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온하랑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리조트에서 산책하면서 사진을 찍었다.점심 열두 시 반. 2층의 식당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세 개 준비되어 있었다. 모든 직원들이 같이 바비큐 파티를 시작했다.여자들이 한 테이블, 남자들이 두 테이블로 나누어 앉았다.여자들은 음료수를 마셨고 남자들은 맥주를 마셨다.다들 기분 좋게 먹고 있었고 조금 취기가 오른 사람은 부승민에게 장난을 치기도 했다.부승민은 담담하게 웃어넘겼다. 직원들은 더욱 기뻐했다.점심을 먹은 후, 누군가가 게임을 하자고 얘기했다.다들 기분이 좋아서 얼른 그 제안을 승낙했다.“좋아요, 무슨 게임을 할 건데요?”“제일 간단하게 술병 돌리기 해요.”한 사람이 빈 맥주병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술병이 지목하는 사람은 진실게임 혹은 벌칙이에요.”“좋아요.”많은 직원들이 승낙했다.부승민이 자리에 있으니 눈치 없이 빠지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MF의 진승철 전무가 물었다.“부 대표님도 같이 하실래요? 같이 놀아요, 다들 기대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렇죠?”“네! 맞아요. 부 대표님도 얼른 오세요.”사람들이 얘기했다.“알겠어요. 그럼 조금만 있을게요.”부승민이 승낙하자 직원들은 환호했다.조 비서를 따라 그들은 리조트 뒤의 별장에 와서 게임을 진행했다.별장에는 커다란 거실도 있고 당구장도 있고 게임기도 있었으며 영화관, 헬스장, 칵테일바까지 있었다. 이건 모두 리조트에 온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사람들은 거실에 동그랗게 앉아 중앙에 맥주병을 놓았다.진승철이 먼저 얘기했다.“자, 내가 먼저 돌릴게요. 처음으로 당첨되는 행운아가 누구인지 한 번 보자고요.”그렇게 말한 후, 진승철은 바닥의 맥주병을 돌렸다.사람들이 조용해져서 모두 그 술병을 쳐다보며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병은 돌다가 한 남자 직원을 가리켰다.자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직원들은 얼른 입을 열었다.“장승우 씨, 운이 좋네요! 첫 타자라니. 진실게임이에요
만약 진실게임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벌칙도 못 하면 술을 세 잔 마셔야 했다.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모든 사람을 지목하려면 거의 40번 돌려야 한다.그래서 온하랑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 다른 여자 동료들도 지목당하긴 했지만 그렇게 난감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벌칙을 수행하고 난 진승철이 얘기했다.“자 이번에는 누구를 돌려볼까.”술병이 중간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술병을 쳐다보았다. 그 술병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부승민이었다.모든 사람들이 환호했다.진승철은 웃으면서 얘기했다.“부 대표님, 어쩔 수 없네요. 진실게임이랑 벌칙 중에서 고르세요.”“진실게임이요.”“그럼 묻죠. 첫 경험은 추서윤 씨와 했나요?”사람들은 진승철의 담대함에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그래도 귀를 쫑긋 세운 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부승민의 대답을 기다렸다.부승민은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얘기했다.“아니요.”그는 추서윤과 연애하면서 스킨쉽을 한 적이 없었다.부승민 본인이 혼외자였기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는 더욱 세게 자신을 억제했던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를 아주 아껴주어 부승민과 부민재는 다른 이복형제들처럼 크게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이 지난 후, 온하랑과 결혼하려고 마음먹은 것이기도 했다. “그럼 누구죠?”진승철이 기세를 몰아 더 물었다.“질문은 하나만 해요. 전 이미 대답했으니까요.”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부승민과 결혼하기 전, 부승민이 추서윤과 사귀었다는 것을 알긴 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였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잘 알지 못했고 물어볼 용기도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온하랑은 약간 기뻐했다.사람들은 실망한 눈치를 내비췄다.“진 전무님! 그렇게 물어보면 당연히 안 되죠. 누구인지 직접 물으셨어야죠.”진승철이 얘기했다.“다음에 꼭 그렇게 할게요.”마침 몇 번 지나지 않아 술병은 또 부승민을 지목했다. 이번에 질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목을 가다듬고 얘기했다.“18센치... 정도?”“그렇게 크다고요? 정말이에요?”사람들은 또 웅성댔다.온하랑은 바로 술병을 돌렸다. 질문이 끝났으니 이제는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술병은 또 마침 부승민을 가리켰다.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부 대표님, 진실게임이에요, 벌칙이에요?”온하랑이 그를 보면서 물었다.“진실게임.”이런 장소만 아니었다면 온하랑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녀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냐고.주변에서 사람들이 질문할 거리를 던져주었다.부승민의 크기가 얼마인지.첫 경험 때 몇 살이었는지.얼마나 많은 여자와 몸을 섞었는지. 부승민의 크기는 온하랑도 잘 알고 있었으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혼전 사생활이 궁금하긴 했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물어보지 않았다.하지만 부승민에 관한 이야기들은 거의 다 알고 있기에 뭘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온하랑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추서윤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직원들도 귀를 세우고 부승민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부승민은 눈을 반짝이더니 온하랑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온하랑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학교 활동 때문에 같이 무대를 준비해야 해서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 무대가 끝난 후 사귀게 되었죠.”“연습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된 거예요?”누군가가 물었다.“네.”그랬구나.온하랑은 마음이 찝찝했다.대학 시절의 연애는 풋풋해서 잊기 어려울 것이다.부승민을 좋아하기 전, 온하랑도 대학에서 풋풋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하지만 부승민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그건 이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온하랑이 대학을 다닐 때, 부승민은 이미 회사에 출근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온하랑은 항상 부승민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추서윤은 부승민과 함께 아리따운 청춘 시절을 보냈으니 더욱 잊기 힘든 것이겠지.그리고 온하랑은 또 앉아서 구경하기 시작했다.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미
무릎으로 생각해도 그가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있었기에 온하랑은 바로 대답했다.[안 가. 쉴 거야.][확신해? 시간은 내일밖에 없는데, 설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온천에 들어가려고?]온하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얘기했다.[저녁에 갈게.][음식을 온천에 흘리면 안 된대. 그래서 온천에서 식사하는 건 금지야.]부승민은 온하랑이 온천에서 식사를 마친 후 도망갈까 봐 미리 얘기했다.[알았어. 그럼 밥 먹고 갈게.]온하랑은 침대에 기대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추서윤과 연관된 검색어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추서윤 독일어]온하랑은 그 검색어를 클릭했다.추서윤이 귀국한 후 참가했던 예능이 오늘 방송되었다.그 예능의 클립 영상에서 추서윤은 독일어를 할 줄 안다고 자기소개에 썼다.다른 게스트들은 그녀더러 독일어로 얘기해 보라고 했고 추서윤은 바로 입을 열었다.“그럼 제가 독일어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그리고 추서윤은 유창하게 독일어로 말을 이어갔다.부승민이 독일어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 온하랑은 이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이건 바로 ‘까마귀와 여우’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요. 한 까마귀가 치즈 덩이를 물어서 나무에 앉아 치즈를 먹고 있었어요. 하지만 까마귀는 먹고 있을 때 쩝쩝대는 습관이 있어요. 여우 한 마리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까마귀한테 얘기하죠. ‘아, 까마귀님, 저는 종래로 당신처럼 예쁜 털을 가진 새를 보지 못했어요! 만약 당신께서 좋은 목소리가 있다면, 노래를 잘 부른다면 우리는 모두 당신을 왕으로 추앙할 거예요. 모든 새들의 왕으로요!’ 그 말을 들은 까마귀는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바로 노래를 시작하려던 찰나, 치즈가 떨어졌죠. 여우는 바로 떨어진 치즈를 입에 넣고 이 어리석은 까마귀를 비웃었어요. 다들 이 이야기, 들어보셨죠?”한 게스트가 얘기했다.“어릴 때 들어본 것 같네요.”다른 게스트가 또 물었다.“추서윤 씨는 미국에서 있으면서 어떻게 독일어를 배운
저녁 여덟 시.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저녁은 먹었어? 왜 아직도 안 와?]온하랑은 문자를 흘깃 보고 카카오톡을 끈 후 핸드폰을 잠갔다.핸드폰이 두 번 진동했다. 또 카카오톡이 도착했다.온하랑은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바로 답장해. 안 그러면 찾아갈 테니까.]온하랑은 입꼬리를 올려 웃고 대답했다.[오늘은 안 갈래.][왜? 왜 아까는 무시한 거야.][아까는 못 봤어. 오늘은 힘들어서 가고 싶지 않아.]핑계였다.딱 봐도 핑계가 확실했다.[온하랑, 솔직히 얘기해. 무슨 일인데.][솔직히 얘기한 거야. 힘들어서 쉬어야겠어.]문자를 보낸 후, 온하랑은 핸드폰은 잡고 얼마간 기다렸다.하지만 부승민에게서 답장이 오지는 않았다.온하랑은 핸드폰을 침대맡에 두고 잠에 들려고 했다.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온하랑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노크한 게 부승민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장서연의 침대가 문과 더 가까웠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문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열지 않고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낮은 목소리가 문을 넘어 들려왔다.“온하랑한테 할 말이 있으니 나오라고 해줘요.”“아, 네.”장서연은 바로 대답한 후 온하랑을 보며 얘기했다.“하랑 씨, 부 대표님께서 찾으세요. 얼른 나가봐요.”부승민이 정말 여기까지 오다니.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그리고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온하랑은 부승민을 보면서 물었다.“왜 왔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몰라서 물어?”부승민은 온하랑을 쳐다보며 물었다.온하랑이 뭐라고 얘기하려는 데, 부승민의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런 핑계들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 기분이 왜 안 좋은지 얘기해 줘야 알 것 아니야.”“다른 이유 없으니까 그만해.”“추서윤이 나간 예능 때문이야?”온하랑은 가만히 있었다.“질투하는 거지?”“그런 거 아니야. 혼자서 마음대로 추측하지 마. 내가 왜 질투를 해?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두 달이나 지났는데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그래도 내 허락이 없으면 안 한다고 했잖아. 난 싫어.”“그럼 나 좀 도와줘.”온하랑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흔들었다.부승민은 고개를 저었다.“돌아서서 다리 모아.”끝날 때, 온하랑의 허벅지는 붉어져 있었다.온하랑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저 부승민을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부승민은 기분이 꽤 좋은 듯, 그녀를 깨끗이 씻어준 후 침대로 안아서 갔다.서비스는 꽤 좋은 편이었다....이튿날 새벽.부승민은 온하랑을 깨웠다.“돌아가야 해. 차에서 자고 있어.”직원들은 아직 온천 리조트에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일찍 돌아오긴 했지만 출근할 필요는 없었기에 집에서 쿨쿨 잤다.핸드폰을 보다가 부승민과 찍은 사진을 떠올리고 바로 인스타에 업로드 했다.온하랑은 간단한 글을 덧붙였다.[남자 친구]그리고 그녀와 부승민이 찍은 사진을 올리고 모든 사람한테 공개했다.이윽고 부승민이 그녀의 게시물에 하트를 눌렀다.사람들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왜 얼굴을 비추지 않는지 의아해했지만 축하한다고 댓글을 달았다.한 남자 직원이 시원하게 댓글을 달았다.[확실히 18센치는 될 것 같네.]김시연은 아예 카카오톡을 보내 물었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 얼른 얘기해 봐요!][보는 그대로예요. 아직은 만나보고 있는 사이라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려워요.][하랑 씨!!! 정말 어디서 이런 남자 친구를 만난 거예요? 이 몸매... 저 가슴 근육... 정말 너무 멋지잖아요!][침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데리고 나오면 안 돼요?][아직은 안돼요. 이다음에 다시 봐요.]이주혁은 그 글을 보고 멍하니 있었다.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온하랑이 항상 솔로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다른 사람이 선수를 쳐버렸다.뚱냥이:[언제 사귄 거야? 남자 친구 몸매가 죽이는데?]온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서윤한테만 공개해서 추서윤을 약 올리고 말걸.
이튿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온하랑은 이주혁과 수운성 촬영장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오전 열 시. 온하랑은 수운성 촬영장에 도착해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이주혁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온하랑은 처음 촬영 현장에 와 본 것이었다.그녀는 이주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내가 주의해야 할 게 있어?”“없어. 그냥 와서 보면 되는 거야. 점심에 시간이 비니까 주변에서 같이 밥이나 먹자.”“그래.”이주혁은 온하랑을 데리고 진 감독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네 촬영은 언제 시작인데?”“곧이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이주혁의 말에 의하면, 지금 찍고 있는 것은 CG 작업이 많이 필요한 촬영이라 모두 세트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온하랑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이주혁은 온하랑을 데리고 촬영장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모든 배우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그리고 이주혁은 바로 준비를 하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혁의 촬영이 시작되었다.그는 조선 시대의 옷을 입고 수수한 화장을 했지만 그래도 우아한 기품은 감출 수 없었다. 빠르게 몰입한 그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연기를 시작했다.진 감독도 그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이주혁의 연기를 지켜보던 온하랑은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마침 나오고 있었다.“온하랑? 네가 왜 여기에 있어?”추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눈에는 증오가 약간 서려 있었다.“그냥 보러 온 거예요.”“누구를?“당연히 서윤 씨를 보러 왔죠. 나 때문에 얼마나 화나 있을지 궁금해서요.”온하랑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추서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럴 줄 알았어. 어제 올린 인스타는 나 보라고 올린 거지? 그럼 내가 올린 인스타도 봤겠네. 승민이가 한밤중에 너 몰래 날 찾아오는 걸 보면서, 넌 기분이 어땠는데?”온하랑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얘기했다.“그만 해요. 승민 씨가 왜 나를 속이고 서윤 씨를 만나러 갔겠어요? 서윤 씨가 그렇게
“알겠어! 그럼 촬영장에서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후, 추서윤은 의기양양하게 얘기했다.“온하랑, 이제 알겠어? 내가 원하면 승민이는 바로 달려와 줘. 승민이는 널 좋아하지 않아. 내가 똑똑히 얘기하는데, 9월 20일, 내 전화 한 통이면 승민이는 바로 나한테 달려올 거야!”온하랑은 몸이 약간 떨렸다.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찬바람이 들어왔다.그녀의 결혼기념일은 추서윤의 생일이다.그건 영원한 상처였다.만약 그날마저도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달려간다면 그에게 철저히 실망할 것이다.“어디 한 번 지켜봐!”추서윤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쳐들고 떠나갔다.온하랑은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가 이주혁의 연기를 지켜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진 감독에게 얘기했다.“부 대표님이 추서윤 씨를 보러 오셨습니다.”진 감독은 확성기를 들고 얘기했다.“다들 먼저 쉬어요. 이따가 다시 찍어요.”말을 마친 후, 진 감독이 부승민을 찾아갔다.이주혁은 한복을 입은 채 온하랑 앞에 와서 물었다.“내 연기 어때?”“멋있어. 빠져들겠더라.”진 감독이 이주혁의 연기에 만족하는 것이 확연히 알렸다. 그의 씬은 순조롭게 촬영이 끝났고 NG도 많지 않았다.이때 한 직원이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음료가 가득했다. 마침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신상 음료였다.“자, 자. 이건 부 대표님이 사온 밀크티예요. 다들 하나씩 가져요. 모자라면 밖에 더 있어요.”온하랑은 차갑게 웃었다.‘쓸데없는 짓을 왜 해.’이주혁은 밀크티 두 잔을 들고 와 온하랑에게 주면서 물었다.“인사하러 안 가봐도 돼?”“너 혼자 가.”온하랑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주혁은 꼭 가야 했다.이주혁은 수운성의 남자 주인공이고 부승민은 투자자니 인사를 꼭 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같이 세트장에서 나왔다.진 감독은 마침 부승민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추서윤도 부승민 곁에 서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온하랑이 세트장에서 나오는 것을 본 그녀는
오형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임연지가 전에 낳은 아이는 데려오지 마.” “알았어.” 최가 저택. 임가희는 임연지와 함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최동림은 집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숙제를 금방 끝낸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잠시 쉬려고 했다. 방을 나가자마자 2층 발코니에서 햇볕을 쬐며 책을 읽고 있는 설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최동림은 잠시 망설였다. 형의 말대로 설윤에게 가까지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결국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설윤에게 다가갔다. 설윤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동림아, 무슨 일이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설윤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미소가 최동림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냉담하게 말했다. “넌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어?” 설윤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입가에 남은 미소를 참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동림이라고 부르지 않을게. 그럼 뭐라고 부를까?” 최동림은 예상과 달리 그녀가 화를 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대답하는 모습에 놀랐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둘째 도련님...” 설윤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봤다. “둘째 도련님, 무슨 일이세요?”최동림은 두 걸음 걸어가더니 작은 의자를 하나 옮겨와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물었다. “몇 살이야?” “스무 살.” 최동림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셈을 하며 계산했다. “그럼 이 나이에 대학을 다녀야 되는 거 아니야?” 설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적으로라면 그럴 텐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고등학교 때 자퇴했어.” “너희 부모님은 도와주지 않나?” 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가족이 없어. 보육원에서 자랐어.”
‘최국환도 낚시하러 간다던데 만약 마주치면 어쩌지? 특히 그 양반이 결혼 얘기라도 꺼내면... 끝장이야.’ 마침 걱정을 마치기가 무섭게 집사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최 회장님께서 함께 낚시 가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는 이미 문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형일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이런 젠장.’ 결국 낚시 도구를 챙겨 트렁크에 실은 후 그는 묵묵히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국환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나야 괜찮지.”운전석에 앉아 있던 최국환이 힐끗 그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형일이 너, 오늘따라 얼굴이 별로다. 무슨 일 있어?” “우리 집 그 망나니 놈 때문에 속 터지겠다.”오형일은 한숨을 쉬며 분을 꾹 삼켰다. “노는 거야 그렇다 쳐도 사고만 안 치면 내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도 없지. 근데 하는 짓마다 골치 아프게 만드니 어쩌겠어?” “재원이야 아직 젊잖아. 결혼하면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최국환은 이미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조용히 본론을 꺼냈다. “형일아, 사실 나도 들었어. 재원이랑 연지 일 말이야. 우리 두 집안은 예전부터 각별했잖아. 그래서 더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재원이랑 연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야. 그리고 지금 연지가 재원이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군. 내 생각엔 이참에 그냥 결혼시키는 게 맞지 않나 싶어.”오형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먹이 저절도 쥐어졌고 차 안의 공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말했다. “말이 쉽지. 만약 네 아들 동철이가 그랬다면 넌 이 결혼 받아들일 수 있겠냐?” 최국환은 단호하게 답했다. “동철이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 그리고 방금 네가 말했잖아? 재원이는 아직 철이 없다고. 동철이랑 비교할 상대가 아니지.”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솔직히 이 일이 승혁이한테 벌어졌다면 나도
“걱정 마세요. 연지도 이제는 잘못을 깨달았어요.” 최국환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좁혔다. “고은이는 어떻게 할 거야? 재원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 “재원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우리 최씨 가문에서 아이 하나 키우는 건 일도 아니야.” 최국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설윤과 몇 마디 나눈 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오씨 가문에서는 지금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해외에 있어야 할 막내아들이 갑자기 집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재원! 네가 정말 내 기대를 저버리는구나.”거실에 울려 퍼지는 노기 어린 외침. “탁!” 오형일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몰래 귀국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임연지랑 얽혔다고? 네가 정말 나를 잡아먹으려고 작정한 거냐?” 옆에 있던 오승은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재원아, 네가 왜 집행유예를 받았는지 잊었니? 임연지는 너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 아이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엄마 말 듣고 다시 해외로 나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야. 그때 가서 엄마가 좋은 아가씨를 골라줄게.” 그러나 오재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더 이상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 연지만 사랑합니다. 연지와 결혼할 거예요.” 순간,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기 전에 연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던 오재원이 비웃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부모님이시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근데 아버지, 어머니는요? 말만 하면 연지를 깎아내리고 모욕하잖아요.”“대체 어느 쪽이 더 못된 겁니까?” “너!” 오승은은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임연지는 우리 집안의 돈과 지위를 탐내니까 네 앞에서 착한 척하는 거야.” “재원아, 아직도 모르겠니?
최동림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순진한 초등학생의 머릿속이 처음으로 거대한 충격이 받았다. 형이 하는 말은 그동안 책에서 읽고 선생님에게 배운 것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그저 현실일 뿐. 그리고 그 현실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동화 속에서 왕자와 공주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악당이 벌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강력한 ‘보스’는 아버지였다. 권력, 재력, 사회적 지위.아버지는 모든 걸 가졌고 온 가족이 그의 뜻에 따라야 했다. 옳고 그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건 아버지의 기분.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설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는 설윤에게 어떤 위협도 가해서는 안 됐다. 최동림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최동철은 동생이 충격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조용히 책상으로 가서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동림은 멍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만약 내가 좀 더 똑똑하고 건강했다면... 아빠는 설윤 아줌마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을까?” “아니.” 최동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동림은 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부족한가?’ ‘형이 건강하지 않은가?’ 전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태어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모아둔 용돈을 전부 설윤 아줌마에게 주고 아이를 지우고 떠나달라고 하면... 아줌마께서 동의할까?” “아니.”최동철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은 이미 설윤 아줌마가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야. 아줌마가 동의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거고. 만약 네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아버지는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심할 거야. 심지어 임 여사님이 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러면 임 여사님께
“동림아, 네가 임 여사님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잘 해결하실 거야.” 최동림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엄마의 태도가 이상했다. 친구네 아빠가 바람을 피웠을 때 친구 엄마는 크게 분노하고 난리를 쳤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아내가 남편의 내연녀를 공격하는 영상 그리고 그 영상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 ‘저런 여자들은 가만두면 안 돼.’ ‘원래 저런 건 맞아야 정신 차리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연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너무도 평온했다. 심지어 그 여자, 설윤에게까지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형, 그런데 엄마는 왜 그러시는 거야?” “너한테는 아직 좀 어려운 얘기야. 그냥 엄마 말 잘 따르기만 하면 돼.” “나도 알고 싶어. 형, 알려줘.” 최동림은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이의 눈빛은 맑고 어렸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최동철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림아, 너 이익이 뭔지 알아?” “알지. 돈!”최동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돈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사람과의 관계, 사업 기회, 사회적 지위, 더 나은 생활. 이 모든 게 다 이익이 될 수 있어.”“음...” 최동림은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최동철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정략결혼도 결국 이익과 이익이 맞물린 관계야.” “정략결혼?”“그래. 두 집안이 서로 협력하면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맺는 거지. 남자가 신분이 낮다면 여자 집안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배경 덕을 볼 수도 있어.”“임 여사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했고 더 많은 인맥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어.”“그게 바로 결혼이 임 여사님에게 가져다준 이익이야.” 최동림은 조금 헷갈린
“형이야 당연히 막아보려고 했지. 하지만...”최동철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용없었어. 아버지가 결정한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아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최국환은 언제나 강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그런데 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건 혹시 설윤 아줌마가 아버지를 유혹한 거 아닐까요?”“유혹?”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동생을 내려다봤다. “유혹이라는 단어 뜻은 제대로 알고 쓰는 거야?” “들었어요. 아빠 같은 사람한테는 붙으려는 여자가 많대요. 그러니까 설윤 아줌마도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최동림은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비가 비싼 만큼 친구들도 하나같이 부잣집 자식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집안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린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안도했다. ‘우리 집은 달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니까.’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림아, 형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단한 사람이요.” 최동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들은 나이 차가 많아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형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형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형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곤 했다. 형이 해외 명문대에 진학할 때도 집안 도움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합격했고 지금도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외모로 보면 형이랑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당연히 형이죠.” ‘아빠는 이미 늙었으니까.’ “몸매는?” “그것도 당연히 형이죠.” “재산은?” 최동림은 이번엔 조금 고민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더 많겠지만... 형도 결코 부족하지
최동철의 입술이 설윤의 쇄골을 스쳤다. “아무도 모를 거야.”“그만해요. 저... 임신 중이에요. 안 돼요.”“알아.”“회장님은 최동림 공부 봐주시러 가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밤새 일할 거야.”“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문 잠갔어. 그리고 다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그럼 어떻게 나왔어요?”“테라스로.”설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조용히 말했다. “흔적 남기지 않게 조심해요.”“응.”잠시 후, 최동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빠르게 손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여민 최동철이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다.”“잠깐만요.” 설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최동철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설윤은 커다란 종이티슈 덩어리를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동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가져가세요. 회장님이 보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동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은 그가 창문을 넘어 테라스로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본가의 방들은 각자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최동철의 방은 설윤의 방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빈 객실 하나만 두고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설윤은 곧장 방을 점검했다. 이상한 흔적은 없는지,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지. 모든 걸 확인한 뒤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최동철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갔다. “똑똑.”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철은
그녀는 어딘가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옷자락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박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 밤이 너무 격정적이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둘 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동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더니 혀끝으로 어금니를 굴리며 낮게 물었다. “내 거야?” 설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최동철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지운 듯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네가 임 여사한테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임신했다고 하던데?” 설윤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희가 절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덫을 놓았어요.” 임가희의 수법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나영이 임가희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그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다움시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최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낙태 수술 기록이라도 위조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울었겠지?” “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임신할 줄은 몰랐다. 최국환에게 보낸 자료에는 임신 9주 차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5주 남짓이었다. 최동철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국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면서 왜 내 제안은 거절했던 거야?” ‘이 인간은 아직도 그걸 따지고 있는 거야?’설윤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발끝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