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질문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배인호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며 갑자기 화를 내더니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 뒤를 따라갔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그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어제저녁 배인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그러려니 했고, 서란과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이 사람 설마, 고작 그것 때문에 화내는 건가?배인호는 날이 가면 갈수록 질투가 느는 것 같았고, 게다가 그 질투는 매번 이유 모를 그런 질투였다.“저 어제저녁 너무 지쳐서 잠들었어요. 원래는 물어보려고 했는데…”나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그를 달랬다.“인호 씨를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건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닌가요?”“이런 말로 쉽게 넘어갈 생각 하지 마!. 너 예전에는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현재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나 너무 잘 보여.”배인호는 차가운 얼굴로,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말했다.내가 예전에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고? 내 예전의 일편단심이 그래도 그에게 어느 정도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나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그냥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지금 웃음이 나와? 너 이젠 간덩이가 부었구나?”나의 웃음에 배인호는 짜증 섞인 말투로 나에게 경고를 날렸다.“너 지금 다쳤다고 내가 널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나는 바로 웃음을 멈췄다.“그래요.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 얼른 가서 일 봐요. 저 요 며칠 내로 진명수 찾아서 계약서 체결할 거니까 아마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알겠어. 일 다 해결되면 나 제대로 보상해 줘야 할 거야.”배인호는 가기 전까지 나에게 상기시켜 줬다. 나는 비록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뭘 어떻게 보상하란 말인가? 진짜 아이라도 가질 생각인 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일이 해결되었을 때쯤이면, 배인호는 아마 뼛속까지 나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도 이젠 깨어났으니,
도시아도 이우범을 발견했고,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이우범은 그녀가 나를 찾아오는 걸 분명히 싫어 할거란걸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도시아 씨, 전 볼 일이 남아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둘이 이야기 나눠요.”나는 도시아를 지나쳐 아무런 표정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나는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명과도 더는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그 둘은 나에게 한 번씩은 다른 마음을 품은 적 있기 때문이다.나는 지금 이우범에 대해 무척 혼란스러웠다. 처음의 믿음부터 시작해서, 후회, 현재는 소원해지고 의심까지 하는 게, 날이 갈수록 낯설었다.“네, 알겠어요.”도시아는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답했고, 그녀는 감히 이우범을 쳐다보기 무서운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나보다도 더 빠르게 회사 큰문을 향해 나갔다.이우범의 옆을 지나칠 때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이우범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그는 오히려 나에게 시선이 멈췄다.나는 굉장히 부담스러웠고, 그 눈빛은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미안해요.”내가 그의 옆을 지나칠 때쯤, 그가 먼저 입을 열었고, 살짝 미안함이 담긴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도시아 씨가 여길 찾아오면 안 되는 건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예요.”“그래요, 이우범 씨. 자기의 일생일대의 일은 신중해야 해요. 그건 어린애들 놀음이 아니니까요.”나는 발걸음을 멈춘 뒤, 2초간 머뭇거리다 그에게 한마디 당부했다.도시아가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내가 이우범에게 당부한 이유는 도시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둘이 앞으로 더는 내 생활을 방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 이 말을 한 것이다.나는 전생에 이우범의 여러 가지 수법이 나에게 쓰이지 말았으면 한다. 그는 이미 그런 낌새가 보였으며 나는 그를 멀리하고 싶을 뿐이다. 전에 냉정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균형을 잃으면 더 물불 안 가리는 법이다.이우범은 나를 깊게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눈빛을 피해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차에 타
그날의 그 통화 이후로 나와 배인호는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필요한 논의 외에는 다른 일로는 거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나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단 기선혜 부모님이 거주할 곳을 마련해준 후, 미도 그룹의 정황에 대해 파악할 방법을 생각하곤 했다. 그들은 불법 자금 세탁에 연루된 이상 분명 허점이 있을 것이다.다만 그 허점을 언제 찾을 수 있을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지영 씨, 지금 아주머니가 제 핸드폰으로 아주머니 친구분들에게 연락하고 싶다 하는데 어떡할까요?”기선혜가 초조한 말투가 나에게 물었다.“저 내일 엄마 친구분들 집에 초대할 거예요. 그러니 그냥 의사 선생님이 최대한 두뇌 사용 시간을 줄이라고 했다고 알려주세요. 조금 나아지면 그때 핸드폰 사용하게 해준다고요.”나는 기선혜에게 당부했다.기선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이런 변명만으로는 끝까지 속일 수 없다는 거도 잘 알고 있고, 엄마도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의심할 것이다.나는 집에서 파일을 가진 후 이 기사님더러 술자리 장소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이 술자리는 진명수가 주선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도착해 보니, 역시나 내 예상대로 하미선, 서란, 민예솔이 있었지만, 다행히 배인호는 없었다.하미선도 간덩이가 부은 듯하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이렇게 당당히 진명수와 산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였고,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예 신경도 안 쓰는듯했다.“허 대표님 왔어요? 얼른 앉아요.”하미선은 나를 보더니 가식적인 미소로 보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나도 웃어 보이며 의자를 끌어당겼고, 서란과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이번에 나를 보는 서란의 눈빛은 예전의 질투심과 적개심이 아닌, 승리자의 차분함이 담긴 눈빛이었고, 거기에는 약간의 의기양양함도 섞여 있었다.아마 요즘 배인호가 그녀에게 잘해주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란에게서 저런 눈빛이 나오기는 어려우니 말이다.배인호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속으로
내 차도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기에, 나는 배인호의 차가 멈췄을 때쯤, 바로 내 차를 향해 걸어갔다.배인호는 차에서 내린 뒤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서란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그의 그 애틋하고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은 내 기분을 더욱 잡치게 했다.물론 그가 서란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내 기분을 통제할 수 없었다.나는 그들을 무시한 채 차에 탔고,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백미러로 서란의 모습이 보였고, 그녀가 신나서 배인호의 팔을 잡는 그 장면은 나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배인호가 지금 계획대로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설마 나 아직도 배인호를 놓지 못한 건가?이런 걸 보면 나는 인간의 본성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유하가든에 돌아간 후, 나는 핸드폰을 확인 해봤지만 아무런 메시지나 전화도 오지 않았다. 조금 전 배인호도 나를 봤을 건데, 그는 나에게 단 하나의 설명도 없이 문자 한 통조차 없었다.하지만 이건 단지 누구나 알고 있는 계획일 뿐인데, 굳이 나에게 어떤 해명을 할 필요가 있을까?하지만 예전의 그라면 나에게 설명을 해줬을 것이다. 나는 이런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거실에 한참이나 혼자 앉아있었다.한참 시간이 지난 뒤 엄마가 위층에서 내려오셨다.“지영아, 왜 아직도 안 자는거야? 금방 들어온 거야?”엄마는 내 옆에 앉아 걱정되는 듯 물었다.“네, 오늘 저녁 술자리 모임이 있어서 조금 전에 왔어요. 엄마는 왜 아직도 안 주무시는 거예요?”나도 되물었다.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라, 엄마도 휴식이 필요하다. 엄마는 평소에는 그래도 일찍이 주무시곤 했었다.하지만 엄마는 한숨을 내쉬더니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지영아, 너 속일 생각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너희 아빠 뭔 일 생겼지?”그 질문에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설마 기선혜의 거짓말이 통하지 않은 건가?나는 애써 웃음을 지
배인호의 그 말에 나는 갑자기 뭐라고 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그 말을 들은 뒤, 조금 전까지 좋지 않았던 내 기분이 조금은 풀린듯했다.“일부러 저에게 이런 말 할 필요 없어요.”한참 뒤, 나는 겨우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일부러 아니야. 여기 온 것도 너 보려고 온 거야. 그러니 내려와.”배인호의 말투에는 명령조가 섞여 있었지만 전혀 싫지만은 않았다.나는 원래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엄마가 깰까 봐 발끝을 들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정원을 통해 큰 대문 앞에 도착하니, 배인호의 그림자가 가로등 불빛에 의해 비쳐 있었고, 그는 손에 담배 한 대를 들고 있었다.그는 나를 보더니 바로 담뱃불을 끄고는 옆 휴지통에 버렸고, 팔을 벌려 포옹의 사인을 보냈다.“안 달려와?”내가 어떻게 달려가서 그에게 안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조용히 걸어가 그에게 살며시 안겼다.배인호는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나를 꽉 끌어안았고, 나는 거의 그 가슴팍에 몸이 붙어져 배인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경이였다.“오늘 질투할 줄도 알고. 잘했어.”배인호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고, 그는 기쁜 표정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그는 나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언제쯤이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희망이 있는 건가?”나는 몇초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모르겠어요.”“모르는 거면 가능성은 있는 거네.”배인호는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그러기만 한다면 난 뭘 해도 좋을 것 같아. 나보고 큰길에서 바닥 청소하라고 해도 난 괜찮을 것 같아.”나는 바로 배인호가 큰길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는 아마 대표님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진 채 잘생긴 청소부라는 검색어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것만 같았다.그 화면은 왠지 모르게 웃겼고,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더 웃기도 전에 내 입술에는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고, 배인호는 내 허리를 감싸
“나도 몰라.”나는 미간을 찌푸렸고, 다소 무거운 말투로 답했다.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알고 있다. 이우범은 나를 진퇴양난의 경지까지 몰고 가려는 듯했다. 만약 이우범이 파혼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외부에서 알게라도 된다면, 나는 또 각종 여론몰이에 휩싸일 것이다.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지영아, 너 예전에 배인호를 그렇게 수년간 쫓아다녀도 끄떡없더니. 이혼하고 난 뒤에야 너에게 다시 돌아왔다는 게 말이 돼? 게다가 배인호의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지금 널 좋아하게 됐는데. 이게 대체 뭔 일이야?”나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배인호가 나에게 마음이 흔들린 시점부터 현생은 전생과 달라지기 시작했다.그래서 많은 일들은 나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인 거다.이렇게 우리들 모임은 나의 침묵 속에서 끝이 났고,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집에 돌아간 뒤, 나는 빠르게 이우범과 도시아의 기사에 대해 찾아봤다.하지만 그 둘은 아직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았기에, 그들과 관련된 소식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한창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쯤, 도시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허지영 씨, 저 다시 좀 도와주면 안 돼요? ”도시아는 울먹이며 나에게 말했다.“제가 뭘 도와줄 수 있죠?”나는 차분하게 되물었다.“우범 씨가 저와 파혼하려 해요. 제가 그걸 동의하지 않으니 우범 씨가 저를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요!”그 말을 하는 도시아는 약간 이미 미쳐있는 상태였다.하지만 그녀의 그런 미쳐있는 상태가 나도 낯설지만은 않았다.전생에 나도 배인호를 붙잡을 때 엄마와 아빠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고, 이런 이유로 우리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나를 도와주었지만, 결말은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전에 배인호가 한 말이 맞았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이우범도 그와 똑같았다. 심지어 협박하는 방식도 거의 비슷했다.“미안해요. 이건 도시아 씨와 이우범 씨 사이의 일이라
“도시아 씨가 자살소동 일으키는 거 때문에 전화했어요?”이우범은 담담하게 나에게 물었고, 그의 차분한 태도에 나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그래요. 지금 약혼녀가 죽으려 하는데 한번 와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내가 차갑게 되물었다.“그 사람도 이제 성인이니, 자기 목숨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이우범의 그 차갑고 냉담함이 나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 대해서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마치 전생의 배인호와 똑같았다. “어찌 됐든 간에, 도시아 씨가 우범 씨에 대한 감정은 진심이잖아요. 사람 한번 살린다 치면 안 돼요?”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도시아 씨도 제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이 모든 건 그 사람이 자초한 거라고요. 아닌가요?”이우범은 이 상황에서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이게 진짜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이우범은 현재도 의사지만, 그의 그 자애로운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건가? 자기 약혼녀에게 이 정도로 대하는 사람이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는 과연 어떻게 대할까?전생에 그와 손잡았다는 사실이 나는 후회스러웠고, 만약 내가 마지막에 불치병으로 죽지만 않았더라면, 그와도 갈등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아무런 결과도 없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고, 이우범을 재촉했다.“와서 도시아 씨 좀 말려줘요. 도시아 씨 부모님도 동의했어요. 이우범 씨가 도시아 씨 자살만 막으면 반드시 파혼할 수 있게 도시아 씨를 설득하겠다고요.”“굳이 그 사람들의 동의 따윈 필요 없어요.”이우범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아니면 지영 씨가 제 부탁을 들어주는 건 어때요?”그 말에 내 가슴이 갑자기 죄어왔다.“그럼, 제가 뭘 들어줬으면 하는데요?”“저와 밥 먹는 거 어때요?”이우범의 제안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나 간단하다고?하지만 나의 속마음에는 알
“왜... 그렇게 흥분해요?”내가 말을 멈추자, 이우범이 물었다.“지영 씨와 인호 사이의 일이 떠올랐나요?”그는 다 알면서 일부러 내게 묻는 것이다. 나와 배인호 사이의 일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이우범이고 기억 속의 배인호와 구분하려고 노력했다.“어쩌면 나와 조금 비슷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도시아는 우범 씨한테 잘했잖아요. 시아 씨는 아무것도 잘 못 한 게 없어요.”이우범은 냉정하게 비웃었다. “허허. 나를 속여 갇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도시아에요. 그 여자가 없었다면 우리 부모님도 그런 생각까진 하지 않으셨을 거고요. 나와 사이가 더 나빠지는 걸 부모님은 싫어하셨어요.”전에 그는 한동안 갇혀 있었다. 도시아가 나를 찾아와서 서류를 넘겨주는 대가로 그와 헤어져 달라고 했다.그것들이 도시아의 아이디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한순간 도시아에 대한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그녀가 이우범을 좋아하는 감정이 내가 배인호를 좋아하는 감정과 비슷하다지만 나는 그런 방법까지 사용한 적은 없었다.적어도 나는 배인호를 함정에 빠뜨리진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결국 나는 할 말이 없어 간단하게 대답했다.이우범은 이미 주문했고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전에 잠깐 만났을 때 그는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입맛이 별로 없어서 몇 젓가락 먹고는 먹지 못했다.“지영 씨하고 인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그는 나에게 물었다.“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어요?”나는 눈을 내리깔고 이우범을 쳐다보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이우범은 웃기 시작했고 그의 웃음소리에 나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콧대에 걸려 있던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늘고 얇은 손가락을 교차시키며 나를 바라보았다.“진명수에게 접근하기 위해서가 아닌가?”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내 마음속의 모든 추측이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