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왼쪽 뺨을 감싸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겨우 말했다.“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오히려 온하랑이 자리에 굳어 버렸다.그녀는 원래 그를 때릴 생각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가더니 얄미운 남자의 빰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부승민이 뒤 돌아 걸어가더니 방을 나갔다.부승민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자리에 굳어 있던 비서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는 부승민의 뒷모습과 방안의 온하랑을 번갈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부승민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량해 보였다.그때, 온하랑이 가까이 다가오자 비서가 다급하게 해명했다.“전무님, 사실은 대표님이 제게 전화해서 저희가 머무는 호텔을 물으셨어요. 그리고 저한테 전무님의 방문을 두드리라고 시키셨는데 저로서는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온하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알겠어요, 가서 쉬세요.”“네.”비서가 떠난 후 온하랑은 방문을 닫았다. 도저히 드라마를 볼 기분이 아니었다.그녀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쓴 게 무색하게 부승민이 직접 찾아와서 어제의 일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어제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에게 갔으면서, 그의 친구가 그녀를 모욕할 때 못 본 척 그냥 넘어갔으면서, 그런데 오늘은 또 B시까지 쫓아와서 해명하려고 하다니.대체 뭘 해명하려는 걸까?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추서윤이 너무 걱정되어서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봐야 맘이 놓일 것 같았다는 내용이겠지.온하랑도 부승민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하지만 부승민은 이번에도 그녀를 버리고 추서윤을 선택했다.그녀는 그날 저녁 이렇게 말했었다.“부승민, 오늘 이 문을 나가는 순간 우리 사이는 끝인 거야.”하지만 그는 이 말을 듣고도 떠나는 걸 선택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든 소용이 있을까?그의 태도와 행동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는데....호텔을 떠난 부승민은 밤비행기를 타고 다시 강남시로 돌아왔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 통화기록을 백업하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왔다.이건 연민우가 부승민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부승민이 핸드폰을 연민우에게 건네주었다.“그럼 가서 백업한 후에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응.”연민우가 부승민의 핸드폰을 들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부승민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그때,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갑자기 오진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네, 대표님, 그레이트 테크의 오진무입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체 에너지에 관한 건 말인데요...”부승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블루투스 스피커를 보았다.지금 재생되고 있는 내용은 일전에 그와 오진무가 통화로 업무 얘기를 나눴을 때의 내용이었다.아마도 연민우가 백업하는 도중에 재생버튼을 잘 못 눌렀고, 마침 그의 핸드폰에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통화 내용이 재생된 것이었다.부승민이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미간을 문질렀다.그의 사무실에 오진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부승민이 몸을 일으켜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끄려고 할 때 마침 오진무와의 통화가 끝나고 다음 통화의 내용을 재생하기 시작했다.“여보세요.”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 승민오빠는요?”이어서 온하랑의 목소리도 들려왔다.부승민은 전원을 끄려던 손을 멈추고 자리에 서서 통화내용을 들었다.“하랑이네. 승민이는 지금 날 위해서 밥하는 중이야.”추서윤이 이어서 말했다.“하랑아, 넌 모르지? 승민이 사실 요리를 엄청 잘해. 대학교 다닐때부터 자취하다 보니까 그때부터 요리를 배웠거든. 우리 둘이서 자주 같이 요리해 먹고 했지.”부승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추서윤은 그녀의 기분을 전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온하랑에게 자랑했다. 지금 자기가 듣고 있는 게 진짜 추서윤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말투였다.“승민오빠 바꿔주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무슨 일인데? 내가 물어봐 줄게.”추서
부승민이 미간을 문질렀다.그러다가 갑자기 예전에 그와 온하랑이 추서윤의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일 때문에 다퉜던 게 생각났다.당시 온하랑의 말로는 추서윤의 메이크업이 주최 측의 요구와 전혀 부합되지 않았지만, 추서윤이 절대 메이크업을 수정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마지막에는 계약 파기로 협박하기까지 했다고 했다.당시의 그는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입에 올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은 메이크업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지금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고 나서야 부승민은 추서윤이 계약 파기를 빌미로 협박했다던 온하랑의 말이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백업이 끝나고 연민우가 핸드폰을 돌려주었다.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리면서 추서윤에게서 문자가 왔음을 알렸다.[승민아, 미안해. 널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이번만 용서해주면 안돼?]추서윤은 부승민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알고는 요 며칠간 계속 문자로 용서를 구했다.부승민이 핸트폰을 내려놓으려던 때, 문자 한 통이 더 도착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 와줄 거지? 내가 귀국하고 나서 여는 첫 번째 생일 파티야. 꼭 와줬으면 좋겠어.]문자의 행간에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부승민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로 예전에 얘기가 다 끝났지만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추서윤은 그가 약속을 철회할까 봐 걱정되었다.하지만 그녀의 예상 밖으로 부승민에게서 곧바로 문자가 왔다.[알겠어.][정말 고마워, 승민아. 나는 네가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나서 안 올 줄 알았어.]부승민에게서 답장이 없자 추서윤이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내일 내 생일파티에서 말이야, 전에 했던 약속 여전히 유효해?][응.]추서윤이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민아! 넌 정말 다정한 거 같아.]그녀가 이어서 문자를 보냈다.[승민아... 화 풀어... 진짜 미안해, 근데 나 진짜 너 사랑해.][다른 거 더 필요한 거 있어? 최대한 맞춰줄게.]추서윤이 속으로 기뻐하며 문자를 보냈다.[고마워, 승
추서윤은 온하랑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부승민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다른 일 없으면 끊을게. 난 이만 일 봐야 해서.”말을 마친 그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버렸다.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 오자 그는 핸드폰을 아예 무음으로 돌려놓고 탁자에 엎어놓았다.그가 의자에 깊이 기대며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예상외로 너무 후련했다.아마 마음이 바뀐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겠지.한편, 꺼진 핸드폰을 본 추서윤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왜?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부승민은 분명 온하랑과 곧 이혼 한다고 했는데.곧 추서윤이 부승민의 안사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정말 조금만 더 있으면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하지만 지금, 이 모든 희망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추서윤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가 차올랐다.온하랑!이게 다 온하랑 때문이야!그녀만 아니었다면 추서윤과 부승민은 진작 결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추서윤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이번 출장은 4날 정도로 스케줄을 잡았었다.하지만 3일 차 오전에 모든 일은 다 끝마쳤기에 거의 두 날의 자유시간을 얻게 되었다.온하랑은 비서들에게 휴가를 주며 그들더러 B시에 온 김에 여행이나 하라고 했다.그때, 이주혁에게서 문자가 왔다.[요 며칠 시간 있어? 나 요즘 한가한데 너도 시간 되면 밥 사줄게.][너 촬영 안 해?][뉴스 못 봤어? 추서윤 일 때문에 촬영장 정비한다고 며칠 동안 촬영 중단됐어. 나 지금 드라마 홍보 때문에 B시에 와 있는데 내일 돌아가.][대박, 나도 지금 B시에 출장 와 있는데.][진짜? 너 일 끝났어? 밥 먹으러 나올래? 내가 살게.][좋아, 내가 식당 찾아볼게.]온하랑은 맛 평가도 좋고 사람도 꽤 적은 개인 레스토랑으로 골랐다.먼저 도착한 이주혁이 룸에 들어가 먼저 몇 가지 주문했다.“앉아.”“홍보하러 여기까지 왔어?”“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초대
”추서윤 씨 화상 입은 거 아니었어?”“사고 난 당일에 병문안 가봤는데, 별로 심각하지 않아.”“아, 그래.”그럼 왜 그날 노준형은 마치 추서윤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얘기했던 걸까.“너도 딱히 할 일 없는 거 아니야? 나랑 같이 갈래?”“그럼 안 되는 거 아니야?”추서윤의 생일 파티라고 했으니 부승민도 참석할 것이다.그녀는 지금 부승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안 될게 뭐가 있어? 초대장에 여자 파트너 데려와도 된다고 쓰여 있었어. 그리고 부 대표님이 네 작은 오빠니까 추서윤씨는 네 미래의 새언니 아니야? 그러니까 생일 파티에 가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지. 그때 발표회 때처럼, 네가 피하면 피할수록 사람들은 더 어처구니없는 루머를 만들어 낼 거야. 네가 당당하게 나가야 오히려 그 사람들이 말을 못 해.”온하랑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이주혁은 그녀를 한번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내 말 한번 들어봐. 부대표님이 이번 추서윤의 생일파티에 적지 않을 돈을 썼다고 해. 장소는 특별히 국제적으로 유명한 실내 디자이너를 불러서 꾸미고, 예복은 리미티드 에디션인데 이번 파티를 위해 특별히 해외에서 가져온 거래. 그리고 생일케익도 유명한 파티시에를 불러서 만든 거고.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데 진짜 안 갈 거야?”이주혁의 말을 들을수록 온하랑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부승민이 추서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이 생일 파티는 아마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던 거겠지?추서윤은 9월 20일 당일에 기어코 부승민을 불러내 그녀의 곁에 머물게 했고, 부승민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생일 파티도 특별히 돈을 많이 들였다. 추서윤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그런데 온하랑이 오늘 그녀의 생일파티에 나타나면 추서윤의 얼굴은 아마 보기 좋게 굳을 것이었다.“좋아, 그럼 같이 가자.”비행기에서 내린 후 두사람은 바로 숍으로 갔다가 파티장으로 출발했다.추서윤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는 연예인이 적었다. 그래서 이번 파티에 초대된 사람
그 말을 들은 온하랑이 자리에 굳었다.어쩐지 멜로디가 익숙하더라니.‘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부승민이 그녀에게 알려주었던 곡의 이름이었다.연주할 줄 아는 곡이었구나.둘의 인연을 이어준 곡이었구나.어쩐지 그날 레스토랑에서 부승민이 듣자마자 알아차렸나 했다.온하랑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다가 추서윤이 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 반지는 아마 그날 부승민의 차에서 발견했던 그 반지일 것이다.파티장에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추서윤이 굳이 격식을 차리지 않았기에 파티의 분위기는 편하고 긴장되지 않았고 덕분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도 좁혀졌다.그녀가 말을 끝마치자 마침 부승민의 연주도 거의 끝나갔다.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추서윤의 앞으로 걸어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파티장 중앙으로 에스코트했다.부승민이 추서윤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추서윤이 부승민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두 사람은 클래식한 사교댄스로 파티의 오프닝을 장식했다.연회장에 음악이 울려 퍼졌고 둘은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이며 호흡을 맞춰갔다.온하랑은 바라보는 입장에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춤사위는 더없이 잘 어울렸고 마치 하늘이 빚어준 한 쌍 같았다.무용을 배웠던 추서윤은 마치 나비를 연상케 하는 가벼운 몸짓으로 음악에 따라 부승민에게 몸을 맡기고 움직였다.저렇게 자연스러운 걸 보니 아마 여러 번 호흡을 맞춰본 것 같았다. 예전에 이런 걸 전혀 해본 적이 없던 온하랑은 일전에 부승민과 춤을 출 때 그의 신발을 밟기도 했었다.그녀는 왜 추서윤이 그녀의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고 우월감에 가득 차 있을 수 있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왜냐면 그녀는 항상 부승민의 따뜻함을 경험한 첫 사람이었으니까.부승민은 그녀를 위해 연주하고, 그녀와 춤을 추고, 독일어를 가르쳐주고, 독일어 이야기를 읽어주고, 그녀를 위해 케익을 사주고, 밥을 해주었다.온하랑은 항상 추서윤보다 한 발 뒤처져있
”승민아, 손에 너무 힘 주지 마.”추서윤이 말했지만 부승민은 대답하지 않으며 구석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사람들은 두 사람이 춤을 추며 대화하는 걸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춤을 추면서 서로 약간의 대화를 하는 건 두 사람의 관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춤을 췄던 그날을 떠올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그가 부드럽게 매만졌고,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며 둘 사이를 확 끌어당겼다.추서윤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그날 밤은 두 사람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추서윤의 존재는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웠다.첫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서로 짝을 맞춰 연회장 가운데로 왔다.부승민이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추서윤의 손을 놓으려 하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승민아, 더 안 출 거야?”“너한테 약속한 건 이미 다 지켰어.”추서윤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고는 부승민의 소매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부승민은 그런 그녀를 한번 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여기 사람도 많은데 이쯤에서 적당히 해, 창피당하지 말고.”그 말을 들은 추서윤은 하는 수 없이 부승민의 소매를 놓아주었다.“서윤아,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 너도 알지? 앞으로 계속 이러면 너한테 남아있던 정까지 다 떨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알아서 정도껏 했으면 좋겠어.”“승민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난 그냥 그날 네가 오지 않을까 봐 너무 무서워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그날, 부승민은 추서윤을 위해 반지를 준비했었다.그녀가 노준형을 시켜 부승민을 부르지 않았어도 그는 그녀를 찾아갔을 것이다.하지만 추서윤이 벌인 자작극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예전에 들었던 변명을 또 한 번 듣고 있으려니 부승민의 인내심이 점점 사라져갔다.부승민이 추서윤의 말을 끊었다.“그만 말해도 돼.”추서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부승민은 그런 그녀를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려
온하랑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서있었다.이주혁이 그녀에게 물었다.“케익 먹을래? 내가 가져다줄까?”“아니야, 됐어. 좀 이따 직접 가서 가지지 뭐. 그리고 추서윤 씨한테 인사도 해야 하고.”이주혁은 온하랑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게 좋겠다.”하지만 온하랑은 사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추서윤의 생일 파티가 순조롭게 끝나가려는 와중에 그녀가 마지막으로 추서윤의 앞에 나타나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면 추서윤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기대되었다.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케익 주위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추서윤이 아직 케익을 못 받은 사람이 있냐고 묻자 온하랑이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저요.”“잠시만요...”온하랑을 보자마자 오늘 내내 추서윤의 얼굴에 걸려있던 웃음이 사라지며 표정이 굳었다.그걸 보는 온하랑은 대조적으로 더 환하게 웃었다.“추서윤 씨, 생일 축하해요.”말은 마친 온하랑은 추서윤의 손가락을 보았다. 역시 그날 부승민의 차에서 보았던 그 반지가 맞았다.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더없이 다정한 장면이었지만, 추서윤은 온하랑이 그녀를 일부러 약 올리기 위해 왔다는 걸 알아챘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대할 수밖에 없었다.“고마워.”“별말씀을요.”부승민은 온하랑을 보더니 딸기가 박혀 있는 쪽을 잘라서 그녀에게 주었다.“고마워, 오빠. 내가 딸기 좋아하는 걸 다 기억해 주고.”부승민이 입술을 깨물었다.온하랑은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였다.그는 온하랑이 돌아오면 자신을 차갑게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싸움이 일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밖으로 온하랑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온하랑이 케익을 들고 자리를 뜨며 말했다.“승민 오빠, 오늘 집에 일찍 들어와.”“알겠어.”자칫하면 오해를 살 만한 말이었지만, 사람들은 온하랑이 말하는 집이 그들의 본가인 부씨 저택이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