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형이 다급하게 말했다.“승민아, 승민아. 그런 말 하지 마, 난 당연히 네 친구지.”“그럼 솔직히 말해.”“말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거 있어.”“물어봐.”“어제 너 간 후에 온하랑씨가 너랑 자기는 혼인신고까지 한 진짜 부부라고 그러던데, 그거 사실이야?”“응.”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인정하자 노준형은 말문이 막혔다.“야, 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언제 결혼했는데? 왜 난 몰랐어?”“삼 년 전.”“삼... 삼 년 전?”노준형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둘이 3년 차 부부라고?이게... 이게 말이 되나?“그럼, 승민이 너는 지금... 바람...”“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 어제 너한테 나 찾아가라고 한 사람 누구야? 서윤이가 많이 다쳤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야?”“너, 절대 내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서윤이가 너한테 가보라고 시켰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좀 과장하라고 하면서.”“서윤이가?”“그래.”“어제 서윤이가 다친 뒤에 만났었어?”“아니, 어제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나한테 전화 왔었어. 야, 이번 일은 내 탓 하면 안돼. 서윤이가 너랑 온하랑씨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자기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고 울면서 부탁하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하냐.”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는 알아?”당연히 서윤이 생일이지.하지만 노준형은 부승민이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님을 알았다.그는 어제 두 사람을 찾으러 글로리아에 갔을 때 근사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던 걸 기억해냈다.설마...“너희 결혼기념일?”노준형이 자신없게 대답했다.“맞아.”“그... 그거참 운명의 장난처럼 어쩜 다 하루에...”노준형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는 추서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추서윤은 두 사람이 결혼한것도 알고 어제가 결혼기념일 인걸 알면서도 부승민을 찾으러 가라고 그에게 시킨 것이었다.다행히 어제 부승민이 온하랑 대신 추서윤의 편을 들어 주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노준형과 부승민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추서윤은 기절한 적이 없다는 뜻이네요?”“네. 추서윤 씨는 어제 병원에 실려 올 때부터 멀쩡하셨어요.”“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을 나갔다.그가 어제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였고 추서윤이 깨어났다고 한 시간이 오늘 아침이었으니, 밤새 기절한 척 잠들어 있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병실밖의 복도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만일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추서윤과 그녀의 매니저가 자작극을 벌여 그를 속이다니.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어느 정도 답을 도출해 냈지만 그래도 추서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부승민이 병실로 들어가자 추서윤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승민아, 왔어?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필요 없었는데, 촬영팀 사람들은 진작에 갔어.”부승민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나가서 좀 걸었어. 어때? 지금도 많이 아파?”“아파, 많이 아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줘. 네가 있으면 안 아플거 같아.”만약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 말에 깜빡 속아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약간 어색한 부분이 느껴졌다.‘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네.’부승민이 이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으며 물었다.“어디가 아픈데?”“등이랑, 허리랑, 허벅지랑, 종아리랑, 여기저기 다 아파.”“등이 아프다고? 너 등도 다쳤어? 어젯밤 안수빈 씨 말로는 배를 다쳤다고 하던데.”추서윤이 순간 멈칫하더니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배... 배도 다쳤어. 너무 아파.”“그래?”부승민이 추서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의 눈빛은 모든 거짓말을 감별해 낼 듯 차갑고도 예리했다.“그래.”추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아, 내가 잘 못 기억했어. 안수빈 씨는 어제 네가 배가
”국내가 꼭 너에게 맞다는 보장은 없어. 너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아팠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해외가 너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아니... 내가 다시 돌아온 건 너 때문이야. 승민아, 제발 이러지 마.”“일단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너 아프지 않은 것도 확인했으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하지만 추서윤은 여전히 그를 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서야 몸을 움찔 떨더니 마지못해 두 팔을 풀었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더니 그 길로 차를 몰고 회사에 갔다.온하랑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도 꺼져 있었다.그는 지나가던 MQ의 직원에게 물었다.“온 전무님은요?”“전무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 휴가 내신 것 같던데요.”“알겠습니다.”그는 그 길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대표님, 오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부승민을 보고 인사했다.그는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안사람은요?”“사모님께서는 출장 가셨는데요.”부승민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출장이요?”“네, 비서랑 같이 출장 가신다고 하던데요.”부승민은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우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그는 온하랑이 일부러 며칠 뒤에 있는 출장 일정을 오늘로 당긴 것임을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피한 것이다.부승민이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출장 갔어? 언제 오는데?]하지만 그는 문자를 보내면서도 온하랑에게서 대답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그녀는 화가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역시나 시간이 지나도 온하랑에게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부승민은 여러 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번이 수신거부를 당했다. 그러다가 4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온하랑의 출장 스케줄을 알아보라고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도 예약해 놓을 것을 지시했다.이 일은 뒤로 끌면 끌수록 그에게 불리했다. 그러니
그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방금 부승민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머무는 호텔과 온하랑의 호텔 방을 물었었다.비서는 예전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예전에 그가 급한 일 때문에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몇 번 걸어도 받지 않다가 마지막에 겨우 받았는데, 그때 뜻밖에도 전화를 대신 받은 사람이 부승민이었다.사실 그때부터 그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사이를 조금 의심했었다.그런데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과 방금 일어난 일까지 합쳐지면서 그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비서는 핸드폰을 잠시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할 준비를 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는데 이번에 전화를 건 사람도 역시나 부승민이었다.그가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나 지금 호텔에 도착했어. 나와 봐.”“네? 아, 네네. 지금 도착하셨다고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내려갈게요...”비서가 방 카드를 들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온하랑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방문 앞까지 왔으면서 왜 나더러 나오라고 한 거지?“대표님.”비서가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부승민이 온하랑의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문 두드리고 네가 왔다고 해, 내 얘기는 하지 말고.”비서는 그제야 깨달았다.알고 보니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그가 온하랑의 방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던 온하랑은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전무님, 접니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잠시만요.”온하랑은 드라마를 잠시 멈추고는 방문을 열었다.“뭘 물어...”문을 연 온하랑은 문밖에 서있던 부승민을 발견하고는 삽시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고 할때, 부승민이 한발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 구두코를 문 틈 사이로 집어넣고 팔로 닫히려는 문을 힘껏 당겼다.“온하랑, 나랑 얘기 좀 해.”온하랑이 기를 쓰고
부승민이 왼쪽 뺨을 감싸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겨우 말했다.“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오히려 온하랑이 자리에 굳어 버렸다.그녀는 원래 그를 때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더니 얄미운 남자의 빰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부승민이 뒤 돌아 걸어가더니 방을 나갔다.부승민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자리에 굳어 있던 비서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는 부승민의 뒷모습과 방안의 온하랑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부승민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그때, 온하랑이 가까이 다가오자 비서가 다급하게 해명했다.“전무님, 사실은 대표님이 제게 전화해서 저희가 머무는 호텔을 물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전무님의 방문을 두드리라고 시키셨는데 저로서는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온하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알겠어요, 가서 쉬세요.”“네.”비서가 떠난 후 온하랑은 방문을 닫았다. 도저히 드라마를 볼 기분이 아니었다.그녀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 게 무색하게 부승민이 직접 찾아와서 어제의 일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어제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에게 갔으면서, 그의 친구가 그녀를 모욕할 때 못 본 척 그냥 넘어갔으면서, 그런데 오늘은 또 B시까지 쫓아와서 해명하려고 하다니.대체 뭘 해명하려는 걸까?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추서윤이 너무 걱정되어서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봐야 맘이 놓일 것 같았다는 내용이겠지.온하랑도 부승민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하지만 부승민은 이번에도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을 선택했다.그녀는 그날 저녁 이렇게 말했었다.“부승민, 오늘 이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 사이는 끝인 거야.”하지만 그는 이 말을 듣고도 떠나는 걸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든 소용이 있을까?그의 태도와 행동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는데....호텔을 떠난 부승민은 밤비행기를 타고 다시 강남시로 돌아왔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 통화기록을 백업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왔다.이건 연민우가 부승민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부승민이 핸드폰을 연민우에게 건네주었다.“그럼 가서 백업한 후에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응.”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을 들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부승민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그때,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갑자기 오진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네, 대표님,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입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체 에너지에 관한 건 말인데요...”부승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보았다.지금 재생되고 있는 내용은 일전에 그와 오진무가 통화로 업무 얘기를 나눴을 때의 내용이었다.아마도 연민우가 백업하는 도중에 재생버튼을 잘 못 눌렀고, 마침 그의 핸드폰에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통화 내용이 재생된 것이었다.부승민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미간을 문질렀다.그의 사무실에 오진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부승민이 몸을 일으켜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끄려고 할 때 마침 오진무와의 통화가 끝나고 다음 통화의 내용을 재생하기 시작했다.“여보세요.”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 승민오빠는요?”이어서 온하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부승민은 전원을 끄려던 손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통화내용을 들었다.“하랑이네. 승민이는 지금 날 위해서 밥하는 중이야.”추서윤이 이어서 말했다.“하랑아, 넌 모르지? 승민이 사실 요리를 엄청 잘해. 대학교 다닐때부터 자취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요리를 배웠거든. 우리 둘이서 자주 같이 요리해 먹고 했지.”부승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추서윤은 그녀의 기분을 전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온하랑에게 자랑했다. 지금 자기가 듣고 있는 게 진짜 추서윤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승민오빠 바꿔주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무슨 일인데? 내가 물어봐 줄게.”추서
부승민이 미간을 문질렀다.그러다가 갑자기 예전에 그와 온하랑이 추서윤의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 때문에 다퉜던 게 생각났다.당시 온하랑의 말로는 추서윤의 메이크업이 주최 측의 요구와 전혀 부합되지 않았지만, 추서윤이 절대 메이크업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마지막에는 계약 파기로 협박하기까지 했다고 했다.당시의 그는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입에 올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은 메이크업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지금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고 나서야 부승민은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빌미로 협박했다던 온하랑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백업이 끝나고 연민우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리면서 추서윤에게서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승민아, 미안해. 널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이번만 용서해주면 안돼?]추서윤은 부승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알고는 요 며칠간 계속 문자로 용서를 구했다.부승민이 핸트폰을 내려놓으려던 때, 문자 한 통이 더 도착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 와줄 거지? 내가 귀국하고 나서 여는 첫 번째 생일 파티야. 꼭 와줬으면 좋겠어.]문자의 행간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부승민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로 예전에 얘기가 다 끝났지만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추서윤은 그가 약속을 철회할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그녀의 예상 밖으로 부승민에게서 곧바로 문자가 왔다.[알겠어.][정말 고마워, 승민아. 나는 네가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서 안 올 줄 알았어.]부승민에게서 답장이 없자 추서윤이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서 말이야, 전에 했던 약속 여전히 유효해?][응.]추서윤이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민아! 넌 정말 다정한 거 같아.]그녀가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화 풀어... 진짜 미안해, 근데 나 진짜 너 사랑해.][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있어? 최대한 맞춰줄게.]추서윤이 속으로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
추서윤은 온하랑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부승민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 난 이만 일 봐야 해서.”말을 마친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버렸다.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오자 그는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돌려놓고 탁자에 엎어놓았다.그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예상외로 너무 후련했다.아마 마음이 바뀐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겠지.한편, 꺼진 핸드폰을 본 추서윤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왜?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부승민은 분명 온하랑과 곧 이혼 한다고 했는데.곧 추서윤이 부승민의 안사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하지만 지금, 이 모든 희망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추서윤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차올랐다.온하랑!이게 다 온하랑 때문이야!그녀만 아니었다면 추서윤과 부승민은 진작 결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추서윤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이번 출장은 4날 정도로 스케줄을 잡았었다.하지만 3일 차 오전에 모든 일은 다 끝마쳤기에 거의 두 날의 자유시간을 얻게 되었다.온하랑은 비서들에게 휴가를 주며 그들더러 B시에 온 김에 여행이나 하라고 했다.그때, 이주혁에게서 문자가 왔다.[요 며칠 시간 있어? 나 요즘 한가한데 너도 시간 되면 밥 사줄게.][너 촬영 안 해?][뉴스 못 봤어? 추서윤 일 때문에 촬영장 정비한다고 며칠 동안 촬영 중단됐어. 나 지금 드라마 홍보 때문에 B시에 와 있는데 내일 돌아가.][대박, 나도 지금 B시에 출장 와 있는데.][진짜? 너 일 끝났어? 밥 먹으러 나올래? 내가 살게.][좋아, 내가 식당 찾아볼게.]온하랑은 맛 평가도 좋고 사람도 꽤 적은 개인 레스토랑으로 골랐다.먼저 도착한 이주혁이 룸에 들어가 먼저 몇 가지 주문했다.“앉아.”“홍보하러 여기까지 왔어?”“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