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위치를 보내 주었다.십 분 뒤 까만색 벤츠 한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우범은 물질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의사다 보니 출퇴근할 때 차가 너무 눈에 띄어도 좋지는 않았다.하지만 이우범쯤 되면 자전거를 타도 여자들이 좋아 죽을 것이다.“타요.”이우범이 차창을 내리고는 나에게 말했다.“어디 가요?”약간 궁금해졌다.“청담동으로, 비비 데리러.”‘역시. 냥집사는 냥이 없이 못 살지.’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조수석에 탔다. 이우범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안전벨트.”나는 말없이 안전벨트를 했다.눈길이라 차들이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가는 길에 나는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봤던 배인호와 서란이 자꾸 떠올랐다. 절반쯤 갔을 때 이우범이 먼저 침묵을 깼다.“서란 쪽에서 병실 바꿔 달라고 했어요.”“아, 알겠어요.”지금은 배인호와 서란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서중석 수술 내가 집도할 거예요.”이우범이 스파이를 했으면 엘리트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전화기를 꺼내 이우범에게 돈을 이체했다. 화면에 뜬 문자를 보고 이우범이 난해하다는 듯 물었다.“무슨 뜻이죠?”나는 일부러 사악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이 선생님, 서중석 집도할 때 대충해요. 성공 시 따로 더 넣을 테니까.”마침 빨간불이라 차가 멈췄고 이우범은 재빨리 내가 이체한 돈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얼굴을 굳힌 채 꾸짖었다.“막장 드라마 그만 봐요. 맨날 무슨 생각하는 거야.”“이런 아이디어가 왜 막장 드라마에서 왔다고 생각해요?”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면요?”이우범의 눈빛은 바보를 보는 눈빛이었다.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청담동에 도착했고 비비는 주인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이우범의 품에 안겨 애교를 마구마구 떨었다. 머리를 비비적거렸고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야옹 소리가 거실을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불빛 아래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로 그는 나를 조용히 쳐다봤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대답했다.“몰라.”“하하하...”멈칫한 내가 실성한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숨도 가빠지는 것 같았다.너무 웃픈 일이다. 나는 너무 웃어서 삐져나온 눈물을 닦고는 그를 올려다봤다.“이런 대답일 줄은 몰랐어요. 추종자, 좋아하면 자존심도 마다하는 여자, 명의상 와이프, 정략결혼의 도구, 이렇게 많은 신분 중에 단 한 가지도 생각나지 않았단 말이죠?”“인호 씨는 너무 이기적이에요.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제 보내 줘요. 그리고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녀요. 인호 씨 지금 지위랑 신분이면 우리 집 지원이 빠진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을 10년이나 사랑했어요. 한 사람 인생에 10년이 몇 번이나 있겠어요? 그리고 여자는 지금이 제일 꽃다운 나이에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10년이라는 청춘을 당신한테 투자했는데 볼품 있게 떠나게 해줘요!”나는 말할수록 점점 감정에 북받쳤다. 환생 후 계속 나 자신을 억제하면서 살았고 해탈하려고 애썼다. 희망이 없는 결혼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고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점점 걷잡을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실패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나는 침대 옆에 놓아둔 책 한 권을 들어 배인호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그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화를 간신히 참아 내는 것 같았다.나는 베개를 들어 침대에 서서 힘껏 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못된 사람! 천벌 받을 거예요! 요 며칠 서중석 때문에 신경 많이 썼죠? 나는 당신 집에 삼사일 던져두고! 데리러 올 생각은 해봤어요? 그렇게 서란이 좋으면 내 시간 낭비하지 말았어야죠! 이혼해요!! 이혼할 거예요!!”욕쟁이 아주머
“묻고 싶은 게 있어요.”떠나려는데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청 중요한 일 같았다.“뭔데요?”나는 살짝 궁금했다.“훗날 내가 서란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이우범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등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우범도 환생한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나의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더니 이우범이 귀띔했다.“그쪽이 한번 술 마시고 내 차에서 횡설수설한 적이 있는데 서란 포기하라고 배인호랑 뺏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나는 그게 술기운에 그냥 한 말 같지는 않았어요.”깜짝 놀랐다. 그냥 내가 술 먹고 전생에 일들을 흘린 거였다.다행이라 생각하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한 소리죠. 그쪽이랑 배인호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좋은 친구인 거 아는데 다 서란한테 빠지면 안 되잖아요. 같은 여자한테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정을 선택할 거 같은데?”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전생에 그들은 물고 뜯고 난리였다. 동물 농장에서 두 사자가 왕 자리를 놓고 싸우는 장면과 매우 흡사했다.이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럴 수도.”할 말을 끝내고 그는 자신의 차로 향했고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만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은 채 한참을 멍해 있었다.‘그럴 수도라는 게 뭔 말이지? 서란을 사랑하게 된 건 맞는데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건가?’어떻든 간에 이건 그 두 남자 인생에서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나는 곧 배인호와 이혼할 거고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배인호가 언제 이혼 서류를 보내올지는 알 수 없었다.며칠이고 기다렸지만, 이혼 서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로 나는 회사까지 들렀지만, 배인호가 요 며칠 회사에 없다는 말만 들었고 그는 보이지 않았다.‘병원에서 미래 장인어른 시중을 드는 건가?’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서중석의 병실을 알아내어 그쪽으로 향했다.서중석은 잠들어 있었고 서란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에 대고 말했다
엄마랑 좀 더 얘기를 나누고 나는 병실에서 나왔다. 병원에서 나오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자를 확인한 아빠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영아. 아빠 진짜 억울하게 당한 거야.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네 엄마도 그렇게 화나 있진 않겠구나.”“아빠. 아직 사진이 남아 있어요. 그것도 반드시 해결해야 해요.”내가 귀띔했다. 그건 엄마의 화와 관계없이 원본 파일을 손에 넣지 않으면 훗날 다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아빠는 결백하다 해도 그 사진 앞에서는 반박 불가였다.“알지. 나도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아빠가 다시 차분해졌다.“아빠도 너무 급해하지 마세요. 방법 있을 거예요.”나는 아빠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청담동으로 돌아왔을 땐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몇 입 먹고는 올라가 반신욕을 즐겼다.어느샌가 욕조에서 잠이 들었고 수온이 점점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나는 계속 잤을 것이다.밤이 깊었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옷을 입고 테라스로 향했다. 머리만 살짝 돌리면 대문을 볼 수 있는 자리라 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기웃거리며 배인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었다.‘이혼 서류만 보내 주면 나도 이곳에서 나가겠지.’청담동은 나에게 너무 비굴한 기억만으로 가득했다. 이혼 후 계속 여기서 사는 건 마음고생을 사서 하는 거다. 그럴 거면 배인호에게 온전히 돌려주어 남은 물건들을 보면서 나를 떠올리게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늘 나에게 차가운 그였고 나를 떠올린다고 해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오래 서 있었더니 바람이 춥게 느껴졌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던 차에 정아가 전화를 걸어왔고 열정적으로 나를 불러냈다.“지영아, 빨리 나와.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여기 잘생긴 오빠들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야!”“안 가. 씻고 이제 막 누워서 자려고.”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불속이 나의 최종
노성민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은색 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멈춘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계속 노성민 옆에 앉아 있었다. 젊어 보였고 강은지가 데려온 사람 같았다.“제가 지목할게요!”그녀가 흥분하며 손을 들었고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며 누구를 지목할지 고민했다.최종 지목된 사람은 박준이었다. 처음으로 지목된 그는 도전을 선택했다.“모르는 남자한테 가서 작업 걸어요. 그러면서 당신 입술 너무 섹시한데 라고 해요.”요구를 들은 박준이 심장마비가 온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다. 상남자인 그에게 이 요구는 죽으라는 말과도 같았다.그는 이를 악물고 그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내뱉었다.“술 마실게요!”그러고는 술 한 병을 원샷 했다.이번엔 박준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이우범에서 멈췄다.이우범은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표정이 덤덤했다.“진실.”박준이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범아, 아직도 총각인 거 확실해?”이 문제는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이우범은 이 무리 중에 흔치 않은 예외였다. 종래로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스님처럼 아무런 욕구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 겉 포장일 뿐이다.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숨기기 나름이다.배인호도 흥미롭다는 듯 이우범을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이우범이 술을 선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의 대답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여자들의 눈이 순간 빛나는 게 보였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시선은 그에게 꽂혀 있었고 지금이라도 저 절벽에 핀 꽃과도 같은 남자를 차지하려고 하는 듯 보였다.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것 같다. 순정남이 맞았다.게임은 다시 시작되었고 천천히 내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우범을 보며 말했다.“진실 선택할게요.”“배인호 말고 다른 남자한테 흥미를 느껴본 적 있어요?”이우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룸이 순간 정적이 흘렀
그때의 기세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가 복권에라도 당첨된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내 정신은 접촉 불량으로 깜빡깜빡하는 전등처럼 돌아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배인호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고 너무나도 흐릿했다. 머리를 돌려보니 배인호뿐만 아니라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유령처럼 형상이 흔들렸다.“지영아, 이리 와. 내가 데려다줄게.”세희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아마도 이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많이 마셨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차례가 올 때마다 술을 선택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진심과 도전을 조금씩 섞었다.민정이도 내가 계속 배인호와 실랑이를 버릴까 봐 무서운지 세희와 좌우로 흑기사처럼 나를 부축했다.“지영아, 이제 가자!”나는 비틀거리며 두 사람의 팔을 뿌리쳤고 박준에게로 달려들었다.“안되지. 아직 도전 못 했잖아...”취하긴 했어도 배인호를 난처하게 해야 한다는 건 시종일관 기억하고 있었다.박준은 내가 귀신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나를 피했고 노성민 곁에 바싹 붙었다. 노성민도 힘껏 그를 안아주었고 그 모습이 재난 영화에서의 형제 같았다.이를 본 이우범이 일어서서 나를 막았다. 나의 팔을 잡았고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요. 한잠 푹 자면 돼요.”“우범 씨 왜 그렇게 나빠요?”내가 힘껏 눈을 치켜뜨고는 그를 쳐다봤다.“아까 게임할 때 계속 나 못살게 굴고. 내일 병원 가서 클레임하는 수가 있어요! 환자 학대한다고 할 거예요. 그래서 평생 의사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 사업 물려받게 할 거예요...”“그래요.”이우범이 어쩔 수 없다는 웃으며 말했다.“돌팔이! 돌팔이!”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주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에도 배인호가 집에 오지 않으면 혼자서 종종 술을 마셨고 많이 마시면 난동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허공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릴 뿐 아무도 대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이우범의 얼굴에 계속 먹칠하려는데 갑자기 몸이 기우는 게 느껴졌고 힘 있는 손 하나가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전생의 비극이 떠올랐다. 아빠 엄마의 그 불쌍하고 처량한 모습이 떠올라 서글퍼졌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게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랑에 눈이 멀어 허우적대는 모자란 딸을 낳은 게 그들의 큰 죄였다.울어서 그런지 언어 구사 능력도 떨어진 거 같았다. 사진을 붙잡고 울기만 했고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환생 후 처음으로 배인호 앞에서 이렇게 슬프게 울어 본다. 눈물로 흐릿한 시선 속에 배인호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배인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이혼하자 해서 그러자고 했잖아요!”나는 애써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억제하며 말했다.“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 위자료 덜 줘도 돼요... 쓸데도 없어요... 끅... 이걸로 아빠 엄마한테까지 손댈 필요는 없잖아요! 아직 인호 씨 장인 장모인데!”“이혼은 네가 하자고 했지.”배인호가 내 말의 흠을 잡아 주었다. 목소리에도 기분 나쁨이 좀 묻어 나왔다.“여태까지 난 이혼하자고 한 적 없어. 네가 여러 번 얘기했지.”“내가 이혼하자고 한 건 인호 씨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 그런 거죠!”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서란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서란한테 명분도 줘야 할 거 아니에요! 하루라도 빨리 이혼해서 서로 체면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요?”배인호가 머리를 숙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사람을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사람을 볼 때 그 눈빛은 늘 냉랭했고 온도가 잘 없었다.“대답할 필요 없어요. 이 사진 갖고 협박할 필요도 없고요. 위자료 안 받으면 되잖아요. 부모님이 나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배인호의 침묵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싫었고 말이 끝나자 내 방으로 올라가 외투를 챙겨 나가려고 했다.현관에서 신을 갈아 신으면서 거실에 서 있는 배인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코 막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이제 좀 재수가 붙는가 싶었는데 죽고 싶어? 집으로 얼른 꺼져! 여기서 눈꼴 사납게 굴지 말고!”유기봉이 욕설을 퍼부었다.조수연은 한참을 바닥에 널브러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도박장 사람들은 늘 있는 일 인양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나는 아직도 가슴이 떨려 왔고 정아를 데리고 빨리 자리를 떴다.이 기사가 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다정하게 말했다.“사모님, 어디 불편하세요?”“아니에요, 다시 서울로 가요.”나는 아직도 얼얼한 목을 매만졌고 정아도 가까이 와서 자세히 봐주었다.“빨개진 거 봐. 그 여자 진짜 너무 독한 거 아니야?”정아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했다.“조수연이 한 말 무슨 뜻이지?”하지만 내 생각은 온통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누가 유기봉을 매수한 거지?”“나도 모르겠어. 유기봉은 도박 중독자라 빚이 엄청 많을 텐데 누군가가 갚아 주는 대신 와이프를 잡아 오라고 했다? 역시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 상대해야 해.”정아가 감탄하며 말했다.“근데 그 사람 누구지?”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전에 내가 고용한 탐정도 유기봉을 찾은 적 있거든. 근데 유기봉은 와이프의 외도 사실에 꿈쩍도 안 했다고 했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유기봉이랑 조수연 사전에 이미 판을 짜 놓은 걸 수도 있어. 조수연이 잘사는 사람한테 빌붙어서 돈을 가져오면 유기봉 도박 빚 갚고. 근데 조수연은 반대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유기봉과 이혼하고 싶은 거고.”정아가 몇 초 정도 생각하더니 눈이 점점 커졌다.“배인호는 아니겠지...?? 배인호 집에서 그 사진들 봤다면서?”마음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중얼댔다.“그 사진들 여기서 가져온 건가?”그럼, 그 사진들이 원본 사진이다. 나는 배인호를 잘 안다. 일을 하면 깔끔하게 하고 돈을 썼으면 그 가치를 최대한으로 뽑은 사람이다. 원본 사진이 아니라면 배인호가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이혼 서류에 사인하고 그 사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