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와 함께 여름의 무더움과 도시의 차가움을 견뎌내 주었지. 노래는 계속되는데 당신의 따뜻한 눈동자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 당신의 따뜻함을 잃는 나는 웃음을 잃었고,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지. 비 오는 날마다 그때의 당신이 생각나. 내가 소중히 간직하는 이 기억을 당신은 이미 다 잊어버렸겠지만. 말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나의 이야기는 너로 전부 가득 차 있지. 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내 나머지 인생을 맡기려고 했을까. 왜 나의 모든 걸 버릴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을까. 말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지. 나의 이야기는 너로 전부 가득 차 있지... ”가수의 목소리가 뛰어난 편도 아니고 음정도 보통이었다. 지금은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노래를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나 노래는 온하랑의 눈시울을 붉히고 가슴을 아프게 하기에는 충분했다.하루 종일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그녀는 부승민이 어리숙한 대학생에서 지금의 BX 그룹 대표로 성장하는 것을 10년 동안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봤다.그는 그녀의 본보기고, 어두운 밤의 한 줄기 빛이며, 그녀의 10년을 가득 채운 소중한 이야기였다.그녀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갔다.3년간의 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대했고 아낌없는 열정을 퍼부었다.그도 괜찮은 남편을 연기하려고 노력했다.하지만 가짜는 결국 가짜인 걸까.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그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갔지만, 그녀만은 멍하니 그 자리에서 서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까지 그는 그녀를 아내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애인 정도로 대했다.3년 동안 그는 매해 추서윤을 만나러 갔지만 그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추서윤의 말대로, 삼각관계에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제3자인 것이다.그녀는 그저 부승민과 추서윤 사이에
네티즌들이 뭐라고 하든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순 없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부승민뿐이었다.그녀는 MQ 및 기타 프로젝트의 홍보와 관련하여 종종 언론과 접촉했기에, 네티즌 대부분이 그저 사실확인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여론을 따르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들이 본 것은, 그저 누군가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오늘의 찌라시 같은 경우도 오미연이 배신을 하고 언론이 의도적으로 댓글을 조작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네티즌들에게 그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극단적인 예로, 온하랑의 해명 같은 건 부승민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해서 인터넷에 단 한 글자도 올라가지 못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것을 네티즌들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주혁과 온하랑은 함께 바에 잠시 앉아 있었다.온하랑이 물었다."오늘 오후에 스케줄 없어?”"없어, 있으면 매니저가 날 가만 안 놔뒀을걸. 오히려 잘 됐어, 너랑 여기 잠깐 같이 앉아 있을게. 아니다, 저녁에 우리 집에 가서 밥 먹을래? 모처럼 둘 다 여유시간 있는데.”"그래."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이따가 백화점에 들러서 아줌마랑 아저씨 선물 좀 사가 자. 빈손으로 갈 순 없지.”"아니야, 그냥 너만 가면 돼.”"안 돼, 예의 없게 그럴 순 없지.”말은 마친 온하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이 근처에 쇼핑몰이 하나 있었기에 그녀는 그리로 가기로 했다."같이 가자.”"안 돼, 네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몰라? 내가 지금 언론에서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데, 나랑 같이 있는 게 찍히면 너까지 봉변당할 거야.”온하랑은 인터넷의 언론을 개의치 않았다.네티즌들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여론이 지나가면 대부분 사람은 이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기껏해야 추서윤의 팬들이 그녀를 쫓아다니며 계속 욕할 것이다."그럼 내 차 타고 가. 주차장에서 기다릴게.”"그래.”온하랑은 이주
김민희는 온하랑을 위로하며 인터넷의 댓글들을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고 했다.김민희는 온하랑과 부승민이 함께 지낸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추서윤이 끼어들 틈이 어디 있겠냐고 생각했다."아줌마, 아저씨, 감사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든 저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어요. 마음에 두지도 않을 거고요.”"그래, 그게 맞는 거야. 근데... 부승민씨는 왜 이런 찌라시에 대해 해명하지 않으셨어? 찌라시 때문에 네 평판이 떨어졌잖아.”"언론과 네티즌들은 제가 부씨 집안의 입양아고 부승민이 제 오빠라는 걸 진작에 알아냈어요. 알면서도 계속 마녀사냥 하는 거라서 그들에게 해명하는 건 소용 없어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관심이 식은 후 기사들을 삭제하면 괜찮을 거예요.”만약 그녀와 부승민의 사이가 결백하다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그렇긴 하지. 부승민씨도 바빠서 네티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겠어."김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이주혁에게도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이 터졌었는데,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그저 무응답으로 대응하니 스캔들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다.그렇기에 김민희는 온하랑의 대응이 맞다고 생각했다.그때, 이주혁이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참, 어머니. 지난번에 부적 두 개 구하셨잖아요.”"아, 맞다."김민희는 서랍에서 부적을 꺼내 온하랑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주혁이가 네가 요즘 운이 좀 안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난번에 절에 가서 향을 피울 때 너한테 주려고 부적을 하나 더 달라고 했어. 스님께서 말하시길 이 부적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쓸모가 있다고 하셨어.”온하랑은 그냥 지나가듯이 한 말을 이주혁이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부적을 건네받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고맙습니다. 괜히 걱정 끼쳐 드렸네요.”"아이고,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데 뭐.”온하랑과 이주혁은 오랫동안 김민희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이주혁이 마스크를 벗고는 앞으로 나서서 인사했다."할아버지, 할머니. 하랑이를 데려다줄 때 할아버지께서 아프시다는 걸 듣고 인사 겸 올라왔어요. 할아버지 몸은 좀 괜찮으세요?”"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아요."할아버지가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알겠습니다. 하랑이도 데려다줬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랑아, 다음에 보자.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부승민씨도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이주혁은 마스크를 쓰고 병실을 나갔다."하랑아, 저 친구 참 잘생기고 사람 괜찮다 얘."할머니가 웃으며 말하고는 몰래 부승민을 쳐다보았다.그녀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주혁은 분명 온하랑에게 관심이 있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주혁은 추서윤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온하랑은 할머니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맞장구를 쳤다.“할머니, 저 친구 사실 엄청 유명한 스타예요. 쟤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이 줄을 섰어요.”"그래? 그럼 너희 둘은 어떻게 알게 됐어?”"어릴 적 이웃집에 살던 애라서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이사 가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어머, 인연이네!"할머니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죽마고우인거지?”"그런 셈이죠.”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그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하랑아, 오늘 하루 종일 출근하느라 피곤했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괜찮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민아, 빨리 하랑이 데려다주지 않고 뭐해?”'출근'이라는 말은 부승민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둘러댄 핑계에 불과했다.두 어르신 모두 이 부부 사이에 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부승민이 아침 일찍 추서윤을 데리고 병문안 왔는데 온하랑은 하루 종일 얼굴을 비치지 않다가 이제야 나타났다. 그리고 방금 온하랑이 병실에 들어와서는 부승민을 보고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태도에서 짐작하고도 남았다.
”서윤 씨가 왜?”부승민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온하랑이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서윤이는 알려진 사람이라 부정적인 여론에 휘말리면 안 돼...”“서윤씨는 여론에 휘말리면 안 되고, 나는 된다는 거야?”“하랑아, 여론이 퍼지지 않게 막는 게 최선의 방법인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이 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퍼질 만큼 퍼진 뒤였어. 지금으로서는 그냥 무응대로 대처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거 너도 알잖아...”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이 일은 부승민과 추서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결국 그녀가 제3자의 누명을 쓰고 욕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그 원인은 역시 그가 추서윤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이번에 부승민이 추서윤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기를 쓰고 막았던 것처럼.이제 그에게는 온하랑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대처도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이는 데서 확연히 알 수 있었다.그는 이미 분명히 입장을 밝혔고 추서윤만을 신경 쓰고 있는데,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희망고문해봤자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다음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부승민은 또다시 추서윤을 선택할 것이다.만약 혹시라도 둘이 싸운다면 부승민은 또 그녀의 공감 능력을 운운하며 그녀가 추서윤의 일을 망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온하랑의 침묵이 이어지자 부승민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미안해, 극성팬들이 너에게 피해를 줄 줄은 미처 몰랐어...”그는 택배를 보내 협박하는 것이 그저 맛보기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온하랑이 입을 피해에 대해 아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그는 추서윤이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만 신경을 썼지, 온하랑이 어떻게 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부승민, 때로는 미안
부승민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해명하듯 말했다."서윤이는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서 혼자 있으면 위험해...”그의 말을 들으며 온하랑은 깊은 허무함을 느꼈다.부승민은 대체 언제쯤이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녀는 추서윤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녀가 추서윤을 이해해 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게다가 추서윤이 아침에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보니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다만 그녀가 이런 얘기를 입 밖으로 내면 부승민은 또 그녀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매도하겠지."그녀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넌 마찬가지로 그녀한테 갔을 거잖아. 네 마음속에는 그녀밖에 없으니까. 뭘 구구절절 핑계를 대.”온하랑이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나한테 이런 얘기 해줄 필요도 없어.”"네가 이주혁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이럴 때 그를 만나야만 했어? 게다가 할아버지한테도 데려오고...”"오빠도 마찬가지야. 너도 이럴 때 추서윤을 만나러 가고 할아버지한테 인사시켰잖아.다 너한테서 배운 거야.”"서윤이가 불안해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와서 기분을 달래줘야 했던 거야. 너도 전에 할아버지께서 일반 병실로 옮기면 서윤이를 데려와도 된다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 화내?"부승민은 어리둥절해하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남편이 다른 여자의 전화 한 통에 불려 나가 밤새 돌아오지 않더니, 다음날 그 여자를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기까지 한 상황인데. 왜 화를 내냐니.그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추서윤의 건강이 제일이었다. 추서윤이 아파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추서윤을 달래줘야 해서... 얼마나 정당한 이유인지.하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다.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아, 맞다. 내가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주혁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쁘면 안 돼. 걔가 할아버지를 보러 오고 싶어
부승민이 침묵했다.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온하랑이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그냥 생각만 해 본 거겠지. 언제 진짜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지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됐어, 이만 돌아가. 나 쉬고 싶어.”만약 부승민이 여전히 지금처럼 추서윤의 전화 한 통에 바로 떠난다면,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다른 여자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 나가는 남편은 사양이었다.부승민의 연기에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이제 겨우 아홉 시인데, 벌써 쉬려고?”"오늘 좀 피곤하네.”"긴장 풀어줄까?”“긴장?"온하랑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응."불빛을 등진 그의 얼굴이 그늘에 가려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어떻게?”"가만히 앉아 있어.”부승민이 온하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벅지에 큰 손이 닿는가 싶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뜨거운 손이 몸을 천천히 만지자 온하랑은 순간 감전된 듯한 느낌이 들어 온몸을 찌릿 떨었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부승민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잠깐만."온하랑이 치마 밑의 손을 지긋하게 눌렀다.방금 말다툼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이렇게 달래주면 풀릴 줄 아는 건가?거기까지 생각한 온하랑은 순간 우울해져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피곤해서 싫어.”"정말 싫어?"부승민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온하랑은 그를 바라보던 눈을 내리깔고 다리를 오므렸다.그가 발걸음을 돌려 떠나자 온하랑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뭐라도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화장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부승민이 떠난 게 아니라 화장실로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잠시 후, 손을 닦으며 나온 부승민이 온하랑을 바라보았
그녀의 시력은 이미 거의 회복되었기에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었다.이튿날 아침, 온하랑은 아침 식사 후 먼저 퇴원 수속을 밟고 운전기사를 불러 자신의 물건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병실로 갔다.병실 안은 고요했다.할아버지는 병상에,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각자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온하랑은 들어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할아버지, 할머니."온하랑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아침 드셨어요?”"먹었어.”"먹었어.”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두 분... 무슨 일이세요? 싸우셨어요?""싸운 게 아니라 네 할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잖아."할머니가 할아버지를 흘겨보며 말했다.온하랑이 할아버지를 보며 물었다."할아버지, 왜 할머니한테 화내셨어요?”"화 안 냈는데..."할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거짓말이라는 게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그럼 무슨 일이에요?”할머니가 냉소를 지으셨다."하랑아, 네가 한번 들어봐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은 양반이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게 일부러 나를 화나게 하는 게 아니면 뭐겠니?”할아버지도 억울하셨는지 대꾸했다."어차피 병원에 입원해도 먹고 싸는 건 똑같은데 차라리 집에 가서 하는 게 낫지.”할아버지는 입원하시는 걸 싫어하셔서 며칠 전에도 퇴원 얘기를 꺼내셨다.온하랑이 할아버지를 설득했다."할아버지, 아직 몸이 다 안 나으셨으니 병원에 며칠 더 계시는 게 어떠세요?”"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난 이미 다 나아서 더 이상 입원할 필요가 없어.”"할아버지, 그건 의사한테 물어봐야죠.”"물어볼 필요 없어. 내가 알아."할아버지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말씀하셨다.“할아버지...”"무슨 일이야?”그때, 부승민이 양복 차림으로 병실 안으로 들어왔는데 손에는 음식이 포장된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너 아직 회사에 안 갔냐?"할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 먼저 뵙고 이따가 가려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