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결국 서윤이, 서윤이. 부승민에게 있어서 추서윤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그래, 질투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한 번만이라도 차갑고 매정한 여자가 되어서 오늘 하루만 부승민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다.부승민은 멈춰서서 그녀에게 얘기했다.“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서윤이가 크게 다쳐서 가보는 것뿐이야.”그는 다시 발을 옮겼다.“부승민! 정말 갈 거야?!”부승민은 멈추지 않았다.“그래, 네가 오늘 이 문을 나가면 우리는 앞으로 끝이야!”온하랑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막말을 내뱉었다.부승민은 잠깐 흠칫했지만 온하랑의 시선 속에서 결국 떠나갔다.그의 모습이 시야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온하랑은 온몸에 힘이 빠져 겨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눈은 절망으로 물들어 시야가 뿌예졌다.부승민은 결국 떠났다.온하랑이 두 사람의 미래로 협박했지만, 부승민은 결국 떠나갔다.요즘 화목하게 지낸 시간은 모두 꿈 같았다.온하랑과 추서윤. 부승민은 여전히 머뭇거리지 않고 추서윤을 선택했다.“연기 그만하고 가자. 불륜녀 주제에 뭐 하는 짓이야. 서윤이는 아직도 병원에 있거든?”짝.온하랑은 온 힘을 다해서 노준형의 뺨을 때렸다.노준형은 멍해서 뺨을 부여잡고 화를 냈다.“너 미쳤어? 부승민이 널 예뻐한다고 해서 가만히 둘 줄 알아?”“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얘기해야겠어요! 추서윤이야말로 불륜녀죠!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불륜녀! 나는 부승민과 결혼한, 법적인 아내예요!”온하랑이 테이블 위에 있는 케이스를 바닥에 던졌다. 안의 팔찌가 깨져서 세 조각이 되었다.온하랑은 자기 가방과 핸드폰을 챙긴 후 몸을 돌려 떠나갔다.노준형이 뒤에서 따라오면서 물었다.“뭐라고? 다시 한번 얘기해 봐.”온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글로리아의 문을 나선 후 아무 방향으로 걸어갔다.노준형은 그런 온하랑을 따라가면서 물었다.“어디 가는데. 내가 바래다줄게.”“됐어요!”“안돼. 난 널 데려다
온하랑은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둑한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랫배에서 약간의 고통이 밀려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아이!’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그러안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후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제 자리에 선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도움을 청해야 할까?하지만 도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랬다.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그제야 핸드폰과 돈이 다 가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기는 그른 것 같다.자리에 서 있던 온하랑은 그제야 경찰서를 떠올렸다.그녀는 행인에게 질문했다.“아저씨, 혹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아이고, 그건 엄청 먼데. 이 길을 따라서 신호등을 세 개 지난 후에... 아이고, 하여튼 그냥 일단 앞으로 가. 그리고 다시 물어봐.”“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온하랑은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대략 반 시간을 걸어 드디어 경찰서에 도착했다.그녀는 경찰서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경찰한테서 택시비를 빌린 뒤 그의 전화번호를 남겼다.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도우미는 온하랑 혼자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사모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온하랑은 고개를 숙여 자기 옷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넘어져서 새까맣게 되었다. 팔꿈치와 무릎에는 상처와 멍도 있었다.“실수로 넘어졌어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할 거예요.”온하랑은 대충 얘기했다.그녀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후 누워서 잠에 들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눈을 뜨고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옆의 이불은 깔끔한 게, 다녀온 사람이 없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아침을 먹은 후, 그녀는 먼저 집의 컴퓨터로 청가를 맡은 후 경찰서, 은행 등 곳을 돌면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고 은행 카드를 새로 발급받고 핸드폰도 새로 개통했다
”화상을 입었다던데 얼마나 크게 다친 거죠?”“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화상 부위가 피부의 23퍼센트 정도라고 해요. 구출될 당시 어떤 부위는 살과 피가 뒤섞인 채 진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서윤이가 기절해서도 아파서 끙끙대는 걸 보니 제 맘이 너무 아프더라고요.”안수빈의 설명을 듣던 부승민은 추서윤이 당시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하며 그녀를 걱정했다.추서윤의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부승민의 양미간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리고 의사 선생님 말로는 무엇보다 서윤이의 심리상태가 문제라고 하셨어요. 이번 일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서윤이가 귀국하고부터 왠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데 누군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예요.”“제일 좋은 의사를 알아봐서 서윤이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대표님, 그런데 왜 핸드폰을 끄고 계셨어요?”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안수빈이 웃으며 말했다.“아니, 별건 아니고요. 서윤이의 핸드폰을 보니 대표님께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전화 건 시간을 보니까 안에 갇혔을 때였던 것 같던데, 서윤이도 너무 놀라서 혹시나 대표님이 구해주러 와주진 않을까 싶어서 전화한 거겠죠. 그때 만약 대표님이 전화를 받고 촬영팀에게 상황을 알렸으면 서윤이도 빨리 구출될 수 있었을 테고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겠죠.”부승민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그때 일이 좀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서윤이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들은 소식에 의하면 추서윤에게 일이 생겼을 때 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외식하고 있었다. 평소 부승민이 추서윤의 전화를 안 받았던 적은 없었으니, 전화를 끊고 핸드폰 전원을 꺼놓은 사람은 온하랑일것이다.그런데 지금 부승민이 이 일의 책임을 자기한테 돌리며 온하랑을 비호하고 있으니, 추서윤이 평소에 걱정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안타깝네요. 전화 연결만 제대로 됐어도 서윤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아
”네, 그러세요.”안수빈은 자신이 설득에 성공했음을 눈치챘다.부승민이 밖으로 나가자 찬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쳤다.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전화했다.오늘 저녁, 그는 여기 남아있어야 했다.그는 추서윤이 다급하게 걸어온 전화를 온하랑이 일방적으로 끊었다고 해서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왜냐면 온하랑이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저 오늘 같은 날 그가 추서윤과 함께 보내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그렇다고 추서윤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급한 와중에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한 것은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잘못이 있다면 온전히 부승민의 잘못이었다.그는 이번 일에 책임이 있었다.온하랑이 전화를 받지 않자 부승민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두 번째로 전화했을때는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부승민은 온하랑이 화가 나서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으로 짐작했다.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서윤이가 많이 다쳤어. 아까 나한테 전화한 건 화재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전화한 거였대. 나는 이번 일에 책임이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남아서 서윤이를 보살펴야 할 것 같아. 내일 돌아가서 자세히 얘기하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문자를 보낸 부승민은 잠시 밖에서 바람을 쐬다가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부승민이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직 온하랑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복도로 나가 온하랑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있었다.부승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아주머니, 하랑이 좀 바꿔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네.”아주머니는 대번에 대표님이 사모님을 화나게 하셔서 사모님이 전화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시간이 좀 흐른 후, 전화기 한편에서 미안한 기색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나온 부승민은 목적 없이 걸었다.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 그는 촬영팀의 사람들이 돌아갔을 거라고 짐작하고 다시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병실에 거의 도착할 때쯤 복도의 한 모퉁이에서 제작사의 사람과 이민혁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제작사의 사람이 말했다.“주혁씨도 그때 현장에 있으셨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지 않았어요?”이주혁이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그때 다들 놀라서 서로 챙길 정신은 없었어요. 근데 다행히 불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왜냐면 금방 구출되었을 때 제 기억엔 서윤씨는 그냥 왼쪽 바지 끝자락만 탄 정도였거든요.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다른 곳은 전혀 타지 않았어요.”“민혁 씨가 잘 못 본 게 아닐거예요. 저도 모승준 씨한테 들었는데 왼쪽 옷자락만 탔다고 하더라고요. 뭐 심하게 다치면 얼마나 심하게 다쳤다고. 아무튼 요즘 매니저들은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잡고 부풀리고 그런다니까요. 이번 일이 밝혀지면 추서윤 팬들이 또 촬영팀을 얼마나 욕하고 갈구겠어요. 추서윤씨 본인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 좋아하겠죠. 그러게 그때 내가 조심 좀 하라고 했는데...”제작사 측의 사람은 추서윤과 안수빈이 화상자국을 심하게 과장해서 이번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생각이라고 짐작했다.예를 들면 분량이나 스토리를 더 달라고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추서윤의 팬들이 그녀가 드라마를 찍는 도중에 사고를 당했기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인터넷에서 떠들고 있었다.제작사에서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수운성은 원작이 무협소설인 드라마로, 이주혁이 연기하고 있는 남주 임찬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주혁의 분량이 추서윤보다 많은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갑자기 추서윤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가 난데없이 들어가면 작품성에 영향을 미칠게 뻔했다.“일단 이건 신경 쓰지 맙시다. 뭐가 됐든 촬영팀의 실수로 추서윤씨가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니까요. 진 감독님도 최대한 맞춰주시겠다고 하고
노준형이 다급하게 말했다.“승민아, 승민아. 그런 말 하지 마, 난 당연히 네 친구지.”“그럼 솔직히 말해.”“말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거 있어.”“물어봐.”“어제 너 간 후에 온하랑씨가 너랑 자기는 혼인신고까지 한 진짜 부부라고 그러던데, 그거 사실이야?”“응.”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인정하자 노준형은 말문이 막혔다.“야, 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언제 결혼했는데? 왜 난 몰랐어?”“삼 년 전.”“삼... 삼 년 전?”노준형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둘이 3년 차 부부라고?이게... 이게 말이 되나?“그럼, 승민이 너는 지금... 바람...”“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 어제 너한테 나 찾아가라고 한 사람 누구야? 서윤이가 많이 다쳤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야?”“너, 절대 내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서윤이가 너한테 가보라고 시켰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좀 과장하라고 하면서.”“서윤이가?”“그래.”“어제 서윤이가 다친 뒤에 만났었어?”“아니, 어제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나한테 전화 왔었어. 야, 이번 일은 내 탓 하면 안돼. 서윤이가 너랑 온하랑씨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자기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고 울면서 부탁하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하냐.”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는 알아?”당연히 서윤이 생일이지.하지만 노준형은 부승민이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님을 알았다.그는 어제 두 사람을 찾으러 글로리아에 갔을 때 근사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던 걸 기억해냈다.설마...“너희 결혼기념일?”노준형이 자신없게 대답했다.“맞아.”“그... 그거참 운명의 장난처럼 어쩜 다 하루에...”노준형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는 추서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추서윤은 두 사람이 결혼한것도 알고 어제가 결혼기념일 인걸 알면서도 부승민을 찾으러 가라고 그에게 시킨 것이었다.다행히 어제 부승민이 온하랑 대신 추서윤의 편을 들어 주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노준형과 부승민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추서윤은 기절한 적이 없다는 뜻이네요?”“네. 추서윤 씨는 어제 병원에 실려 올 때부터 멀쩡하셨어요.”“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을 나갔다.그가 어제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였고 추서윤이 깨어났다고 한 시간이 오늘 아침이었으니, 밤새 기절한 척 잠들어 있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병실밖의 복도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만일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추서윤과 그녀의 매니저가 자작극을 벌여 그를 속이다니.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어느 정도 답을 도출해 냈지만 그래도 추서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부승민이 병실로 들어가자 추서윤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승민아, 왔어?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필요 없었는데, 촬영팀 사람들은 진작에 갔어.”부승민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나가서 좀 걸었어. 어때? 지금도 많이 아파?”“아파, 많이 아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줘. 네가 있으면 안 아플거 같아.”만약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 말에 깜빡 속아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약간 어색한 부분이 느껴졌다.‘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네.’부승민이 이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으며 물었다.“어디가 아픈데?”“등이랑, 허리랑, 허벅지랑, 종아리랑, 여기저기 다 아파.”“등이 아프다고? 너 등도 다쳤어? 어젯밤 안수빈 씨 말로는 배를 다쳤다고 하던데.”추서윤이 순간 멈칫하더니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배... 배도 다쳤어. 너무 아파.”“그래?”부승민이 추서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의 눈빛은 모든 거짓말을 감별해 낼 듯 차갑고도 예리했다.“그래.”추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아, 내가 잘 못 기억했어. 안수빈 씨는 어제 네가 배가
”국내가 꼭 너에게 맞다는 보장은 없어. 너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아팠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해외가 너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아니... 내가 다시 돌아온 건 너 때문이야. 승민아, 제발 이러지 마.”“일단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너 아프지 않은 것도 확인했으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하지만 추서윤은 여전히 그를 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서야 몸을 움찔 떨더니 마지못해 두 팔을 풀었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더니 그 길로 차를 몰고 회사에 갔다.온하랑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도 꺼져 있었다.그는 지나가던 MQ의 직원에게 물었다.“온 전무님은요?”“전무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 휴가 내신 것 같던데요.”“알겠습니다.”그는 그 길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대표님, 오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부승민을 보고 인사했다.그는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안사람은요?”“사모님께서는 출장 가셨는데요.”부승민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출장이요?”“네, 비서랑 같이 출장 가신다고 하던데요.”부승민은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우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그는 온하랑이 일부러 며칠 뒤에 있는 출장 일정을 오늘로 당긴 것임을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피한 것이다.부승민이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출장 갔어? 언제 오는데?]하지만 그는 문자를 보내면서도 온하랑에게서 대답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그녀는 화가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역시나 시간이 지나도 온하랑에게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부승민은 여러 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번이 수신거부를 당했다. 그러다가 4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온하랑의 출장 스케줄을 알아보라고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도 예약해 놓을 것을 지시했다.이 일은 뒤로 끌면 끌수록 그에게 불리했다. 그러니
“동림아, 네가 임 여사님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잘 해결하실 거야.” 최동림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엄마의 태도가 이상했다. 친구네 아빠가 바람을 피웠을 때 친구 엄마는 크게 분노하고 난리를 쳤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아내가 남편의 내연녀를 공격하는 영상 그리고 그 영상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 ‘저런 여자들은 가만두면 안 돼.’ ‘원래 저런 건 맞아야 정신 차리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연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너무도 평온했다. 심지어 그 여자, 설윤에게까지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형, 그런데 엄마는 왜 그러시는 거야?” “너한테는 아직 좀 어려운 얘기야. 그냥 엄마 말 잘 따르기만 하면 돼.” “나도 알고 싶어. 형, 알려줘.” 최동림은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이의 눈빛은 맑고 어렸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최동철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림아, 너 이익이 뭔지 알아?” “알지. 돈!”최동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돈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사람과의 관계, 사업 기회, 사회적 지위, 더 나은 생활. 이 모든 게 다 이익이 될 수 있어.”“음...” 최동림은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최동철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정략결혼도 결국 이익과 이익이 맞물린 관계야.” “정략결혼?”“그래. 두 집안이 서로 협력하면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맺는 거지. 남자가 신분이 낮다면 여자 집안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배경 덕을 볼 수도 있어.”“임 여사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했고 더 많은 인맥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어.”“그게 바로 결혼이 임 여사님에게 가져다준 이익이야.” 최동림은 조금 헷갈린
“형이야 당연히 막아보려고 했지. 하지만...”최동철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용없었어. 아버지가 결정한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아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최국환은 언제나 강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그런데 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건 혹시 설윤 아줌마가 아버지를 유혹한 거 아닐까요?”“유혹?”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동생을 내려다봤다. “유혹이라는 단어 뜻은 제대로 알고 쓰는 거야?” “들었어요. 아빠 같은 사람한테는 붙으려는 여자가 많대요. 그러니까 설윤 아줌마도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최동림은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비가 비싼 만큼 친구들도 하나같이 부잣집 자식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집안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린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안도했다. ‘우리 집은 달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니까.’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림아, 형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단한 사람이요.” 최동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들은 나이 차가 많아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형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형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형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곤 했다. 형이 해외 명문대에 진학할 때도 집안 도움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합격했고 지금도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외모로 보면 형이랑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당연히 형이죠.” ‘아빠는 이미 늙었으니까.’ “몸매는?” “그것도 당연히 형이죠.” “재산은?” 최동림은 이번엔 조금 고민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더 많겠지만... 형도 결코 부족하지
최동철의 입술이 설윤의 쇄골을 스쳤다. “아무도 모를 거야.”“그만해요. 저... 임신 중이에요. 안 돼요.”“알아.”“회장님은 최동림 공부 봐주시러 가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밤새 일할 거야.”“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문 잠갔어. 그리고 다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그럼 어떻게 나왔어요?”“테라스로.”설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조용히 말했다. “흔적 남기지 않게 조심해요.”“응.”잠시 후, 최동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빠르게 손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여민 최동철이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다.”“잠깐만요.” 설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최동철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설윤은 커다란 종이티슈 덩어리를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동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가져가세요. 회장님이 보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동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은 그가 창문을 넘어 테라스로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본가의 방들은 각자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최동철의 방은 설윤의 방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빈 객실 하나만 두고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설윤은 곧장 방을 점검했다. 이상한 흔적은 없는지,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지. 모든 걸 확인한 뒤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최동철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갔다. “똑똑.”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철은
그녀는 어딘가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옷자락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박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 밤이 너무 격정적이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둘 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동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더니 혀끝으로 어금니를 굴리며 낮게 물었다. “내 거야?” 설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최동철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지운 듯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네가 임 여사한테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임신했다고 하던데?” 설윤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희가 절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덫을 놓았어요.” 임가희의 수법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나영이 임가희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그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다움시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최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낙태 수술 기록이라도 위조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울었겠지?” “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임신할 줄은 몰랐다. 최국환에게 보낸 자료에는 임신 9주 차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5주 남짓이었다. 최동철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국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면서 왜 내 제안은 거절했던 거야?” ‘이 인간은 아직도 그걸 따지고 있는 거야?’설윤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발끝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
최씨 가문의 저녁 식탁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최동철은 식탁 한쪽에 앉아 냉랭한 표정으로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 음식을 집어 들었을 뿐 내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설윤을 스쳤다. 눈빛에는 차가움과 은근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고 설윤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최국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여보, 집안 아주머니 손맛이 정말 좋아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바로 준비하게 할 테니까.” 최국환은 그렇게 말하며 직접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고마워요. 여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연지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설윤이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사랑스러운 아내인 척하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임연지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질 것처럼 꽉 쥐었다. 혹여나 자신의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애써 고개를 숙이고 밥만 떠넣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았다. 최동림 역시 그녀 옆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도 가끔 설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곁에 앉은 임가희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공용 젓가락으로 설윤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한번 먹어봐. 아주머니가 제일 잘하는 요리야.” “고마워요. 언니.” 설윤은 미소를 띠며 음식을 한입 가져갔다. “정말 맛있네요.” 최국환은 식탁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먹어. 이제 둘이서 먹는 거니까 영양도 충분히 챙겨야지.” 설윤은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여보도 많이 드세요.” ‘우웩!’ 임연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저 귀에 거슬리는 ‘여보’
‘뭐야. 저 여자 또 시작이네.’ 설윤은 체리를 입에 넣고 씨를 가볍게 뱉은 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최국환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요. 최 회장님.” “아직도 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최국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설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앉아 있는 임가희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여보, 더 먹고 싶어요.” ‘우웩!’ 눈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자 임연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리고 고모부... 저 역겨운 느끼한 미소는 또 뭐야?’ 오늘 오후, 최국환은 직접 설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러니까 임연지의 고모인 임가희는 설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설윤도 눈치가 있었는지 임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후, 임가희는 집안의 가정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설윤을 가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연지는 억울함과 불쾌함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설윤에게 좋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더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은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 설윤도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최국환이 따로 가정부까지 붙여주었고 집안일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했다. 설윤은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서 쉬던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은 최국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최동철. 설윤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 한
최동철은 김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문서를 거칠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김지환을 향했다.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설윤 씨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가 해야 할 일만 신경 써.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그 차가운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김지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솔했습니다.”“됐어. 나가.”“예.”김지환은 속으로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안만 했을 뿐 직접 나서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윤 씨가 임신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처리할 생각이지?’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볼 셈인가?’ 어젯밤, 최동철이 설윤의 주소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지환은 최동철이 직접 그녀를 만나 겁을 주고 이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후에도 최동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해 봤자 의미 없었다. 김지환은 잠시 머릿속에서 이 일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최동철은 매일 야근했고 김지환 역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님이 정시 퇴근을 하시네?’김지환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비서실 내부에도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사 로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최동철을 본 김지환은 재빠르게 다가가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메이슨 도련님 보러 가시는 건가요?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그 말에 최동철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강남시에서 돌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