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전무, 건강 회복한 거 축하해."오미연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온하랑이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온 전무가 며칠 동안 안 오길래 얼굴 들고 다니기 창피해서 안 오는 줄 알았지 뭐야.”온하랑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오 전무는 연말 상여금이 반이나 깎였는데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날 골탕 먹이고 싶었어? 오 전무 알고 보니까 통이 큰 사람이었네.”오미연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온하랑,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무슨 뜻이야?”오미연이 눈썹을 올리며 은근하게 말했다."그게 정말 인턴의 업무 실수라고 생각해?”온하랑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을 꾸민 것은 오미연이고 인턴은 그저 오미연의 죄를 뒤집어쓴 것에 불과했다.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오미연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한 일인 걸 너도 눈치챘는데 과연 대표님이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지키고 인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로 했어,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해?”뭘 의미하냐고?온하랑이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이미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승민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고, 그에게 있어서 추서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의미했다.온하랑과 오미연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오미연이 아무리 그녀를 헐뜯어도 홍보팀 전무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녀의 평판보다 오미연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오미연이 이어 말했다."연말 상여금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상여금일 뿐이고, 내 월급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리고 연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상여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처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너뿐이겠지. 온하랑, 이제 대표님 마음속에서의 네 위치를 알겠어? 그는 마치 너를 보호하는 것처럼 단톡방에서 얘기했지만 실제로 너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평판은 여전히 나빴고, 일은 예전과 다름없
그녀는 그 오래된 베이커리의 초콜릿케이크를 또 먹고 싶었다."기사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가서 물건 좀 사고 금방 올게요."온하랑이 운전기사에게 당부하고는 차에서 내려 쏜살같이 DK 플라자로 들어섰다.‘애프터눈’이라는 이름의 이 베이커리는 DK 플라자에 들어선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장사가 매우 잘 되었다.온하랑이 들어섰을 때 가게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곧장 왼쪽 진열대 앞으로 가서 베이커리 직원에게 초콜릿케이크 하나와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줄을 서서 돈을 지불했다.온하랑이 종이봉투를 든 채 막 베이커리 가게를 나섰을 때 그녀는 마침 가게에 들어서는 두 여자와 맞힐 뻔했다."죄송합니다."사과하고는 길을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온하랑?”온하랑이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눈에 두 여자 중 마스크와 모자를 쓴 사람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옆에 있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그녀의 매니저였다.추서윤이 앞으로 나서더니 온하랑의 손에 든 종이봉투를 보며 말했다."케이크 사러 왔어? 너도 이 집 케이크 좋아해? 어쩜, 나도 좋아하는데.”"서윤 씨, 바쁜 와중에 직접 케이크 사러 올 시간도 있나요?”"당연하지.”"그럼 사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온하랑이 돌아서자 추서윤이 또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 네가 산 건 초콜릿케이크지?”온하랑은 온몸이 굳었다.‘애프터눈’의 케이크는 불투명한 포장지에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추서윤은 어떻게 알았을까?"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추서윤은 마스크를 내리고는 웃으며 천천히 온하랑 앞으로 다가갔다."왜냐면 나도 이 집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하니까.”온하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추서윤은 그녀가 예상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그녀는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납덩이라도 붙인 것처럼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었다.“예전에 나랑 승민이가 연애했을 때, 내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그녀가 부씨 가문에 오고부터 부승민은 쭉 미적지근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둘 사이가 딱히 친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케이크를 사 왔지?"싫어?"그녀의 표정을 본 부승민이 묻자 온하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그녀는 반 친구가 이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직접 사지는 못하고 그 친구 덕분에 운 좋게도 이 가게의 녹차 케이크를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당시 아버지의 월급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충분했고, 아버지도 온하랑에게 아낌없이 용돈을 주셨지만, 그래도 ‘애프터눈’의 케이크는 그녀에게 있어 거의 사치품 정도였고 평범한 가정의 온하랑에게는 약간 벅찼다."좋으면 됐어."부승민이 싱긋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온하랑은 방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그러다가 부승민이 거의 위층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계단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오빠, 고마워.”부승민이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이들의 대화가 단순한 인사로 끝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눈앞의 케이크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지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지루할 것 같았던 수학과 물리 숙제마저 사랑스럽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케이크를 옆에 두고 숙제를 빨리 끝내고 나서 케이크를 먹자고 다짐했다.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빠르게 숙제를 마치고는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포장을 뜯었다.그리고는 급하게 먹는 대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하지만 아무리 찍어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중에서 겨우 한 장을 건져 SNS에 올렸다. 내용은 글귀 없이 담백하게 케이크 이모티콘만 올렸다.그 SNS는 그녀의
이번 달 초, 그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도 온하랑은 소파에서 잠들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그러다가 나중에 이혼 얘기가 나온 뒤로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저녁에 돌아오면 거실은 항상 어두컴컴하고 한기로 가득했다."대표님, 오셨어요."거실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를 들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와서 인사했다."네.""술 드셨으니 해장국 끓여드릴까요?”"그래 주실래요.”부승민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잠시 후 아주머니는 해장국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승민에게 말했다."대표님, 뜨거울 때 드세요.”"네."부승민이 눈을 뜨고 나지막이 대답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아주머니는 뜨거운 김이 나는 해장국을 보더니 다시 부엌으로 가서 신선한 과일을 몇 종류 꺼내 부승민의 앞에 놓았다."대표님, 해장국 드시기 싫으시면 과일이라도 드세요.”접시에 있는 몇 가지 과일도 숙취 해소에 효과가 좋았다."고마워요.”“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뭐. 이 과일들은 원래 사모님을 위해 준비한 건데, 사모님께서 오늘 입맛이 없으신지 저녁도 많이 드시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과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요.”그 말을 들은 부승민이 잠깐 멈칫했다."저 사람 아직도 위가 안 좋아요?”"그냥 오늘만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요. 걱정거리도 있어 보이시고."아주머니가 은근히 주의를 주셨다.그녀는 할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이 아직 이혼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결혼은 또다시 기회를 맞이했고, 아주머니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두 사람이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일을 몇 입 맛보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다.다음날, 부승민이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식당에 앉아 있었고 아주머니가 아침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내려와 온하랑의 앞에 앉았다.“좋은 아침.”온하랑이 고개를
부승민은 온하랑을 잠시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온하랑, 농담하는 거야? 하나도 안 웃겨. 네가 오 전무랑 업무상 라이벌 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농담은 해서는 안 되지.”어쩐지 오미연이 그렇게 말하더라니.하지만 오미연이 미리 말하지 않았어도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오미연은 BX 그룹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일했고, 그녀의 인성과 업무 능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오미연에게는 여러 해 동안 사귀어 온 남자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그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온하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은 전혀 믿지 않으면서 왜 또 굳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것처럼 이것저것 묻는 걸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얼마나 가식을 잘 떠는 사람인지 잠깐 잊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기를 관심하는 거라고 착각하다니.점심 휴식 시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점심에 내 사무실로 와. 네 몫도 시켰어.]온하랑은 대화창을 보며 문자를 적어넣었다.[식당에 가서 먹을게.]하지만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송신 버튼 위에서 계속 머뭇거리다가, 결국 몇 초 후 그녀는 대화창을 지운 후 다시 문자를 적었다.[그래.]부승민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소파 앞의 탁자 위에는 이미 점심 식사가 가득 놓여 있었다.온하랑은 도시락 옆에서 익숙한 포장을 발견했다.온하랑의 시선이 옆에 닿자 부승민이 말했다."너 먹으라고 주문한 초콜릿케이크야. 너 이거 좋아하지 않았어? 점심 식사 후에 먹어.”온하랑은 그제야 부승민이 케이크 하나로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걸 눈치챘다.예전에는 이 방법이 통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애프터눈’의 초콜릿케이크를 보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쳤고 입맛이 싹 사라졌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이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맞은편에 앉아 음식을 몇 입 먹는 듯하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다 먹었어.”부승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겨우 그거 먹고? 좀 더 먹어."배
부승민이 돌아서서 온하랑을 한번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병실로 들어갔다."할아버지.”할아버지는 집에 갈 생각에 들떠서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일찌감치 소파에 앉아있었다."왔구나, 어서 돌아가자.”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자 온하랑이 부승민의 손을 뿌리치고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할아버지, 천천히 걸으세요.”"괜찮아.”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반대편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막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걸을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임 원장과 그의 조수들도 함께 저택에 갔다.할아버지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부민재가 임 원장의 조수들을 한동안 저택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할아버지께서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저택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온하랑과 부승민이 소파에 앉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민재과 그의 아내 소청하가 왔고, 그들은 아들 부윤민도 데리고 왔다.부윤민은 지금 네 살이고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기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어서 다들 귀엽게 봐주었다.그는 작은 가방을 메고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께 가서 인사했다."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오냐."할아버지가 부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증손자를 귀여워하셨다."이리와, 우리 증손주 좀 안아보자. 윤민이 오늘 학교 안 갔어?”"엄마 아빠가 증조할아버지 보러 와야 한다고 했어요. 효도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요.”"아이고, 착해, 우리 강아지! 윤민아,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어?"할아버지가 온하랑과 부승민을 가리켰다.부윤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하랑과 부승민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이랑 숙모.”"우리 윤민이 기억력도 좋네."온하랑이 웃으며 손짓하자 부윤민이 온하랑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온하랑이
온하랑의 몸이 잠시 굳는가 싶더니 그녀는 말없이 부승민과 눈길을 주고받고는 할머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이번에 제가 깜빡 잊고 안 가져왔어요, 다음에 꼭 가지고 와서 보여드릴게요.”소청하가 옆에서 거들었다."그 오로라 자선 파티에 나왔다던 바다의 심장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그때 그 팔찌 소문 듣고 가고 싶었는데 그날 밤에 일이 있어서 못 갔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도련님이 사서 동서에게 선물로 줬다고 하더라고요. 하랑 씨 다음에 꼭 가지고 와줘요, 실물 구경 좀 해보고 싶어요.”할머니가 말했을 때까지는 그냥 적당히 얼버무려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소청하까지 입을 열자 이 일은 아무래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에이, 실물 구경이라뇨, 이번 일은 아주버님이 잘못하셨네요. 형님께서 이렇게 갖고싶어 하시는데, 두고 보고만 계실 건 아니죠? 형님도 똑같은 걸로 하나 해주셔야죠. 바다의 심장을 만들었던 에메랄드 원료가 꽤 크다고 들었는데 아마 팔찌를 하나만 만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건 그중 하나일 뿐이고요.”"정말이에요?"온하랑의 말을 들은 소청하가 귀를 쫑긋 세우자 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소청하가 뜨거운운 눈빛으로 부민재를 쳐다보자 부민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사람 시켜서 알아보고 있다고 하면 바로 살게.”"그래요.”"아주버님은 형님한테 정말 잘해주시네요."온하랑이 부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며 말하자 소청하가 의아한한듯 물었다."도련님도 동서한테 잘해주잖아요. 몇십억짜리 팔찌도 동서 말 한마디에 바로 사주는 걸 보니까 둘 사이도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요.”온하랑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부승민은 그녀를 위해 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다만 문제는 추서윤을 위해 쓰는 돈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만약 어떠한 물건이 단 한 개뿐이라면 그건 틀림없이 추서윤의 것이었다.그녀에게 주어진 건 추서윤이 원하지 않아
굳이 묻지 않아도 추서윤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건 많았다.그때 둘은 아직 친하지 않았기에 부승민은 그녀에게 케이크를 사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그리고 그녀가 이 일에 관해 계속 물어보면 부승민은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됐다.“할 말 없지?"부승민이 다그치며 묻자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금 진지하게 이러는 거야?”"당연히 진지하지."부승민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난 이제껏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어.”온하랑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부승민은 확실히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줬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너무 실망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기에, 그가 주는 호의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혹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그에게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할까 봐, 그녀는 너무 두려웠다.온하랑이 침묵하는 것을 보던 부승민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하랑아, 나 밀어내지 마. 이미 할아버지랑 약속했다며. 근데 왜 나한테 마음을 안 열어 주는 거야?”"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온하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그녀는 더 이상 그를 멀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가지도 않을 것이다.그저 상처받기 전에 제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면 되겠지."알겠어. 그럼 우리 다시 안방으로 옮길까?”부승민은 온하랑이 허락하지 않을까 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올바른 부부 생활은 부부 관계에 많은 도움이 돼.”그 말은 들은 온하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3년 동안 그들은 꽤 화목한 부부 생활을 유지했지만 딱히 그게 부부 사이의 관계에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알겠어. 하지만 내 허락 없이는...”"알아.”...두 사람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