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그 오래된 베이커리의 초콜릿케이크를 또 먹고 싶었다."기사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가서 물건 좀 사고 금방 올게요."온하랑이 운전기사에게 당부하고는 차에서 내려 쏜살같이 DK 플라자로 들어섰다.‘애프터눈’이라는 이름의 이 베이커리는 DK 플라자에 들어선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장사가 매우 잘 되었다.온하랑이 들어섰을 때 가게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곧장 왼쪽 진열대 앞으로 가서 베이커리 직원에게 초콜릿케이크 하나와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줄을 서서 돈을 지불했다.온하랑이 종이봉투를 든 채 막 베이커리 가게를 나섰을 때 그녀는 마침 가게에 들어서는 두 여자와 맞힐 뻔했다."죄송합니다."사과하고는 길을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온하랑?”온하랑이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눈에 두 여자 중 마스크와 모자를 쓴 사람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옆에 있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그녀의 매니저였다.추서윤이 앞으로 나서더니 온하랑의 손에 든 종이봉투를 보며 말했다."케이크 사러 왔어? 너도 이 집 케이크 좋아해? 어쩜, 나도 좋아하는데.”"서윤 씨, 바쁜 와중에 직접 케이크 사러 올 시간도 있나요?”"당연하지.”"그럼 사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온하랑이 돌아서자 추서윤이 또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 네가 산 건 초콜릿케이크지?”온하랑은 온몸이 굳었다.‘애프터눈’의 케이크는 불투명한 포장지에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추서윤은 어떻게 알았을까?"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추서윤은 마스크를 내리고는 웃으며 천천히 온하랑 앞으로 다가갔다."왜냐면 나도 이 집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하니까.”온하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추서윤은 그녀가 예상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그녀는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납덩이라도 붙인 것처럼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었다.“예전에 나랑 승민이가 연애했을 때, 내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그녀가 부씨 가문에 오고부터 부승민은 쭉 미적지근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둘 사이가 딱히 친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케이크를 사 왔지?"싫어?"그녀의 표정을 본 부승민이 묻자 온하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그녀는 반 친구가 이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직접 사지는 못하고 그 친구 덕분에 운 좋게도 이 가게의 녹차 케이크를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당시 아버지의 월급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충분했고, 아버지도 온하랑에게 아낌없이 용돈을 주셨지만, 그래도 ‘애프터눈’의 케이크는 그녀에게 있어 거의 사치품 정도였고 평범한 가정의 온하랑에게는 약간 벅찼다."좋으면 됐어."부승민이 싱긋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온하랑은 방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그러다가 부승민이 거의 위층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계단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오빠, 고마워.”부승민이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이들의 대화가 단순한 인사로 끝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눈앞의 케이크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지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지루할 것 같았던 수학과 물리 숙제마저 사랑스럽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케이크를 옆에 두고 숙제를 빨리 끝내고 나서 케이크를 먹자고 다짐했다.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빠르게 숙제를 마치고는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포장을 뜯었다.그리고는 급하게 먹는 대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하지만 아무리 찍어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중에서 겨우 한 장을 건져 SNS에 올렸다. 내용은 글귀 없이 담백하게 케이크 이모티콘만 올렸다.그 SNS는 그녀의
이번 달 초, 그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도 온하랑은 소파에서 잠들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그러다가 나중에 이혼 얘기가 나온 뒤로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저녁에 돌아오면 거실은 항상 어두컴컴하고 한기로 가득했다."대표님, 오셨어요."거실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를 들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와서 인사했다."네.""술 드셨으니 해장국 끓여드릴까요?”"그래 주실래요.”부승민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잠시 후 아주머니는 해장국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승민에게 말했다."대표님, 뜨거울 때 드세요.”"네."부승민이 눈을 뜨고 나지막이 대답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아주머니는 뜨거운 김이 나는 해장국을 보더니 다시 부엌으로 가서 신선한 과일을 몇 종류 꺼내 부승민의 앞에 놓았다."대표님, 해장국 드시기 싫으시면 과일이라도 드세요.”접시에 있는 몇 가지 과일도 숙취 해소에 효과가 좋았다."고마워요.”“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뭐. 이 과일들은 원래 사모님을 위해 준비한 건데, 사모님께서 오늘 입맛이 없으신지 저녁도 많이 드시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과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요.”그 말을 들은 부승민이 잠깐 멈칫했다."저 사람 아직도 위가 안 좋아요?”"그냥 오늘만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요. 걱정거리도 있어 보이시고."아주머니가 은근히 주의를 주셨다.그녀는 할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이 아직 이혼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결혼은 또다시 기회를 맞이했고, 아주머니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두 사람이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일을 몇 입 맛보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다.다음날, 부승민이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식당에 앉아 있었고 아주머니가 아침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내려와 온하랑의 앞에 앉았다.“좋은 아침.”온하랑이 고개를
부승민은 온하랑을 잠시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온하랑, 농담하는 거야? 하나도 안 웃겨. 네가 오 전무랑 업무상 라이벌 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농담은 해서는 안 되지.”어쩐지 오미연이 그렇게 말하더라니.하지만 오미연이 미리 말하지 않았어도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오미연은 BX 그룹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일했고, 그녀의 인성과 업무 능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오미연에게는 여러 해 동안 사귀어 온 남자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그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온하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은 전혀 믿지 않으면서 왜 또 굳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것처럼 이것저것 묻는 걸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얼마나 가식을 잘 떠는 사람인지 잠깐 잊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기를 관심하는 거라고 착각하다니.점심 휴식 시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점심에 내 사무실로 와. 네 몫도 시켰어.]온하랑은 대화창을 보며 문자를 적어넣었다.[식당에 가서 먹을게.]하지만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송신 버튼 위에서 계속 머뭇거리다가, 결국 몇 초 후 그녀는 대화창을 지운 후 다시 문자를 적었다.[그래.]부승민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소파 앞의 탁자 위에는 이미 점심 식사가 가득 놓여 있었다.온하랑은 도시락 옆에서 익숙한 포장을 발견했다.온하랑의 시선이 옆에 닿자 부승민이 말했다."너 먹으라고 주문한 초콜릿케이크야. 너 이거 좋아하지 않았어? 점심 식사 후에 먹어.”온하랑은 그제야 부승민이 케이크 하나로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걸 눈치챘다.예전에는 이 방법이 통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애프터눈’의 초콜릿케이크를 보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쳤고 입맛이 싹 사라졌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이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맞은편에 앉아 음식을 몇 입 먹는 듯하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다 먹었어.”부승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겨우 그거 먹고? 좀 더 먹어."배
부승민이 돌아서서 온하랑을 한번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병실로 들어갔다."할아버지.”할아버지는 집에 갈 생각에 들떠서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일찌감치 소파에 앉아있었다."왔구나, 어서 돌아가자.”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자 온하랑이 부승민의 손을 뿌리치고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할아버지, 천천히 걸으세요.”"괜찮아.”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반대편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막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걸을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임 원장과 그의 조수들도 함께 저택에 갔다.할아버지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부민재가 임 원장의 조수들을 한동안 저택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할아버지께서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저택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온하랑과 부승민이 소파에 앉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민재과 그의 아내 소청하가 왔고, 그들은 아들 부윤민도 데리고 왔다.부윤민은 지금 네 살이고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기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어서 다들 귀엽게 봐주었다.그는 작은 가방을 메고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께 가서 인사했다."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오냐."할아버지가 부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증손자를 귀여워하셨다."이리와, 우리 증손주 좀 안아보자. 윤민이 오늘 학교 안 갔어?”"엄마 아빠가 증조할아버지 보러 와야 한다고 했어요. 효도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요.”"아이고, 착해, 우리 강아지! 윤민아,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어?"할아버지가 온하랑과 부승민을 가리켰다.부윤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하랑과 부승민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이랑 숙모.”"우리 윤민이 기억력도 좋네."온하랑이 웃으며 손짓하자 부윤민이 온하랑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온하랑이
온하랑의 몸이 잠시 굳는가 싶더니 그녀는 말없이 부승민과 눈길을 주고받고는 할머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이번에 제가 깜빡 잊고 안 가져왔어요, 다음에 꼭 가지고 와서 보여드릴게요.”소청하가 옆에서 거들었다."그 오로라 자선 파티에 나왔다던 바다의 심장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그때 그 팔찌 소문 듣고 가고 싶었는데 그날 밤에 일이 있어서 못 갔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도련님이 사서 동서에게 선물로 줬다고 하더라고요. 하랑 씨 다음에 꼭 가지고 와줘요, 실물 구경 좀 해보고 싶어요.”할머니가 말했을 때까지는 그냥 적당히 얼버무려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소청하까지 입을 열자 이 일은 아무래도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에이, 실물 구경이라뇨, 이번 일은 아주버님이 잘못하셨네요. 형님께서 이렇게 갖고싶어 하시는데, 두고 보고만 계실 건 아니죠? 형님도 똑같은 걸로 하나 해주셔야죠. 바다의 심장을 만들었던 에메랄드 원료가 꽤 크다고 들었는데 아마 팔찌를 하나만 만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건 그중 하나일 뿐이고요.”"정말이에요?"온하랑의 말을 들은 소청하가 귀를 쫑긋 세우자 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소청하가 뜨거운운 눈빛으로 부민재를 쳐다보자 부민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사람 시켜서 알아보고 있다고 하면 바로 살게.”"그래요.”"아주버님은 형님한테 정말 잘해주시네요."온하랑이 부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며 말하자 소청하가 의아한한듯 물었다."도련님도 동서한테 잘해주잖아요. 몇십억짜리 팔찌도 동서 말 한마디에 바로 사주는 걸 보니까 둘 사이도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요.”온하랑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부승민은 그녀를 위해 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다만 문제는 추서윤을 위해 쓰는 돈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만약 어떠한 물건이 단 한 개뿐이라면 그건 틀림없이 추서윤의 것이었다.그녀에게 주어진 건 추서윤이 원하지 않아
굳이 묻지 않아도 추서윤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건 많았다.그때 둘은 아직 친하지 않았기에 부승민은 그녀에게 케이크를 사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그리고 그녀가 이 일에 관해 계속 물어보면 부승민은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됐다.“할 말 없지?"부승민이 다그치며 묻자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지금 진지하게 이러는 거야?”"당연히 진지하지."부승민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난 이제껏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어.”온하랑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난 며칠 동안 부승민은 확실히 그녀에게 많은 관심을 줬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너무 실망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기에, 그가 주는 호의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혹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다시 그에게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자아를 상실할까 봐, 그녀는 너무 두려웠다.온하랑이 침묵하는 것을 보던 부승민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하랑아, 나 밀어내지 마. 이미 할아버지랑 약속했다며. 근데 왜 나한테 마음을 안 열어 주는 거야?”"그건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온하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그녀는 더 이상 그를 멀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가지도 않을 것이다.그저 상처받기 전에 제때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면 되겠지."알겠어. 그럼 우리 다시 안방으로 옮길까?”부승민은 온하랑이 허락하지 않을까 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올바른 부부 생활은 부부 관계에 많은 도움이 돼.”그 말은 들은 온하랑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3년 동안 그들은 꽤 화목한 부부 생활을 유지했지만 딱히 그게 부부 사이의 관계에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알겠어. 하지만 내 허락 없이는...”"알아.”...두 사람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간 후,
부승민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있었다."온하랑."온하랑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몸을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또 이런 상황.지금 그를 놀리는 건가?그러다가 잠시 후,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부승민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그도 마지못해 옆에 누웠지만 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온하랑 좋은 일만 해준 기분이 들며 뭔가 밑진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즐길 만큼 즐긴 온하랑은 쿨하게 자리를 떠났고, 미련 가득한 그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MQ 브랜드의 신제품이 이제 출시 준비 막바지에 들어섰다.추서윤의 광고는 여러 시리즈로 나뉘어 공식 출시될 예정이며, 광고 홍보 주요 플랫폼은 포털 사이트와 소셜 미디어였다.전에 추서윤 메이크업 사건이 일어났던 것 때문에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번에 그녀가 홍보할 제품을 주시하고 있었다.온하랑도 직원들에게 상시 언론을 주시할 것을 분부하고는 필요하다면 댓글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MQ 홍보가 한창이었다.강남시의 몇몇 대형 광장의 전광판뿐만 아니라 지하철 안, 버스 정류장, 공항 등 여러 곳에서 MQ의 신제품 홍보 광고를 볼 수 있었다.온하랑이 착실하고도 바쁘게 시간을 보내던 와중, 그녀는 SNS에서 이미 3일 전에 수운성의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전무님."그때, 비서가 밖에서 뛰어 들어오며 다급하게 말했다."정인아 씨가 아프시대요. 어떡하죠?”비서가 말한 사람은 MQ 브랜드의 대외 대변인인 정인아였다.3일 후 그들은 신제품 발표회를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이었고, 매년 발표회마다 정인아가 무대에 올라 제품에 대한 상세한 소개와 설명을 해왔다."아프다고요? 어디가 아프시대요? 정인아 씨는 괜찮아요?"온하랑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물었다."오늘 아침 갑자기 복통이 심해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해야 한대요. 의사가 적어도 사흘은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봐야 한
‘뭐야. 저 여자 또 시작이네.’ 설윤은 체리를 입에 넣고 씨를 가볍게 뱉은 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최국환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요. 최 회장님.” “아직도 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최국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설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앉아 있는 임가희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여보, 더 먹고 싶어요.” ‘우웩!’ 눈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자 임연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리고 고모부... 저 역겨운 느끼한 미소는 또 뭐야?’ 오늘 오후, 최국환은 직접 설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러니까 임연지의 고모인 임가희는 설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설윤도 눈치가 있었는지 임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후, 임가희는 집안의 가정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설윤을 가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연지는 억울함과 불쾌함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설윤에게 좋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더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은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 설윤도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최국환이 따로 가정부까지 붙여주었고 집안일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했다. 설윤은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서 쉬던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은 최국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최동철. 설윤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 한
최동철은 김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문서를 거칠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김지환을 향했다.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설윤 씨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가 해야 할 일만 신경 써.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그 차가운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김지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솔했습니다.”“됐어. 나가.”“예.”김지환은 속으로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안만 했을 뿐 직접 나서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윤 씨가 임신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처리할 생각이지?’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볼 셈인가?’ 어젯밤, 최동철이 설윤의 주소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지환은 최동철이 직접 그녀를 만나 겁을 주고 이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후에도 최동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해 봤자 의미 없었다. 김지환은 잠시 머릿속에서 이 일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최동철은 매일 야근했고 김지환 역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님이 정시 퇴근을 하시네?’김지환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비서실 내부에도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사 로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최동철을 본 김지환은 재빠르게 다가가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메이슨 도련님 보러 가시는 건가요?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그 말에 최동철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강남시에서 돌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