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차를 마시는 거라면 간단했다.이우범은 나를 주시했지만, 눈빛은 예전처럼 부드럽고 절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 그때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가끔 입꼬리에 웃음이 걸리긴 했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나는 찻잔을 들어 “꿀꺽꿀꺽”하고 두 모금 만에 다 마시고는 이우범에게 말했다.“이우범 선생님, 천천히 마셔요. 저는 올라가서 쉬고 싶어요.”“지영아!”엄마는 내가 일부러 그러는 걸 알고 매우 언짢아 보였다.“엄마, 나 좀 그만 내버려두면 안 될까?”나는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이 말을 뒤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샤워하고 나니 몸이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Snow의 자료를 더 찾아보려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선혜였다.“아가씨, 저녁 식사하세요.”배가 고프긴 했지만, 이우범이 아직 갔는지 몰라 기선혜에게 물었다.“이우범 씨 갔어요?”기선혜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이요. 사모님이 저녁 먹고 가라고 해서…”이 말을 듣자 갑자기 식욕이 사라졌다. 하여 기선혜에게 밥을 위로 가져다 달라고 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 Snow의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자료를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면서도 신비했고 거의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국적과 종사하는 업종 외에 기타 정보는 거의 찾지 못했고 사진도 없었다.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이상했다. 국내외로 소문날 의술이라면 일부러 숨기지 않는 이상 사진 한 장 없을 리가 없었다. 숨길만한 이유가 뭘까 생각했지만 유일하게 생각나는 이유는 얼굴이 망가졌다는 것뿐이었다.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나는 기선혜가 밥을 가지고 온 줄 알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들어와요.”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웹페이지에 올라온 자료를 봤다.테이블에 올려놓은 밥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고 나는 손을 내밀어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곁눈질로 아직 방에 사람이 있다는 걸 발
수화기 너머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배 사장님이 계속 허지영 씨 이름만 불러서 서란 씨가 와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이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 아까까지 먹구름 가득하던 기분이 조금은 개인 듯한 느낌이었다.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였다니, 살짝 빈정이 상했다. 비서 한마디에 이렇게 기분이 풀릴 줄 몰랐다.“오해하셨네요. 전 지금 그 사람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에요. 서란이 그 사람 여자 친구에요. 저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서란을 찾아가세요.”기분이 좋아지긴 했어도 말투는 계속 딱딱했다.비서가 난감한 말투로 계속 도움을 청했다.“허지영 씨, 그래도 나와 주세요. 아니면 배 사장님 계속 여기 계실 텐데 그러면 일이 시끄러워집니다.”“안 가요.”내가 대답했다.그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배 사장님!”나도 같이 가슴을 졸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허지영 씨, 빨리 나와주세요! 배 사장님 무슨 원인인지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었는데 다치기까지 했어요!”“전에 썼던 방법이에요. 이제 안 속아요. 그 사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나는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배인호가 전에 이 방법을 쓴 적이 있어서 다시 차분해졌다.비서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이번엔 진짜 아니에요. 빨리 와보세요. 사, 사장님께서 다른 분 여자 친구를 허지영 씨로 착각했어요!”이 부분은 실로 나를 놀라게 했고 의외였다.‘만취야,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차를 운전해 그 술집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을 여자 친구로 착각하는 배인호를 찾으러 말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 배인호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비서는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쌍의 남녀가 보였고 남자는 매우 화가 난
“내가 기회를 얼마나 많이 줬는데, 다 잊었어요?”나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그때는 내가 내 마음을 몰랐잖아. 예전 일로 지금의 나를 판단하지 마. 응?”배인호의 말에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예전에 있었던 일은 기정사실이라 그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그도 자기가 전에 얼마나 지나치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만 계속했다.병원에 도착해 나는 배인호를 데리고 상처를 처리하고는 청담동으로 데려다줬다.배인호 어머니도 같이 있는 걸 알기에 나는 배인호를 문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알아서 들어가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조수석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너 때문에 다쳐서 길을 못 걷겠어.”배인호는 고개를 돌려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나는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게 왜 나 때문에 다친 게 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을 내가 마시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그 남자에게 때리라고 시킨 것도 아니다.배인호는 내가 답답해하자 말을 이어갔다.“두 달 동안 냉전만 안 했어도 내가 이렇게 됐겠어?”나는 배인호의 적반하장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분명히 애초에 배인호가 잘못해서 내가 화난 건데, 마지막에 가서 보면 내가 일부러 연락을 끊은 것으로 되었다.“아,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치료비는 물어줄 테니까 지금 당장 차에서 내려서 들어가요.”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귀찮은 듯 말했다.“안까지 데려다줘. 차가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배인호는 여전히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싫다고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내일 출근을 위해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둘이 계속 대치하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배인호 어머니의 얼굴이 창밖으로 크게 보였다. 거의 얼굴을 차에 붙이다시피 했다.나는 하는 수 없이 창문을 열었다. 배인호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고요한 거실에 핸드폰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나는 심장이 떨려왔다.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확인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걸어온 전화였다.받고 싶지 않았지만 안 받으면 오히려 더 의심을 살까 봐 배인호에게 “쉿”하고는 전화를 받았다.“지영아, 어디야? 왜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와?”엄마가 매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투는 듣는 사람이 큰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빨리 돌아갈게요. 세희랑 밖에서 돌고 있어요.”나는 아무렇게나 이유를 둘러댔지만, 마음속은 당황하기 그지없었다.“세희랑 있다는 거 진짜야?”엄마가 의심하며 물었다.“그럼 좀 바꿔봐.”일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배인호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갔어요. 있다 전화 넣으라고 할게요. 됐죠? 저도 이제 들어가려고요.”나는 계속 둘러대려고 했지만 엄마는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고 바로 알아챘다.“아니다. 내가 바로 세희에게 전화하면 돼. 세희 번호 알아.”이렇게 말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세희와 말을 맞출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다.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배인호가 예리한 시선으로 나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갑자기 말했다.“내가 이미 문자 넣었어. 별일 없을 거야.”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진짜요?”“응.”배인호의 눈썹이 올라갔다.“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이 밖에서 불륜 저지르고 있는 거 같지 않아?”이렇게 비유할 바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나는 배인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1, 2분쯤 지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엄마가 다시 전화해 온 것이었다.배인호가 반응이 빨랐고 세희도 마침 그 문자를 확인해서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길 수 있었다. 엄마는 그저 빨리 들어오라고 했고 나는 용건이 끝난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순간 엄마가 이우범 얘기
엄마의 눈빛이 살짝 변하더니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나는 네가 다시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까 봐 무서운 거야. 어찌 됐든 간에 다시 배인호와 감정으로 엮이지 마. 알겠지?”“엄마, 오늘 내가 인호 씨 만나러 갔다고 의심했죠? 맞아요?”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되물었다.엄마는 침묵을 지켰다.나는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배인호가 지금 나를 도와서 진명수 조사하고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안 만나요? 만나서 토론은 해야죠.”“전화로 해도 되잖아.”엄마는 확실히 좀 꽉 막힌 느낌이었다.예전의 엄마는 나를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인호와 관련된 일에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다.나와 배인호가 아까 같이 있었다는 것만 알면 바로 연을 끊을 것 같은 기세였다.“엄마, 나 피곤해요. 먼저 들어가서 쉴게요.”나는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아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 엄마도 더 이상 나를 구박하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았다.내가 돌아버릴 것 같은 건 엄마 때문만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모질게 끊어내지 못하는 것도 알고 있기에 엄마가 캐묻는 게 두려운 것이다.만약 내가 진짜 켕기는 게 없다면, 배인호에게 조금의 감정이라도 남아있지 않다면 나는 지금 태연하면서도 침착했을 것이다.이 밤 나는 깊은 잠이 들지 못했고 일찍 잠에서 깼다. 엄마와 마주 앉으면 다시 물어볼 것 같아서 나는 아침도 먹지 않은 채 회사로 향했다.나는 혼자 밖에서 아침을 먹었다. 정아가 의외로 아침부터 내게 전화를 해왔다. 말투는 매우 흥분에 차 있었다.“지영아, 나 다시 Snow 선생님 예약했어. 오늘도 나와 같이 갈 거야? 너도 약 좀 처방해 달라고 해. 살 좀 찌우게.”“언제?”Snow 얘기를 꺼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나를 살피던 그 눈동자가 생각났다.“오후에 잡혔어. 나도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지. 저번에 서란에게 기회를 빼앗긴 게 짜증 나긴 하지만 그래도 둘째를 위해
“침 맞는 거 받아들일 수 있어요?”Snow는 아이에 대한 질문을 건너뛴 채 나를 향해 물었다.나는 침을 맞아본 적은 없었기에 더럭 겁이 나긴 했다. 게다가 그녀가 나에게 주는 느낌이 이상해서 거절했다.“고민해 볼게요. 연락처 좀 남겨줄래요? 치료하고 싶으면 연락할게요.”나는 Snow가 쉽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 연락도 어렵고 예약은 더 어렵다고 정아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하지만 Snow는 바로 명함 한 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위에는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정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니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하지만 나는 그 명함을 받아 들었다. 나와 이 Snow라는 의사 사이에 남다른 인연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호텔에서 나온 정아는 의아함을 드러냈다.“왜지? 난 Snow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너를 이렇게 특별하게 대하는 거지?”“좋은 일 아니야?”내가 되물었다.“당연하지. 이렇게 대단한 의사를 친구로 두는 것도 나쁠 건 없지.”정아가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때때로 그 명함을 꺼내서 살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자꾸 불편해졌다.갑자기 뭔가 중요한게 생각났다. 만약 Snow가 진짜 그렇게 대단하다면 아까 맥을 짚으면서 내가 다시 임신하기는 어렵다는 걸 눈치챈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순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아가씨, 오셨네요.”기선혜가 나를 보고는 인사를 해왔다.“네, 엄마는요?”내가 물었다.“오후에 이 기사님과 병원으로 검사하러 갔어요. 아까 전화를 했는데 이우범 선생님이 밥 사주겠다고 해서 저녁에 식사하고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기선혜는 내가 이우범을 조금 꺼리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말하는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작아졌다.원래도 불안하던 마음에 짜증이 더해졌다. 엄마는 내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기어코 이우범을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나는 가방을 소파에 던져두
전생의 나는 유방암이었다. 현생에도 유방에 자그마한 문제가 있지만 크게 심각한 상태는 아녔다.하지만 이번의 검사로 보아하니, 문제가 조금은 심각해진 듯했다. 의사 선생님은 나더러 휴식을 잘 취하고, 감정 조절도 잘해야 한다면서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는 앞으로도 계속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죽기 직전의 느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인지라, 이 부분에대해 극도로 민감한 상태였다. 그러나 현생에서도 나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한 것 또한 잘 알고 있다.병원에서 나온 뒤 나는 회사로 가지 않고 혼자서 수정 팰리스로 갔다. 아마 집에서 나와 혼자 여기서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야 할 듯싶다.배인호든 우리 엄마든 지금 나에게 있어 모두 혼란스러운 존재이고, 나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나는 결정을 내린 뒤, 집에 돌아가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하였다.“지영아, 너 뭐 하는 짓이야?”내가 트렁크를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엄마가 놀라서 물으셨다.“엄마, 나 한동안은 바빠서 일단 수정 팰리스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머리도 혼란스럽고 엄마와도 다투고 싶지 않으니까, 나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나는 직설적으로 엄마에게 말했고, 모녀 사이에 이 정도의 솔직함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내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지영아, 너 지금 엄마와 맞먹으려는 거야? 내가 너더러 이우범 씨 만나라고 강요했다고 지금 엄마한테 화난 거니?”이건 단지 일부분의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단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은 기선혜가 엄마를 보살펴주시니, 나도 더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나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엄마, 나 엄마한테 화난 거 아니야. 그냥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감정적인 조절도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뿐이에요. ”내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은 엄마는 당황스러운 표정으
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한평생 나 보지 않을 예정이야?”배인호는 원망 섞인 말투로 마치 내가 그에게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나는 머뭇거리며 답했다.“그런 건 아니에요. 며칠 전 제가 인호 씨에게 미도 그룹 자료 보냈잖아요?”배인호는 내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도 말이 없어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은 줄 알았다.“너 지금 세상 무서운 거 없지? ”배인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또 한 달이 지났어. 너 내가 다친 거 뻔히 알면서도 한 달 동안 미도 그룹 자료 보낸 것 외에 다른 말 한 적 있어? 심지어 내가 괜찮아졌는지도 관심 없고 말이야.”그 말은 되게 낯설게 느껴졌다. 배인호가 지금 내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다니?이런 상황은 나에게 있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의 말투에서 내 과거의 모습이 보였으니 말이다.그의 말에 대답하려던 찰나, 전화기 너머로 서란의 소리가 들려왔다.“인호 씨, 저와 밥 먹으러 간다면서요? 안가도 뭐해요? 나 배고파요!”그녀의 청량한 목소리와 애교 섞인 말투에서 그 둘의 친밀한 관계가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분명히 이 모든 게 계획된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배인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내가 혹여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 기분이 나빠질까 봐 끊은 것인지, 아니면 나에게 전화를 한 게 들켜 전화를 끊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여 내가 배인호를 탓할 명분 또한 없다. 이 모든 게 내가 선택한 계획이니 말이다.나는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업무에만 집중했고, 어떻게 하면 하미선의 금고에서 진명수의 그 파일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지만 생각했다.퇴근 시간까지도 나의 기분은 여전히 다운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는 내 찌푸린 얼굴이 비쳤고, 나는 손을 들어 미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고, 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