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우가 나를 조금 다르게 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린 소년들의 마음은 더 쉽게 움직이고 진지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문득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만약 기선우가 나에 대한 호감이 점점 깊어진다면 어떻게 하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런 작은 강아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나는 단지 그의 신분을 이용해 내 마음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그가 기꺼이 나와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여전히 고려할 수 있지만 그가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나는 절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내가 생각에 잠겨 혼란스러울 때 배인호가 샤워하고 돌아왔다. 그는 검은 샤워 가운을 입고 가슴을 드러내 가슴의 탄탄하고 섹시한 근육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베개 아래에 놓고 자는 척을 했다.잠시 후, 푹신한 매트리스가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배인호가 내가 좋아하는 샴푸와 바디워시의 향기를 풍겼다.“지금은 왜 게스트 룸에서 안 자요?”나는 그를 등지고 누워 또 따지기 시작했다.“침실에 절반은 내 것이야.”배인호는 차갑게 대답했다.“그러면 왜 내 욕실을 써요? 그리고 내 샴푸하고 바디워시는요?”나는 몸을 돌려 그를 째려보았다.“예전에는 그런 향기 싫어한다고 했잖아요?”또다시 트집을 잡고 싶어 묻는 말이 까다로워졌다.배인호의 얼굴은 여전히 완벽했다. 찌푸린 미간마저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움직였다.“허지영, 너 지금 네가 하는 말 다시 들어 볼래?”한동안 그를 째려보다 그의 눈빛에 조금 화가 풀려 몸을 돌려 잠에 들려 했다.“됐어요. 마음 넓은 내가 양보할게요.”한순간, 한 손이 나의 어깨를 잡고 무자비하게 내 몸을 다시 돌렸다. 나의 얇은 피부가 배인호에게 다 뜯겨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아파, 아파, 아파요. 뭐 하는 거예요?”배인호의 눈이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시선이 나의 입술에서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 나는 배인호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어젯밤에 잠을 전혀 못 잤기에 그저 잠을 보충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 나는 차가 아닌 침대 위에 있었고, 주변 가구들을 살펴보니 이곳은 배인호의 방이었다.나는 이마를 짚으며 일어났다. 어떻게 침대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이때 배인호가 들어와서 내게 물었다.“일어났네? 충분히 잤으면 내려와서 밥 먹어. 다들 기다리고 있어.”“금방 내려갈게요.”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배인호가 방을 나가고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의 전화였다. 오늘이 어머님 생신이니 엄마는 이미 전화를 걸어 축복을 전했을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오늘 어머니 기쁘게 해드리라고 당부하려고 전화한 것이다. 나는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평소에 두 집안 부모님 생신에 서로 문자도 보내고 선물도 서로 보내시고 이렇게 직접 집에 오는 것은 우리가 했다. 전화를 끊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도착하자마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배인호와 시부모님을 제외하고도 일가친척들이 다 앉아 있었다.내가 오는 것을 보고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결혼식을 제외하고는 그의 친척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다.“지영아, 빨리 오너라!”어머님은 아주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이는 레드 드레스를 입으시고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어머니는 내가 자느라고 식사 시간이 미뤄진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고 나에게 손짓하시며 옆에 빈자리에 나를 앉으라고 하셨다. 배인호도 나의 옆에 앉았다.이모님과 다른 분들도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평소에 서로 연락을 많이 하지 않아서 잘 알지 못했다.나는 제꺽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모든 어르신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업계에서 유명한 분들이다. 전생에서 배인호가 우리 가문을 무너뜨릴 때 이분들도 자연스럽게 힘을
“어머님, 마셨어요. 인호 씨가 마셨어요.”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피하고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야릿한 장면들을 제쳐두려고 노력했다.나는 어머님이 한시름 놓으시도록 약을 다른 처방으로 바꿔 가져온 과정과 마신 과정을 어머님에게 모두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배인호와 있었던 일들은 말씀드리지 않았다.“그럼 되었다. 한동안 계속 먹으면 반드시 건강한 손주를 보게 될 거야.”어머님의 미소를 지으시며 갑자기 한마다 덧붙였다.“건강한 손녀면 더 좋고!”나는 가끔 어머님이 귀여웠다. 나의 마음이 상할까 봐 항상 배려해 주셨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환생한 후, 나는 서란도 정말 청순하고 아름다워 보였고 어머님도 귀엽고 친절하셨다. 심지어 차가운 벽 같았던 이우범에게서도 나는 따뜻한 면을 발견했다. 그리고 배인호도 많이 변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통제 불능 상태가 될까?“지영아, 부담 갖지 말아. 아이는 순리에 따르자. 네 아버지와 내가 가끔 손주 손녀들이 부러워 그저 얘기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라.”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님은 내가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머님, 저 괜찮아요. 저도 당연히 빨리 아이가 생겼으면 좋겠어요.”거짓말이다. 배인호와 아이가 생기면 절대로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이런 절망적인 결혼생활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 아이한테도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은 아빠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배인호와 이혼하게 되면 서란이 나를 대신해 시부모님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니 급할 것 없었다.어머님과 얘기를 나누다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배인호가 거실로 돌아와 어린 조카와 놀아 주고 있었다. 그는 두 살배기 아기를 안고 어깨에 앉힌 뒤, 아기의 손을 잡고 날게 하며 뛰어다녔더니 즐겁게 웃는 아기의 웃음소리가 너무 귀여웠다. 나는 약간 멍해졌다. 마치 이다음 배인호가 아이와 놀아주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고 앞으로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았다.단지,
기선우의 답장을 보고 나는 바로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의 원본 카메라를 켜 나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그래, 확실히 예쁘다. 타고난 바탕이든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이든 모두 나쁘지 않았다. 나는 배인호의 앞에서만 열등감을 느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몇 분 후, 나는 이렇게 답장했다. 「그래 요정 같네, 칭찬 고마워.」기선우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고, 그것을 보고 나도 웃었다. 한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너무 졸려서 참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지영아, 지영아?”다음 날 아침, 어머님의 노크 소리에 가 들렸다. 나는 금방 잠에서 깨 몽롱하게 대답했다.“네, 어머님. 무슨 일이세요?”“인호 방에 없니? 차도 안 보이고, 전화도 안 받아!”어머님은 큰소리로 물으셨다.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배인호는 이미 서울시로 돌아갔을 것이다. 단지 부모님께 말하지 않고 떠났을 뿐이다. 나는 하품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 어머님이 문 앞에 계셨다.“어머님, 세화 프로젝트에 급한 일이 있어서 처리하러 어젯밤 한밤중에 급히 돌아갔어요.”나는 배인호를 대신해 변명했다.“그렇구나. 전화를 안 받는 것도 당연하네.”어머님은 조금 의심하시는 듯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그럼 알겠다. 너도 어서 일어나서 밥 먹자. 배고프겠네.”“네, 옷만 바꿔 입고 금방 내려갈게요.”어머님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시고 나는 문을 닫고 배인호에게 문자를 보내 방금 어머님과 나눴던 대화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친척분들은 어젯밤 집에 돌아가셨다, 나만 하룻밤 묵었고, 아버님은 회사에 가셨다. 집에는 어머님과 나, 가사도우미분들이 집에 남아 있었다.어머님과 나는 편하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뜨거운 수프와 갓 구운 빵을 함께 먹었다. 이때 배인호는 나의 메시지에 답했다.「그래, 알겠어.」고맙다는 한마디가 없었
아빠의 얼굴은 몹시 곤란해 보였다. 평소에 잘 피우시지도 않던 담배를 계속 태우고 계셨다. 아빠는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엄마만 바라보셨다.엄마는 눈물을 닦으시며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 내셨다.“너희 아빠 그 요망한 비서랑 바람났어!”요망한 비서? 사진을 집어 자세히 보니 여자가 아주 낯이 익은 것 같더니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 정아와 함께 찻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우연히 아빠를 만났었는데 함께 있었던 비서였다.그때 나는 아빠의 전 비서는 남자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왜 갑자기 여자로 바뀐 것인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믿었고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엄마하고 말하지 않았었다.“엄마, 일단 화내지 마세요.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30년이 지나도록 아빠한테 여자를 소개하는 사람이 없었겠어요? 그래도 한 번도 어긋나는 행동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이번에도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나는 엄마의 옆에 앉아서 등을 쓰다듬어 드리며 화를 풀어 드렸다.“맞아, 누군가가 나를 음해 하려는 거야!”아빠는 마침내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나는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그 여자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아빠의 지금 자리까지 쉽게 오른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까 봐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아오셨다. 곧 퇴직하게 되시는데 굳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이유가 없었다.엄마는 나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셨고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미간은 찌푸려져 한 번도 펴지지 않았다. “아빠, 사람을 보내서 이 여자 좀 조사해 보세요. 어떤 목적이 있는지.”나는 다시 입을 열어 아빠에게 말했다.“확인해 봤다. 그 여자의 인사정보도 나한테 있어. 이름은 조수연이고 세종시 사람이야.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어. 하지만 그 여자가 키우는 것 같진 않아.”아빠는 또 담배를 피우셨다. 고새 몇 년을 더 늙은 것 같았다.“그리고 다른 단서는 없어.”
“엄마, 이런 검사 결과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거 아시죠? 믿지 마세요.”나는 신속하게 검사지를 챙겼다.엄마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신 뒤 떠나려고 몸을 일으키신 순간 쓰러지셨다.“엄마!”나는 바로 엄마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 한차례 검사를 받고 의사는 나에게 일시적인 쇼크라고 했다. 아까 조수연 때문에 충격을 받으셨을 것이다. 다행히도 엄마의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고 며칠 입원해서 몸조리를 잘하면 괜찮다고 말했다.일인실에서 나는 엄마가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계신 것을 지켜보았다.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전생에서 엄마는 이런 일을 겪으시면서도 나에게 알리지도 않으시고 혼자서 이런 고통을 견디셨다.나는 착한 딸이 아니지만 다행히 하늘에서 나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셨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옆 병실이 한 남자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아이고, 나 입원 안 해도 돼! 무슨 수술이야! 돈만 팔고!”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었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저 몸을 뒤척였다.“엄마, 아침 사다 드릴게요.”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세수를 하고 엄마에게 밥을 사다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옆 병실을 지날 때 몇 명의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서란과 윤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서중석의 옆에 앉아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사모님!”윤선은 예리하게 나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가왔다.“어떻게 여기 계세요? 어디 아프세요?”“윤 집사님, 이제 우리 집 일도 그만두셨는데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그저 지영 씨라고 불러 주세요.”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서란을 바라보았다.서란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언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전에 엄마가 언니네 집에서 일한다고 들었을 때도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나는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가 인연인가 봐. 너희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야?”서중석도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내가 그의 동생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그 재수 없는 사람이라는
정아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하던 차였다. 매일 먹고 마시고 자기만 하니 머리가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말을 듣고는 바로 조수연의 임신 여부 조사는 자신한테 맡기라고 했다.“그래. 나도 요 며칠 계속 조수연 조사해 볼 거야. 돌파구를 찾아서 사진 가져와야지.”나는 감격스러움에 정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정아야, 고마워!”“우리 사이에 고맙긴. 가자. 오늘 일단은 아주머니 병문안부터 같이 가자.”정아가 잽싸게 외투를 챙기더니 나를 끌고는 병원으로 향했다.정아는 특별히 영양제까지 사서 챙겨 갔다.서중석의 병실을 지나치는데 서란이 안에 있는 게 보였다. 몸매를 잘 드러내는 하늘색 패딩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분위기는 여전히 청순하고 어여뻤다.정아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옆모습만으로 서란을 알아보았고 발걸음을 멈췄다.“어머, 세컨드 아니야?”정아는 서란의 본성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유부남이랑 놀아났으면 세컨드였다.서란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어렴풋이 웃어 보이더니 병실로 들어갔다.서란은 아까부터 엄마의 병실을 보고 있었다.‘배인호가 온 건가?’“잠깐만, 할 말 있어.”나는 정아를 끌고 복도 한편으로 갔고 최근에 발생한 일들을 간단하게 말해주고는 당부했다.“날 돕겠다고 나서지 마. 난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상관없어. 그냥 배인호가 언젠가 나랑 이혼해 주면 돼.”정아의 입술이 점점 켜졌고 눈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 말을 모두 이해한 듯했고 말투에도 흥분과 존중이 묻어났다.“지영아, 그러니까 지금 배인호가 이혼 안 해준다는 거지?”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대박, 잘됐네! 뭔가 네가 되게 태연하다 했어!”정아가 복권에라도 당첨된 양 즐거워했다.갓 환생했을 때 난 이미 친구들에게 말했다. 배인호와 이혼할 거라고.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전처럼 내가 매달리는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배인호가 이혼하자고 했을 테고 난 죽어도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네’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위치를 보내 주었다.십 분 뒤 까만색 벤츠 한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우범은 물질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의사다 보니 출퇴근할 때 차가 너무 눈에 띄어도 좋지는 않았다.하지만 이우범쯤 되면 자전거를 타도 여자들이 좋아 죽을 것이다.“타요.”이우범이 차창을 내리고는 나에게 말했다.“어디 가요?”약간 궁금해졌다.“청담동으로, 비비 데리러.”‘역시. 냥집사는 냥이 없이 못 살지.’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조수석에 탔다. 이우범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안전벨트.”나는 말없이 안전벨트를 했다.눈길이라 차들이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가는 길에 나는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봤던 배인호와 서란이 자꾸 떠올랐다. 절반쯤 갔을 때 이우범이 먼저 침묵을 깼다.“서란 쪽에서 병실 바꿔 달라고 했어요.”“아, 알겠어요.”지금은 배인호와 서란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서중석 수술 내가 집도할 거예요.”이우범이 스파이를 했으면 엘리트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전화기를 꺼내 이우범에게 돈을 이체했다. 화면에 뜬 문자를 보고 이우범이 난해하다는 듯 물었다.“무슨 뜻이죠?”나는 일부러 사악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이 선생님, 서중석 집도할 때 대충해요. 성공 시 따로 더 넣을 테니까.”마침 빨간불이라 차가 멈췄고 이우범은 재빨리 내가 이체한 돈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얼굴을 굳힌 채 꾸짖었다.“막장 드라마 그만 봐요. 맨날 무슨 생각하는 거야.”“이런 아이디어가 왜 막장 드라마에서 왔다고 생각해요?”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면요?”이우범의 눈빛은 바보를 보는 눈빛이었다.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청담동에 도착했고 비비는 주인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이우범의 품에 안겨 애교를 마구마구 떨었다. 머리를 비비적거렸고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야옹 소리가 거실을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