으면 요 며칠 애견숍 데려가서 샤워시키고 정기적으로 충도 없애줘야 해요.”이우범의 얼굴이 작은 화면으로 보였고 그는 무심하게 편하게 나에게 당부했다.“나를 너무 시터로 보는 거 아니에요?”나는 이우범을 최대한 무서운 얼굴로 째려봤다.“안 가요. 확 인터넷에 올려서 팔아버릴 수가 있어요!”이우범이 내 말을 듣더니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 그와 배인호는 무표정일 때 도도하고 웃으면 봄바람 같은 사람이었다.다행히 나도 훈남을 많이 거친 여자라 어느 정도는 면역력이 있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이우범이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다가 정신을 차렸다.“왜 웃어요? 진짜 고양이 팔아 버린다니까요.”“한 번 해봐요.”이우범이 약간은 경멸의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나는 그를 흘기고는 말했다.“끊어요. 잘래요!”“할 말 있어요.”이우범이 전화를 끊
밥을 다 먹고 여왕벌 정아는 여전히 흥이 가라앉지 않아 평소처럼 나와 민정이, 세희를 끌고 클럽에 가자고 했다. 앞으로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술집과 클럽이 그녀의 두 번째 집이라고 했다.“하, 고작 남자일 뿐이잖아. 너희들 봐봐, 여기 다 남자잖아?”그녀는 술잔을 흔들며 턱을 세우고 술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남자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만약 정아처럼 남자를 돌 보듯 했다면 어젯밤에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꿈에서 내가 배인호와 결혼하던 날, 나의 얼굴만 서란의 얼굴로 바뀌고 배인호는 차가웠던 얼굴을 바꾸고 ‘나’에게 아주 부드러웠고 눈빛에 빠져 버릴 것 같았다.이건 악몽 아닌가? 나는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지영아, 저번에, 클럽에서 췄던 춤 너무 섹시했는데, 오늘도 출래?”민정이는 갑자기 해맑게 웃었다.“맞아, 그리고 배인호 그 자식이 너 데려갔잖아?”정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남자들은 다 그래, 집에 있는 꽃이 향긋한 걸 모르다가 갑자기 들꽃으로 변하면 그건 또 싫어하고.”세희도 그 관점에 동의하며 말했다.“그날, 그 여자애가 배인호가 쫓아다닌다는 대학생이야? 말할 것도 없이 순수하게 생겼더라, 요즘은 다 그런 순수한 느낌이 인기 있잖아? 내가 딱 보니까 그런 느낌이더라.”그날 배인호와 내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많은 친구와 서란이 술집에 남아 있었고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서란이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만 알고 있다.“순수하긴 개뿔이!”정아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말했다.“행동거지가 그 모양인데 무슨 소용이야? 유부남하고 엮였는데 확실하게 선도 긋지 않고 클럽에 따라와서 술이나 마시고. 딱 보면 여우야.”“너 그렇게 말하지 마.”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쓰게 웃었다.“배인호가 어떤 사람인지 너 몰라? 서란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이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어.”정아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내 얼굴을 잡더니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지영아, 너 지금
“그렇지?”나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일부러 신비롭게 대답했다. 엄기준은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올렸다. “글쎄요. 하지만 당신이 싱글이었으면 좋겠네요. 저한테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려고 하는 걸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들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친근감이 느껴져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나는 남은 술 원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즐거웠어요, 엄기준 씨. 안녕히 계세요.”엄기준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말을 꺼냈다.“연락처 주시겠어요? 제 진심을 보여드릴게요.”진심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배인호에게 10년 동안 진심이었지만 결과는 여전했다.하지만 나는 엄기준에게 전화번호를 건넸다. 배인호도 그의 공주님을 데리고 놀 수 있는데 나라고 남자를 만나면 안 되나?연락처를 남기고 나는 정아와 애들을 불렀다. 다들 실컷 놀았는지 다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클럽 밖, 찬 바람 속에서 이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매번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부르면 데리러 왔다. 이 기사가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주고 내가 차에 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이 기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내년에 월급 올려드릴게요!”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없이 이 기사는 항상 불만 없이 나의 부탁을 들어줬다. 이 기사는 잠시 경직되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내려 문을 닫았다.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 나를 청담동으로 데려다줬다.집에 도착해서 눈사람을 지나갈 때, 나는 몇 초간 쳐다보다가 눈을 뽑아버렸다.“너와 배인호는 둘 다 장님이야.”나는 중얼거렸다.내가 서란 보다 못 한게 뭐지? 그녀가 어린것 빼곤 없었다.집에 들어가자, 비비의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여운 ‘야옹’ 소리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고양이 집에서 털실 뭉치를 가지고 놀고 있는 비비를 안고 힘차게 뽀뽀하며 인스타에 스토리를 올렸다. 그리고 나는 샤워를 하고 잠을 잤다. 잠자리에
기선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필요하지 않아요.”“왜? 사랑에 상처받았다고 혼자 늙어 죽으려고?”나는 작은 전골을 먹으며 웃었다.“아니... 그저...”기선우는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웃었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새우 몇 개의 껍질을 벗겨 내 그릇에 놓아 줬다. “누나, 너무 말랐어요. 많이 드세요.”나도 너무 마르고 싶지 않은데 왜 늘 살찌는 계획이 잘 안되는지 모르겠다. 환생하고 지금까지 총 2, 3킬로 쪘다가 또 살이 빠지기도 했다.아마도 윤 집사가 너무 일찍 해고 된 것 같다. 그녀가 나에게 계속 식사를 차려줬다면 아마 세 자릿수까지 살이 찌고 글래머스한 몸매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기선우는 나보다 훨씬 어려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조금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예를 들어, 많은 일에 대한 그의 견해는 순진하고 옳고 그름으로 나눴다. 나는 그를 반박하지 않고 그저 그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그러면 기선우는 내가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뷔페를 다 먹고 기선우와 나는 식당을 나왔다. 이 기사가 차를 가져갔기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야 했다.“또 눈 오네.”나는 하늘 곳곳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손을 뻗어 두, 세개 잡아서 자세히 관찰했다.“누나 밀크티 좋아해요?”기선우는 양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말하면서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그는 쌍꺼풀이 있고 상대적으로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대학생의 눈빛은 투명하고 다소 멍청하다고 했는데 기선우와 어울리는 말 같았다. 대학 시절에는 밀크티를 즐겨 마셨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밀크티 한잔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선우는 바로 근처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달려갔고 가게는 손님이 많아 웨이팅 줄이 길었다. 기선우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이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나는 얼어서 빨갛게 된 손을 비비며 주머니
기선우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누나.”나는 서란과의 이별로 기선우도 어느 정도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인생에 지름길이 있다면 왜 굳이 진흙탕 길을 걸어야 하는가?“누나, 저 먼저 갈게요.”잠시 앉았다가 기선우는 뚱땡이를 팔에 안고 일어서서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알았어. 데려다줄게.”나도 일어섰다.기선우는 거듭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냥 나가서 택시 탈 거예요. 밖은 너무 춥고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힘들 거예요. 집에 있는 게 낫겠어요.”나는 고집하지 않고 기선우를 배웅 했다. 비비를 안고 몇 번이고 뽀뽀를 한 다음 비비를 안고 위층으로 데려가 첼로를 연주했다.비비는 배인호보다 착했다. 나의 연주를 시끄러워하지 않고 얌전하게 듣고 있었다. 바깥에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다. 나는 몇 곡 연주한 후 비비를 안고 창틀에 가서 눈을 구경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저택의 가로등은 이미 반짝반짝 빛을 내며 눈 속의 차가움을 비추고 있었다.갑자기 아래층에 가사도우미분이 급하게 뛰어가 큰 출문을 열었고 배인호의 차가 나타났다. 그는 차에서 내려 짜증스럽게 차 문을 쾅 닫고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뇌리에서 번뜩 한 문장이 떠올랐다.‘젠장, 너 기다리고 있어.’ 설마 진짜로 나와 따지려고 그 먼 곳에서 달려온 것일까? 나는 마음속으로 당황했다. 전생에서 나는 그가 집에 들어와 나와 싸우기를 바랬고 나의 헌신을 하나하나 말해 그가 죄책감을 느끼고 나의 옆에 있어 주길 원했다.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와 더 싸우고 싶지 않다. 기껏해야 두세 마디 하면 끝이다.“허지영, 어디 있어?”연습실에서 나오자마자 아래층에서 배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쳐다보니 마침 배인호가 나를 올려다봤다.나는 신속하게 계단을 내려가 2층에 침실로 뛰었다. 배인호도 빠르게 올라와 2층에서 나를 막았다.키가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이니 몇 걸음 만에 달려와 내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