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연은 작업의 고수처럼 보였고 경험이 많아 보였다. 차에 오르자마자 그는 주동적으로 나의 안전벨트를 해주었다.“누나, 우리 바로 호텔로 갈까요?”전우연이 나를 보며 웃었다. 목소리도 일부러 낮게 깔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약간 느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나는 싫은 티를 내지 않았고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얼굴을 받치고 창밖의 풍경을 구경했다.오늘 이렇게 파격적인 결정을 한 것도 충동적으로 한 결정은 아니었다.배인호의 어머니는 내가 빨리 좋은 남자를 만나서 배인호가 나에게 관심을 끊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우범 어머니는 내가 최대한 이우범을 다시 만나지 말았으면 했다.그런데도 내가 남자를 찾지 않으면 진짜 말이 안 되었다.신체상의 제한이 없어져야만 마음의 족쇄도 풀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시도를 많이 해야 했다.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데 차는 이미 한 호텔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꽤 좋은 호텔로 보였다. 그래도 나를 저렴한 호텔로 데려가지는 않았다.“누나, 우리 올라가요.”전우연이 익숙한 듯 방을 예약하고는 내 어깨를 만지며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무슨 원인인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우연이 얍삽하고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속에 차오르던 욕망도 서서히 사라졌다.엘리베이터에 올라 그는 15층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를 기다렸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이유로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말이 될지 고민이 되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우범이 때를 잘 맞춰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잠깐만요.”나는 바로 전우연의 손을 뿌리치며 아주 중요한 전화인 듯 말했다.“먼저 전화 좀 받을게요.”“네, 누나 빨리 와요.”전우연은 내가 이 전화를 핑계로 떠날 준비를 한다는 걸 모르고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으로 걸어가 이우범의 전화를 받았다.이우범은 평소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조급하게 말했다.“지영 씨, 왜 우리 엄마 제안 받아들인 거예요? 난 지영 씨를
우지훈과 나는 친한 편은 아니라서 서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유정은 나와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허허, 어떤 사람은 여기서 커피 마실 기분이 나나 봐요?”나는 정아와 애들이랑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무시를 선택했다.“몇 년 동안 일편단심인 척하더니 지금 보니까 자아도취네요. 가식적인 감정으로 오히려 라니만 억울하게 누명 씌우고, 진짜 나쁜 사람이라니까요!”유정은 쉬지 않고 계속 말했다. 우지훈이 막아섰지만 듣지 않았다.“미친년.”정아가 그쪽을 노려보며 욕했다.“누굴 욕하는 거예요? 당신한테 한 얘기도 아닌데 왜 나서요?”유정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허지영 씨, 거북이처럼 숨지만 말고 직접 몇 마디 하시죠?”나는 이 상황이 그저 웃겼다.“개가 짖는데 나도 같이 짖어야 하나?”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아네와 같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유정이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오늘 배인호 씨 라니랑 같이 민설아 성묘하러 갔어요. 미선 아주머니랑 예솔 언니 이렇게 같이 갔을걸요?”전에 하미선에게서 민설아를 보러 가고 싶다고, 그것도 배인호와 같이 가보고 싶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이제 또 붙어먹은 건가? 웃겨.’“지금처럼 밀당하는 게 먹힌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라니한테는 안 되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역시 불쌍해요.”유정은 내가 타격을 받았겠다고 생각했는지 말투가 점점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 앞에서의 이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했다.우지훈의 표정이 복잡했고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유정아, 왜 그래?”갑자기 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은 방금 울기라도 한 듯 빨갛게 부어 있었고 무슨 상황인지 몰라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라니야, 괜찮아?”유정은 서란을 보자 바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서란을 관심하기 시작했다.서란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그냥 조금 슬퍼서 그래. 근데 왜 이 사람들이랑.
“지영아, 나 좀 데려다줘.”정아가 바로 나한테 바짝 붙었다.“노성민이 데리러 못 오겠대.”정아는 오늘 노성민 차를 타고 온 거여서 차가 없었다.“그래, 가자.”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임산부를 혼자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중간쯤 갔을 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배인호가 걸어온 전화였다. 나는 걸려 온 전화를 한번 힐끔 보더니 바로 핸드폰 전원을 종료했다.하지만 이내 정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또 배인호였다.“뭐죠?”정아가 짜증스럽게 스피커폰을 켜고 언짢은 듯 물었다.“지영이 옆에 있어요?”배인호가 몇 초 침묵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보세요, 형님. 혹시 정신 분열 걸렸어요? 한쪽으로는 서란이랑 첫사랑 만나러 가고 다른 쪽으로는 지영이 찾으러 오게?”정아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욕했다.배인호가 대충 설명했다.“다 오해예요.”“제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쓰레기!”정아가 그 해명을 듣더니 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바로 비속어를 내뱉고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이렇게 말하고는 엄숙하게 나를 타일렀다.“지영아, 배인호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믿지 마. 오해긴 무슨, 그냥 너 속이려고 하는 말이야!”“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까지 바보 아니야.”내가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며칠 뒤에 회사로 출근하래. 나도 직장 다니는 여자 된다. 사랑싸움할 시간 없어.”다행이네, 우리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는 거야!”정아가 엄마처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말했다.차가 정아네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이우범을 발견했다. 그는 노성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가 잡지 모델 같기도 했다.순간 나는 정아를 데려다준 걸 후회했다.차가 멈추자, 노성민이 쪼르르 달려 나와 정아를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이우범은 차창 너머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일부러 참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지영 씨.”노성민이 되돌아 와 나한테 말했다.“조금 있다 우범이 형 좀 태워다줘요. 오늘 차를 안 가져왔대요.”나는 무의
누리꾼은 두 파로 나뉘었다.한 파는 배인호가 서란과 성묘하러 간 건 화해의 징조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서로 좋아하던 사이기도 했고 일부 사건 때문에 2년 헤어진 것뿐이라고 했다.다른 한 파는 배 씨와 시에나 그룹 간의 협력의 징조지 서로 옛정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거라고 했다.배인호와 서란이 열점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우리 집 회사에 입사했다.입사를 축하하기 위해 정아가 자리를 만들었다. 다 같이 모여서 먹고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정아는 옆에서 웃으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지영아, 귀띔하는 건데...”정아가 갑자기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배인호가 요즘 서란과의 그 뉴스 누가 내보냈는지 조사 중인데 네가 내보냈다면서?”“켁켁켁...”나는 술에 사레가 걸려 죽을 뻔했다. 배인호도 어지간히 한가한 게 아닌가 보다.“왜 그랬어?”정아가 실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나는 술기운이 조금 올라온 상태라 시원하게 대답했다.“배인호가 귀찮게 할가 봐 일 만들어 준 거지. 어때? 아이디어 좋지 않아?”정아가 내 뒤를 보고는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고 급히 내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술에 취해서 헛소리까지 하네!”나는 무슨 고집인지 정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헛소리 아니야. 내가 터트린 거 맞아. 서란이랑 계속 엮일 거면 단단히 엮이는 게 낫지. 그럼 나 귀찮게 안 할 거 아니야. 이제부터는 매일 기자들한테 터트릴 거야. 안 되면 민설아 일도 터트릴 거야!”이때 손 하나가 내 뒤에서 나타나 술잔을 낚아챘다.나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뒤를 돌아보았다. 배인호가 얼굴을 굳히고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옆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정아도 평소 배인호를 쓰레기라고 욕하긴 했지만, 지금은 내가 상대방에 관한 찌라시를 터트리다가 들켰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넷은 마치 무언극을 찍는 것 같았다.“따라 나와.”배인호가 술잔을
그 침묵은 한 여자가 나타나 나를 알아보고 나서야 깨졌다.“잉? 또 보네요?”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한참을 쳐다봤다. 며칠 전 카페에서 내 편을 들어준 단발머리 여자였다.그녀는 오늘 오버스러운 귀걸이를 하고 옷도 매우 화려하게 입고 있었다. 하지만 촌스럽다기보다는 굉장히 섹시하고 활발해 보였다.“또 만났네요.”나는 내던 성질을 감추고 단발머리 여자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배인호가 내 옆에 서서 모르는 사람은 절대 가까이 오지 말라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고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하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술 마시러 왔어요?”단발머리 여자는 꽤 열정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이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시원시원했다.“이분은, 남자 친구?”단발머리 여자가 배인호를 가리키며 물었다.나는 빠르게 부인했다.“안 친해요. 그냥 보통 친구예요.”단발머리 여자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말했다.“그래요? 내가 찜해도 괜찮죠? 잘생긴 거 같은데.”그는 아주 직설적으로 배인호에 대한 흥미를 드러냈다.“당연하죠. 화이팅해요!”나는 그녀의 말을 전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고 팔을 들어 화이팅 하라고 손짓했다.배인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단발머리 여자가 연락처를 받으려고 다가오자 험악하게 나를 째려보더니 길옆에 세워둔 포르쉐를 타고 사라졌다.단발머리 여자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예쁜 언니, 친구가 성격이 되게 더러운데요?”“더럽기만 하겠어요? 눈치도 없어요. 그냥 타겟을 바꾸는 게 어때요? 저 사람한테 당신은 너무 과분한 사람이에요.”배인호가 가고 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하지만 도전적인 걸 좋아한다면 제가 저 사람 전화번호 줄게요.”단발머리 여자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진짜요? 아까 보니까 친하지 않다기보다는 커플 간의 사랑싸움 같던데요?”나는 웃음이 나왔다.“나랑 저 사람 다 서른 살 넘은 아저씨 아줌마예요. 커플은 무슨. 걱정 마요. 진짜 안 친해요.
이상한 여자...나는 냥이의 빨간 머리와 오버스러운 귀걸이, 코걸이를 한번 보고는 생각했다.‘이건 이상한 게 아니라 개성이 있는 거야.’반항심 때문인지 나는 배인호의 전화번호를 냥이에게 넘겼다.“전화번호는 문자로 보내줬어요. 잘 메모해 둬요.”냥이가 활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래요, 고마워요!”만약 냥이가 나 대신 배인호를 해결해 준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한다.이때 냥이의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찾으러 나왔고 냥이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나도 다시 돌아가려는데 양아치로 보이는 서너 명의 청년들이 나를 감쌌다.이때 유진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민머리를 살살 매만지더니 가식적으로 웃으며 말했다.“허지영 씨 맞죠? 자기소개 좀 할게요. 저는 유진웅이라고 합니다. 아주 반듯한 서울시 시민이죠!”유진웅은 전에 세화 프로젝트에서 난동을 부리던 양아치 삼식이 형님의 본명이었다. 딱 봐도 유진웅은 오늘 나를 목적으로 온 것 같았다. 저번에 차 사고도 그렇고 왜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알아줘야 할 건 그가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아주 능수능란하다는 것이었다.“유진웅 씨? 저한테 무슨 일로?”내가 담담하게 물었다.“아가씨가 저 같은 서민을 다 알고 계시고, 참으로 영광입니다!”유진웅은 웃을 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마침 오늘 이렇게 만났는데 아가씨한테 차 한잔 대접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친구라도 사귑시다!”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진웅 씨, 무슨 일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제 친구가 곧 저 찾으러 나올 텐데 차는 다음에 마십시다. 그때는 제가 살게요.”“딱 오늘 마셔야겠어요. 어디가 맛있는지 잘 아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갑시다. 제 차가 바로 저쪽에 있는데 올라가시죠?”유진웅이 길옆에 서 있는 차 한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만약 내가 거절하면 유진웅은 아마도 나를 강제로 끌고 갈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나만 손해다.“그래요, 그럼 한잔하러 가시죠.”나는
몸이 점점 더 뜨거워졌고 이성만으로 버티고 있었다.하지만 곧 이우범의 목소리가 들렸다.“허지영 씨!”그의 목소리는 화가 나 있었고 매우 조급해 보였다.순간 내 목에 칼이 들어왔고 누군가 나를 인질로 삼아 이우범을 협박하고 있었다.“테이블에 있는 물 마셔. 아니면 지금 당장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나는 힘들게 눈을 떴다. 눈앞이 흐릿했고 그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이우범이 테이블 옆으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물을 마시는 걸 보았다.마시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매우 허약했다.“이우범 씨...”이우범이 물을 다 마시자, 내 옆에 있던 남자들이 바로 도망쳤고 대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이우범은 다른데 신경 쓸 새 없이 내 옆으로 달려왔고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걱정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이우범 씨, 빨리 신고해요. 그 물에 약을 탔어요...”나는 몸이 너무 불처럼 타올라 말할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약이요?”이우범이 머리를 돌려 빈 페트병을 보았다.나는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디워시 향 같았다. 그 향은 마치 맑고 푸른 수림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꽃향기가 나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전에 배인호가 약에 취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이건 확실히 컨트롤하기가 힘들었다.잘생기고 몸매가 좋은 남자라, 그것도 이렇게 활기 넘치는 남자라니...나는 그의 몸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의 몸도 나처럼 열이 달아올랐고 눈빛도 점점 흐려졌다.“우범 씨,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나도 더 이상 버티긴 힘들었다. 머릿속에 모자이크가 필요한 화면이 자꾸만 떠올랐다.이우범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목젖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머리를 숙여 나에게 키스를 해왔다. 하지만 입술이 아닌 볼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나는 솔로다”를 외치고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우범을 바닥에 눌러 눕혔다. 그러고는 이우범의 몸 위에 올라
내 말이 끝나자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이우범만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진짜예요?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거예요?”나는 일부러 배인호를 무시하고는 이우범을 향해 웃어 보였다.“네. 오늘도 봐요. 우범 씨가 제일 먼저 나 구하러 왔잖아요. 기회를 안 주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이우범이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억제하지 못했다.배인호의 표정은 전례 없는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에겐 더 이상 손댈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우범과 사귀는 건 나의 자유였다.“먼저 병원부터 가자.”엄마가 걱정스레 말했다.나는 머리를 끄덕였고 이우범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배인호 옆을 지나치는데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허지영, 후회할 거야.”나는 배인호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배인호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겪었던 아픔을 겪었으니 서로 퉁친 걸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엄마 아빠는 그런 배인호를 힐끔 쳐다보더니 나를 데리고 나갔다. 곧이어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경찰이 온 듯싶었다.나와 이우범은 병원에 도착해 치료받았다. 약 효과가 지나긴 했지만, 몸에 해로운 약이라 신중하게 대해야 했다.엄마는 새벽까지 내 곁에 같이 있어 주면서 말했다.“네 아빠 아직 경찰서에 있는데 화가 잔뜩 나 계시더라.”“서란이랑 유진웅이 한 짓이에요. 증인이 있어도 부족하대요?”내가 물었다.“유진웅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서란이 너무 깨끗하게 빠져나가서 어려울 수도 있어.”엄마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배인호를 알게 되면서부터 계속 다사다난하네, 어떡하지?”그러다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그리고, 이 선생님이랑 사귀는 거 진짜 신중하게 고려해 봤어?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야.”“네, 생각해 봤어요.”나는 굳건하게 대답했다.“엄마랑 아빠도 내가 이 선생님이랑 만나보는 거 원하지 않았어요?”엄마가 한참 침묵하더니 말했다.“저번에 절에 가서 제비를 뽑아서 길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