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이나 지났는데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그래도 내 허락이 없으면 안 한다고 했잖아. 난 싫어.”“그럼 나 좀 도와줘.”온하랑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흔들었다.부승민은 고개를 저었다.“돌아서서 다리 모아.”끝날 때, 온하랑의 허벅지는 붉어져 있었다.온하랑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저 부승민을 째려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부승민은 기분이 꽤 좋은 듯, 그녀를 깨끗이 씻어준 후 침대로 안아서 갔다.서비스는 꽤 좋은 편이었다....이튿날 새벽.부승민은 온하랑을 깨웠다.“돌아가야 해. 차에서 자고 있어.”직원들은 아직 온천 리조트에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일찍 돌아오긴 했지만 출근할 필요는 없었기에 집에서 쿨쿨 잤다.핸드폰을 보다가 부승민과 찍은 사진을 떠올리고 바로 인스타에 업로드 했다.온하랑은 간단한 글을 덧붙였다.[남자 친구]그리고 그녀와 부승민이 찍은 사진을 올리고 모든 사람한테 공개했다.이윽고 부승민이 그녀의 게시물에 하트를 눌렀다.사람들은 그녀의 남자 친구가 왜 얼굴을 비추지 않는지 의아해했지만 축하한다고 댓글을 달았다.한 남자 직원이 시원하게 댓글을 달았다.[확실히 18센치는 될 것 같네.]김시연은 아예 카카오톡을 보내 물었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 얼른 얘기해 봐요!][보는 그대로예요. 아직은 만나보고 있는 사이라 자세히 얘기하기는 어려워요.][하랑 씨!!! 정말 어디서 이런 남자 친구를 만난 거예요? 이 몸매... 저 가슴 근육... 정말 너무 멋지잖아요!][침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데리고 나오면 안 돼요?][아직은 안돼요. 이다음에 다시 봐요.]이주혁은 그 글을 보고 멍하니 있었다.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온하랑이 항상 솔로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다른 사람이 선수를 쳐버렸다.뚱냥이:[언제 사귄 거야? 남자 친구 몸매가 죽이는데?]온하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추서윤한테만 공개해서 추서윤을 약 올리고 말걸.
이튿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온하랑은 이주혁과 수운성 촬영장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오전 열 시. 온하랑은 수운성 촬영장에 도착해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이주혁이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온하랑은 처음 촬영 현장에 와 본 것이었다.그녀는 이주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서 물었다.“내가 주의해야 할 게 있어?”“없어. 그냥 와서 보면 되는 거야. 점심에 시간이 비니까 주변에서 같이 밥이나 먹자.”“그래.”이주혁은 온하랑을 데리고 진 감독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네 촬영은 언제 시작인데?”“곧이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이주혁의 말에 의하면, 지금 찍고 있는 것은 CG 작업이 많이 필요한 촬영이라 모두 세트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온하랑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이주혁은 온하랑을 데리고 촬영장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모든 배우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그리고 이주혁은 바로 준비를 하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주혁의 촬영이 시작되었다.그는 조선 시대의 옷을 입고 수수한 화장을 했지만 그래도 우아한 기품은 감출 수 없었다. 빠르게 몰입한 그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연기를 시작했다.진 감독도 그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이주혁의 연기를 지켜보던 온하랑은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마침 나오고 있었다.“온하랑? 네가 왜 여기에 있어?”추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눈에는 증오가 약간 서려 있었다.“그냥 보러 온 거예요.”“누구를?“당연히 서윤 씨를 보러 왔죠. 나 때문에 얼마나 화나 있을지 궁금해서요.”온하랑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추서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그럴 줄 알았어. 어제 올린 인스타는 나 보라고 올린 거지? 그럼 내가 올린 인스타도 봤겠네. 승민이가 한밤중에 너 몰래 날 찾아오는 걸 보면서, 넌 기분이 어땠는데?”온하랑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얘기했다.“그만 해요. 승민 씨가 왜 나를 속이고 서윤 씨를 만나러 갔겠어요? 서윤 씨가 그렇게
“알겠어! 그럼 촬영장에서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후, 추서윤은 의기양양하게 얘기했다.“온하랑, 이제 알겠어? 내가 원하면 승민이는 바로 달려와 줘. 승민이는 널 좋아하지 않아. 내가 똑똑히 얘기하는데, 9월 20일, 내 전화 한 통이면 승민이는 바로 나한테 달려올 거야!”온하랑은 몸이 약간 떨렸다.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찬바람이 들어왔다.그녀의 결혼기념일은 추서윤의 생일이다.그건 영원한 상처였다.만약 그날마저도 부승민이 추서윤에게 달려간다면 그에게 철저히 실망할 것이다.“어디 한 번 지켜봐!”추서윤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쳐들고 떠나갔다.온하랑은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다시 세트장으로 돌아가 이주혁의 연기를 지켜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진 감독에게 얘기했다.“부 대표님이 추서윤 씨를 보러 오셨습니다.”진 감독은 확성기를 들고 얘기했다.“다들 먼저 쉬어요. 이따가 다시 찍어요.”말을 마친 후, 진 감독이 부승민을 찾아갔다.이주혁은 한복을 입은 채 온하랑 앞에 와서 물었다.“내 연기 어때?”“멋있어. 빠져들겠더라.”진 감독이 이주혁의 연기에 만족하는 것이 확연히 알렸다. 그의 씬은 순조롭게 촬영이 끝났고 NG도 많지 않았다.이때 한 직원이 양손 가득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음료가 가득했다. 마침 요즘 가장 잘나간다는 신상 음료였다.“자, 자. 이건 부 대표님이 사온 밀크티예요. 다들 하나씩 가져요. 모자라면 밖에 더 있어요.”온하랑은 차갑게 웃었다.‘쓸데없는 짓을 왜 해.’이주혁은 밀크티 두 잔을 들고 와 온하랑에게 주면서 물었다.“인사하러 안 가봐도 돼?”“너 혼자 가.”온하랑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주혁은 꼭 가야 했다.이주혁은 수운성의 남자 주인공이고 부승민은 투자자니 인사를 꼭 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같이 세트장에서 나왔다.진 감독은 마침 부승민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추서윤도 부승민 곁에 서서 그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온하랑이 세트장에서 나오는 것을 본 그녀는
이주혁은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얘기했다.“어릴 때 옆집에 살았었어요. 하랑이가 어찌나 크게 울던지.”“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참 인연이 깊네요. 그럼 결혼할 때 나한테 청첩장 주는 거 잊지 말아요.”“진 감독님, 그만 하세요. 저랑 하랑이는 그냥 친구예요.”이주혁이 얘기했다. 그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지금의 온하랑에게는 남자 친구가 있었으니까.“알아요, 알아. 요즘 사람들은 다 친구라고 그러더라고요.”부감독이 옆에서 얘기했다.부승민은 시선을 들어 담담하게 이주혁과 온하랑을 노려보더니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부승민은 분명 온하랑에게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할 정도로 이주혁이 좋은 건가?“승민아, 승민아?”“응? 뭐라고?”부승민이 추서윤을 돌아보았다.추서윤은 부승민 귓가에 대고 얘기했다.“하랑이랑 이주혁 씨,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만약 너희가 이혼하면 이주혁 씨랑 결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부승민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안 돼. 두 사람은 안 어울려.”“두 사람이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난 두 사람의 직업과 성격에 대해서 잘 알아.”부승민과 추서윤이 가까이에서 귓속말을 하는 것을 본 온하랑은 씁쓸해서 시선을 돌렸다.종업원이 와서 음식을 가져다주었고 어느새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다들 머뭇거리지 않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이주혁은 온하랑에게 두리안 파이를 챙겨주며 얘기했다.“이것부터 먹어봐.”“고마워.”온하랑은 두리안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파이 안에는 독특한 향기의 두리안 잼이 있었다.“음, 맛있다.”두리안 파이를 하나 다 먹은 온하랑은 또 다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주혁은 온하랑을 신경 써 주면서 음식을 더 짚어주었다.부승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지경이었다.“승민아, 나 저것 좀 짚어주면 안 돼? 팔이 안 닿아.”추서윤은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부승민이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게 벌써 두
“난 네가 여기 있을 줄 알고 있었어.”온하랑이 이주혁을 보러 왔다는 건 도우미가 얘기해 주었다. 온하랑을 데려가려던 찰나, 추서윤이 마침 전화한 것이었다.부승민은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한 후 다시 입을 맞췄다.다른 한 손은 온하랑의 몸을 따라 기분 좋게 매만졌다.온하랑은 온몸에 힘이 풀려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댔다.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닿았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입술을 떼고 그녀를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얘기했다.“도와줄게.”“됐어... 싫어...”온하랑은 얼굴이 붉어졌다.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대낮에 이런 곳에서...부승민은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고 미소 짓더니 얘기했다.“소리 내지 마.”부승민은 바로 그녀를 문에 밀어붙이고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목에 토해냈다. 그리고 바로 손가락을 움직였다.“하지만 사람들이 기다리는데...”“기다리라고 하지, 뭐.”온하랑은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물고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임신해서인지, 아니면 요즘 부승민의 기술이 늘어서인지. 온하랑은 자기의 욕구가 점점 커져간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심정이 복잡했다.‘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무슨 생각해?”부승민은 온하랑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감히 자기 품에서 집중하지 못하다니. 설마 또 이주혁을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이주혁이 좋은 건가?계속 기다리던 사람이 정말 이주혁인 건가?!그 생각에 기분이 안 좋아진 그는 표정이 굳은 채 더 힘을 주어 손가락을 움직였다.“그, 그만...!”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하랑은 그대로 힘이 풀려버렸다.“으읏...”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됐어. 나가봐.”부승민은 드디어 그녀를 놓아주었다.온하랑은 문에 기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 문에 기대어 서 있다가 걸어 나왔다.부승민은 아주 열심히 손을 씻고 있었다. 그러면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그녀는 빠르게 화장
그 말을 들은 부승민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머릿속에는 온하랑이 눈시울을 붉히고 그에게 따지던 장면이 떠올랐다.추서윤을 얼마나 사랑하면 두 사람의 기념일에도 추서윤 생각만 하냐고.그렇게 사랑하면 왜 추서윤과 결혼하지 않고 자기와 결혼했냐고.왜 가만히 있는 자신의 자존심을 계속 짓밟냐고.“그날에는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미리 쇠던지, 후에 쇠던지. 날짜를 골라.”부승민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얘기했다.추서윤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그날에 일이 있다니.무슨 일이기에 말하지 않는 것일까.추서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고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애교를 부리며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일인데? 미루면 안 돼?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해준 지는 정말 오래되었단 말이야.”“미안.”“승민아, 나 귀국하고 처음 보내는 생일인데 너랑 같이...”“내 말 들어.”부승민이 차갑게 얘기했다.추서윤은 더는 웃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슬픈 예감은 종래로 틀린 적이 없었다.부승민의 마음속에서 추서윤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그는 항상 온하랑을 선택했다.설마 정말 온하랑을 사랑하게 된 걸까?그건... 절대로 안 된다!...이주혁, 진 감독과 부감독은 같이 차를 타고 떠났다.차가 떠나는 것을 본 부승민은 몸을 돌려 온하랑을 보면서 얘기했다.“가자. 집에 돌아가자.”차에 앉은 부승민은 온하랑 쪽으로 붙어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거의 딱 달라붙을 정도였다. 비싼 향수의 향기가 온하랑의 폐에 들어왔다. 위가 좋지 않은 온하랑은 하마터면 토해낼 뻔했다.“저리 가.”얼굴이 창백해진 온하랑은 부승민을 밀어내며 얘기했다.“왜 그래?”부승민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좋지 않은 온하랑의 낯색을 보고 표정이 굳어버렸다.“괜찮아. 그냥 많이 먹었을 뿐이야. 가만히 내버려 둬.”온하랑을 그렇게 얘기하면서 부승민과 멀어졌다.표정이 어두워진 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케이스는 정방형이었는데 한 뼘 정도의 길이었다. 겉면에는 붉은 칠이 되어있었고 정교하게 조각까지 되어있었다.아마도 팔찌인 것 같았다.“그럼 연다?”온하랑은 천천히 케이스를 열었다.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는 투명한 옥팔찌가 온하랑 앞에 나타났다.확인한 순간, 온하랑은 굳어버렸다.다름이 아니라 이 팔찌가 저번 경매회에서 본 ‘바다의 심장’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하지만 부승민은 추서윤에게서 그 물건을 가져와 온하랑에게 준 것을 아닐 것이다.온하랑이 멍하니 서 있자 부승민이 해명했다.“저번에 네가 ‘바다의 심장’이 더 있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찾아봤더니 결국 두 번째를 사게 되었어.”“고마워, 신경 써줘서.”온하랑은 케이스를 덮어서 옆에 놓았다.“껴보지 그래.”“집에 가서.”온하랑이 대답했다.이 팔찌를 사기 위해 부승민이 아주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하랑은 크게 기쁘지 않았다.처음부터 노력의 방향이 틀렸다.온하랑은 ‘바다의 심장’과 같은 팔찌를 갖고 싶지 않았다.‘바다의 심장’은 원래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갖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운명이 아닐까. 무슨 일이든지 추서윤에게 선두를 빼앗기는, 그런 운명 말이다.추서윤이 먼저 가져야, 온하랑도 소유할 수 있다.온하랑은 또 차에 있는 반지를 떠올렸다.온하랑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면 추서윤에게 줄 생일 선물이라는 건가?그러니까, 그녀와 식사를 마친 후, 추서윤을 찾아갈 생각을 했다는 건가?‘참 바쁜 몸이네.’온하랑은 슬쩍 물어봤다.“아까 차에서 반지를 봤는데 엄청 예쁘고 정교해서 마음에 들어. 혹시 나한테 줄 수 있어?”두 사람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결혼반지가 없었다.온하랑이 한 번 커플 반지를 산 적이 있었다. 그리고 홀로 반지를 끼고 회사에 갔다. 하지만 부승민은 끼지 않았다. 회사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반지를 끼면 발각되기 쉬우니까.그때의 온하랑은 순진하게 얘기했다.‘혼자 끼면 누구도 발견하지
온하랑은 호흡이 그대로 멎었다.그날 추서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부승민은 추서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간다고.온하랑은 수신 거부한 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하지만 2초 후,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온하랑은 다시 수신 거부했다.추서윤은 아마 끝까지 전화를 걸어올 것이다.온하랑은 두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을 지워버린 후, 부승민의 핸드폰을 끈 후 원래 자리에 놓았다.돌아온 부승민은 온하랑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얼마 지나 부승민은 온하랑이 더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물었다.“다 먹었어? 이 집의 디저트 좀 먹어볼래?”“그래.”온하랑은 직원을 불러 메뉴판을 보다가 디저트를 두 개 시켰다.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떠났다.그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온하랑과 부승민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직원이 아니라 노준형이었다.“준형이, 네가 여긴 왜 왔어? 같이 밥 먹으려고?”부승민이 물었다.“밥? 넌 밥이 넘어가?”노준형이 다가와 화를 냈다.“속도 편하지. 네가 밥을 먹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무슨 일인데.”부승민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서윤이가 촬영하고 있을 때, 스태프의 실수로 불이 나서 큰 화상을 입었어. 다들 바빠서 죽겠는데, 넌 여유롭게 밥이나 먹고 있어? 전화는 왜 또 안 받아!”노준형의 말투는 아주 조급했다.‘화상을 입었다고?’온하랑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버렸다.‘그럼 아까의 전화가...’온하랑은 불안한 마음에 노준형을 보면서 얘기했다.“준형 오빠, 일단 조급해하지 말아요. 서윤 씨가 곧장 병원으로 갔겠죠? 그러니 일단 수술 결과를 기다려 봐요, 승민 오빠 탓만 하지 말고...”노준형은 온하랑을 흘깃 보더니 얘기했다.“네가 낄 일이 아니야. 더러운 불륜녀 같으니라고. 전에는 어르신 얼굴을 봐서 잘 대해준 거지. 그것도 모르고 감히 선 넘지 마!”온하랑은 파리하게 질려서
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
최씨 가문의 저녁 식탁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했지만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최동철은 식탁 한쪽에 앉아 냉랭한 표정으로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몇 번 음식을 집어 들었을 뿐 내내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설윤을 스쳤다. 눈빛에는 차가움과 은근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고 설윤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다시 최국환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여보, 집안 아주머니 손맛이 정말 좋아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바로 준비하게 할 테니까.” 최국환은 그렇게 말하며 직접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덜어 주었다. “고마워요. 여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연지는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설윤이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며 사랑스러운 아내인 척하는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 임연지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손에 쥔 젓가락을 부러질 것처럼 꽉 쥐었다. 혹여나 자신의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날까 봐 애써 고개를 숙이고 밥만 떠넣었지만 도무지 목구멍을 넘어가질 않았다. 최동림 역시 그녀 옆에서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도 가끔 설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그의 곁에 앉은 임가희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없이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먼저 나서서 공용 젓가락으로 설윤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한번 먹어봐. 아주머니가 제일 잘하는 요리야.” “고마워요. 언니.” 설윤은 미소를 띠며 음식을 한입 가져갔다. “정말 맛있네요.” 최국환은 식탁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먹어. 이제 둘이서 먹는 거니까 영양도 충분히 챙겨야지.” 설윤은 살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 여보도 많이 드세요.” ‘우웩!’ 임연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저 귀에 거슬리는 ‘여보’
‘뭐야. 저 여자 또 시작이네.’ 설윤은 체리를 입에 넣고 씨를 가볍게 뱉은 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최국환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고마워요. 최 회장님.” “아직도 최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최국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설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앉아 있는 임가희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조그맣게 속삭였다. “여보, 더 먹고 싶어요.” ‘우웩!’ 눈앞에서 대놓고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자 임연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그리고 고모부... 저 역겨운 느끼한 미소는 또 뭐야?’ 오늘 오후, 최국환은 직접 설윤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러니까 임연지의 고모인 임가희는 설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설윤도 눈치가 있었는지 임가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 후, 임가희는 집안의 가정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설윤을 가족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라고 당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연지는 억울함과 불쾌함을 꾹 참고 어쩔 수 없이 설윤에게 좋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진짜 토할 것 같아.’ 더 있다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은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 설윤도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위해 최국환이 따로 가정부까지 붙여주었고 집안일은 손끝 하나 대지 않도록 했다. 설윤은 그저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한동안 방에서 쉬던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그러다 계단을 내려오던 도중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은 최국환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최동철. 설윤의 입꼬리가 은근히 올라갔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우아한 걸음으로 거실로 내려갔다. 거실 한
최동철은 김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문서를 거칠게 덮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김지환을 향했다.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박혀들었다. “설윤 씨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네가 해야 할 일만 신경 써. 나머지는 간섭하지 말고.”그 차가운 분위기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김지환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솔했습니다.”“됐어. 나가.”“예.”김지환은 속으로 싸늘한 긴장감을 느끼며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순간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제안만 했을 뿐 직접 나서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윤 씨가 임신한 지 3개월도 채 안 됐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처리할 생각이지?’ ‘그냥 아이가 태어나는 걸 지켜볼 셈인가?’ 어젯밤, 최동철이 설윤의 주소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김지환은 최동철이 직접 그녀를 만나 겁을 주고 이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후에도 최동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해 봤자 의미 없었다. 김지환은 잠시 머릿속에서 이 일을 지워버리기로 했다. 요즘 회사 일이 많아 최동철은 매일 야근했고 김지환 역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님이 정시 퇴근을 하시네?’김지환은 놀라면서도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더 이상 야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졌다. 비서실 내부에도 한층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회사 로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가는 최동철을 본 김지환은 재빠르게 다가가 노트북을 받아들었다. 그와 함께 아래로 내려가며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네요. 메이슨 도련님 보러 가시는 건가요? 정말 좋은 아버지세요.”그 말에 최동철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강남시에서 돌아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