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혁은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얘기했다.“어릴 때 옆집에 살았었어요. 하랑이가 어찌나 크게 울던지.”“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참 인연이 깊네요. 그럼 결혼할 때 나한테 청첩장 주는 거 잊지 말아요.”“진 감독님, 그만 하세요. 저랑 하랑이는 그냥 친구예요.”이주혁이 얘기했다. 그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지금의 온하랑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으니까.“알아요, 알아. 요즘 사람들은 다 친구라고 그러더라고요.”부감독이 옆에서 얘기했다.부승민은 시선을 들어 담담하게 이주혁과 온하랑을 노려보더니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부승민은 분명 온하랑에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할 정도로 이주혁이 좋은 건가?“승민아, 승민아?”“응? 뭐라고?”부승민이 추서윤을 돌아보았다.추서윤은 부승민 귓가에 대고 얘기했다.“하랑이랑 이주혁 씨,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만약 너희가 이혼하면 이주혁 씨랑 결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부승민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 돼. 두 사람은 안 어울려.”“두 사람이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난 두 사람의 직업과 성격에 대해서 잘 알아.”부승민과 추서윤이 가까이에서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본 온하랑은 씁쓸해서 시선을 돌렸다.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어느새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다들 머뭇거리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이주혁은 온하랑에게 두리안 파이를 챙겨주며 얘기했다.“이것부터 먹어봐.”“고마워.”온하랑은 두리안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파이 안에는 독특한 향기의 두리안 잼이 있었다.“음, 맛있다.”두리안 파이를 하나 다 먹은 온하랑은 또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주혁은 온하랑을 신경 써 주면서 음식을 더 짚어주었다.부승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지경이었다.“승민아, 나 저것 좀 짚어주면 안 돼? 팔이 안 닿아.”추서윤은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부승민이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게 벌써 두
“난 네가 여기 있을 줄 알고 있었어.”온하랑이 이주혁을 보러 왔다는 건 도우미가 얘기해 주었다. 온하랑을 데려가려던 찰나, 추서윤이 마침 전화한 것이었다.부승민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한 후 다시 입을 맞췄다.다른 한 손은 온하랑의 몸을 따라 기분 좋게 매만졌다.온하랑은 온몸에 힘이 풀려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닿았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입술을 떼고 그녀를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얘기했다.“도와줄게.”“됐어... 싫어...”온하랑은 얼굴이 붉어졌다.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대낮에 이런 곳에서...부승민은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미소 짓더니 얘기했다.“소리 내지 마.”부승민은 바로 그녀를 문에 밀어붙이고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목에 토해냈다. 그리고 바로 손가락을 움직였다.“하지만 사람들이 기다리는데...”“기다리라고 하지, 뭐.”온하랑은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임신해서인지, 아니면 요즘 부승민의 기술이 늘어서인지. 온하랑은 자기의 욕구가 점점 커져간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심정이 복잡했다.‘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무슨 생각해?”부승민은 온하랑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감히 자기 품에서 집중하지 못하다니. 설마 또 이주혁을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이주혁이 좋은 건가?계속 기다리던 사람이 정말 이주혁인 건가?!그 생각에 기분이 안 좋아진 그는 표정이 굳은 채 더 힘을 주어 손가락을 움직였다.“그, 그만...!”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하랑은 그대로 힘이 풀려버렸다.“으읏...”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됐어. 나가봐.”부승민은 드디어 그녀를 놓아주었다.온하랑은 문에 기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 문에 기대어 서 있다가 걸어 나왔다.부승민은 아주 열심히 손을 씻고 있었다. 그러면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그녀는 빠르게 화장
그 말을 들은 부승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머릿속에는 온하랑이 눈시울을 붉히고 그에게 따지던 장면이 떠올랐다.추서윤을 얼마나 사랑하면 두 사람의 기념일에도 추서윤 생각만 하냐고.그렇게 사랑하면 왜 추서윤과 결혼하지 않고 자기와 결혼했냐고.왜 가만히 있는 자신의 자존심을 계속 짓밟냐고.“그날에는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미리 쇠던지, 후에 쇠던지. 날짜를 골라.”부승민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얘기했다.추서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날에 일이 있다니.무슨 일이기에 말하지 않는 것일까.추서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애교를 부리며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인데? 미루면 안 돼?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해준 지는 정말 오래되었단 말이야.”“미안.”“승민아, 나 귀국하고 처음 보내는 생일인데 너랑 같이...”“내 말 들어.”부승민이 차갑게 얘기했다.추서윤은 더는 웃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슬픈 예감은 종래로 틀린 적이 없었다.부승민의 마음속에서 추서윤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그는 항상 온하랑을 선택했다.설마 정말 온하랑을 사랑하게 된 걸까?그건... 절대로 안 된다!...이주혁, 진 감독과 부감독은 같이 차를 타고 떠났다.차가 떠나는 것을 본 부승민은 몸을 돌려 온하랑을 보면서 얘기했다.“가자. 집에 돌아가자.”차에 앉은 부승민은 온하랑 쪽으로 붙어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거의 딱 달라붙을 정도였다. 비싼 향수의 향기가 온하랑의 폐에 들어왔다. 위가 좋지 않은 온하랑은 하마터면 토해낼 뻔했다.“저리 가.”얼굴이 창백해진 온하랑은 부승민을 밀어내며 얘기했다.“왜 그래?”부승민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좋지 않은 온하랑의 낯색을 보고 표정이 굳어버렸다.“괜찮아. 그냥 많이 먹었을 뿐이야. 가만히 내버려 둬.”온하랑을 그렇게 얘기하면서 부승민과 멀어졌다.표정이 어두워진 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케이스는 정방형이었는데 한 뼘 정도의 길이었다. 겉면에는 붉은 칠이 되어있었고 정교하게 조각까지 되어있었다.아마도 팔찌인 것 같았다.“그럼 연다?”온하랑은 천천히 케이스를 열었다.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투명한 옥팔찌가 온하랑 앞에 나타났다.확인한 순간, 온하랑은 굳어버렸다.다름이 아니라 이 팔찌가 저번 경매회에서 본 ‘바다의 심장’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부승민은 추서윤에게서 그 물건을 가져와 온하랑에게 준 것을 아닐 것이다.온하랑이 멍하니 서 있자 부승민이 해명했다.“저번에 네가 ‘바다의 심장’이 더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찾아봤더니 결국 두 번째를 사게 되었어.”“고마워, 신경 써줘서.”온하랑은 케이스를 덮어서 옆에 놓았다.“껴보지 그래.”“집에 가서.”온하랑이 대답했다.이 팔찌를 사기 위해 부승민이 아주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하랑은 크게 기쁘지 않았다.처음부터 노력의 방향이 틀렸다.온하랑은 ‘바다의 심장’과 같은 팔찌를 갖고 싶지 않았다.‘바다의 심장’은 원래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갖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운명이 아닐까. 무슨 일이든지 추서윤에게 선두를 빼앗기는, 그런 운명 말이다.추서윤이 먼저 가져야, 온하랑도 소유할 수 있다.온하랑은 또 차에 있는 반지를 떠올렸다.온하랑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면 추서윤에게 줄 생일 선물이라는 건가?그러니까, 그녀와 식사를 마친 후, 추서윤을 찾아갈 생각을 했다는 건가?‘참 바쁜 몸이네.’온하랑은 슬쩍 물어봤다.“아까 차에서 반지를 봤는데 엄청 예쁘고 정교해서 마음에 들어. 혹시 나한테 줄 수 있어?”두 사람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결혼반지가 없었다.온하랑이 한 번 커플 반지를 산 적이 있었다. 그리고 홀로 반지를 끼고 회사에 갔다. 하지만 부승민은 끼지 않았다. 회사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반지를 끼면 발각되기 쉬우니까.그때의 온하랑은 순진하게 얘기했다.‘혼자 끼면 누구도 발견하지
온하랑은 호흡이 그대로 멎었다.그날 추서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부승민은 추서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간다고.온하랑은 수신 거부한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2초 후,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온하랑은 다시 수신 거부했다.추서윤은 아마 끝까지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온하랑은 두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을 지워버린 후, 부승민의 핸드폰을 끈 후 원래 자리에 놓았다.돌아온 부승민은 온하랑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얼마 지나 부승민은 온하랑이 더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물었다.“다 먹었어? 이 집의 디저트 좀 먹어볼래?”“그래.”온하랑은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보다가 디저트를 두 개 시켰다.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떠났다.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온하랑과 부승민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직원이 아니라 노준형이었다.“준형이, 네가 여긴 왜 왔어? 같이 밥 먹으려고?”부승민이 물었다.“밥? 넌 밥이 넘어가?”노준형이 다가와 화를 냈다.“속도 편하지. 네가 밥을 먹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무슨 일인데.”부승민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서윤이가 촬영하고 있을 때, 스태프의 실수로 불이 나서 큰 화상을 입었어. 다들 바빠서 죽겠는데, 넌 여유롭게 밥이나 먹고 있어? 전화는 왜 또 안 받아!”노준형의 말투는 아주 조급했다.‘화상을 입었다고?’온하랑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버렸다.‘그럼 아까의 전화가...’온하랑은 불안한 마음에 노준형을 보면서 얘기했다.“준형 오빠, 일단 조급해하지 말아요. 서윤 씨가 곧장 병원으로 갔겠죠? 그러니 일단 수술 결과를 기다려 봐요, 승민 오빠 탓만 하지 말고...”노준형은 온하랑을 흘깃 보더니 얘기했다.“네가 낄 일이 아니야. 더러운 불륜녀 같으니라고. 전에는 어르신 얼굴을 봐서 잘 대해준 거지. 그것도 모르고 감히 선 넘지 마!”온하랑은 파리하게 질려서
온하랑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결국 서윤이, 서윤이. 부승민에게 있어서 추서윤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그래, 질투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한 번만이라도 차갑고 매정한 여자가 되어서 오늘 하루만 부승민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다.부승민은 멈춰서서 그녀에게 얘기했다.“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서윤이가 크게 다쳐서 가보는 것뿐이야.”그는 다시 발을 옮겼다.“부승민! 정말 갈 거야?!”부승민은 멈추지 않았다.“그래, 네가 오늘 이 문을 나가면 우리는 앞으로 끝이야!”온하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막말을 내뱉었다.부승민은 잠깐 흠칫했지만 온하랑의 시선 속에서 결국 떠나갔다.그의 모습이 시야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온하랑은 온몸에 힘이 빠져 겨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 시야가 뿌예졌다.부승민은 결국 떠났다.온하랑이 두 사람의 미래로 협박했지만, 부승민은 결국 떠나갔다.요즘 화목하게 지낸 시간은 모두 꿈 같았다.온하랑과 추서윤. 부승민은 여전히 머뭇거리지 않고 추서윤을 선택했다.“연기 그만하고 가자. 불륜녀 주제에 뭐 하는 짓이야. 서윤이는 아직도 병원에 있거든?”짝.온하랑은 온 힘을 다해서 노준형의 뺨을 때렸다.노준형은 멍해서 뺨을 부여잡고 화를 냈다.“너 미쳤어? 부승민이 널 예뻐한다고 해서 가만히 둘 줄 알아?”“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얘기해야겠어요! 추서윤이야말로 불륜녀죠!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녀! 나는 부승민과 결혼한, 법적인 아내예요!”온하랑이 테이블 위에 있는 케이스를 바닥에 던졌다. 안의 팔찌가 깨져서 세 조각이 되었다.온하랑은 자기 가방과 핸드폰을 챙긴 후 몸을 돌려 떠나갔다.노준형이 뒤에서 따라오면서 물었다.“뭐라고? 다시 한번 얘기해 봐.”온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글로리아의 문을 나선 후 아무 방향으로 걸어갔다.노준형은 그런 온하랑을 따라가면서 물었다.“어디 가는데. 내가 바래다줄게.”“됐어요!”“안돼. 난 널 데려다
온하랑은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둑한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랫배에서 약간의 고통이 밀려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아이!’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그러안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후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제 자리에 선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도움을 청해야 할까?하지만 도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랬다.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그제야 핸드폰과 돈이 다 가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기는 그른 것 같다.자리에 서 있던 온하랑은 그제야 경찰서를 떠올렸다.그녀는 행인에게 질문했다.“아저씨, 혹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아이고, 그건 엄청 먼데. 이 길을 따라서 신호등을 세 개 지난 후에... 아이고, 하여튼 그냥 일단 앞으로 가. 그리고 다시 물어봐.”“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온하랑은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대략 반 시간을 걸어 드디어 경찰서에 도착했다.그녀는 경찰서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경찰한테서 택시비를 빌린 뒤 그의 전화번호를 남겼다.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도우미는 온하랑 혼자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사모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온하랑은 고개를 숙여 자기 옷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넘어져서 새까맣게 되었다. 팔꿈치와 무릎에는 상처와 멍도 있었다.“실수로 넘어졌어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할 거예요.”온하랑은 대충 얘기했다.그녀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후 누워서 잠에 들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눈을 뜨고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옆의 이불은 깔끔한 게, 다녀온 사람이 없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아침을 먹은 후, 그녀는 먼저 집의 컴퓨터로 청가를 맡은 후 경찰서, 은행 등 곳을 돌면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고 은행 카드를 새로 발급받고 핸드폰도 새로 개통했다
”화상을 입었다던데 얼마나 크게 다친 거죠?”“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화상 부위가 피부의 23퍼센트 정도라고 해요. 구출될 당시 어떤 부위는 살과 피가 뒤섞인 채 진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서윤이가 기절해서도 아파서 끙끙대는 걸 보니 제 맘이 너무 아프더라고요.”안수빈의 설명을 듣던 부승민은 추서윤이 당시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하며 그녀를 걱정했다.추서윤의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부승민의 양미간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리고 의사 선생님 말로는 무엇보다 서윤이의 심리상태가 문제라고 하셨어요. 이번 일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서윤이가 귀국하고부터 왠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데 누군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예요.”“제일 좋은 의사를 알아봐서 서윤이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대표님, 그런데 왜 핸드폰을 끄고 계셨어요?”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안수빈이 웃으며 말했다.“아니, 별건 아니고요. 서윤이의 핸드폰을 보니 대표님께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전화 건 시간을 보니까 안에 갇혔을 때였던 것 같던데, 서윤이도 너무 놀라서 혹시나 대표님이 구해주러 와주진 않을까 싶어서 전화한 거겠죠. 그때 만약 대표님이 전화를 받고 촬영팀에게 상황을 알렸으면 서윤이도 빨리 구출될 수 있었을 테고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겠죠.”부승민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그때 일이 좀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서윤이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들은 소식에 의하면 추서윤에게 일이 생겼을 때 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외식하고 있었다. 평소 부승민이 추서윤의 전화를 안 받았던 적은 없었으니, 전화를 끊고 핸드폰 전원을 꺼놓은 사람은 온하랑일것이다.그런데 지금 부승민이 이 일의 책임을 자기한테 돌리며 온하랑을 비호하고 있으니, 추서윤이 평소에 걱정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안타깝네요. 전화 연결만 제대로 됐어도 서윤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