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추서윤의 병이 그래서...“안 갈래. 안가.”추서윤은 울면서 말했다.“눈만 감으면 그날의 모습이 떠올라. 잊을 수도 없어. 내가 얼마나 너를 불렀는데... 네가 날 구하러 와줬으면 좋겠다고...”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하랑도 코너에 서서 나가지 않았다.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온하랑은 두 손을 꽉 쥐고 몸을 약간 돌려 밖을 쳐다보았다. 검은색 카이엔이 지하 주차장을 나서고 있었다. 온하랑은 핸드폰을 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일이 끝난 듯한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마음 약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부승민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기분이다.부승민을 사랑하지만 기대는 할 수 없다.온하랑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가서 택시를 잡고 집에 갔다.길에서 부승민이 문자를 보내왔다.[하랑아, 미안해.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응, 택시 타고 갈게.]온하랑이 대답했다.[저녁 같이 먹자. 기다려.][응.]온하랑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부승민이 추서윤 때문에 나갔을 때마다 이튿날에 돌아오곤 했으니까.만약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온다면 내일 서쪽에서 해가 뜰 것이다.추서윤의 수단이 잘 먹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온종일 바삐 돌아챈 온하랑은 피곤해서 집에 돌아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반신욕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을 보면서 인스타와 각종 SNS를 확인했다. 발표회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가장 핫한 건 부승민과 추서윤이었다.두 사람이 사귀는 것이 맞다고 싸우고 있었다.머글, 안티팬, 악개팬, 커플팬. 여러 사람들이 싸우면서 댓글이 엄청나게 달렸다.하지만 발표회가 있은 후, 온하랑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사람들은 온하랑의 신분까지 밝혀냈다.네티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온하랑의 아버지는 유명한 기자, 온강호였다.
추서윤이 무대 위에서 얘기하는 걸 보면 온하랑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게다가 온하랑은 동생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보통 불륜녀한테 그렇게까지 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하지만 추서윤의 팬은 온하랑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사진을 찍을 때, 추서윤은 온하랑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그때 카메라 감독이 마침 부승민이 추서윤을 부축하는 장면을 찍었다. 추서윤은 온하랑을 쳐다보고 있었다.네티즌들은 누가 밟았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추서윤이 온하랑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온하랑이 밟은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온하랑의 인스타에는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DM 창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하랑의 핸드폰은 온종일 울릴 것이다.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댓글은 그녀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충 보고 난 후 인스타를 끄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좋은 댓글이나 나쁜 댓글이나, 다 관심이 아니겠는가.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저녁 준비했습니다.”“알겠어요.”온하랑은 짧게 대답한 후 욕조에서 나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 밥을 먹었다.“사모님, 대표님은 오늘 돌아오시나요? 음식을 준비해 드릴까요?”“안 돌아올 거예요. 남은 건 버려요.”온하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네.”온하랑은 저녁을 다 먹고 올라갔다. 도우미는 그릇을 씻고 있었다.청소를 다 하고 주방에서 나온 도우미는 부승민이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그는 넥타이를 풀면서 물었다.“저녁 준비해줘요.”도우미는 그대로 얼어붙어 얘기했다.“대표님, 돌아오셨어요? 사모님께서 대표님이 돌아오시지 않으니 남은 건 버리라고 하셔서 이미 설거지를 끝냈는데... 지금 다시 준비해 드릴게요.”“...네.”부승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바로 침실로 향했다.온하랑은 야근하지 않았기에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놀고 있었다.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부승민이 밖에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온하랑은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일찍 돌아왔네?”부승민은 침대맡에 서서 멍한 온하랑을 보면서
“오늘 발표회, 잘 준비했더라. 참 잘했어.”부승민이 칭찬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역시, 올 게 왔구나.온하랑은 몸을 일으켜 그를 보고 해명했다.“미안해. 다 MQ 브랜드를 위해서 그런 거야. 우리가 관심을 받고 인기가 많아지면 브랜드한테도 우세잖아.”“그리고?”“오빠한테 그런 이상한 게임을 준비해줘서 미안해. 오빠는 그런 연예인들과 다른데 말이야.”“그리고.”그리고?그리고 또 뭐가 있지?온하랑은 더는 떠올리지 못했다.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부승민은 화가 나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왜 나와 추서윤한테 그런 게임을 준비해 준 거야?”“싫었어?”부승민의 표정은 그대로 굳었다.이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온하랑은 사실대로 얘기했다.“두 사람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줘야 인기가 더 많아지지.”부승민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입가가 부들부들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온하랑은 마치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았다. 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하랑은 당당하게 얘기했다.“오늘 발표회의 열기가 아주 뜨거웠으니까 앞으로도 잘 될 거야. 난 자신 있어. 부 대표님도 이런 일로 날 탓하지 않을 것 같은데.”“아주 당연하다는 듯 얘기하네?”“이게 다 회사를 위해서지.”“욕먹는 게 두렵지는 않아?”“안 무서워. 하나도.”“다음에는 절대로 안 돼.”“감사합니다. 부 대표님.”온하랑은 그를 향해 웃었다.부승민은 아래로 내려와 밥을 먹은 후 다시 침실로 돌아가 씻고 나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끊겼다. 그는 샤워가운을 입고 나와 간단하게 머리를 말린 후 침대의 다른 편에 가서 앉았다.온하랑이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는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온하랑의 어깨에 기댔다.“뭘 봐?”“아무것도 아니야.”온하랑은 얼른 폰을 닫았다.아까 그녀는 비밀 계정으로 댓글을 달고 있었다.발표회의 일들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벨 소리가 몇 초 울리자마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온하랑은 아직도 꿈인 줄 알았다.이윽고 주변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열리고 닫혔다.온하랑은 그제야 눈을 떴다. 방은 어두웠고 희미한 달빛을 빌려 옆을 쳐다봤을 때, 옆자리는 비어있었다.그러니까 꿈이 아니라 누군가가 부승민한테 전화를 건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고리가 천천히 돌려졌다. 부승민이 조용히 들어와 잘 자고 있는 온하랑을 보더니 조용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옷을 갈아입고 난 후 그는 또 방을 나갔다.방문이 닫히고 남은 건 정적뿐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에서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천장을 응시했다.추서윤이 건 전화라는 직감이 들었다.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온하랑은 진실을 알아버리면 힘들어질까 봐 두려웠다.어차피 그녀가 말린다고 해도 부승민은 듣지 않을 테니까.온하랑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이미 완전히 깨버려 다시 잠에 들기 어려웠다.날이 거의 밝을 때, 밑에서 엔진 소리가 또 들려왔다.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부승민이 옷을 갈아입은 후 온하랑의 곁에 누워서 잤다. 마치 처음부터 나간 적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온하랑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에 동조해주었다. 아침 여섯 시 반. 부승민은 일어나서 아침 조깅을 시작했다.그가 떠난 후, 온하랑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는데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았다.침대에 더 누워있던 그녀는 일곱 시가 넘었을 때 일어나 세수를 했다.옷을 입고 내려가자 부승민은 이미 소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일어났어? 아침 먹자.”부승민은 신문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어제 제대로 못 쉬었어?”은하랑은 대충 대답했다.“요즘 좀 힘들었나 봐.”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온하랑이 회사에 도착하자 비서팀의 조 비서가 갑자기 그녀를 단체 카톡방에 초대했다.단톡방의 이름은 온천 리조트였다.공지에는 MQ, MF,
단톡방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 퇴근 후 회사 문앞에서 집합한다고.회사에서 버스를 대여해 그들을 데리고 미리 교외의 온천 리조트로 간다는 뜻이었다. 세 부문의 사람들을 합치면 도합 40여 명이었기에 차가 두 대 필요했다.이튿날, 사람들은 출근하면서 갈아입을 옷과 개인용품들을 챙겨왔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갔다. 다들 온천 리조트에 대한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온하랑이 내려왔을 때, 버스에는 사람이 꽤 많이 앉아있었다. 온하랑은 가방을 들고 차에 타서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직원들이 더 타서 버스에는 거의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온하랑 디렉터님, 저 여기 앉아도 돼요?”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앉으세요.”“감사합니다.”“괜찮아요.”온하랑은 옆에 앉은 남자를 알고 있었다. MF 부문의 직원인데 이름은 황세운이었다.원래 MQ의 사람이었는데 후에 MF로 간 것이었다.게다가 황세운은 전에 온하랑에게 관심이 있었다.그래서 온하랑은 크게 반응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얘기했다.그러다 갑자기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부 대표님도 가시게요?”온하랑이 고개를 돌리자 손에 캐리어를 든 부승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어제 부승민은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었다.하지만 온하랑은 동료들이 오해할까 봐 거절했다.“왜요? 부 대표님도 쉴 수 있는 거죠.”누군가가 웃으면서 얘기했다.그러자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태면서 장난을 쳤다.버스에는 이제 자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안쪽에 앉거나 뒤쪽에 앉아야만 했다. 부승민은 들어가면서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황세운은 시선을 돌리고 놀라서 얘기했다.“부 대표님도 가실 줄 몰랐어요. 부 대표님은 일밖에 모르는 워커홀릭인 줄 알았는데.”온하랑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했다.온하랑은 대답하지 않고 차창문에 기대 눈을 감았다.버스가 온천 리조트를 향해 출발했다.버스 안은 신난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승민이 보낸 문자였다.[내 방 번호 0104.]동료들의 방은 이미 준비되어있었다. 여자는 2인실, 남자는 4인실이었다 그리고 부승민은 홀로 스위트룸을 쓰고 있었다.온하랑이 답장했다.[괜찮아요.]그녀에게는 룸메이트가 있었다. 만약 그녀가 부승민의 방에서 잔다면 괜한 소문이 날 수도 있다.[내 방에는 개인 온천이 있는데.]“...”온하랑은 머뭇거렸다. 회사에서 돈을 내서 가는 워크샵이니 모든 사람에게 단독 온천이 차려질 수는 없었다.하지만 온하랑은 다른 사람들과 온천욕을 하는 것이 살짝 꺼려졌다. 단독 온천이라니. 온하랑은 확실히 설렜다.버스가 온천 리조트에 도착해 멈춰 섰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조 비서와 함께 가서 방 키를 가졌다.이윽고 조 비서는 단톡방에 문자를 보냈다.[저녁에는 자유활동하고 내일 점심은 2층 식당에서 모여서 먹으면 됩니다.]그리고 리조트의 지도 한 장을 보냈다.온하랑과 같은 방을 쓰게 된 건 장서연이라는 MF의 직원이었다.두 사람은 먼저 방으로 돌아가 짐을 풀었다.장서연은 문자를 하더니 온하랑과 얘기했다.“온하랑 디렉터님, 저 다른 직원들이랑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온하랑이 대답했다.“먼저 가세요. 전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 이따가 가려고요.”“알겠습니다.”장서연이 나간 후, 온하랑도 방을 나가 0104방 문을 두드렸다.부승민이 나와 온하랑을 보고 얘기했다.“들어와.”온하랑은 0104에 들어가 방을 구경했다. 스위트룸이라 그런지 확실히 호화롭고 좋아 보였다. 모든 물건은 다 최상급으로 준비되어있었다.온하랑의 방보다 100배는 나았다.방 밖에는 단독 온천이 따로 있었다.“오늘 여기서 잘 거야?”“안돼. 저녁에는 돌아가서 자야 해. 내일 여기 와서 온천욕이나 하려고.”“오늘 밤에도 와서 온천에 들어가면 좋잖아?”온하랑은 살짝 설렜다.“먼저 들어가 있어. 사람을 시켜서 음식을 가져올 테니까. 그러면 밥을 먹으면서 온천을 할 수 있잖아.”온하랑
온하랑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거의 부승민의 품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이 뱉어졌다.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본 부승민은 손을 뺐다.“어때? 긴장이 다 풀렸지?”온하랑은 부승민의 품에서 움직일 힘도 없이 겨우 “응”이라고 대답했다.부승민은 두 팔로 그녀를 안아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그의 뜻을 안 온하랑은 온몸으로 버둥거렸다.“안 돼... 안 돼...”더 하게 된다면 힘들어질 것 같았다.부승민이 속삭였다.“괜찮아, 내일은 출근 안 하잖아.”그는 이미 2개월을 참았다.게다가 요즘은 그녀를 편하게 해주느라고 더욱 힘들었다.온하랑이 버둥대고 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온하랑은 한숨을 돌리고 얘기했다.“얼른 가서 문 열어.”부승민은 눈을 감고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마도 식사를 가져온 사람일 것이다.그는 샤워가운을 입고 문앞에 가서 밥을 챙겼다.저녁 식사는 꽤 풍성했다. 부승민은 요리를 온천 옆에 가져다주었다.온하랑은 온천 속에서 밥을 먹었다. 얼마나 꿈 같은 시간이었는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저녁을 먹은 후, 온하랑은 온천에서 일어나 샤워타올을 몸에 감고 얘기했다.“난 먼저 돌아갈게. 천천히 먹고 있어.”부승민의 이마에는 핏줄이 설 지경이었다....온하랑이 간 후, 부승민은 간단히 밥을 먹은 후 온천에서 나와 주변을 정리했다.거실로 돌아온 부승민은 소파 안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려고 보니 그의 핸드폰이 아닌 온하랑의 핸드폰이었다.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던 그는 손쉽게 핸드폰 잠금을 풀었다.온하랑은 아까까지 인스타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그는 온하랑의 인스타를 내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건 추서윤이 이틀 전에 올린 글이었다.[새벽에도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사진을 보니 그건 부승민의 손이었다.그리고 글을 올린 시각은 바로 그가 온하랑을 재우고 추서윤에게 갔던 날이었다.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는
추서윤이 아는 온하랑은 그 인스타를 부승민에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담하게 올린 것인데 부승민이 그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인스타를 본 순간, 그가 알던 추서윤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추서윤은 계속 변명하면서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승민아, 제발 날 용서해줘. 지금 바로 온하랑에게 가서 빌게.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난 네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이번 한 번뿐이야. 인스타를 지워.”“알겠어. 지금 당장 지울게. 승민아, 날 용서해 준거지? 미안해, 승민아. 널 실망하게 해서. 내가 어떻게 온하랑에게 그럴 수 있겠어. 또 하랑이한테 상처를 줬으니 날 미워하고 있을 거야.”“못 봤을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고 온하랑과 멀어져.”“알겠어.”추서윤은 그렇게 말하면서 속이 불편했다.온하랑이 이 인스타를 보지 못했다니, 얼마나 아쉬운가.전화를 끊은 후, 부승민은 온하랑의 핸드폰으로 다시 인스타를 들어가 보았다. 추서윤의 글은 이미 사라졌다.그제야 부승민은 한숨을 돌렸다.이렇게 하면 온하랑은 그날 밤, 부승민이 나갔다 왔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문앞에 다가가 보니 온하랑이였다.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며 얘기했다.“핸드폰을 여기에 둔 것 같아.”“여기.”부승민은 그녀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고마워.”온하랑은 떠나려다가 무언가가 떠올라서 얘기했다.“맞다, 뭐 좀 도와줄 수 있어?”“들어와서 얘기해.”온하랑이 들어오자 부승민은 문을 닫았다.“솔직하게 얘기하면 되지. 우리 사이가 부탁해야 할 사이야?”“오빠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려도 돼?”부승민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내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려고?”설마 추서윤이 올린 그 글을 이미 본 건가?온하랑이 해명했다.“차에서 황세운 씨가 나한테 남자친구가 없냐고 물었어. 날 좋아하나 봐. 남자친구가 있다고 얘기했더니 안 믿는 거 있지. 그러니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