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머리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도둑한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랫배에서 약간의 고통이 밀려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었다.‘아이!’아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배를 그러안고 있었다. 고통이 사라진 후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제 자리에 선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도움을 청해야 할까?하지만 도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랬다.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가 그제야 핸드폰과 돈이 다 가방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 집에 돌아가기는 그른 것 같다.자리에 서 있던 온하랑은 그제야 경찰서를 떠올렸다.그녀는 행인에게 질문했다.“아저씨, 혹시 가장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아이고, 그건 엄청 먼데. 이 길을 따라서 신호등을 세 개 지난 후에... 아이고, 하여튼 그냥 일단 앞으로 가. 그리고 다시 물어봐.”“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온하랑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온하랑은 사람들이 알려준 대로 대략 반 시간을 걸어 드디어 경찰서에 도착했다.그녀는 경찰서에서 신고를 접수하고 경찰한테서 택시비를 빌린 뒤 그의 전화번호를 남겼다.집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도우미는 온하랑 혼자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사모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온하랑은 고개를 숙여 자기 옷을 쳐다보았다. 바닥에 넘어져서 새까맣게 되었다. 팔꿈치와 무릎에는 상처와 멍도 있었다.“실수로 넘어졌어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할 거예요.”온하랑은 대충 얘기했다.그녀는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후 누워서 잠에 들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눈을 뜨고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옆의 이불은 깔끔한 게, 다녀온 사람이 없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다.아침을 먹은 후, 그녀는 먼저 집의 컴퓨터로 청가를 맡은 후 경찰서, 은행 등 곳을 돌면서 신분증을 다시 만들고 은행 카드를 새로 발급받고 핸드폰도 새로 개통했다
”화상을 입었다던데 얼마나 크게 다친 거죠?”“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화상 부위가 피부의 23퍼센트 정도라고 해요. 구출될 당시 어떤 부위는 살과 피가 뒤섞인 채 진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서윤이가 기절해서도 아파서 끙끙대는 걸 보니 제 맘이 너무 아프더라고요.”안수빈의 설명을 듣던 부승민은 추서윤이 당시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하며 그녀를 걱정했다.추서윤의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는 부승민의 양미간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리고 의사 선생님 말로는 무엇보다 서윤이의 심리상태가 문제라고 하셨어요. 이번 일로 너무 충격을 받아서 병이 더 악화될 수도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서윤이가 귀국하고부터 왠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데 누군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예요.”“제일 좋은 의사를 알아봐서 서윤이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대표님, 그런데 왜 핸드폰을 끄고 계셨어요?”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자 안수빈이 웃으며 말했다.“아니, 별건 아니고요. 서윤이의 핸드폰을 보니 대표님께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전화 건 시간을 보니까 안에 갇혔을 때였던 것 같던데, 서윤이도 너무 놀라서 혹시나 대표님이 구해주러 와주진 않을까 싶어서 전화한 거겠죠. 그때 만약 대표님이 전화를 받고 촬영팀에게 상황을 알렸으면 서윤이도 빨리 구출될 수 있었을 테고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겠죠.”부승민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그때 일이 좀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서윤이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저도 생각지 못했습니다.”들은 소식에 의하면 추서윤에게 일이 생겼을 때 부승민은 온하랑과 함께 외식하고 있었다. 평소 부승민이 추서윤의 전화를 안 받았던 적은 없었으니, 전화를 끊고 핸드폰 전원을 꺼놓은 사람은 온하랑일것이다.그런데 지금 부승민이 이 일의 책임을 자기한테 돌리며 온하랑을 비호하고 있으니, 추서윤이 평소에 걱정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안타깝네요. 전화 연결만 제대로 됐어도 서윤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아
”네, 그러세요.”안수빈은 자신이 설득에 성공했음을 눈치챘다.부승민이 밖으로 나가자 찬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쳤다.그는 계단 쪽으로 걸어가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는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전화했다.오늘 저녁, 그는 여기 남아있어야 했다.그는 추서윤이 다급하게 걸어온 전화를 온하랑이 일방적으로 끊었다고 해서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왜냐면 온하랑이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저 오늘 같은 날 그가 추서윤과 함께 보내는 게 싫었을 뿐이었다.그렇다고 추서윤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그녀가 급한 와중에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한 것은 그만큼 그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잘못이 있다면 온전히 부승민의 잘못이었다.그는 이번 일에 책임이 있었다.온하랑이 전화를 받지 않자 부승민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고, 두 번째로 전화했을때는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알림음이 들려왔다.부승민은 온하랑이 화가 나서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으로 짐작했다.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서윤이가 많이 다쳤어. 아까 나한테 전화한 건 화재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전화한 거였대. 나는 이번 일에 책임이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 남아서 서윤이를 보살펴야 할 것 같아. 내일 돌아가서 자세히 얘기하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문자를 보낸 부승민은 잠시 밖에서 바람을 쐬다가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다음 날 아침.부승민이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직 온하랑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복도로 나가 온하랑에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여전히 전화기가 꺼져있었다.부승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아주머니, 하랑이 좀 바꿔주세요. 할 말이 있어요.”“네.”아주머니는 대번에 대표님이 사모님을 화나게 하셔서 사모님이 전화를 피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시간이 좀 흐른 후, 전화기 한편에서 미안한 기색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나온 부승민은 목적 없이 걸었다.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 그는 촬영팀의 사람들이 돌아갔을 거라고 짐작하고 다시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병실에 거의 도착할 때쯤 복도의 한 모퉁이에서 제작사의 사람과 이민혁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제작사의 사람이 말했다.“주혁씨도 그때 현장에 있으셨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지 않았어요?”이주혁이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그때 다들 놀라서 서로 챙길 정신은 없었어요. 근데 다행히 불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왜냐면 금방 구출되었을 때 제 기억엔 서윤씨는 그냥 왼쪽 바지 끝자락만 탄 정도였거든요.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다른 곳은 전혀 타지 않았어요.”“민혁 씨가 잘 못 본 게 아닐거예요. 저도 모승준 씨한테 들었는데 왼쪽 옷자락만 탔다고 하더라고요. 뭐 심하게 다치면 얼마나 심하게 다쳤다고. 아무튼 요즘 매니저들은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잡고 부풀리고 그런다니까요. 이번 일이 밝혀지면 추서윤 팬들이 또 촬영팀을 얼마나 욕하고 갈구겠어요. 추서윤씨 본인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면서 좋아하겠죠. 그러게 그때 내가 조심 좀 하라고 했는데...”제작사 측의 사람은 추서윤과 안수빈이 화상자국을 심하게 과장해서 이번 거래에서 우위를 점할 생각이라고 짐작했다.예를 들면 분량이나 스토리를 더 달라고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추서윤의 팬들이 그녀가 드라마를 찍는 도중에 사고를 당했기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인터넷에서 떠들고 있었다.제작사에서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수운성은 원작이 무협소설인 드라마로, 이주혁이 연기하고 있는 남주 임찬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주혁의 분량이 추서윤보다 많은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 갑자기 추서윤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가 난데없이 들어가면 작품성에 영향을 미칠게 뻔했다.“일단 이건 신경 쓰지 맙시다. 뭐가 됐든 촬영팀의 실수로 추서윤씨가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니까요. 진 감독님도 최대한 맞춰주시겠다고 하고
노준형이 다급하게 말했다.“승민아, 승민아. 그런 말 하지 마, 난 당연히 네 친구지.”“그럼 솔직히 말해.”“말하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볼 거 있어.”“물어봐.”“어제 너 간 후에 온하랑씨가 너랑 자기는 혼인신고까지 한 진짜 부부라고 그러던데, 그거 사실이야?”“응.”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인정하자 노준형은 말문이 막혔다.“야, 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언제 결혼했는데? 왜 난 몰랐어?”“삼 년 전.”“삼... 삼 년 전?”노준형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둘이 3년 차 부부라고?이게... 이게 말이 되나?“그럼, 승민이 너는 지금... 바람...”“먼저 내 물음에 대답해. 어제 너한테 나 찾아가라고 한 사람 누구야? 서윤이가 많이 다쳤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야?”“너, 절대 내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서윤이가 너한테 가보라고 시켰어. 안 올지도 모르니까 좀 과장하라고 하면서.”“서윤이가?”“그래.”“어제 서윤이가 다친 뒤에 만났었어?”“아니, 어제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나한테 전화 왔었어. 야, 이번 일은 내 탓 하면 안돼. 서윤이가 너랑 온하랑씨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자기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고 울면서 부탁하는데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하냐.”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는 알아?”당연히 서윤이 생일이지.하지만 노준형은 부승민이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님을 알았다.그는 어제 두 사람을 찾으러 글로리아에 갔을 때 근사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던 걸 기억해냈다.설마...“너희 결혼기념일?”노준형이 자신없게 대답했다.“맞아.”“그... 그거참 운명의 장난처럼 어쩜 다 하루에...”노준형이 어색하게 웃었다.그는 추서윤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추서윤은 두 사람이 결혼한것도 알고 어제가 결혼기념일 인걸 알면서도 부승민을 찾으러 가라고 그에게 시킨 것이었다.다행히 어제 부승민이 온하랑 대신 추서윤의 편을 들어 주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노준형과 부승민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추서윤은 기절한 적이 없다는 뜻이네요?”“네. 추서윤 씨는 어제 병원에 실려 올 때부터 멀쩡하셨어요.”“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부승민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무실을 나갔다.그가 어제 병원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9시에서 10시 사이였고 추서윤이 깨어났다고 한 시간이 오늘 아침이었으니, 밤새 기절한 척 잠들어 있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병실밖의 복도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만일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다면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추서윤과 그녀의 매니저가 자작극을 벌여 그를 속이다니.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어느 정도 답을 도출해 냈지만 그래도 추서윤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부승민이 병실로 들어가자 추서윤이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승민아, 왔어? 그렇게 오래 나가 있을 필요 없었는데, 촬영팀 사람들은 진작에 갔어.”부승민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나가서 좀 걸었어. 어때? 지금도 많이 아파?”“아파, 많이 아파.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줘. 네가 있으면 안 아플거 같아.”만약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이 말에 깜빡 속아 기꺼이 그녀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약간 어색한 부분이 느껴졌다.‘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네.’부승민이 이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으며 물었다.“어디가 아픈데?”“등이랑, 허리랑, 허벅지랑, 종아리랑, 여기저기 다 아파.”“등이 아프다고? 너 등도 다쳤어? 어젯밤 안수빈 씨 말로는 배를 다쳤다고 하던데.”추서윤이 순간 멈칫하더니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배... 배도 다쳤어. 너무 아파.”“그래?”부승민이 추서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의 눈빛은 모든 거짓말을 감별해 낼 듯 차갑고도 예리했다.“그래.”추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피해버리고 말았다.“아, 내가 잘 못 기억했어. 안수빈 씨는 어제 네가 배가
”국내가 꼭 너에게 맞다는 보장은 없어. 너 귀국하자마자 여기저기 아팠잖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해외가 너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아니... 내가 다시 돌아온 건 너 때문이야. 승민아, 제발 이러지 마.”“일단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너 아프지 않은 것도 확인했으니까 나는 이만 가볼게.”하지만 추서윤은 여전히 그를 안은 채 손을 놓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서야 몸을 움찔 떨더니 마지못해 두 팔을 풀었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더니 그 길로 차를 몰고 회사에 갔다.온하랑의 사무실을 찾아갔지만 사무실에는 사람이 없었고 컴퓨터도 꺼져 있었다.그는 지나가던 MQ의 직원에게 물었다.“온 전무님은요?”“전무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 휴가 내신 것 같던데요.”“알겠습니다.”그는 그 길로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대표님, 오셨어요.”도우미 아주머니가 부승민을 보고 인사했다.그는 급하게 위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안사람은요?”“사모님께서는 출장 가셨는데요.”부승민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출장이요?”“네, 비서랑 같이 출장 가신다고 하던데요.”부승민은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누우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그는 온하랑이 일부러 며칠 뒤에 있는 출장 일정을 오늘로 당긴 것임을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피한 것이다.부승민이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출장 갔어? 언제 오는데?]하지만 그는 문자를 보내면서도 온하랑에게서 대답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그녀는 화가 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역시나 시간이 지나도 온하랑에게서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부승민은 여러 번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번번이 수신거부를 당했다. 그러다가 4번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연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온하랑의 출장 스케줄을 알아보라고 하고 비행기표와 호텔도 예약해 놓을 것을 지시했다.이 일은 뒤로 끌면 끌수록 그에게 불리했다. 그러니
그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방금 부승민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머무는 호텔과 온하랑의 호텔 방을 물었었다.비서는 예전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예전에 그가 급한 일 때문에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몇 번 걸어도 받지 않다가 마지막에 겨우 받았는데, 그때 뜻밖에도 전화를 대신 받은 사람이 부승민이었다.사실 그때부터 그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사이를 조금 의심했었다.그런데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과 방금 일어난 일까지 합쳐지면서 그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비서는 핸드폰을 잠시 보다가 욕실로 들어가 샤워할 준비를 했다.그때 그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울렸는데 이번에 전화를 건 사람도 역시나 부승민이었다.그가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나 지금 호텔에 도착했어. 나와 봐.”“네? 아, 네네. 지금 도착하셨다고요. 잠시만요, 제가 지금 내려갈게요...”비서가 방 카드를 들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하지만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온하랑의 방문 앞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방문 앞까지 왔으면서 왜 나더러 나오라고 한 거지?“대표님.”비서가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부승민이 온하랑의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문 두드리고 네가 왔다고 해, 내 얘기는 하지 말고.”비서는 그제야 깨달았다.알고 보니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서프라이즈를 주기 위해 그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그가 온하랑의 방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보고 있던 온하랑은 노크 소리에 몸을 일으키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전무님, 접니다.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잠시만요.”온하랑은 드라마를 잠시 멈추고는 방문을 열었다.“뭘 물어...”문을 연 온하랑은 문밖에 서있던 부승민을 발견하고는 삽시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고 할때, 부승민이 한발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 구두코를 문 틈 사이로 집어넣고 팔로 닫히려는 문을 힘껏 당겼다.“온하랑, 나랑 얘기 좀 해.”온하랑이 기를 쓰고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