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는 내게 와인을 따라주고는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정아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번 생은 저번 생처럼 비참하진 않았지만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내가 다시 태어나면서 모든 게 변했고 나도 변한 환경에 따라 같이 변하고 있었다.그렇게 변한 지금 나는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너 요즘 세종시에서 무슨 일 있었어?”정아가 먼저 내게 물었다.“많은 일이 있었지.”나는 한숨을 쉬며 배씨 집안과 이우범의 일을 하나하나 자세히 정아에게 털어놓았다. 마음속에 묵혀둔 말을 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처음에는 정아도 담담하게 들으면서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게 질문을 해왔다.점점 뒤로 가면서 정아는 흥분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와인까지 내뿜을 뻔했다.“뭐? 이우범이 민설아가 죽은 척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정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의 놀라움을 표시했다.“응, 생각도 못 했지?”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처음엔 나도 정아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정아처럼 오버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정아는 입가에 묻은 와인 자국을 닦으며 말했다.“잘못 들은 거 아니야? 와, 진짜 이우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아니다. 근데 왜 그랬대? 배인호와 무슨 원수라도 진 거야?”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라면 둘 사이에 절대 아무런 원한이 없었을 것이다. 모순이 있다고 해도 원인은 민설아밖에 없다.하지만 이우범은 전에 민설아를 받아준 적이 없다고 했다. 민설아도 이우범에게서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자 홧김에 배인호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이것도 나를 속인 건가?’이우범도 그때 민설아에게 호감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민설아가 자기를 쫓아다니게 놔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설마... 민설아가 배인호와 사귀게 되면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점유욕과 실망감을 불러일으킨 건가?’이것 때문에 민설아가 죽은 척할 수 있게 도와줬다면 정말 너무했다.“난 이럴
“민설아는요? 진짜 기회 안 줄 거예요?”내가 물었다.민설아 얘기를 꺼내자 드물게 보이던 배인호의 부드러움이 바로 사라졌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응.”나는 할 말이 없었다. 둘 사이를 놓고 내가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었다.“기분 안 좋아?”배인호가 갑자기 되물었다.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기분 좋아야 할 일이 없었다. 빈이로 인해 로아와 승현이까지 영향 줄까 봐 걱정되었다.민설아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보더니 배인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허탈해 보였다.“빈이가 괜찮아지면 나와 같이 지낼 거야. 빈이가 있으면 나도 더 이상 너한테 매달리지 않겠지. 너한테 불공평하니까.”의외였다. 나한테 불공평하다니, 나한테 불공평한 게 뭔지 알고 하는 얘기인가 싶었다.“진짜예요?”나는 조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응, 너도 나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 아니야?”배인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민설아가 돌아오지 않았거나, 혹은 나와 민설아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었겠지.”“하지만 나도 아이가 있잖아요.”나는 배인호에게 귀띔했다.“넌 내가 아이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도 난 받아들일 수 있어.”요즘 배인호가 하는 말은 그에 대한 나의 인지를 계속 업그레이드 했다.‘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나?’내가 여기서 빈이를 잘 돌봐줘야 하니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배인호는 믿을 수 없다는 내 표정을 보고 믿어달라고 더 해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을 확인하더니 몇 마디 당부했다.“나 이따 회사 들어가 봐야 해. 무슨 상황 있으면 바로 연락해.”“네. 도와준다고 했으니 나도 최선을 다할게요.”내가 이렇게 대답했다.나를 보는 배인호의 눈빛은 전과는 조금 달랐다. 전에는 본 적 없었던 신뢰가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병원을 나섰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바람을 좀 더 쐬고 나서야 병실로
의사가 가고 빈이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인호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빈이가 아까 보였던 반응이 자꾸만 떠올랐다. 반응이 너무 이상했다.“빈아?”배인호가 빈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불렀다.“아빠, 아줌마 옷이 나 때문에 더러워졌어요.”빈이는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빈이는 약간 걱정스러운 말투로 배인호에게 말했다.“아줌마가 저 때리지는 않겠죠?”전에 나를 대하는 빈이의 태도가 너무 엉망이었어도, 더 심한 짓을 했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옷 한 벌이 뭐라고 이렇게 긴장하고 두려워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갑자기 어제 들은 잠꼬대가 생각났다. 정아네 집에서 와인을 마셔서 그런지 나는 그때 이미 많이 졸린 상태였다. 그래서 잠이 조금 깊게 들어 있었다. 빈이의 잠꼬대를 듣고 겨우 눈을 떠 빈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그때 빈이가 한 잠꼬대는 “엄마, 미안해”, “때리지 마요” 였다.민설아에 대한 의심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빈이의 마음에 이런 영향을 미칠 정도면 장기적인 학대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가 힘들었다.“아니야. 아줌마는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라 너를 돌보러 왔어.”배인호가 빈이를 다독였다.빈이는 눈물이 글썽해서 나를 쳐다봤다. 순간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만약 민설아가 진짜 빈이를 학대했다면 진짜 너무 불쌍했다.배인호가 달래주자 빈이도 천천히 잠에 들었다. 내가 먼저 배인호를 한쪽으로 데려가 말했다.“인호 씨, 빈이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이 있어요.”“응, 말해 봐.”배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빈이의 이상한 행동을 그에게 알려줬다. 만약 민설아가 진짜 아이를 학대했고 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면 빈이의 양육권을 가져오는데 더 큰 승산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이를 들은 배인호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고 눈빛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아이를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빈이가 학대를 당했다는 사실
“아빠.”배인호를 본 빈이가 이렇게 불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조금 느껴졌다. 배인호를 보는 빈이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배인호는 그제야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은 이미 정상이었다.“아까 무슨 말 하고 있었어?”배인호가 침대맡에 앉으며 빈이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눈은 나를 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빈이도 무서운가 봐요. 엄마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고요.”내가 대답했다.내 말에 빈이도 입을 열어 배인호에게 빌었다.“아빠, 엄마 한번 만나게 해주면 안 돼요? 며칠이나 못 봤어요. 어디 갔는지 알아요? 설마 나 버린 거 아니죠?”빈이는 이렇게 말하며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병에 걸린 다음부터 일고여덟 살 된 아이가 갑자기 성숙해진 것 같았고 전처럼 짓궂고 활발하지 않았다. 많은 시간 침대에서 자지 않으면 멍을 때리곤 했다.배인호는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수술 끝나면 엄마 만날 수 있어.”“근데 나는 지금 보고 싶어요.”빈이가 다급하게 말했다.“빈이 착하지. 곧 만나게 될 거야.”배인호는 빈이 말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가볍게 대꾸했다.평소와 똑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빈이도 이걸 느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더는 떼를 부리지 않고 입을 다문채 그냥 조용하게 잠을 청했다.빈이는 곧 잠이 들었다. 빈이는 지금 힘이 별로 없었다. 자지 않으면 치료를 받고 있었다.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라 배인호에게 물었다.“결과 나왔어요?”빈이의 친부인 배인호는 매칭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빈이에게 기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내 두 아이도 마지막 남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배인호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상했다.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눈빛은 아닐 텐데 말이다.“나가서 얘기하자.”분명 빈이는 잠들었지만 그래도 배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빈이가 잠결에 어렴풋이 들을까 봐 걱정
의사가 배인호 곁으로 다가오더니 나와 민설아를 힐끔 보고는 배인호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배인호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나는 어렴풋이 조금 들었다.“문제가 생겼습니다. 죄송합니다.”“금방 나온 결과입니다.”순간 나는 이 의사가 뭐 하러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전에 말한 배인호와 빈이의 매칭 결과가 잘못되었고 빈이는 여전히 배인호의 친자라는 소식일 것이다.민설아도 무조건 조금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나는 그녀의 태연함에서 수상함을 느꼈다.처음에는 강력하게 거부하다가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짧은 기간에 이렇게 변한 게 너무 이상했다.빈이를 돌보는 동안 민설아는 한 번도 빈이를 보러 온 적이 없었다. 간절하게 배인호와 빈이를 뺏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빈이를 직접 치료하겠다고 하던 민설아가 말이다.배인호는 그 서류를 확인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마치 한시름 놓은 것 같으면서도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민설아는 알면서 일부러 되물었다.“그건 뭐예요?”“별거 아니야.”배인호의 손이 자연스럽게 툭 아래로 떨어졌다.“내가 이번에 온 건 인호 씨가 빈이를 포기하는지 보려고 온 거예요. 만약 빈이를 포기하고 싶다면 지금 바로 데려갈 거예요. 내가 병을 잘 치료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일이에요.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앞으로 빈이는 배 씨가 아니라 민 씨에요.”민설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병실로 들어갔다. 배인호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상했다.오히려 내가 자기도 모르게 민설아를 따라 들어갔다. 빈이는 이미 잠에서 깨어났다. 민설아를 보고는 생각처럼 흥분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하고 두려운 표정이었다.“엄마, 미안해요.”“빈아, 사과는 왜 해? 엄마는 너 데리고 가려고 왔어. 앞으로 엄마와 여기를 떠나서 풍경 좋은 곳으로 가서 생활하자. 어때?”민설아가 손을 뻗어 빈이 몸에 꽂은 링거를 빼려고 했다.빈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나를 보더니 이내
“만약 설아에게 빈이를 치료할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데려가게 해야지.”배인호는 여전히 앞서 한 결정을 견지했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이 반응이 아니어야 하는데 의외였다.배인호의 이러한 태도는 민설아가 빈이를 데려가는데 제일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민설아의 표정은 나보다 별반 나을 바 없었다. 오히려 원망하고 있었다.“허지영 씨,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나를 대하는 민설아의 태도가 날카로웠다. 다시 빈이를 데려가려는데 빈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작았지만 굳건했다.“엄마, 나 아빠와 같이 치료할래요.”민설아는 마치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빈이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빈이가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뭐라고? 여기 남아서 치료하겠다고?”빈이는 민설아가 쭈그리고 앉아 자기와 눈을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민설아의 눈빛에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용기 내서 속마음을 드러냈다.“엄마, 나 여기 남아서 치료할래요. 다 나으면 내가 찾으러 갈게요. 그러면 안 돼요?”“빈아, 엄마가 치료해 주면 돼. 너 여기 있으면 오히려 위험해. 알아?”민설아가 인내심 있게 빈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빈이는 오늘 예전과 많이 달랐다. 빈이는 내 손을 잡더니 행동으로 민설아를 거절했다.나는 빈이를 뒤에 숨기고는 말했다.“빈이가 결정했으니 다 나으면 돌려보내는 거로 하죠.”“빈아!”민설아가 잔뜩 약이 올랐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던 장난감이 갑자기 엇나가니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이해는 갔다.빈이는 민설아를 보기가 두려워 내 두 손을 더 힘껏 부여잡았다. 이때 배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빈이 두고 가. 내가 책임질게. 다 나아서도 너랑 같이 가겠다면 나도 막지 않을 거야.”배인호의 차가우면서도 가벼운 태도에 민설아는 놀라면서도 잘 믿지 못했다. 그녀는 나를 힐끔 보더니 나에 대한 질책과 거부감을 드러냈다.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민설아는 아마 내가
나는 환생했지만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환생한 것은 아니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나와 배인호의 사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모두 그와 연결되었다.민설아가 지금 여기서 나를 욕하는 것보다 차라리 사람을 갖고 노는 하늘을 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그 손 놔.”나의 손을 잡은 민설아를 본 이우범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민설아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바로 민설아의 손을 쳐냈다.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병실에서 나오는 배인호가 보였다. 그와 이우범은 이제 가장 큰 라이벌이다. 만나기만 하면 두 사람 표정이 모두 차갑게 변했다.“아직도 안 갔어? 지금 당장 여기서 떠나.”배인호는 민설아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배인호도 방금 민설아가 나의 손을 세게 잡은 걸 봤는지 내 앞을 막아서며 민설아와 나 사이의 거리를 떨어트렸다.민설아는 자기를 향한 배인호의 냉담한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비록 배인호는 예전에도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말투에서 거부감이 느껴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화가 나 보였지만 심호흡하며 결국 참았다.“그래요 그럼. 인호 씨 말대로 빈이 이식 수술 진행해요. 그런데 인호 씨하고 일치하던가요?”“아니.”배인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일치한 기증자를 계속 찾을 거야.”비록 기증자 검사에서 빈이가 그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친 자식이라고 해도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결국 오해는 풀렸다. “언제까지 찾을 작정이에요? 일치하는 기증자가 계속 나타나지 않으면 빈이는 죽기를 기다려야 하나요?”민설아가 배인호에게 물었다.“그럴 일은 절대로 없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배인호의 대답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간결했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민설아는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이우범이 그녀를 막았다.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에 나는 짜증이 몰려왔다.나는 이우범이
“그래요. 그때 가서 빈이 선택에 따르죠. 당신이 후회하지 않길 바라요.”민설아는 이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배인호는 차가운 표정으로 이우범을 바라보았다.“넌 안 가고 뭐 해?”이우범은 배인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내게 던졌다.“아이들을 돌보는 건 참 힘든 일이에요. 아이들을 일찍 데려오는 게 좋을 거예요.”그가 나에게 명확하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나는 이우범의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민감하게 알아차렸다.설마 이우범이 뭔갈 아는 건 아니겠지?로아와 승현이를 우리 부모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이우범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우범의 핸드폰이 울렸다. 회사 일 때문인지 1분 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쳐다보았다.“알겠어요.”그는 상대방의 말을 들은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침착한 말투로 배인호에게 말했다.“네가 우리 이씨 가문에 끼친 손해는 꼭 두 배로 갚아줄게.”“기대하고 있을게.”배인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하나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여기는 듯 침착했다.이우범도 회사 일을 처리하러 가는지 더 머무르지 않고 떠났다.나는 배인호와 이우범 사이의 비즈니스 전쟁이 현재 어느 정도 있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더 이상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내 문제가 아니라면 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병실로 다시 돌아오니 빈이는 이미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빈이의 작은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나와 배인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지영 아줌마, 아줌마하고 아빠도 날 버리는 거예요?”“빈이야 어떻게 널 버려? 네 아빠인데 널 버릴 리가 없잖아.”나의 위로가 다소 쓸모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배인호가 자기 피가 섞인 친 아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믿고 있었다.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바라보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