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준형이 다급하게 말했다.“승민아, 승민아. 그런 말 하지 마, 난 당연히 네 친구지.”“그럼 솔직히 말해.”“말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거 있어.”“물어봐.”“어제 너 간 후에 온하랑씨가 너랑 자기는 혼인신고까지 한 진짜 부부라고 그러던데, 그거 사실이야?”“응.”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인정하자 노준형은 말문이 막혔다.“야, 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언제 결혼했는데? 왜 난 몰랐어?”“삼 년 전.”“삼... 삼 년 전?”노준형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둘이 3년 차 부부라고?이게... 이게 말이 되나?“그럼, 승민이 너는 지금... 바람...”“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 어제 너한테 나 찾아가라고 한 사람 누구야? 서윤이가 많이 다쳤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야?”“너, 절대 내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서윤이가 너한테 가보라고 시켰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좀 과장하라고 하면서.”“서윤이가?”“그래.”“어제 서윤이가 다친 뒤에 만났었어?”“아니, 어제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나한테 전화 왔었어. 야, 이번 일은 내 탓 하면 안돼. 서윤이가 너랑 온하랑씨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자기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고 울면서 부탁하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하냐.”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는 알아?”당연히 서윤이 생일이지.하지만 노준형은 부승민이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님을 알았다.그는 어제 두 사람을 찾으러 글로리아에 갔을 때 근사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던 걸 기억해냈다.설마...“너희 결혼기념일?”노준형이 자신없게 대답했다.“맞아.”“그... 그거참 운명의 장난처럼 어쩜 다 하루에...”노준형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는 추서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추서윤은 두 사람이 결혼한것도 알고 어제가 결혼기념일 인걸 알면서도 부승민을 찾으러 가라고 그에게 시킨 것이었다.다행히 어제 부승민이 온하랑 대신 추서윤의 편을 들어 주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노준형과 부승민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추서윤은 기절한 적이 없다는 뜻이네요?”“네. 추서윤 씨는 어제 병원에 실려 올 때부터 멀쩡하셨어요.”“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을 나갔다.그가 어제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였고 추서윤이 깨어났다고 한 시간이 오늘 아침이었으니, 밤새 기절한 척 잠들어 있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병실밖의 복도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만일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추서윤과 그녀의 매니저가 자작극을 벌여 그를 속이다니.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어느 정도 답을 도출해 냈지만 그래도 추서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부승민이 병실로 들어가자 추서윤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승민아, 왔어?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필요 없었는데, 촬영팀 사람들은 진작에 갔어.”부승민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나가서 좀 걸었어. 어때? 지금도 많이 아파?”“아파, 많이 아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줘. 네가 있으면 안 아플거 같아.”만약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 말에 깜빡 속아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약간 어색한 부분이 느껴졌다.‘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네.’부승민이 이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으며 물었다.“어디가 아픈데?”“등이랑, 허리랑, 허벅지랑, 종아리랑, 여기저기 다 아파.”“등이 아프다고? 너 등도 다쳤어? 어젯밤 안수빈 씨 말로는 배를 다쳤다고 하던데.”추서윤이 순간 멈칫하더니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배... 배도 다쳤어. 너무 아파.”“그래?”부승민이 추서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의 눈빛은 모든 거짓말을 감별해 낼 듯 차갑고도 예리했다.“그래.”추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아, 내가 잘 못 기억했어. 안수빈 씨는 어제 네가 배가
”국내가 꼭 너에게 맞다는 보장은 없어. 너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아팠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해외가 너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아니... 내가 다시 돌아온 건 너 때문이야. 승민아, 제발 이러지 마.”“일단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너 아프지 않은 것도 확인했으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하지만 추서윤은 여전히 그를 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서야 몸을 움찔 떨더니 마지못해 두 팔을 풀었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더니 그 길로 차를 몰고 회사에 갔다.온하랑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도 꺼져 있었다.그는 지나가던 MQ의 직원에게 물었다.“온 전무님은요?”“전무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 휴가 내신 것 같던데요.”“알겠습니다.”그는 그 길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대표님, 오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부승민을 보고 인사했다.그는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안사람은요?”“사모님께서는 출장 가셨는데요.”부승민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출장이요?”“네, 비서랑 같이 출장 가신다고 하던데요.”부승민은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우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그는 온하랑이 일부러 며칠 뒤에 있는 출장 일정을 오늘로 당긴 것임을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피한 것이다.부승민이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출장 갔어? 언제 오는데?]하지만 그는 문자를 보내면서도 온하랑에게서 대답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그녀는 화가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역시나 시간이 지나도 온하랑에게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부승민은 여러 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번이 수신거부를 당했다. 그러다가 4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온하랑의 출장 스케줄을 알아보라고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도 예약해 놓을 것을 지시했다.이 일은 뒤로 끌면 끌수록 그에게 불리했다. 그러니
그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방금 부승민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머무는 호텔과 온하랑의 호텔 방을 물었었다.비서는 예전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예전에 그가 급한 일 때문에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몇 번 걸어도 받지 않다가 마지막에 겨우 받았는데, 그때 뜻밖에도 전화를 대신 받은 사람이 부승민이었다.사실 그때부터 그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사이를 조금 의심했었다.그런데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과 방금 일어난 일까지 합쳐지면서 그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비서는 핸드폰을 잠시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할 준비를 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는데 이번에 전화를 건 사람도 역시나 부승민이었다.그가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나 지금 호텔에 도착했어. 나와 봐.”“네? 아, 네네. 지금 도착하셨다고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내려갈게요...”비서가 방 카드를 들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온하랑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방문 앞까지 왔으면서 왜 나더러 나오라고 한 거지?“대표님.”비서가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부승민이 온하랑의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문 두드리고 네가 왔다고 해, 내 얘기는 하지 말고.”비서는 그제야 깨달았다.알고 보니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그가 온하랑의 방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던 온하랑은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전무님, 접니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잠시만요.”온하랑은 드라마를 잠시 멈추고는 방문을 열었다.“뭘 물어...”문을 연 온하랑은 문밖에 서있던 부승민을 발견하고는 삽시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고 할때, 부승민이 한발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 구두코를 문 틈 사이로 집어넣고 팔로 닫히려는 문을 힘껏 당겼다.“온하랑, 나랑 얘기 좀 해.”온하랑이 기를 쓰고
부승민이 왼쪽 뺨을 감싸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겨우 말했다.“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오히려 온하랑이 자리에 굳어 버렸다.그녀는 원래 그를 때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더니 얄미운 남자의 빰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부승민이 뒤 돌아 걸어가더니 방을 나갔다.부승민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자리에 굳어 있던 비서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는 부승민의 뒷모습과 방안의 온하랑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부승민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그때, 온하랑이 가까이 다가오자 비서가 다급하게 해명했다.“전무님, 사실은 대표님이 제게 전화해서 저희가 머무는 호텔을 물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전무님의 방문을 두드리라고 시키셨는데 저로서는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온하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알겠어요, 가서 쉬세요.”“네.”비서가 떠난 후 온하랑은 방문을 닫았다. 도저히 드라마를 볼 기분이 아니었다.그녀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 게 무색하게 부승민이 직접 찾아와서 어제의 일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어제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에게 갔으면서, 그의 친구가 그녀를 모욕할 때 못 본 척 그냥 넘어갔으면서, 그런데 오늘은 또 B시까지 쫓아와서 해명하려고 하다니.대체 뭘 해명하려는 걸까?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추서윤이 너무 걱정되어서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봐야 맘이 놓일 것 같았다는 내용이겠지.온하랑도 부승민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하지만 부승민은 이번에도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을 선택했다.그녀는 그날 저녁 이렇게 말했었다.“부승민, 오늘 이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 사이는 끝인 거야.”하지만 그는 이 말을 듣고도 떠나는 걸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든 소용이 있을까?그의 태도와 행동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는데....호텔을 떠난 부승민은 밤비행기를 타고 다시 강남시로 돌아왔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 통화기록을 백업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왔다.이건 연민우가 부승민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부승민이 핸드폰을 연민우에게 건네주었다.“그럼 가서 백업한 후에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응.”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을 들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부승민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그때,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갑자기 오진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네, 대표님,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입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체 에너지에 관한 건 말인데요...”부승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보았다.지금 재생되고 있는 내용은 일전에 그와 오진무가 통화로 업무 얘기를 나눴을 때의 내용이었다.아마도 연민우가 백업하는 도중에 재생버튼을 잘 못 눌렀고, 마침 그의 핸드폰에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통화 내용이 재생된 것이었다.부승민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미간을 문질렀다.그의 사무실에 오진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부승민이 몸을 일으켜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끄려고 할 때 마침 오진무와의 통화가 끝나고 다음 통화의 내용을 재생하기 시작했다.“여보세요.”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 승민오빠는요?”이어서 온하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부승민은 전원을 끄려던 손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통화내용을 들었다.“하랑이네. 승민이는 지금 날 위해서 밥하는 중이야.”추서윤이 이어서 말했다.“하랑아, 넌 모르지? 승민이 사실 요리를 엄청 잘해. 대학교 다닐때부터 자취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요리를 배웠거든. 우리 둘이서 자주 같이 요리해 먹고 했지.”부승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추서윤은 그녀의 기분을 전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온하랑에게 자랑했다. 지금 자기가 듣고 있는 게 진짜 추서윤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승민오빠 바꿔주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무슨 일인데? 내가 물어봐 줄게.”추서
부승민이 미간을 문질렀다.그러다가 갑자기 예전에 그와 온하랑이 추서윤의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 때문에 다퉜던 게 생각났다.당시 온하랑의 말로는 추서윤의 메이크업이 주최 측의 요구와 전혀 부합되지 않았지만, 추서윤이 절대 메이크업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마지막에는 계약 파기로 협박하기까지 했다고 했다.당시의 그는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입에 올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은 메이크업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지금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고 나서야 부승민은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빌미로 협박했다던 온하랑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백업이 끝나고 연민우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리면서 추서윤에게서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승민아, 미안해. 널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이번만 용서해주면 안돼?]추서윤은 부승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알고는 요 며칠간 계속 문자로 용서를 구했다.부승민이 핸트폰을 내려놓으려던 때, 문자 한 통이 더 도착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 와줄 거지? 내가 귀국하고 나서 여는 첫 번째 생일 파티야. 꼭 와줬으면 좋겠어.]문자의 행간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부승민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로 예전에 얘기가 다 끝났지만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추서윤은 그가 약속을 철회할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그녀의 예상 밖으로 부승민에게서 곧바로 문자가 왔다.[알겠어.][정말 고마워, 승민아. 나는 네가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서 안 올 줄 알았어.]부승민에게서 답장이 없자 추서윤이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서 말이야, 전에 했던 약속 여전히 유효해?][응.]추서윤이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민아! 넌 정말 다정한 거 같아.]그녀가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화 풀어... 진짜 미안해, 근데 나 진짜 너 사랑해.][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있어? 최대한 맞춰줄게.]추서윤이 속으로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
추서윤은 온하랑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부승민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 난 이만 일 봐야 해서.”말을 마친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버렸다.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오자 그는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돌려놓고 탁자에 엎어놓았다.그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예상외로 너무 후련했다.아마 마음이 바뀐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겠지.한편, 꺼진 핸드폰을 본 추서윤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왜?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부승민은 분명 온하랑과 곧 이혼 한다고 했는데.곧 추서윤이 부승민의 안사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하지만 지금, 이 모든 희망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추서윤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차올랐다.온하랑!이게 다 온하랑 때문이야!그녀만 아니었다면 추서윤과 부승민은 진작 결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추서윤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이번 출장은 4날 정도로 스케줄을 잡았었다.하지만 3일 차 오전에 모든 일은 다 끝마쳤기에 거의 두 날의 자유시간을 얻게 되었다.온하랑은 비서들에게 휴가를 주며 그들더러 B시에 온 김에 여행이나 하라고 했다.그때, 이주혁에게서 문자가 왔다.[요 며칠 시간 있어? 나 요즘 한가한데 너도 시간 되면 밥 사줄게.][너 촬영 안 해?][뉴스 못 봤어? 추서윤 일 때문에 촬영장 정비한다고 며칠 동안 촬영 중단됐어. 나 지금 드라마 홍보 때문에 B시에 와 있는데 내일 돌아가.][대박, 나도 지금 B시에 출장 와 있는데.][진짜? 너 일 끝났어? 밥 먹으러 나올래? 내가 살게.][좋아, 내가 식당 찾아볼게.]온하랑은 맛 평가도 좋고 사람도 꽤 적은 개인 레스토랑으로 골랐다.먼저 도착한 이주혁이 룸에 들어가 먼저 몇 가지 주문했다.“앉아.”“홍보하러 여기까지 왔어?”“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