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더는 그들과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통 벗어 날 수가 없었다.온하랑은 점점 짜증이 밀려와 끝내는 인내심의 극치에 다다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를 보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즉시 방해죄로 경찰에 신고 할거에요."기자들은 그제야 슬금슬금 물러섰다.병원 부근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기자들이 떠나자 주위의 행인들과 주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에게 손가락질을했다.온하랑은 복잡한 마음으로 다시 길을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버스 한 대가 도착했다. 그녀는 몇 호선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무작정 올라탔다.현대병원 역에서 승객들이 많이 내려 버스는 텅텅 비어 있었다. 온하랑은 맨 뒤 쪽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강남 시는 큰도시로서 요 몇 년 동안 다른 도시에 비해 가장 빠르게 발전했다.병원 부근이 가장 번화해서 식당과 호텔이 곳곳에 널려 있다.행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병원의 보고서류를 들고 있었다.몇 정거장 지나자 행인이 뜸해졌고 가로변 파란 들판이 눈에 들어왔고 양쪽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어느새 재개발 구역에 도착했다.재개발 구역을 지나고 승객들이 잇따라 내리자 버스 안에는 온하랑과 어떤 아주머니 두 명만 남았다."다음 역은 논현역입니다."버스 안은 조용하고 안내방송 소리만 났다.갑자기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그 아주머니는 뒤를 돌아보았다.온하랑은 멍해 있다가 뒤늦게 자신의 핸드폰임을 깨닫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핸드폰 화면에 부승민 세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온하랑의 엄지손가락은 몇 초간 멈춰 있다가 버튼을 왼쪽으로 당겼다.전화를 끊어버렸다.2초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벨 소리가 다시 울렸고 부승민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온하랑은 다시 거절하고 모든 앱을 종료하고 전원을 끄고 가방에 쑤셔 넣었다.그녀의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아주머니는 도시 외곽에 곧 도착하기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버스가
온하랑은 먼저 휴대폰으로 돈을 지불하고 통화 기록을 누르자 그 안에는 부승민 한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과 부승민이 보낸 메시지 몇 통이 있었다.그녀는 차례차례 확인했다. [온하랑, 너 어디야? 내가 널 데리러 갈게.][그 기사는 내가 설명할게.][미안해.]그 세 문자를 보고 온하랑은 피식 웃었다.[미안해.]또 미안하다는 말이다.그는 영원히 이 한마디만 할 것이다.미안한 줄 알면서도 계속 미안한 짓을 한다.한참 뒤에 네 번째 문자가 보내져 있었다. [온하랑, 네가 병원 입구에서 한 인터뷰가 악의적으로 편집되어서 내가 이미 손을 써서 기사를 모두 막았어. 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이 문자 보면 연락 줘.”온하랑이 인스타에서 검색하자 과연 자신에 대한 찌라시를 보았고 얼마 전 여러 공식계정에서 게시했다.언론매체에서는 이 찌라시에 [부승민의 바람 상대 온하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온하랑은 어떤 조치가 있었는지 확인을 했다.과연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다만 여러 공식계정과 언론에서는 온하랑의 이런 태도를 보고 그녀가 찔리는 구석이있다고 판단했다. 찌라시 아래에 달린 댓글들은 모두 온하랑에 대한 비난과 외모 평가였다."비록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금 부승민이라는 이 사람은 도대체 뭔 생각이지? 추서윤이 그렇게 예쁜데 불륜녀를 찾으러 가다니. 이 여자는 추서윤과 비길 수도 없는데 말이지.""이건 즉 남자들이 바람 날 때 불륜녀의 외모보다 신선함에 끌린다는 거지.""아내는 첩보다 못하고 첩은 도둑질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한편 이 기간에 유튜브에는 추서윤과 온하랑의 비주얼 믹스컷이 쏟아졌다.가장 많이 재생된 영상 중 하나는 [부승민의 불륜 상대 VS 부승민 결혼 상대]라는 제목이다. 인기에 힘입어 이런 종류의 동영상은 셀 수 없이 많았다.이것들은 모두 중요치 않다.또 다른 인기 검색어는 [BX 그룹 공식계정 ‘좋아요’를 누르다] 였다.클릭 해 보니 누군가가 BX 그룹 공식계정으로 [온하랑은 불륜녀] 라는 게시글에
”당신은 나와 함께 여름의 무더움과 도시의 차가움을 견뎌내 주었지. 노래는 계속되는데 당신의 따뜻한 눈동자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 당신의 따뜻함을 잃는 나는 웃음을 잃었고,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지. 비 오는 날마다 그때의 당신이 생각나. 내가 소중히 간직하는 이 기억을 당신은 이미 다 잊어버렸겠지만. 말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나의 이야기는 너로 전부 가득 차 있지. 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내 나머지 인생을 맡기려고 했을까. 왜 나의 모든 걸 버릴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을까. 말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지. 나의 이야기는 너로 전부 가득 차 있지... ”가수의 목소리가 뛰어난 편도 아니고 음정도 보통이었다. 지금은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나 노래는 온하랑의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을 아프게 하기에는 충분했다.하루 종일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그녀는 부승민이 어리숙한 대학생에서 지금의 BX 그룹 대표로 성장하는 것을 10년 동안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봤다.그는 그녀의 본보기고, 어두운 밤의 한 줄기 빛이며, 그녀의 10년을 가득 채운 소중한 이야기였다.그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갔다.3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대했고 아낌없는 열정을 퍼부었다.그도 괜찮은 남편을 연기하려고 노력했다.하지만 가짜는 결국 가짜인 걸까.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갔지만, 그녀만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 그는 그녀를 아내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애인 정도로 대했다.3년 동안 그는 매해 추서윤을 만나러 갔지만 그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추서윤의 말대로, 삼각관계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제3자인 것이다.그녀는 그저 부승민과 추서윤 사이에
네티즌들이 뭐라고 하든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순 없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승민뿐이었다.그녀는 MQ 및 기타 프로젝트의 홍보와 관련하여 종종 언론과 접촉했기에, 네티즌 대부분이 그저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여론을 따르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들이 본 것은, 그저 누군가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오늘의 찌라시 같은 경우도 오미연이 배신을 하고 언론이 의도적으로 댓글을 조작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네티즌들에게 그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극단적인 예로, 온하랑의 해명 같은 건 부승민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해서 인터넷에 단 한 글자도 올라가지 못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네티즌들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주혁과 온하랑은 함께 바에 잠시 앉아 있었다.온하랑이 물었다."오늘 오후에 스케줄 없어?”"없어, 있으면 매니저가 날 가만 안 놔뒀을걸. 오히려 잘 됐어, 너랑 여기 잠깐 같이 앉아 있을게. 아니다, 저녁에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을래? 모처럼 둘 다 여유시간 있는데.”"그래."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따가 백화점에 들러서 아줌마랑 아저씨 선물 좀 사가 자. 빈손으로 갈 순 없지.”"아니야, 그냥 너만 가면 돼.”"안 돼, 예의 없게 그럴 순 없지.”말은 마친 온하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이 근처에 쇼핑몰이 하나 있었기에 그녀는 그리로 가기로 했다."같이 가자.”"안 돼, 네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몰라? 내가 지금 언론에서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데, 나랑 같이 있는 게 찍히면 너까지 봉변당할 거야.”온하랑은 인터넷의 언론을 개의치 않았다.네티즌들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여론이 지나가면 대부분 사람은 이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기껏해야 추서윤의 팬들이 그녀를 쫓아다니며 계속 욕할 것이다."그럼 내 차 타고 가. 주차장에서 기다릴게.”"그래.”온하랑은 이주
김민희는 온하랑을 위로하며 인터넷의 댓글들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했다.김민희는 온하랑과 부승민이 함께 지낸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추서윤이 끼어들 틈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다."아줌마, 아저씨, 감사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든 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어요. 마음에 두지도 않을 거고요.”"그래, 그게 맞는 거야. 근데... 부승민씨는 왜 이런 찌라시에 대해 해명하지 않으셨어? 찌라시 때문에 네 평판이 떨어졌잖아.”"언론과 네티즌들은 제가 부씨 집안의 입양아고 부승민이 제 오빠라는 걸 진작에 알아냈어요. 알면서도 계속 마녀사냥 하는 거라서 그들에게 해명하는 건 소용 없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관심이 식은 후 기사들을 삭제하면 괜찮을 거예요.”만약 그녀와 부승민의 사이가 결백하다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그렇긴 하지. 부승민씨도 바빠서 네티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겠어."김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이주혁에게도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 터졌었는데,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무응답으로 대응하니 스캔들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그렇기에 김민희는 온하랑의 대응이 맞다고 생각했다.그때, 이주혁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참, 어머니. 지난번에 부적 두 개 구하셨잖아요.”"아, 맞다."김민희는 서랍에서 부적을 꺼내 온하랑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주혁이가 네가 요즘 운이 좀 안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난번에 절에 가서 향을 피울 때 너한테 주려고 부적을 하나 더 달라고 했어. 스님께서 말하시길 이 부적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쓸모가 있다고 하셨어.”온하랑은 그냥 지나가듯이 한 말을 이주혁이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부적을 건네받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고맙습니다. 괜히 걱정 끼쳐 드렸네요.”"아이고,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데 뭐.”온하랑과 이주혁은 오랫동안 김민희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이주혁이 마스크를 벗고는 앞으로 나서서 인사했다."할아버지, 할머니. 하랑이를 데려다줄 때 할아버지께서 아프시다는 걸 듣고 인사 겸 올라왔어요. 할아버지 몸은 좀 괜찮으세요?”"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아요."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알겠습니다. 하랑이도 데려다줬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랑아, 다음에 보자.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부승민씨도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이주혁은 마스크를 쓰고 병실을 나갔다."하랑아, 저 친구 참 잘생기고 사람 괜찮다 얘."할머니가 웃으며 말하고는 몰래 부승민을 쳐다보았다.그녀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주혁은 분명 온하랑에게 관심이 있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주혁은 추서윤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온하랑은 할머니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맞장구를 쳤다.“할머니, 저 친구 사실 엄청 유명한 스타예요. 쟤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이 줄을 섰어요.”"그래? 그럼 너희 둘은 어떻게 알게 됐어?”"어릴 적 이웃집에 살던 애라서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이사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어머, 인연이네!"할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죽마고우인거지?”"그런 셈이죠.”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그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하랑아, 오늘 하루 종일 출근하느라 피곤했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괜찮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민아, 빨리 하랑이 데려다주지 않고 뭐해?”'출근'이라는 말은 부승민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둘러댄 핑계에 불과했다.두 어르신 모두 이 부부 사이에 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부승민이 아침 일찍 추서윤을 데리고 병문안 왔는데 온하랑은 하루 종일 얼굴을 비치지 않다가 이제야 나타났다. 그리고 방금 온하랑이 병실에 들어와서는 부승민을 보고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태도에서 짐작하고도 남았다.
”서윤 씨가 왜?”부승민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온하랑이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서윤이는 알려진 사람이라 부정적인 여론에 휘말리면 안 돼...”“서윤씨는 여론에 휘말리면 안 되고, 나는 된다는 거야?”“하랑아, 여론이 퍼지지 않게 막는 게 최선의 방법인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퍼질 만큼 퍼진 뒤였어. 지금으로서는 그냥 무응대로 대처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거 너도 알잖아...”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이 일은 부승민과 추서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결국 그녀가 제3자의 누명을 쓰고 욕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그 원인은 역시 그가 추서윤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이번에 부승민이 추서윤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기를 쓰고 막았던 것처럼.이제 그에게는 온하랑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대처도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데서 확연히 알 수 있었다.그는 이미 분명히 입장을 밝혔고 추서윤만을 신경 쓰고 있는데,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희망고문해봤자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다음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부승민은 또다시 추서윤을 선택할 것이다.만약 혹시라도 둘이 싸운다면 부승민은 또 그녀의 공감 능력을 운운하며 그녀가 추서윤의 일을 망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온하랑의 침묵이 이어지자 부승민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미안해, 극성팬들이 너에게 피해를 줄 줄은 미처 몰랐어...”그는 택배를 보내 협박하는 것이 그저 맛보기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온하랑이 입을 피해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그는 추서윤이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만 신경을 썼지, 온하랑이 어떻게 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부승민, 때로는 미안
부승민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해명하듯 말했다."서윤이는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서 혼자 있으면 위험해...”그의 말을 들으며 온하랑은 깊은 허무함을 느꼈다.부승민은 대체 언제쯤이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녀는 추서윤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녀가 추서윤을 이해해 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추서윤이 아침에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다만 그녀가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내면 부승민은 또 그녀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매도하겠지."그녀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넌 마찬가지로 그녀한테 갔을 거잖아. 네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으니까. 뭘 구구절절 핑계를 대.”온하랑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나한테 이런 얘기 해줄 필요도 없어.”"네가 이주혁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이럴 때 그를 만나야만 했어? 게다가 할아버지한테도 데려오고...”"오빠도 마찬가지야. 너도 이럴 때 추서윤을 만나러 가고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켰잖아.다 너한테서 배운 거야.”"서윤이가 불안해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서 기분을 달래줘야 했던 거야. 너도 전에 할아버지께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 서윤이를 데려와도 된다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 화내?"부승민은 어리둥절해하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남편이 다른 여자의 전화 한 통에 불려 나가 밤새 돌아오지 않더니, 다음날 그 여자를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한 상황인데. 왜 화를 내냐니.그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추서윤의 건강이 제일이었다. 추서윤이 아파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추서윤을 달래줘야 해서... 얼마나 정당한 이유인지.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다.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아, 맞다. 내가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주혁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안 돼. 걔가 할아버지를 보러 오고 싶어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