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는 손을 올려 자기 코를 만지더니 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왜 그래?”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민설아는 바로 빈이를 데리고 내렸다. 티슈를 꺼내 지혈하려고 했다. 그런 다음 책임을 나와 배인호에게 물었다.“두 사람 빈이한테 무슨 짓 했어요?”“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병원에 있는데 바로 빈이 검사부터 시켜요.”나는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빈이는 다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 확실히 이상했다. 자세히 검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필요 없어요. 내가 의사예요.”민설아는 차갑게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만약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다른 사람도 해결하기 힘들어요. 인호 씨 어서 병실을 잡아줘요.”그녀는 돌아서서 배인호에게 명령했다.배인호는 이때 민설아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빈이의 건강이 걱정되어 잠시 개인감정은 접어두고 빈이를 챙겼다.“알겠어.”배인호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바로 병실을 잡았다.민설아가 필요로 한 의료 장비와 약품은 모두 병원에서 제공했다.오늘 나는 병원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지금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저 병원에서 기다렸다. 이우범은 나의 옆에 와서 앉았다.나와 이우범은 얼굴을 보지 못한 며칠 사이에 왠지 모를 서먹함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는 이미 몇 번이고 나를 함정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나를 다치지 않기 위해 그랬다는 핑계를 댔지만 거부감이 들었다.“먼저 돌아가 봐.”배인호는 병실에서 나오더니 내게 말했다.“주소는 너도 알지?”“괜찮아요. 조금 있다가 호텔 잡을 거예요.”나는 고개를 저었다. 배인호 부모님 집으로 갔다가 배건호라도 만나게 된다면 더 어색할 것 같았다.“바로 내가 지내던 곳으로 가. 주소와 비밀번호는 보내줄게.”배인호는 호텔에 가서 자겠다는 나의 말을 무시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보니 부모님 집이 아니었다. 아마도 세종시에 있는 그의 부동산인 듯했다. 주소와 비밀번호를 모두
“지영아, 인호 어머니는 좀 어떠니? 어떻게 갑자기... 설마 그 일들이 다 사실이야?”엄마는 갑자기 내게 그 일에 대해 물었다.엄마도 아빠에게서 들었지만 자세한 상황은 모르는 것 같았다.나는 이쪽에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제야 엄마는 내가 세종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엄마가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별말씀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하셨다.“전에 얼마나 너한테 잘해주셨니. 우리 사이도 좋았었고. 다 배인호 그 나쁜 놈이 잘 못한 거지. 네가 김미애를 만나러 가는 거는 옳은 일이야. 안 그러면 너무 정 없어 보여요.”“엄마 나 안 혼내요?”나는 의심하며 물었다.“이게 뭐 혼낼 일이니? 배인호와 어쩔 수 없이 다시 부딪히겠지만 거리를 지켜. 다시 얽히는 건 안 돼. 엄마하고 아빠가 바라는 건 그거 딱 하나야.”엄마는 진지하게 말했다.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엄마의 태도에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대화를 나누다가 로아와 승현이가 잠에 들자 엄마는 통화를 끊었다.밤에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계속 엄습했다. 새벽 4시쯤, 안 그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배인호의 전화였다.설마 이 새벽에 잠을 안 자는 것일까? 나는 겨우 잠에서 깬 다음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너 어디야?”배인호는 바로 물었다.“호텔이에요.”내가 대답했다.“왜 내가 보낸 주소로 가지 않았어?”배인호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너 이우범하고 같이 있어?”나는 당연히 이우범과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호텔에 묵었다.나는 아직 잠이 덜 깨 정신이 없어서 천천히 대답했다.“아니요.”“왜 5초 동안이나 고민하다가 대답하는 거야? 허지영!”배인호는 갑자기 거칠하게 화를 내며 말했다.“너 어디 있어? 찾아갈게.”내가 어떻게 배인호가 지금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바로 거절했다.“안 돼요. 지금이 몇 신데, 인호 씨는
“알겠어.”이우범은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지금 그와 민설아의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 섣불리 말하지 않을 것이다.병원에 도착한 뒤 나와 이우범은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는 빈이를 만나러 갔고 나는 바로 김미애의 병실로 향했다.김미애는 빈이의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오늘 기분이 그래도 평온해 보였다. 내가 온 것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지영아, 왔니?”“아주머니, 점심은 드셨어요?”마침 점심시간이라 물었다.“먹었어. 너는? 점심도 안 먹고 온 건 아니지?”김미애는 따뜻하게 내게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침 뭔가를 먹고 싶었는데 누군가 음식을 가져왔다.배인호는 아주 넉넉하게 음식을 보냈다.김미애가 물었다.“인호는요? 왜 같이 안 왔어요?”“사모님, 대표님은 오후에 회의가 있으십니다.”비서는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그래요, 알겠어요.”김미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음식을 가져다준 비서가 떠난 뒤 김미애는 내게 말했다.“지영아, 어제 민설아가 병원에 와서 소란을 피웠다는데 그게 사실이니? 인호가 지금 민설아하고 같이 있는 거야?”김미애는 속으로 배인호가 민설아를 포기하고 아이만 지키겠다고 한 이유가 자기의 반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배인호가 다시 민설아와 엮일까 봐 걱정했다.”예전의 서란처럼 말이다.이 일은 절대로 김미래를 속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병원 의사나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네, 맞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걱정하지 마세요. 인호 씨 생각 바꾸지 않을 거예요.”“인호는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야. 아이 때문에라도 설마...”김미애의 얼굴에 의심이 깊어졌다. 빈이가 돌아온 뒤 그들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와 동시에 또 많은 골칫거리도 있었다.나는 김미애에게 빈이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마음의 병이기에 때로는
“만약 진짜 빈이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오냐오냐하면서 이렇게 버릇없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배인호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민설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이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빈이의 병세는 아마 매우 엄중한 듯했다. 이우범이 차에서 받은 전화는 빈이 병세와 관련된 내용이었을 것이다.배인호의 반응으로 보나 민설아의 말로 보나 나는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김미애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캐물었다.“빈이 그냥 위장에 조금 문제 생겼다고 하지 않았어? 너희들이 하는 말 들어보면 심각한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나 속일 생각하지 마.”“큰 문제 아니에요. 제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요.”민설아가 대답했다.“난 너 못 믿어. 인호야. 솔직하게 말해. 빈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김미애는 아예 민설아가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배인호에게 물었다.배인호는 민설아 품에 안긴 빈이를 보며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배인호도 민설아와 같은 대답을 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설아한테 치료 맡기기 싫어서 그래요.”배인호가 한 말은 민설아보다 설득력 있었다. 김미애는 한시름 놓더니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작은 문제면 민 선생님한테 맡길 필요가 없지. 뛰어난 신의면 치료하기 어려운 그런 병을 더 많이 봐줘야지. 빈이는 우리한테 맡겨.”그 말인즉 빈이는 배씨 가문에서 돌볼 테니 민설아더러 빈이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민설아는 이 일에서만큼은 매우 확고했고 전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안 돼요. 빈이를 돌보는 건 괜찮은데 빈이 몸 상태는 반드시 제가 관리해야 해요. 완치되면 다시 양육권에 관해 토론해요. 안 그러면 저도 절대 포기 못 해요. 배씨 가문이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세다 하지만 내가 빈이 엄마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아요. 강제로 아이를 빼앗아 가면 아이가 당신들 미워할 거라고요.”김미애와 배인호가 걱정하는 것도 이 문제였다.빈이도 클 만큼 컸기에 기억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아버지와 할
“이 일은 이미 결정했어.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마.”배인호가 내 말을 끊어버렸다. 말투는 민설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찼다. 내 마음도 같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병원 앞에 도착하자 배인호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했다.“호텔 가서 짐 정리하고 나한테로 와.”“필요 없어요. 내가 남겠다고 한 건 아주머니 곁에서 얘기도 나누고 마음을 풀어주려고 그랬던 거예요. 며칠 뒤면 나도 다시 서울로 올라갈 거 같아요.”나는 배인호의 제안을 거절했다.“여기서 얼마를 지내든 간에 내 쪽으로 와서 지내든지 아니면 우리 엄마 아빠한테로 가든지 해. 혼자 호텔에 있지 말고.”배인호는 이 일에서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내가 호텔에서 지내는 걸 아주 싫어하는 눈치였다.나는 배인호가 왜 이렇게 반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이때 이우범이 옆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왔다. 나와 배인호를 보고는 살짝 멈칫했지만 이내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우범이 나와 배인호 앞으로 오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나에게 물었다.“호텔로 같이 갈까요?”금방 나에게 거절당한 배인호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고 언짢은 표정으로 나와 이우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내가 어디서 지내든 배인호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먼저 들어가요.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요.”그래도 나는 이우범을 거절했다. 이 두 사람 중 그 누구와 있어도 이상했다.“무슨 일이 더 남았는데요?”하지만 이우범이 한마디 더 캐물었다.이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일이라면 당연히 이 두 사람을 피하는 것이었다. 순간 내 뇌세포들은 전쟁터라도 나간 듯 앞다투어 완벽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다.“전에 몸이 좀 안 좋다고 했잖아요. 조금 있다 검사 좀 받고 가려고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먼저들 가요.”“어디가 불편한데?”“어디가 불편한데요?”배인호와 이우범은 똑같은 말을 똑같이 걱정하는 눈빛으
이우범이 나를 해치지 않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한 많은 일이 은연중에 나에게 상처를 준 거나 다름없었다.아무리 마음이 강해도 이우범의 설계와 사기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특히 환생 후 이우범에 대한 내 믿음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비록 뒤에 점차 떨어졌지만 말이다.“그럼 말해봐요. 우범 씨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만약 인호가 빈이 수술을 고집한다면 설아가 로아와 승현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막아 줄게요.”이우범의 말투가 다시 침착해졌다.“그걸 들어줄 리가 없잖아요. 만약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하면 무조건 로아와 승현이를 생각하게 될 텐데.”이 일만 꺼내면 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이우범은 나를 다시 힐끔 쳐다봤고 눈빛이 묘했다. 이대 신호가 바뀌고 차는 십자로를 건너 앞으로 달렸다.“방법은 있죠. 나를 믿어요.”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대답했다.나는 더 이상 이우범을 믿을 수 없었다. 기분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만약 진짜 그날이 온다면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한 살도 안 되는 내 아이를 희생해 배인호와 다른 여자 사이의 아이를 구할만큼 위대하지 않다.나는 침묵을 지켰고 차는 그렇게 호텔에 도착했다. 나는 입을 꾹 닫고 방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는 온통 빈이의 병세와 관련된 일이었다.‘최악의 경우가 온다면 배인호는 어떻게 선택할까? 로아와 승현이가 자기 자식인 걸 아는데 내가 골수 기증을 거절한다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밤새 나는 이 문제 때문에 뒤척거렸다. 꿈에서도 빈이가 수술하는 장면이 나왔다. 잠에서 깬 나는 정신이 좋지 않았다. 약간 흐리멍덩한 기분이었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딜런이었다.이 사람은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내게 전화를 해왔다. 하지만 나는 가끔 받지 않았다.하는 말은 매번 너무 일치했다. 다급하게 민설아를 찾았는지 확인했다. 차수가 늘어날수록 더 조급해 보였다. 내 눈으로 딜런이 큰 병이 없는 걸 확인하지 않았으면 진짜 무슨 죽
“빈이는 큰 문제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이때 현관문 쪽에서 배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는 아줌마 두 분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부른 도우미인 것 같았다.배인호가 돌아오자 나는 한시름 놓았다. 이런 어려운 문제는 그에게 돌리면 된다.그는 두 아줌마에게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고 두 아줌마는 주방으로 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다른 편 소파에 앉았다.“나 속이려 들지 마. 작은 문제인데 설아가 왜 그런 말을 해.”김미애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는 당연히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발견했지만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빈이가 원래 체질이 좀 약해요. 그래서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사람들이 신경이 곤두서요. 엄마는 그냥 잘 쉬면서 정서만 잘 조절하면 돼요.”배인호의 담담한 말투는 아무런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김미애도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배인호가 말하기 싫으면 아무리 물어도 소용이 없다.하여 김미애도 입을 꾹 닫은 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너무 바빴다. 몇 분 더 앉아 있다가 위층 서재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나와 김미애만 남았다.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배건호가 나타났다.그는 나와 김미애를 보자 티 나게 멈칫하더니 이내 나를 향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김미애는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배건호를 피해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뭐 하자는 거야?”배건호가 이를 보더니 곧장 김미애를 붙잡으며 물었다.“지금 아예 나랑 마주치기도 싫다는 거야?”“이거 놔요!”김미애가 화를 내며 배건호의 손을 뿌리쳤다.“왜 돌아왔어요? 그때 아예 그 여자와 손잡고 집안의 한계를 뚫었어야죠. 인호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당신이네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나는 말문이 막혔다. 뭔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듯한 느낌이었다.배건호가 다시 손을 내밀어 김미애를 잡으려 했지만 나를 보더니 손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을 앞에 두고 계속 티격태격하기도 그랬다
배인호는 이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예의가 없다고 하기엔 전화를 받았고 예의 바르다고 하기엔 너무 대수롭지 않게 끊었다.“이 씨 그룹의 어떤 프로젝트를 빼앗았는데요?”내가 물었다.“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넌 그냥 내 충고만 기억하면 돼. 아니면 우범이 손에 어떻게 죽을지 몰라.”배인호가 덤덤하게 말했다.이우범 손에 죽는다라, 말이 너무 심했다.배인호는 얼굴을 굳히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말한 죽는다는 몸이 죽는다는 게 아니야. 너 바보야?”“내가 언제 몸이 죽는다고 했어요?”나도 약간 어이없었다. 난 그냥 이우범이 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아직 전생의 이우범에 대한 필터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게 아니라면 진흙 속에서 자라나는 연꽃과도 같은 인품에 대한 인상이 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나도 그에게 경계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종래로 그의 인성이 좋지 못하다거나 나의 생명 안전을 위협할 거라고는 의심한 적이 없다.하지만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우범은 어떤 때 마음이 차갑다 못해 모질었다.자기 약혼 파티에서 서란을 해코지하려고 한 것도 그리고 도시아의 죽음에 대한 냉정함도 그 증표였다.배인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랍에서 서류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던져놓았다.“봐봐.”이 몇 글자를 뱉는 배인호는 분노에 차 있었지만 애써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어리둥절해서 그 자료를 펼쳐보았다. 잠시 자료를 확인한 나는 놀라우면서도 곤혹스러웠고 약간은 아리송하기까지 했다. 자료는 당시 민설아가 강에 투신한 후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치료를 했지만 실패했다는 내용이 적힌 자료였다.더 아래로 내려가 보니 다른 결과도 있었다. 민설아가 상태가 좋아졌다는 내용이었다.그 결과에는 이우범의 사인도 있었다.이우범은 그때 아마 레지던트였을 것이다. 5년제 대학이라 그때는 레지던트일 수밖에 없다. 민설아의 응급 처치에 참여해도 정상이었다.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