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 씨가 왜?”부승민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온하랑이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서윤이는 알려진 사람이라 부정적인 여론에 휘말리면 안 돼...”“서윤씨는 여론에 휘말리면 안 되고, 나는 된다는 거야?”“하랑아, 여론이 퍼지지 않게 막는 게 최선의 방법인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퍼질 만큼 퍼진 뒤였어. 지금으로서는 그냥 무응대로 대처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거 너도 알잖아...”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이 일은 부승민과 추서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결국 그녀가 제3자의 누명을 쓰고 욕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그 원인은 역시 그가 추서윤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이번에 부승민이 추서윤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기를 쓰고 막았던 것처럼.이제 그에게는 온하랑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대처도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데서 확연히 알 수 있었다.그는 이미 분명히 입장을 밝혔고 추서윤만을 신경 쓰고 있는데,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희망고문해봤자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다음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부승민은 또다시 추서윤을 선택할 것이다.만약 혹시라도 둘이 싸운다면 부승민은 또 그녀의 공감 능력을 운운하며 그녀가 추서윤의 일을 망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온하랑의 침묵이 이어지자 부승민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미안해, 극성팬들이 너에게 피해를 줄 줄은 미처 몰랐어...”그는 택배를 보내 협박하는 것이 그저 맛보기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온하랑이 입을 피해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그는 추서윤이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만 신경을 썼지, 온하랑이 어떻게 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부승민, 때로는 미안
부승민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해명하듯 말했다."서윤이는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서 혼자 있으면 위험해...”그의 말을 들으며 온하랑은 깊은 허무함을 느꼈다.부승민은 대체 언제쯤이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녀는 추서윤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녀가 추서윤을 이해해 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추서윤이 아침에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다만 그녀가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내면 부승민은 또 그녀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매도하겠지."그녀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넌 마찬가지로 그녀한테 갔을 거잖아. 네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으니까. 뭘 구구절절 핑계를 대.”온하랑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나한테 이런 얘기 해줄 필요도 없어.”"네가 이주혁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이럴 때 그를 만나야만 했어? 게다가 할아버지한테도 데려오고...”"오빠도 마찬가지야. 너도 이럴 때 추서윤을 만나러 가고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켰잖아.다 너한테서 배운 거야.”"서윤이가 불안해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서 기분을 달래줘야 했던 거야. 너도 전에 할아버지께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 서윤이를 데려와도 된다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 화내?"부승민은 어리둥절해하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남편이 다른 여자의 전화 한 통에 불려 나가 밤새 돌아오지 않더니, 다음날 그 여자를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한 상황인데. 왜 화를 내냐니.그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추서윤의 건강이 제일이었다. 추서윤이 아파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추서윤을 달래줘야 해서... 얼마나 정당한 이유인지.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다.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아, 맞다. 내가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주혁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안 돼. 걔가 할아버지를 보러 오고 싶어
부승민이 침묵했다.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온하랑이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그냥 생각만 해 본 거겠지. 언제 진짜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됐어, 이만 돌아가. 나 쉬고 싶어.”만약 부승민이 여전히 지금처럼 추서윤의 전화 한 통에 바로 떠난다면,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다른 여자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 나가는 남편은 사양이었다.부승민의 연기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이제 겨우 아홉 시인데, 벌써 쉬려고?”"오늘 좀 피곤하네.”"긴장 풀어줄까?”“긴장?"온하랑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응."불빛을 등진 그의 얼굴이 그늘에 가려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어떻게?”"가만히 앉아 있어.”부승민이 온하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벅지에 큰 손이 닿는가 싶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뜨거운 손이 몸을 천천히 만지자 온하랑은 순간 감전된 듯한 느낌이 들어 온몸을 찌릿 떨었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부승민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잠깐만."온하랑이 치마 밑의 손을 지긋하게 눌렀다.방금 말다툼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이렇게 달래주면 풀릴 줄 아는 건가?거기까지 생각한 온하랑은 순간 우울해져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피곤해서 싫어.”"정말 싫어?"부승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온하랑은 그를 바라보던 눈을 내리깔고 다리를 오므렸다.그가 발걸음을 돌려 떠나자 온하랑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뭐라도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부승민이 떠난 게 아니라 화장실로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잠시 후, 손을 닦으며 나온 부승민이 온하랑을 바라보았
그녀의 시력은 이미 거의 회복되었기에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었다.이튿날 아침, 온하랑은 아침 식사 후 먼저 퇴원 수속을 밟고 운전기사를 불러 자신의 물건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병실로 갔다.병실 안은 고요했다.할아버지는 병상에,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각자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온하랑은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할아버지, 할머니."온하랑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아침 드셨어요?”"먹었어.”"먹었어.”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두 분... 무슨 일이세요? 싸우셨어요?""싸운 게 아니라 네 할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잖아."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흘겨보며 말했다.온하랑이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할아버지, 왜 할머니한테 화내셨어요?”"화 안 냈는데..."할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게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그럼 무슨 일이에요?”할머니가 냉소를 지으셨다."하랑아, 네가 한번 들어봐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양반이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게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는 게 아니면 뭐겠니?”할아버지도 억울하셨는지 대꾸했다."어차피 병원에 입원해도 먹고 싸는 건 똑같은데 차라리 집에 가서 하는 게 낫지.”할아버지는 입원하시는 걸 싫어하셔서 며칠 전에도 퇴원 얘기를 꺼내셨다.온하랑이 할아버지를 설득했다."할아버지, 아직 몸이 다 안 나으셨으니 병원에 며칠 더 계시는 게 어떠세요?”"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난 이미 다 나아서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어.”"할아버지, 그건 의사한테 물어봐야죠.”"물어볼 필요 없어. 내가 알아."할아버지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씀하셨다.“할아버지...”"무슨 일이야?”그때, 부승민이 양복 차림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손에는 음식이 포장된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너 아직 회사에 안 갔냐?"할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 먼저 뵙고 이따가 가려
"알겠습니다."부승민은 임 원장실에서 나와 병실로 향했다.모퉁이를 돌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두 명이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전 남편? 그럼 둘이 실제로 결혼했단 말이야?"왼쪽에 선 의사가 말했다."아마 진짜일걸. 그리고 최근에 이혼한 걸 거야."오른쪽에 선 의사가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부씨 집안 큰 어르신이 이 병원 주주 중 한 명인 데다가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시고, BX그룹 대표인 부승민 또한 이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내부 직원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부승민이 최근 스캔들에 휩싸이는 바람에 병원 입구에는 기자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심지어 VIP 병동에 들어가려는 기자들까지 있어 병원에서는 직원들과 경비원에게 특별공지를 내렸다.오른쪽에 있는 의사도 며칠 전 자신이 진료한 온하랑이 부씨 어르신의 병실에 드나드는 걸 보고 나서야 그녀가 찌라시에 나오는 '제3자'라는 걸 알았다.하지만 온하랑은 전 남편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그때 그는 온하랑의 남편이 쓰레기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그게 부승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얼마 전 부승민과 스캔들이 났던 그 여자 연예인이 아마 내연녀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녀가 이혼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그들이 결혼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왼쪽 의사가 물었다.막 대답하려던 오른쪽 의사가 부승민을 발견하고는 정색하며 인사했다.“부 대표님.”"부 대표님."왼쪽 의사도 따라서 소리쳤다.부승민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곁을 지나갔다.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들은 오른쪽 의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온하랑씨가 직접 말해줬어.”부승민이 잠깐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계속 걸어갔다.병실로 돌아오자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물었다."임 원장이 뭐라고 하든?”할머니와 온하랑도 부승민을 보았다."임 원장님께서 퇴원해서 집에서 휴식해도 된다고 하셨어요.”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그제야 기를 편 듯 할머니와 온하랑을 곁눈질로 흘깃 보았다."
부승민이 운전기사를 데려오지 않았기에 온하랑은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전벨트를 맸다.부승민은 운전석에 앉은 후 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그는 손을 들어 옷깃을 느슨하게 하며 무심코 물었다."의사한테 내가 네 전남편이라고 말했어?”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부승민이 임신한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온하랑은 경계심을 갖고 부승민을 쳐다보며 다리 옆에 있던 양손을 무심코 아랫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지지 않고 쏘아보며 말했다."왜? 추서윤 때문에 이혼했다는 걸 남들이 알까 봐 걱정돼?”"온하랑, 그런 뜻이 아니잖아.”"그럼 무슨 뜻이야?"온하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부승민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널 탓할 생각은 없었어.”온하랑의 현남편으로서, 온하랑이 의사에게 자신을 전남편이라고 소개한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내가 오버했다고 치자."온하랑이 무심한 듯 대답했다."내가 처음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말한 거야. 그때 우리는 원래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전남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지.”“...”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온하랑은 살며시 부승민의 안색을 살피고는 한숨을 돌렸다.그는 아직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온하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할아버지의 병세가 금방 호전되었기에 당분간 그녀와 부승민은 이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배 속의 아이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하지만 그때가 되면 아이도 꽤 자랐을 테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녀를 비호해줄 테니 부승민이 강제로 낙태를 시킬 수는 없었다.차가 BX그룹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온하랑과 부승민은 차에서 내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온하랑이 먼저 내렸다.사무실로 가는 길에 몇몇 직원들이 온하랑을 보고 인사를 했다.“전무님.”"전무님, 몸은 괜찮
사무실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BX 그룹에는 직원 단톡방이 있었는데 평소 내용 공고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단톡방의 주요 관리인은 대표실의 조 비서였다.부승민도 단톡방의 관리인이지만 그는 한 번도 단톡방에 무언가를 올린 적이 없었다.단톡방에는 비록 사람이 많았지만 상사들도 모두 있었기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조용했고 직원들도 감히 안에서 마음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오늘도 단톡방에 공고가 올라왔기에 직원들은 평소처럼 조 비서가 무언가 올린 줄 알고 단톡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단톡방에 공고를 올린 사람은 관리인 배지를 달고 있는 '부승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었다.부대표가 단체 채팅방에 뭘 올렸다고?![BX 그룹 직원 수칙, 제53조: 엄격한 업무 분위기를 지향하고 좋은 업무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업무 시간 중 모여 장난을 치거나, 업무 외의 사적인 일에 대해 논의하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상사의 사생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1차 위반 시 경고 후 한 달 동안 월급 10% 감액, 2차 위반 시 월급 20% 감액, 3차 위반 시 즉시 해고 후 블랙리스트에 등기.]확인을 마친 사람들이 단톡방에 하나둘 답장하기 시작했다.추서윤이 부승민을 찾으러 회사에 왔을 때부터 직원들은 각종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승민과 추서윤이 함께 있는 장면이 여러 번 찍히며 민윤커플을 덕질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다가 부승민과 온하랑이 함께 있는 사진도 찍히면서 회사에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이런 루머는 아무리 퍼져도 부승민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고, 부승민 역시 이런 작은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평소 단톡방에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가 뜻밖에도 발언했다.직원 수칙 53조를 되풀이하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 의미까지 간단히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한 소식통에 따르면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인 온 전무가
"온 전무, 건강 회복한 거 축하해."오미연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온하랑이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온 전무가 며칠 동안 안 오길래 얼굴 들고 다니기 창피해서 안 오는 줄 알았지 뭐야.”온하랑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오 전무는 연말 상여금이 반이나 깎였는데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날 골탕 먹이고 싶었어? 오 전무 알고 보니까 통이 큰 사람이었네.”오미연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온하랑,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무슨 뜻이야?”오미연이 눈썹을 올리며 은근하게 말했다."그게 정말 인턴의 업무 실수라고 생각해?”온하랑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을 꾸민 것은 오미연이고 인턴은 그저 오미연의 죄를 뒤집어쓴 것에 불과했다.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오미연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한 일인 걸 너도 눈치챘는데 과연 대표님이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지키고 인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로 했어,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해?”뭘 의미하냐고?온하랑이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이미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승민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고, 그에게 있어서 추서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의미했다.온하랑과 오미연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오미연이 아무리 그녀를 헐뜯어도 홍보팀 전무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녀의 평판보다 오미연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오미연이 이어 말했다."연말 상여금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상여금일 뿐이고, 내 월급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리고 연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상여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처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너뿐이겠지. 온하랑, 이제 대표님 마음속에서의 네 위치를 알겠어? 그는 마치 너를 보호하는 것처럼 단톡방에서 얘기했지만 실제로 너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평판은 여전히 나빴고, 일은 예전과 다름없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