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얼굴은 몹시 곤란해 보였다. 평소에 잘 피우시지도 않던 담배를 계속 태우고 계셨다. 아빠는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엄마만 바라보셨다.엄마는 눈물을 닦으시며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 내셨다.“너희 아빠 그 요망한 비서랑 바람났어!”요망한 비서? 사진을 집어 자세히 보니 여자가 아주 낯이 익은 것 같더니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 정아와 함께 찻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우연히 아빠를 만났었는데 함께 있었던 비서였다.그때 나는 아빠의 전 비서는 남자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왜 갑자기 여자로 바뀐 것인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믿었고 아버지가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엄마하고 말하지 않았었다.“엄마, 일단 화내지 마세요. 아빠가 어떤 분인지 아시잖아요. 30년이 지나도록 아빠한테 여자를 소개하는 사람이 없었겠어요? 그래도 한 번도 어긋나는 행동 하신 적 없으시잖아요. 이번에도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나는 엄마의 옆에 앉아서 등을 쓰다듬어 드리며 화를 풀어 드렸다.“맞아, 누군가가 나를 음해 하려는 거야!”아빠는 마침내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나는 술에 취해서 정신을 잃었는데, 어떻게 그 여자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소?”아빠의 지금 자리까지 쉽게 오른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까 봐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아오셨다. 곧 퇴직하게 되시는데 굳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이유가 없었다.엄마는 나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셨고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미간은 찌푸려져 한 번도 펴지지 않았다. “아빠, 사람을 보내서 이 여자 좀 조사해 보세요. 어떤 목적이 있는지.”나는 다시 입을 열어 아빠에게 말했다.“확인해 봤다. 그 여자의 인사정보도 나한테 있어. 이름은 조수연이고 세종시 사람이야.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어. 하지만 그 여자가 키우는 것 같진 않아.”아빠는 또 담배를 피우셨다. 고새 몇 년을 더 늙은 것 같았다.“그리고 다른 단서는 없어.”
“엄마, 이런 검사 결과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거 아시죠? 믿지 마세요.”나는 신속하게 검사지를 챙겼다.엄마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신 뒤 떠나려고 몸을 일으키신 순간 쓰러지셨다.“엄마!”나는 바로 엄마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 한차례 검사를 받고 의사는 나에게 일시적인 쇼크라고 했다. 아까 조수연 때문에 충격을 받으셨을 것이다. 다행히도 엄마의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고 며칠 입원해서 몸조리를 잘하면 괜찮다고 말했다.일인실에서 나는 엄마가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계신 것을 지켜보았다.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전생에서 엄마는 이런 일을 겪으시면서도 나에게 알리지도 않으시고 혼자서 이런 고통을 견디셨다.나는 착한 딸이 아니지만 다행히 하늘에서 나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셨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옆 병실이 한 남자의 목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아이고, 나 입원 안 해도 돼! 무슨 수술이야! 돈만 팔고!”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었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기 귀찮아서 그저 몸을 뒤척였다.“엄마, 아침 사다 드릴게요.”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세수를 하고 엄마에게 밥을 사다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옆 병실을 지날 때 몇 명의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서란과 윤선이 침대에 누워있는 서중석의 옆에 앉아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사모님!”윤선은 예리하게 나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가왔다.“어떻게 여기 계세요? 어디 아프세요?”“윤 집사님, 이제 우리 집 일도 그만두셨는데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시고 그저 지영 씨라고 불러 주세요.”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시선은 서란을 바라보았다.서란도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언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전에 엄마가 언니네 집에서 일한다고 들었을 때도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는데!”나는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가 인연인가 봐. 너희 아버지는 어떻게 되신 거야?”서중석도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내가 그의 동생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그 재수 없는 사람이라는
정아도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하던 차였다. 매일 먹고 마시고 자기만 하니 머리가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내 말을 듣고는 바로 조수연의 임신 여부 조사는 자신한테 맡기라고 했다.“그래. 나도 요 며칠 계속 조수연 조사해 볼 거야. 돌파구를 찾아서 사진 가져와야지.”나는 감격스러움에 정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정아야, 고마워!”“우리 사이에 고맙긴. 가자. 오늘 일단은 아주머니 병문안부터 같이 가자.”정아가 잽싸게 외투를 챙기더니 나를 끌고는 병원으로 향했다.정아는 특별히 영양제까지 사서 챙겨 갔다.서중석의 병실을 지나치는데 서란이 안에 있는 게 보였다. 몸매를 잘 드러내는 하늘색 패딩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분위기는 여전히 청순하고 어여뻤다.정아도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옆모습만으로 서란을 알아보았고 발걸음을 멈췄다.“어머, 세컨드 아니야?”정아는 서란의 본성이 어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유부남이랑 놀아났으면 세컨드였다.서란이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어렴풋이 웃어 보이더니 병실로 들어갔다.서란은 아까부터 엄마의 병실을 보고 있었다.‘배인호가 온 건가?’“잠깐만, 할 말 있어.”나는 정아를 끌고 복도 한편으로 갔고 최근에 발생한 일들을 간단하게 말해주고는 당부했다.“날 돕겠다고 나서지 마. 난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상관없어. 그냥 배인호가 언젠가 나랑 이혼해 주면 돼.”정아의 입술이 점점 켜졌고 눈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 말을 모두 이해한 듯했고 말투에도 흥분과 존중이 묻어났다.“지영아, 그러니까 지금 배인호가 이혼 안 해준다는 거지?”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대박, 잘됐네! 뭔가 네가 되게 태연하다 했어!”정아가 복권에라도 당첨된 양 즐거워했다.갓 환생했을 때 난 이미 친구들에게 말했다. 배인호와 이혼할 거라고.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전처럼 내가 매달리는 상황이었다면 무조건 배인호가 이혼하자고 했을 테고 난 죽어도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네’나는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위치를 보내 주었다.십 분 뒤 까만색 벤츠 한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이우범은 물질적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의사다 보니 출퇴근할 때 차가 너무 눈에 띄어도 좋지는 않았다.하지만 이우범쯤 되면 자전거를 타도 여자들이 좋아 죽을 것이다.“타요.”이우범이 차창을 내리고는 나에게 말했다.“어디 가요?”약간 궁금해졌다.“청담동으로, 비비 데리러.”‘역시. 냥집사는 냥이 없이 못 살지.’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조수석에 탔다. 이우범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안전벨트.”나는 말없이 안전벨트를 했다.눈길이라 차들이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가는 길에 나는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아까 봤던 배인호와 서란이 자꾸 떠올랐다. 절반쯤 갔을 때 이우범이 먼저 침묵을 깼다.“서란 쪽에서 병실 바꿔 달라고 했어요.”“아, 알겠어요.”지금은 배인호와 서란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서중석 수술 내가 집도할 거예요.”이우범이 스파이를 했으면 엘리트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전화기를 꺼내 이우범에게 돈을 이체했다. 화면에 뜬 문자를 보고 이우범이 난해하다는 듯 물었다.“무슨 뜻이죠?”나는 일부러 사악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이 선생님, 서중석 집도할 때 대충해요. 성공 시 따로 더 넣을 테니까.”마침 빨간불이라 차가 멈췄고 이우범은 재빨리 내가 이체한 돈을 돌려줬다. 그러고는 얼굴을 굳힌 채 꾸짖었다.“막장 드라마 그만 봐요. 맨날 무슨 생각하는 거야.”“이런 아이디어가 왜 막장 드라마에서 왔다고 생각해요?”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아니면요?”이우범의 눈빛은 바보를 보는 눈빛이었다.나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청담동에 도착했고 비비는 주인을 보고는 쪼르르 달려와 이우범의 품에 안겨 애교를 마구마구 떨었다. 머리를 비비적거렸고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야옹 소리가 거실을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불빛 아래 차갑지만, 잘생긴 얼굴로 그는 나를 조용히 쳐다봤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대답했다.“몰라.”“하하하...”멈칫한 내가 실성한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고 눈가가 촉촉해지는 게 느껴졌다. 숨도 가빠지는 것 같았다.너무 웃픈 일이다. 나는 너무 웃어서 삐져나온 눈물을 닦고는 그를 올려다봤다.“이런 대답일 줄은 몰랐어요. 추종자, 좋아하면 자존심도 마다하는 여자, 명의상 와이프, 정략결혼의 도구, 이렇게 많은 신분 중에 단 한 가지도 생각나지 않았단 말이죠?”“인호 씨는 너무 이기적이에요.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제 보내 줘요. 그리고 진짜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녀요. 인호 씨 지금 지위랑 신분이면 우리 집 지원이 빠진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당신을 10년이나 사랑했어요. 한 사람 인생에 10년이 몇 번이나 있겠어요? 그리고 여자는 지금이 제일 꽃다운 나이에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10년이라는 청춘을 당신한테 투자했는데 볼품 있게 떠나게 해줘요!”나는 말할수록 점점 감정에 북받쳤다. 환생 후 계속 나 자신을 억제하면서 살았고 해탈하려고 애썼다. 희망이 없는 결혼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랐고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점점 걷잡을 수 없었고 나 자신이 실패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나는 침대 옆에 놓아둔 책 한 권을 들어 배인호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그는 피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화를 간신히 참아 내는 것 같았다.나는 베개를 들어 침대에 서서 힘껏 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았다.“못된 사람! 천벌 받을 거예요! 요 며칠 서중석 때문에 신경 많이 썼죠? 나는 당신 집에 삼사일 던져두고! 데리러 올 생각은 해봤어요? 그렇게 서란이 좋으면 내 시간 낭비하지 말았어야죠! 이혼해요!! 이혼할 거예요!!”욕쟁이 아주머
“묻고 싶은 게 있어요.”떠나려는데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청 중요한 일 같았다.“뭔데요?”나는 살짝 궁금했다.“훗날 내가 서란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이우범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등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우범도 환생한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나의 경악스러운 눈빛을 보더니 이우범이 귀띔했다.“그쪽이 한번 술 마시고 내 차에서 횡설수설한 적이 있는데 서란 포기하라고 배인호랑 뺏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근데 나는 그게 술기운에 그냥 한 말 같지는 않았어요.”깜짝 놀랐다. 그냥 내가 술 먹고 전생에 일들을 흘린 거였다.다행이라 생각하고는 웃으며 말했다.“그냥 한 소리죠. 그쪽이랑 배인호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좋은 친구인 거 아는데 다 서란한테 빠지면 안 되잖아요. 같은 여자한테 빠진다고 하더라도 우정을 선택할 거 같은데?”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전생에 그들은 물고 뜯고 난리였다. 동물 농장에서 두 사자가 왕 자리를 놓고 싸우는 장면과 매우 흡사했다.이우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럴 수도.”할 말을 끝내고 그는 자신의 차로 향했고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만 주차장에 덩그러니 남은 채 한참을 멍해 있었다.‘그럴 수도라는 게 뭔 말이지? 서란을 사랑하게 된 건 맞는데 애써 억누르고 있다는 건가?’어떻든 간에 이건 그 두 남자 인생에서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나는 곧 배인호와 이혼할 거고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배인호가 언제 이혼 서류를 보내올지는 알 수 없었다.며칠이고 기다렸지만, 이혼 서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로 나는 회사까지 들렀지만, 배인호가 요 며칠 회사에 없다는 말만 들었고 그는 보이지 않았다.‘병원에서 미래 장인어른 시중을 드는 건가?’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서중석의 병실을 알아내어 그쪽으로 향했다.서중석은 잠들어 있었고 서란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는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에 대고 말했다
엄마랑 좀 더 얘기를 나누고 나는 병실에서 나왔다. 병원에서 나오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문자를 확인한 아빠는 바로 전화를 걸어왔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영아. 아빠 진짜 억울하게 당한 거야. 나 진짜 아무 짓도 안 했어. 이제 사실을 알았으니 네 엄마도 그렇게 화나 있진 않겠구나.”“아빠. 아직 사진이 남아 있어요. 그것도 반드시 해결해야 해요.”내가 귀띔했다. 그건 엄마의 화와 관계없이 원본 파일을 손에 넣지 않으면 훗날 다시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아빠는 결백하다 해도 그 사진 앞에서는 반박 불가였다.“알지. 나도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아빠가 다시 차분해졌다.“아빠도 너무 급해하지 마세요. 방법 있을 거예요.”나는 아빠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청담동으로 돌아왔을 땐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몇 입 먹고는 올라가 반신욕을 즐겼다.어느샌가 욕조에서 잠이 들었고 수온이 점점 떨어지지만 않았으면 나는 계속 잤을 것이다.밤이 깊었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옷을 입고 테라스로 향했다. 머리만 살짝 돌리면 대문을 볼 수 있는 자리라 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여기서 기웃거리며 배인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었다.‘이혼 서류만 보내 주면 나도 이곳에서 나가겠지.’청담동은 나에게 너무 비굴한 기억만으로 가득했다. 이혼 후 계속 여기서 사는 건 마음고생을 사서 하는 거다. 그럴 거면 배인호에게 온전히 돌려주어 남은 물건들을 보면서 나를 떠올리게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늘 나에게 차가운 그였고 나를 떠올린다고 해도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오래 서 있었더니 바람이 춥게 느껴졌고 방으로 들어갔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이루던 차에 정아가 전화를 걸어왔고 열정적으로 나를 불러냈다.“지영아, 빨리 나와.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여기 잘생긴 오빠들 많아. 고르기가 힘들 정도야!”“안 가. 씻고 이제 막 누워서 자려고.”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불속이 나의 최종
노성민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은색 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멈춘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계속 노성민 옆에 앉아 있었다. 젊어 보였고 강은지가 데려온 사람 같았다.“제가 지목할게요!”그녀가 흥분하며 손을 들었고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며 누구를 지목할지 고민했다.최종 지목된 사람은 박준이었다. 처음으로 지목된 그는 도전을 선택했다.“모르는 남자한테 가서 작업 걸어요. 그러면서 당신 입술 너무 섹시한데 라고 해요.”요구를 들은 박준이 심장마비가 온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와 다른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다. 상남자인 그에게 이 요구는 죽으라는 말과도 같았다.그는 이를 악물고 그 여자를 보며 또박또박 내뱉었다.“술 마실게요!”그러고는 술 한 병을 원샷 했다.이번엔 박준이 시작 버튼을 눌렀고 이우범에서 멈췄다.이우범은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표정이 덤덤했다.“진실.”박준이 괴상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범아, 아직도 총각인 거 확실해?”이 문제는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이우범은 이 무리 중에 흔치 않은 예외였다. 종래로 여자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스님처럼 아무런 욕구가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 겉 포장일 뿐이다.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는 숨기기 나름이다.배인호도 흥미롭다는 듯 이우범을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이우범이 술을 선택할 줄 알았다. 하지만 몇 초 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우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그의 대답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몇몇 여자들의 눈이 순간 빛나는 게 보였다.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시선은 그에게 꽂혀 있었고 지금이라도 저 절벽에 핀 꽃과도 같은 남자를 차지하려고 하는 듯 보였다.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것 같다. 순정남이 맞았다.게임은 다시 시작되었고 천천히 내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우범을 보며 말했다.“진실 선택할게요.”“배인호 말고 다른 남자한테 흥미를 느껴본 적 있어요?”이우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하던 룸이 순간 정적이 흘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