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운전기사를 데려오지 않았기에 온하랑은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전벨트를 맸다.부승민은 운전석에 앉은 후 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그는 손을 들어 옷깃을 느슨하게 하며 무심코 물었다."의사한테 내가 네 전남편이라고 말했어?”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부승민이 임신한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온하랑은 경계심을 갖고 부승민을 쳐다보며 다리 옆에 있던 양손을 무심코 아랫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지지 않고 쏘아보며 말했다."왜? 추서윤 때문에 이혼했다는 걸 남들이 알까 봐 걱정돼?”"온하랑, 그런 뜻이 아니잖아.”"그럼 무슨 뜻이야?"온하랑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부승민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널 탓할 생각은 없었어.”온하랑의 현남편으로서, 온하랑이 의사에게 자신을 전남편이라고 소개한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내가 오버했다고 치자."온하랑이 무심한 듯 대답했다."내가 처음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말한 거야. 그때 우리는 원래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전남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지.”“...”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았다.온하랑은 살며시 부승민의 안색을 살피고는 한숨을 돌렸다.그는 아직 그녀의 임신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온하랑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할아버지의 병세가 금방 호전되었기에 당분간 그녀와 부승민은 이혼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배 속의 아이는 조만간 드러날 것이다...하지만 그때가 되면 아이도 꽤 자랐을 테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녀를 비호해줄 테니 부승민이 강제로 낙태를 시킬 수는 없었다.차가 BX그룹의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온하랑과 부승민은 차에서 내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온하랑이 먼저 내렸다.사무실로 가는 길에 몇몇 직원들이 온하랑을 보고 인사를 했다.“전무님.”"전무님, 몸은 괜찮
사무실은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BX 그룹에는 직원 단톡방이 있었는데 평소 내용 공고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단톡방의 주요 관리인은 대표실의 조 비서였다.부승민도 단톡방의 관리인이지만 그는 한 번도 단톡방에 무언가를 올린 적이 없었다.단톡방에는 비록 사람이 많았지만 상사들도 모두 있었기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 조용했고 직원들도 감히 안에서 마음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오늘도 단톡방에 공고가 올라왔기에 직원들은 평소처럼 조 비서가 무언가 올린 줄 알고 단톡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을 확인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단톡방에 공고를 올린 사람은 관리인 배지를 달고 있는 '부승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었다.부대표가 단체 채팅방에 뭘 올렸다고?![BX 그룹 직원 수칙, 제53조: 엄격한 업무 분위기를 지향하고 좋은 업무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업무 시간 중 모여 장난을 치거나, 업무 외의 사적인 일에 대해 논의하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상사의 사생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1차 위반 시 경고 후 한 달 동안 월급 10% 감액, 2차 위반 시 월급 20% 감액, 3차 위반 시 즉시 해고 후 블랙리스트에 등기.]확인을 마친 사람들이 단톡방에 하나둘 답장하기 시작했다.추서윤이 부승민을 찾으러 회사에 왔을 때부터 직원들은 각종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부승민과 추서윤이 함께 있는 장면이 여러 번 찍히며 민윤커플을 덕질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러다가 부승민과 온하랑이 함께 있는 사진도 찍히면서 회사에는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하지만 이런 루머는 아무리 퍼져도 부승민에게까지 전해지지는 않았고, 부승민 역시 이런 작은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평소 단톡방에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가 뜻밖에도 발언했다.직원 수칙 53조를 되풀이하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그 의미까지 간단히 넘기는 사람은 없었다.한 소식통에 따르면 소문의 또 다른 당사자인 온 전무가
"온 전무, 건강 회복한 거 축하해."오미연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온하랑이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온 전무가 며칠 동안 안 오길래 얼굴 들고 다니기 창피해서 안 오는 줄 알았지 뭐야.”온하랑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오 전무는 연말 상여금이 반이나 깎였는데도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날 골탕 먹이고 싶었어? 오 전무 알고 보니까 통이 큰 사람이었네.”오미연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온하랑,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무슨 뜻이야?”오미연이 눈썹을 올리며 은근하게 말했다."그게 정말 인턴의 업무 실수라고 생각해?”온하랑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을 꾸민 것은 오미연이고 인턴은 그저 오미연의 죄를 뒤집어쓴 것에 불과했다.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오미연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한 일인 걸 너도 눈치챘는데 과연 대표님이 몰랐을까? 하지만 그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를 지키고 인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로 했어,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해?”뭘 의미하냐고?온하랑이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이미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부승민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고, 그에게 있어서 추서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의미했다.온하랑과 오미연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를 견제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오미연이 아무리 그녀를 헐뜯어도 홍보팀 전무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결국 그녀의 평판보다 오미연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었다.오미연이 이어 말했다."연말 상여금은 아무리 많이 받아도 상여금일 뿐이고, 내 월급은 건드리지 않았어. 그리고 연말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상여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애들 장난 같은 처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 너뿐이겠지. 온하랑, 이제 대표님 마음속에서의 네 위치를 알겠어? 그는 마치 너를 보호하는 것처럼 단톡방에서 얘기했지만 실제로 너는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평판은 여전히 나빴고, 일은 예전과 다름없
그녀는 그 오래된 베이커리의 초콜릿케이크를 또 먹고 싶었다."기사님,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가서 물건 좀 사고 금방 올게요."온하랑이 운전기사에게 당부하고는 차에서 내려 쏜살같이 DK 플라자로 들어섰다.‘애프터눈’이라는 이름의 이 베이커리는 DK 플라자에 들어선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장사가 매우 잘 되었다.온하랑이 들어섰을 때 가게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그녀는 곧장 왼쪽 진열대 앞으로 가서 베이커리 직원에게 초콜릿케이크 하나와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하고는 줄을 서서 돈을 지불했다.온하랑이 종이봉투를 든 채 막 베이커리 가게를 나섰을 때 그녀는 마침 가게에 들어서는 두 여자와 맞힐 뻔했다."죄송합니다."사과하고는 길을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온하랑?”온하랑이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눈에 두 여자 중 마스크와 모자를 쓴 사람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옆에 있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그녀의 매니저였다.추서윤이 앞으로 나서더니 온하랑의 손에 든 종이봉투를 보며 말했다."케이크 사러 왔어? 너도 이 집 케이크 좋아해? 어쩜, 나도 좋아하는데.”"서윤 씨, 바쁜 와중에 직접 케이크 사러 올 시간도 있나요?”"당연하지.”"그럼 사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온하랑이 돌아서자 추서윤이 또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 네가 산 건 초콜릿케이크지?”온하랑은 온몸이 굳었다.‘애프터눈’의 케이크는 불투명한 포장지에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추서윤은 어떻게 알았을까?"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추서윤은 마스크를 내리고는 웃으며 천천히 온하랑 앞으로 다가갔다."왜냐면 나도 이 집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하니까.”온하랑이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추서윤은 그녀가 예상했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그녀는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납덩이라도 붙인 것처럼 너무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었다.“예전에 나랑 승민이가 연애했을 때, 내
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그녀가 부씨 가문에 오고부터 부승민은 쭉 미적지근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고 둘 사이가 딱히 친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케이크를 사 왔지?"싫어?"그녀의 표정을 본 부승민이 묻자 온하랑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그녀는 반 친구가 이 베이커리의 케이크를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직접 사지는 못하고 그 친구 덕분에 운 좋게도 이 가게의 녹차 케이크를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당시 아버지의 월급은 두 사람을 먹여 살리기 충분했고, 아버지도 온하랑에게 아낌없이 용돈을 주셨지만, 그래도 ‘애프터눈’의 케이크는 그녀에게 있어 거의 사치품 정도였고 평범한 가정의 온하랑에게는 약간 벅찼다."좋으면 됐어."부승민이 싱긋 웃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온하랑은 방금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그러다가 부승민이 거의 위층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계단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 오빠, 고마워.”부승민이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이들의 대화가 단순한 인사로 끝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녀는 눈앞의 케이크가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 준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지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는데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지루할 것 같았던 수학과 물리 숙제마저 사랑스럽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케이크를 옆에 두고 숙제를 빨리 끝내고 나서 케이크를 먹자고 다짐했다.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빠르게 숙제를 마치고는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포장을 뜯었다.그리고는 급하게 먹는 대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하지만 아무리 찍어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그중에서 겨우 한 장을 건져 SNS에 올렸다. 내용은 글귀 없이 담백하게 케이크 이모티콘만 올렸다.그 SNS는 그녀의
이번 달 초, 그가 출장에서 돌아온 날도 온하랑은 소파에서 잠들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그러다가 나중에 이혼 얘기가 나온 뒤로는 더 이상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저녁에 돌아오면 거실은 항상 어두컴컴하고 한기로 가득했다."대표님, 오셨어요."거실에서 나는 인기척 소리를 들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와서 인사했다."네.""술 드셨으니 해장국 끓여드릴까요?”"그래 주실래요.”부승민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잠시 후 아주머니는 해장국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부승민에게 말했다."대표님, 뜨거울 때 드세요.”"네."부승민이 눈을 뜨고 나지막이 대답했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아주머니는 뜨거운 김이 나는 해장국을 보더니 다시 부엌으로 가서 신선한 과일을 몇 종류 꺼내 부승민의 앞에 놓았다."대표님, 해장국 드시기 싫으시면 과일이라도 드세요.”접시에 있는 몇 가지 과일도 숙취 해소에 효과가 좋았다."고마워요.”“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뭐. 이 과일들은 원래 사모님을 위해 준비한 건데, 사모님께서 오늘 입맛이 없으신지 저녁도 많이 드시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셨어요. 과일에는 손도 대지 않았고요.”그 말을 들은 부승민이 잠깐 멈칫했다."저 사람 아직도 위가 안 좋아요?”"그냥 오늘만 좀 안 좋으신 것 같아요. 걱정거리도 있어 보이시고."아주머니가 은근히 주의를 주셨다.그녀는 할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이 아직 이혼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이유가 어찌 되었든 이 결혼은 또다시 기회를 맞이했고, 아주머니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두 사람이 예전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과일을 몇 입 맛보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었다.다음날, 부승민이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식당에 앉아 있었고 아주머니가 아침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내려와 온하랑의 앞에 앉았다.“좋은 아침.”온하랑이 고개를
부승민은 온하랑을 잠시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온하랑, 농담하는 거야? 하나도 안 웃겨. 네가 오 전무랑 업무상 라이벌 사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농담은 해서는 안 되지.”어쩐지 오미연이 그렇게 말하더라니.하지만 오미연이 미리 말하지 않았어도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오미연은 BX 그룹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일했고, 그녀의 인성과 업무 능력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오미연에게는 여러 해 동안 사귀어 온 남자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그를 좋아할 수 있겠는가.온하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은 전혀 믿지 않으면서 왜 또 굳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것처럼 이것저것 묻는 걸까.온하랑은 부승민이 얼마나 가식을 잘 떠는 사람인지 잠깐 잊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기를 관심하는 거라고 착각하다니.점심 휴식 시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점심에 내 사무실로 와. 네 몫도 시켰어.]온하랑은 대화창을 보며 문자를 적어넣었다.[식당에 가서 먹을게.]하지만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송신 버튼 위에서 계속 머뭇거리다가, 결국 몇 초 후 그녀는 대화창을 지운 후 다시 문자를 적었다.[그래.]부승민의 사무실에 도착하니 소파 앞의 탁자 위에는 이미 점심 식사가 가득 놓여 있었다.온하랑은 도시락 옆에서 익숙한 포장을 발견했다.온하랑의 시선이 옆에 닿자 부승민이 말했다."너 먹으라고 주문한 초콜릿케이크야. 너 이거 좋아하지 않았어? 점심 식사 후에 먹어.”온하랑은 그제야 부승민이 케이크 하나로 그녀를 달래려고 하는 걸 눈치챘다.예전에는 이 방법이 통했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애프터눈’의 초콜릿케이크를 보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쳤고 입맛이 싹 사라졌다.그녀는 케이크 포장이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되는 양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맞은편에 앉아 음식을 몇 입 먹는 듯하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다 먹었어.”부승민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겨우 그거 먹고? 좀 더 먹어."배
부승민이 돌아서서 온하랑을 한번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한 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병실로 들어갔다."할아버지.”할아버지는 집에 갈 생각에 들떠서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일찌감치 소파에 앉아있었다."왔구나, 어서 돌아가자.”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자 온하랑이 부승민의 손을 뿌리치고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할아버지, 천천히 걸으세요.”"괜찮아.”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반대편으로 가서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막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걸을 줄 모르는 것도 아니고.”임 원장과 그의 조수들도 함께 저택에 갔다.할아버지가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부민재가 임 원장의 조수들을 한동안 저택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할아버지께서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다.저택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온하랑과 부승민이 소파에 앉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이야기를 나눴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민재과 그의 아내 소청하가 왔고, 그들은 아들 부윤민도 데리고 왔다.부윤민은 지금 네 살이고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기가 씩씩하게 자라고 있어서 다들 귀엽게 봐주었다.그는 작은 가방을 메고 먼저 할아버지, 할머니께 가서 인사했다."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오냐."할아버지가 부윤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증손자를 귀여워하셨다."이리와, 우리 증손주 좀 안아보자. 윤민이 오늘 학교 안 갔어?”"엄마 아빠가 증조할아버지 보러 와야 한다고 했어요. 효도하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요.”"아이고, 착해, 우리 강아지! 윤민아,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겠어?"할아버지가 온하랑과 부승민을 가리켰다.부윤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하랑과 부승민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이랑 숙모.”"우리 윤민이 기억력도 좋네."온하랑이 웃으며 손짓하자 부윤민이 온하랑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온하랑이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