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걱정 마세요. 인호 씨랑 같이 가서 검사해 봤는데 문제 없었어요. 그냥 요즘 그이가 너무 바빠서 집에 잘 못 들어오다보니 계획이 좀 늦어졌을 뿐이에요.”감동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쉽게도 나에겐 이 집 며느리로 남을 복이 없었다.“네 아빠랑 나 인호 스캔들 보고 여러 번 뭐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집사람인 네가 단속을 더 잘해야 해. 알겠니?”어머님이 당부했다.내가 단속한다 해서 얌전해질 배인호가 아니었고 곧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그 진심 가득한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어머니.”대화를 좀 더 나누고는 아버님 어머님과 같이 아침을 먹었다. 배인호가 아침 일찍 나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하지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배인호에 대한 생각은 단 하나, 그러든지 말든지였다.아침 식사가 끝나자 나는 차를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우범을 찾아 따져야 할 게 있었다.이우범이 회진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회를 잡은 나는 거짓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물었다.“이 선생님,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바빠요.”이우범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하얗고 청초한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저 보기 민망해서 그러는 거죠?”나는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원망을 쏟아냈다.“배인호를 이혼하게 설득해달라고 했더니 아버님 어머님을 청담동으로 오게 설득하셨네요. 이 선생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정의로우셨을까. 열 채의 절을 부술지언정 한 사람의 혼인은 깨지 않는다 뭐 이런 신념이라도 생긴 건가요?”이우범은 가볍게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말한다.“아저씨랑 아주머니가 저한테 배인호와 그쪽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으셔서 그냥 간단하게 그쪽이 이혼하고 싶어 한다고 했을 뿐이에요.”이 말을 들은 나는 하마트면 병원에서 난동을 피울 뻔했다.이 사람은 인성을 잘생긴 얼굴과 맞바꾼 건가? 나와 배인호 사이의 많고 많은 문제 중에 하필이면 “나 이혼하고 싶어”
마키아토가 달기는 했지만 그걸 마신다고 연애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쓰디쓴 아메리카노 같았고 서란은 달콤한 마키아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때때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머릿속으로 내일모레 그녀와 배인호가 만나는 시간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서울시 비즈니스 심포지엄은 오전 9시 반부터 시작되고 서란은 서빙 알바로 일찍부터 회의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배인호는 문을 통과할 때 그녀를 발견할 것이고 그렇게 큐피드의 사랑의 화살을 맞을 것이다.“서란 씨, 다른 아르바이트해볼 생각 있어요? 과외 알바 소개해 줄까요? 내일부터 가능한데, 페이도 좋고.”서란이 옆자리 테이블을 정리하는 틈을 타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서란이 고맙다는 듯 나를 보며 웃어 보였지만 내 제안은 거절했다.“지영 언니,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제가 며칠 뒤면 개학이라 내일모레 임시 서빙 알바까지만 하고 학교 가서 등록해야 돼요.”생각해 보니 개학이 다가오긴 했다.내가 한발 늦었다. 며칠만 더 일찍 말을 꺼냈으면 서란이 배인호 앞에 나타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이내 마음이 다시 놓였다. 배인호와 서연 정도의 인연이면 한 번을 막으면 두 번 세 번 더 막아야 할 것이다...“고맙긴.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얘기해 본 거야.”나는 커피를 한 모금 하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럼 이 알바도 그만두는 거야?”“네, 개학하면 시간이 안 나서요.”서란이 아쉬운 듯 주위를 한번 빙 둘러본다. 그러고는 보기 좋게 씩 웃어 보인다.“지영 언니, 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조금 난처했다. 서란이 이 모든 걸 안다면 아마도 멀찌감치 나를 피했을 것이다.이때 손님이 들어왔고 서란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아마 이 저렴한 가게에 다시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방관자로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다시 한번 감상하는 게 전생보다 쉽지는 않았다.이우범
서란은 우리에게 헤드셋을 나눠주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헤드셋을 우리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고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다음은 배인호였고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배인호는 보기 드물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 곧이어 한 마디 덧붙였다.“고마워요.”서란이 그에게 남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서란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배인호로 향했고 그 시선에는 경이로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일편단심이라고 해도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소녀는 “고마워요”라는 말 한미디로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수줍음이 많았다.혹시 반할 가봐 배인호를 보고도 못 본척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이 소소한 에피소드는 금방 지나갔다. 심포지엄이 시작되었고 주요하게는 서울시와 세종시의 연합 발전 및 주변 도시의 발전에 대한 토론과 실현 가능한 방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서울시는 최근 몇 년간 무서운 기세로 발전했고 그중 여러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라 확장이 필요했다.나는 잘 모르는 내용이라 아빠의 견해, 배인호의 생각, 아버님의 의견을 듣는 것 외에 나는 줄곧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심포지엄이 끝나고 아빠가 찾아왔다.“영이야, 여긴 어쩐 일이야?”“집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와 봤어.”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내가 태생부터 장사나 정치와는 안맞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런 행사를 지겨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여기에 있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인호랑 같이 온 거냐?”아빠가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쳐다보았다. 배인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가 상위자임을 알 수 있었다.기타 비즈니스 거물들과 비기면 배인호는 젊은 편이었지만 이미 그는 빼어난 능력자였다.“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기 좋네. 집사람으로서 이런 자리에 참석해 그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필요해.”아빠가 의미심장하게 당부했다.“사돈, 오랜만입니다.”“아이고 이게 누굽니까. 우리 배 사장님 아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청담동은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집에 도착했고 나는 이 기사한테 들어가 보라고 했다.아버님 어머님은 집에 있었지만 배인호는 아직이었다.“지영아, 인호는? 같이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혼자 들어오는 나를 보고 어머님이 물었다.“심포지엄이 끝나고 친구랑 밥 먹었어요. 인호 씨 이미 들어온 줄 알았는데.”나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내 추측이 맞다면 배인호는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냥감이 생겼으니 그의 마음은 진작에 다른 사람한테 가 있을 것이다.아버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세종시로 돌아가기 전인데도 이렇게 밖으로 돌아치는데 돌아가면 이 집을 호텔처럼 사용할게 뻔했다.“인호한테 전화해. 안 받으면 친구들한테 전화 돌려!”아버님이 성질을 내더니 손을 저으며 말했다.어머님이 나한테 눈치를 주었고 나는 전화기를 건넸다.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을 텐데 멀리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일을 어머님께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았다. 배인호가 자기 어머니를 욕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배인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이우범 빼고 있어야 할 번호는 다 있었다.어머님이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들 뒤지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서너 사람쯤 연락했을 때 스피커폰으로 노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인호 형, 형수님 전환데?”“안 받아!”배인호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가득 묻어 나왔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 모든 걸 똑똑히 듣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 사람들한테 난 그저 사랑받지 못해 원망으로 가득한 여자일 것이다.“형 어머니신데...”노성민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맞장구 소리가 갑자기 끊겼고 배인호가 전화를 넘겨받았다.“엄마?”“인호 너 지금 어디야. 저녁은 집에 들어와서 먹어야지. 맨날 이상한 별 볼일 없는 애들이랑 어울리고 다니다 몸 망가지면 어떡해!”어머님은 평소에 부드럽고 차분한 분이셨지만 지금은 기세가 호랑이 같
“정아가 찾아서요.”나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자정이 넘어 클라우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기선우는 이미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다.오버스러운 금목걸이를 한 뚱뚱한 남자 서너 명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비웃었다.“저분이 네가 연락한 빽이냐 이 자식아. 고작 아줌마를 불러왔어?”“설마 우리랑 하룻밤 보내는 걸로 목숨 값하려고?”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나는 기선우 쪽으로 걸어가 그를 일으켰다. 멀쩡하던 젊은 사내가 눈탱이가 밤탱이 되어 못 알아볼 정도였고 그 모습은 꽤나 딱했다.“누나, 여기서 알바로 발레파킹 중이었는데 실수로 저분들 차를 살짝 긁었어요. 배상해 드린다고 했는데 2000만 원이나 달라고... 그렇게 많이는 없는데...”기선우가 작은 소리로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줬다.“무슨 차길래? 한번 봐봐.”내 물음에 기선우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밝지 않은 불빛 아래 하얀 티구안이 세워져 있었다.고작 이 차로?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쌀이 찌푸려졌다. 한 대가 4000만 원 정도일 텐데 조금 긁힌 거로 1000만 원이라니,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었다.“어때요 아가씨, 보상은 어떻게 하실라고?”“삐쩍 마른 게 가슴이 나보다도 작네. 하룻밤으로는 안되겠는데!”뚱뚱한 남자들이 상스러운 말을 계속 뱉어내자 기선우가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켜 세웠고 피로 얼룩진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말 가려서 해! 아님 그냥 날 때려죽여!”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요즘 대학생들 다 이렇게 혈기왕성한 건가?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내 뒤에 숨어 덜덜 떨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빗나갔다.기선우의 남자다운 모습에 뚱보들은 다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기선우를 몸 뒤로 숨겼고 무섭게 뚱보들을 쏘아보며 말했다.“3분만 기다려.”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기는 클라우드 호텔 소속이었고 기선우는 호텔 알바생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호텔 책임자가 나서서 해결하는 게 맞지만 아직까지 그 누
가슴 쪽이 시원해졌다. 나는 지금 분명히 옷이 벗겨진 채로 흐트러진 모습일 것이다.이 모든 상황의 장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고 머리를 파묻으려 했다.재빨리 손을 뻗어 배인호를 막았다. 하지만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또 날 시험하려는 거예요?”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배인호의 눈 속에 담긴 욕망이 반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몇 초 정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상황이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행동은 빠르고 냉랭했다.나도 조용히 몸을 돌려 배인호와 등지고 누웠다. 마음속에 낙담만 커져갔다.언젠가 나도 배인호를 몸으로 유혹하려 했다. 그와 아이를 낳고 간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혼하고 각자의 생활을 살기를 바랐다.새벽이 되어서야 잠든 탓에 나는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문자가 여러 통 와있었다.한 통은 어머님이 보낸 문자였다. 볼일이 생겨 세종시로 돌아간다는 문자였다.또 한 통은 민정이었다. 상업성 콘서트 제안이었다.마지막 한 통은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내용이 아주 놀라웠다. 어제 기선우의 손을 잡고 주차장에서 나오는 사진이었고 각도로 봤을 땐 연인 같았지만 기선우는 많이 다쳐 있었고 조금 불쌍해 보였다.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에 여러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파파라치한테 찍힌 건가? 아니면 어제 그 뚱보들이랑 한패인 사람들이 찍은 건가?아빠와 남편의 신분이 특별하긴 해도 난 항상 조용하게 지내왔다. 배인호와 결혼하고 나서는 정아도 잘 만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파파라치한테 찍히게 된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원인이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그쪽에서 끊어버렸다.할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만약 사진이 새나가면 기선우와의 사이가 아무리 결백하다 해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누리꾼들에게 오해를 살 것이다. 그냥 조용히 얼굴 반반한 애와 잠시 즐기고
여기는 서울시 교외의 한 낡은 동네다. 90년대 말에 지은 직원 복지 아파트 단지 옆에 이미 폐업한 대형 화학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그때 그 시절 서중석은 이 화학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의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10년 전, 화학공장에 부도가 났고 배 씨 가문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그 뒤 별다른 계획 없이 계속 이곳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만약 어느 날 계획이 생긴다면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단지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자본가는 피도 눈물도 없다. 배인호 같은 천생 장사꾼은 더 계략에 능했다. 그가 허락한 철거 보상금은 딱 표준선을 맞췄고 한 푼도 더 주지 않았다.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배인호가 서란을 위해 자선가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말이다.서중석이 대표로 배인호와 면담했고 충돌을 예상했지만 배인호는 의외로 배중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곧이어 배상 표준을 바꿨고 입주민들 모두 표준선을 훌쩍 넘는 금액을 보상받게 되었다.이러한 행보는 서란을 화나게 하면서도 감동받게 했다. 화나는 건 이러한 상황을 애초에 배인호가 만들었다는 거고 감동받은 건 배인호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는 거였다.나는 차 안에 앉아 단지에 켜진 불들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전생에 나는 배인호가 철거 보상 방안을 바꾼 사실을 알고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여자 하나를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계산해 보니 그때는 배인호가 서란을 쫓아다닌지 반년쯤 되던 때였다. 반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그녀에 미쳐있었다는 거다.서란이 몇 동 몇 호에 사는지까지는 모르는 터라 나는 차를 운전해 크지 않은 단지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담장도 없고 경비도 없는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편했다.마침 한바퀴를 다 돌았을 때 익숙한 부가티 한대가 보였다.배인호가 올블랙 차림으로 차 앞에 기대어 있었다. 긴 다리로 차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고 머리는 살짝 아래로 떨구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몇 분 뒤, 기선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말투는 몹시 황송했다.“누나, 이 돈 뭐예요? 학비쯤은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너 아직 학생이고 공부가 본분이야. 학점 때문에 졸업 못하면 어떡해?”침대에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나는 목소리가 조금 풀려있었다.“누나 말 들어. 서울대 좋은 학교야. 시간을 알바에만 쏟아붓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으면 그때 갚아도 돼.”“그래도 저는...”기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목이 메는 듯했다.내 마음도 씁쓸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너무 간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단순한 애를 잘 이용하고 있다. 기선우는 내가 착한 줄로만 알고 있다. 사실은 양의 탈을 쓴 승냥이인데 말이다.기선우 같은 출신으로 서울대에 입학하고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서란만 빼면 나는 기선우와 같은 불굴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좋게 보고 있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앞으로 돈 부족하면 나한테 얘기해. 후원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졸업해서 직장 찾으면 그때 갚으면 돼.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이자 조금 보태서 갚으면 돼.”나는 이렇게 덧붙였다.이 정도 돈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선우를 도우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였다.기선우도 많이 쪼들렸을 게 뻔했다. 아니면 개강 전날까지 알바할 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기선우는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카톡을 보내왔다.「고마워요 누나. 앞으로 꼭 갚을게요.」 답장은 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이튿날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정성껏 치장을 했다. 하얀 드레스는 우아함을 자아냈고 연한 화장으로 미모를 더 뽐냈다. 첼로를 챙겨 이기사와 서울대로 향했다.학교로 다시 돌아오니 감개무량했다. 생기발랄한 신입생들을 보아하니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엊그제 같았다.그때의 나는 기쁨에 들떠있었다. 배인호가 다니는 학교에 합격해 그와 학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