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소문들은 온하랑이 마케팅 계정 이용해 일부러 퍼뜨린 것이었다.그녀는 이번에 진짜로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대중들이 그녀에게 주는 관심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나서면 MQ발표회에 적지 않은 화제성을 몰고 올 수 있다.게다가 부승민과 추서윤은 발표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기자회견 전날, 부승민이 퇴근 전에 미리 온하랑에게 문자를 남겼다.[저녁에 나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자.][그래.]온하랑은 퇴근 후 사무실에서 잠깐 야근하다가, 차에서 그를 기다리겠다고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그녀는 지하 1층 주차장으로 내려가 뒷좌석에 앉아 잠시 휴대전화를 보았다.대략 10여 분이 지나서야 부승민이 지하 주차장에 나타났다.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탄 그가 기사에게 말했다."가죠.”운전기사가 차에 시동을 걸자 차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정인아 씨가 아프다고 들었어."부승민이 온하랑에게 물었다."맞아. 이틀 전에 아파서 입원했는데 어제 병문안 갔었어.”온하랑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부승민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일 발표회에 정말 네가 나설 거야?”그는 실시간 검색어의 기사를 보고는 한눈에 온하랑이 손을 쓴 것임을 눈치챘다.온하랑의 이번 마케팅은 정말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온하랑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안돼?”"안 될 게 뭐가 있어. 네가 두렵지만 않다면야.”"두려울 거 없어."온하랑이 깊게 심호흡했다.그녀는 카메라를 싫어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그녀의 아빠는 기자로서 수많은 사람들과 당당하게 마주했었다. 그렇기에 딸인 그녀도 할 수 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부승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혼자 강가에 내놓은 부모처럼 온하랑을 걱정하었다.발표회는 9월 5일 오후 3시부터 정식으로 시작한다.오전에 리허설을 두 번 해야 하기에 온하랑은 이른 아침부터 현장으로
추서윤이 기대를 담아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추서윤만으로도 온하랑은 이미 기분이 충분히 나빴는데, 부승민까지 와서 거들자 그녀는 지금 당장 구역질을 할 듯 속이 메스꺼웠다.‘서윤이가 너무 착해서 그녀에게 뭐든 해주고 싶다’고 했던가.정말 웃겼다.추서윤을 착하다는 말로 표현하다니, 정말 ‘착하다’는 단어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온하랑이 아무 말도 없자 추서윤이 계속 말했다."하랑아, 네가 아직도 날 미워하는 거 알아... 그렇게 싫으면 이리 줘, 내가 버릴게.”추서윤이 온하랑의 손에서 종이봉투를 도로 가져가려 했다."됐어요, 그냥 받을게요. 추서윤 씨는 리허설 하러 가세요."온하랑이 말했다.지금 옆에는 부승민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 심지어 CCTV까지 있었으니, 그녀가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어떤 소문이 돌지 몰랐다.내일 당장 CCTV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며 온하랑이 추서윤을 괴롭힌다는 기사가 포털을 도배할지도 몰랐다.추서윤이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하랑아.”"승민아, 난 리허설 하러 먼저 갈게. 하랑이가 케이크를 먹는지 안 먹는지 꼭 확인해, 알겠지?”말을 마친 추서윤이 비서의 뒤를 따라 떠났다.온하랑이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떠나려 하자 부승민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요즘 많이 바빴지? 앉아서 잠깐 쉴래? 케이크도 좀 먹으면서.”부승민이 종이봉투에서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꺼내 포크를 꽂고는 온하랑의 앞으로 밀었다.온하랑은 그가 이 정도로 추서윤의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다. 아주 그냥 추서윤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해줄 기세였다."너 이거 좋아하지 않았어?”온하랑이 꼼짝도 하지 않자 부승민이 이어서 말했다.“아니면 서윤이 때문에 안 먹는 거야?”온하랑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포크를 집어 케이크를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분명 예전과 같은 맛이었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맛있었던 케이크가 지금은 위에 들어가자마자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우욱-"온하랑이 입을 가리고는 다급하
각 플랫폼 라이브 방송에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부승민이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겼네.][쓰레기 같은 남자.]별의별 댓글들이 다 있었다.부승민 뒤에는 BX그룹 고위층 사람들이 있었고 그 뒤에 온하랑이 있었다.지난번 병원 근처에서 온하랑을 취재하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인터넷에서 가장 널리 퍼졌다.그 당시에 온하랑의 얼굴색은 무척 어두웠고 게다가 카메라가 좋지 않아 화질이 흐릿했다. 사람들은 이 동영상을 캡처하여 온하랑과 추서윤의 외모를 비교했다.온하랑은 이번에 정식으로 매체에 노출될 것이다. 그녀는 잠시 후 브랜드 대변인 신분으로 무대에 올라가 제품을 소개하고 게스트와 작은 이벤트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전문가에게서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을 받았다.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담담하고 태연한 모습을 보여줬다.온하랑이 카메라에 나오자, 별의별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그녀가 이쁘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고 못생겼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왜 추서윤보다 비주얼 순위가 앞설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발표회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고 댓글도 계속 많이 달렸다.카메라에 추서윤이 나오는 순간, 추서윤을 응원하는 실시간 댓글들도 가득했다.발표회의 처음 순서는 공식 대표 인물이 무대에 올라가 축사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다시 무대에 올라가 말했다.“다음 순서로 BX 그룹의 부승민 대표님께서 축사가 있겠습니다.”카메라를 부승민 쪽으로 돌리자, 그는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복을 입은 그는 키가 훤칠하고 몸매가 좋아 보였다. 그는 무대 위로 곧장 걸어가 사회자로부터 마이크를 받고 밑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게스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부승민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오늘 이 자리에서 BX 그룹의 계열 브랜드인 MQ의 S/S 신제품의 출시를 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지금 제가 전체 직원분들을 대표하여...”그의 말투는 전혀 급하지 않고 여유로워 보였다. 스포트라이트가 그의 몸에 비추었을
사회자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부 대표님 오늘 정말 운이 좋네요. 첫 번째 행운아가 되었습니다. 어서 무대로 올라오세요.”기자들은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고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실시간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가짜.][정해진 거네.][볼거리가 생겼군.]부승민이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이벤트 시작에 앞서 간단한 인터뷰를 해볼게요. 부 대표님 오늘 첫 번째 이벤트가 무엇인지 아세요?”“모릅니다.”부승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확실히 몰랐다. BX 그룹은 여러 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고 여러 계열사가 있어 이러한 활동이 많았다. 그래서 예전부터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한 후 퇴장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활동인지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온하랑 디렉터님과 같이 이벤트를 하시는 건 알고 있죠? 부 대표님은 온하랑 디렉터님에 대한 첫인상이 어떠세요?”그는 옆에 있던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능력이 아주 뛰어난 친구입니다. 만약 온하랑 디렉터님이 없었다면 MQ는 오늘의 성적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네요.”사회자는 목청을 가다듬고 일부터 기자들을 쳐다보면서 눈치를 줬다.“부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저희가 듣고 싶은 게 따로 있잖아요.”그는 사회자가 이렇게 나올 줄 모르고 어색하게 온하랑을 쳐다보았다. 사회자 대본은 미리 작성한 것이기에 사회자가 즉흥으로 이렇게 물어볼 리가 없었다. 분명 온하랑의 뜻이었다. 부승민도 그녀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이용하여 화제를 만들고 인기를 끌려 하였다.그러기에는 스캔들이 딱 맞았다. 게다가 추서윤도 지금 무대 아래에 앉아 있었다. 눈치 빠른 카메라 감독은 몇 번이나 추서윤에게 앵글을 맞췄다.사회자가 이렇게 묻자 기자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고 혹시 어떤 정보라도 놓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기다렸다.네티즌들도 귀를 쫑긋하고 기대했으며 이 라이브 방송은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키며 각종 플랫폼 홈페이지를 점령했다.부승민은 잠
부승민과 온하랑은 눈을 마주치더니 실을 꿰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바늘을 물고 구멍을 그녀 쪽으로 대고 실을 꿰도록 맞춰주었다. 두 사람은 이마와 코끝을 맞대고 있었고 분위기는 무척 애매해졌다.눈치 빠른 카메라 감독은 일부러 클로즈업해서 두 사람을 촬영하였다. 얼떨결에 두 사람 입술은 서로 맞대면서 스쳐 갔다. 이때 카메라는 추서윤에게 앵글을 넘겼다.그러자 댓글은 폭발적이었다.몇 번인가 성공할 것 같았는데 항상 조금 모자랐다. 쉬워 보이는 게임이었는데 이렇게 어려울 수가.[X발, 이 계집애가 일부러 흔드는 건 아니지?][이러는데 둘이 그냥 동료라고?][그냥 게임이잖아. 왜 다들 이렇게 진지해.]스크린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십몇 초를 남겨두고 드디어 구멍을 통과했다.게임 성공.“두 분 축하드립니다. 벌칙을 면하셨네요. 정말 아쉽습니다! 자, 부 대표님은 이제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지금부터 두 번째 게스트를 추첨하겠습니다.”스크린에서 수많은 이름이 오가고 있었다. 과연 누구 일가? 계획대로라면 추서윤이 뽑히게 된다.[무조건 계획된 거야.][기획을 참 잘해.]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추서윤이 무대로 올라갔다. 카메라는 추서윤과 온하랑을 같은 앵글에 넣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화목해 보이는 날이 오다니.하지만 댓글 분위기는 전혀 화목하지 않았다.사회자는 먼저 추서윤을 간단히 인터뷰했다.“다들 서윤 씨가 MQ 모델이자 이 또한 서윤 씨가 귀국하고 복귀한 첫 광고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어떠한 계기로 이 브랜드 모델이 되셨나요? 특별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나요?”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렇게 특별한 건 없고요. 그냥 서로 마음에 들어서 협업하기로 했어요.”“그렇군요. 일부 네티즌들이 서윤 씨가 MQ 브랜드 모델이 되는데 부승민 씨가 도와줬다고 하는데 이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보다 더 직설적일 수는 없었다. 추서윤은 부승민을 쳐다보고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그런 적 없습니다.”그러
“헐, 정말 스캔들 제대로 나겠는데?”카메라가 부승민의 얼굴을 찍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검고 깊은 눈은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무대에 오른 그는 추서윤 곁에 섰다.추서윤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래도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났다.매체들은 그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카메라맨도 계속 그들을 찍었다. 그러다가 가끔 무대 아래의 온하랑을 찍기도 했다.사회자가 웃으면서 물었다.“관중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추서윤 씨한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까 얘기하시길 온하랑 디렉터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온하랑 디렉터님이 열여섯 살이라고 했죠? 그럼 두 분의 첫 만남 장소는 어디입니까?”이 질문은 피디가 인이어로 사회자에게 알려준 것이다.추서윤은 입술을 말고 옆의 부승민을 힐긋 쳐다보았다.“추서윤 씨가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해도 됩니다. 하지만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이미 알 것 같으니까요. 여러분들은 어떠세요?”댓글이 가득 올라와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다음 질문은 부 대표님께 하는 질문입니다. 추서윤 씨와는 언제 알게 된 거죠?”부승민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대학 때요.”사회자는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오~ 오랫동안 알고 지내셨군요.”댓글 창의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다.두 사람이 사귄다고 얘기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봤을 때 이건 공개연애나 다름없었다.민윤 커플의 팬들은 다시 살아났다.피디는 팬들을 가스라이팅할 줄 잘 알았다.아까 온하랑과 부승민의 행동에 민윤 커플의 팬들은 많이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또다시 기력을 되찾고 부활했다.“긴말 하지 않고 다음 게임 코너로 넘어가죠.”온하랑은 부승민과 추서윤을 위해 풍선 터뜨리기 게임을 준비했다.두 사람이 풍선을 몸 사이에 끼고 힘껏 끌어안아 터뜨리는 방식이었다.준비한 풍선은 많지 않았다. 모두 세 개였다.부승민과 추서윤은 힘을 합쳐 풍선은 터뜨렸다.사회자가
재치있는 대처에 팬들이 더욱 많아졌다.온하랑은 다른 인터뷰가 없었기에 스태프와 함께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한 매체의 기자와 감독이 온하랑에게 인터뷰를 제의했지만 온하랑은 거절했다.기자도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이 발표회에는 이미 많은 떡밥이 뿌려져 있었으니까.MQ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인스타와 네이버에서도 수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발표회가 끝난 후에도 열기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현장을 다 처리한 후, 온하랑은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켰다.오늘까지 홍보는 거의 끝났다고 봐야 한다. 앞으로 상품이 출시되면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스튜디오에서 나온 온하랑은 부승민이 보낸 카카오톡을 발견했다.[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릴게.]그 문자를 본 온하랑은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뒷정리를 도와주면서 부승민을 보지 못했기에 그녀는 부승민이 추서윤과 함께 떠난 줄 알았다.다른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온하랑은 부승민의 표정이 굳어있다는 것을 알았다.부승민은 돈 많은 재벌집 자제들 중에서도 조용한 편이었다.아무리 팬이 많아도 개인 인스타를 만들지 않았다.인터넷에서 그가 바람을 피운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사생활을 일일이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오늘의 발표회는 마치 부승민을 아이돌처럼 여기며 진행했다. 연예인들처럼, 예능에서 재밌는 게임으로 팬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 말이다.이건 BX 그룹의 대표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다. 그것도 상대를 바꿔가면서.화를 꾹 참고 무대에서 내려온 건 온하랑의 얼굴을 봐서였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따가 어떻게 화를 낼지 걱정되었다.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온하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와 부승민이 보낸 위치로 걸어갔다.“승민아, 오늘 저녁 나랑 같이 밥 먹자, 응? 어렵게 나온 거란 말이야.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코너에서 추서윤의 목소리를 들은 온하랑은 그대로 굳어버렸다.“일단 돌아가. 오늘 밤에는
그럼 추서윤의 병이 그래서...“안 갈래. 안가.”추서윤은 울면서 말했다.“눈만 감으면 그날의 모습이 떠올라. 잊을 수도 없어. 내가 얼마나 너를 불렀는데... 네가 날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다고...”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도 코너에 서서 나가지 않았다.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온하랑은 두 손을 꽉 쥐고 몸을 약간 돌려 밖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카이엔이 지하 주차장을 나서고 있었다. 온하랑은 핸드폰을 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이 끝난 듯한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마음 약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부승민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기분이다.부승민을 사랑하지만 기대는 할 수 없다.온하랑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가서 택시를 잡고 집에 갔다.길에서 부승민이 문자를 보내왔다.[하랑아, 미안해.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응, 택시 타고 갈게.]온하랑이 대답했다.[저녁 같이 먹자. 기다려.][응.]온하랑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부승민이 추서윤 때문에 나갔을 때마다 이튿날에 돌아오곤 했으니까.만약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온다면 내일 서쪽에서 해가 뜰 것이다.추서윤의 수단이 잘 먹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온종일 바삐 돌아챈 온하랑은 피곤해서 집에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반신욕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을 보면서 인스타와 각종 SNS를 확인했다. 발표회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가장 핫한 건 부승민과 추서윤이었다.두 사람이 사귀는 것이 맞다고 싸우고 있었다.머글, 안티팬, 악개팬, 커플팬. 여러 사람들이 싸우면서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하지만 발표회가 있은 후, 온하랑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사람들은 온하랑의 신분까지 밝혀냈다.네티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온하랑의 아버지는 유명한 기자, 온강호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