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방문을 갑자기 열어젖히는 바람에 온하랑은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천천히 걸어들어오면서 문을 닫고 묻는다. “왜 이 방에 있는 거야?”“다른 침대로 바꿔보려고, 후에 다시 옮길 거야.”온하랑이 물었다. “왜 찾았는데?”온하랑의 말투를 들은 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블랙카드를 꺼내 침대 머리에 놓인 탁자에 놓더니 온하랑의 앞으로 밀었다. “좋아하는 것 있으면 사.”온하랑이 카드를 힐끗 보더니 말한다. “괜찮아, 도로 갖고 가, 내가 손해 본 것도 없잖아.”“내가 약속을 못 지켰으니 내가 마땅히 보상을 해줘야지.”온하랑은 입술을 깨물더니 묻는다., “괜찮다니깐.”“사양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날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것 나도 알아. 안 그래도 돼.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일 예뻐하는 손녀일테니 우리가 영원히 안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편하게 받아들이자.”편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부승민이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승민은 온하랑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남자랑 추서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온하랑은 그렇지 못하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리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거기에 두면 돼.”“잘 자.”“잘 자.”부승민은 몸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토요일 아침, 부승민은 아침 일찍 조깅하러 나가려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아주머니는 거실에서 청소하다 부승민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부른다. “사장님.”문가로 걸어가던 부승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사모님이 언제 침실을 옮겼는지 알고 계셨어요?”“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화요일에 누가 택배를 보내왔는데 그 택배를 받아보고 사모님이 엄청 놀라셨어요. 안에는 악취가 풍기는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침구랑 바닥을 더럽혀서 사모님이 그 방에서 나오셔서 다른 방으로 옮기셨어요.”부승민은 깜짝 놀라면서 묻는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사장님께서 그때 출장
김시연은 한 커피숍 창가에 앉아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온하랑이 들어서자, 김시연은 커피 한 잔을 하랑의 앞으로 내밀었다.“방금 하랑씨 몫으로 시킨 거예요. 아직 따뜻해요.”“고마워요.” 온하랑은 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받아 홀짝거리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좀 있다 3층으로 갈까요? 아니면 4층?”3층과 4층 모두 패션코너이다.“3층.” 하랑은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주현이는 왜 안 불렀어요?”김시연은 하하 웃더니 “말도 마요, 걔가 요즘 잔업으로 엄청 바빠요. 주현이가 우리 이 프로젝트만 책임진 것 아니잖아요. 걔가 나한테 추서연 팀이 너무 불평불만이 많다고 구시렁 대더라고요. 가슴이 너무 작아도 안 되고 가슴이 너무 커도 안 되고 귓볼마저 보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귓볼을 동그랗게 복스럽게 보정해야 된다나. 요즘 바빠서 죽으려고 하거든요.”하랑이가 피식하고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웃지 마요, 진짜에요. 주현이가 가엽지. 그런데 추서윤의 가슴은 정말 작단 말이야.”말하면서 김시연은 눈길을 하랑의 몸으로 돌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하랑씨는 틀리지. 이제 애 낳으면 그 아이는 참 복 받은 아이예요.”변태같은 자식.하랑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왜 쓸데 없는 소리에요. 하랑 씨. 나한테 비법을 전수 해 줘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풍만할 수 있을까요?”“안 알려줌.” 하랑이는 컵을 내려놓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전에는 확실히 이렇게까지 풍만하지 않았는데 결혼 뒤 차츰 풍만해졌다. 두 사람은 커피를 다 마시고 팔짱을 끼고 커피숍에서 나와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점원은 두 사람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더니 웃음꽃을 피우면서 열성스럽게 신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온하랑과 김시연은 각 두 벌씩 골라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역시 우리 하랑 씨는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너무 예쁘잖아요.” 김시연은 오버하면서 말했다. 점원도 곁에서 끝없이 부추겼
부승민과 함께 있는 추서윤을 보는 순간 온하랑은 숨이 턱 막히더니 급히 눈을 돌려 김시윤을 잡아당겼다.김시윤도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두 남녀를 보더니 웃음기를 싹 빼고 비웃음으로 장착했다. 두 사람은 부승민 앞으로 다가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부사장님.”부승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이 오늘 만난다는 사람은 그녀의 애인이 아니라 김시연이었다.“하랑이 하고, 여긴 김시연 씨.” 추서연은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급히 하랑을 향해 말했다. “하랑 씨도 여기 있었네. 미안해, 승민 씨랑은...”부승민은 어쩔 바를 몰라하는 추서윤을 보고 금방 귀국했을 때의 밝은 모습의 정상인과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추서윤의 모든 변화는 추서윤이 부승민의 결혼 소식을 알고나서부터였다.추서윤은 부승민과 헤어지기 싫지만 부승민이 이미 결혼 한 몸이라 자신은 엄연히 내연녀인 셈이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그녀의 병세는 악화한 것이다. “괜찮아요. 다 알고 있어요. 볼일 보세요. 저희는 이만.”온하랑은 김시연의 손을 잡아끌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김시연은 돌부처처럼 끄떡하지 않고 웃으면서 묻는다. “서윤 씨, 오늘 화장은 누가 해준 거예요? 화장이 너무 잘됐네요.”추서윤은 의아한 얼굴로 “제가 한 건데요.”“서윤 씨 대단하다. 직접 화장도 하고. 그 세리 씨가 한 것보다 더 예쁘잖아요. 서윤 씨 안 그래요?”추서윤은 얼어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 씨 미적 감각이 모자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듣고 그래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믿지 말고요. 그러다 잘못되면 죄 없는 사람만 욕먹게 된다고요.”추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러버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랑 씨, 우리 가요..” 김시연은 하랑이를 끌고 가버렸다. 추서윤은 몸을 돌려 부승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울면서 말한다. “승민 씨,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이런 일이 생길 줄 정말 몰랐어. 그날은 오미연이 컨설팅을 담당했고 나도 그럴
부승민이 전에 말했었다. 출장 갔다 돌아오면 이혼 수속을 마치자고.출장 갔다 돌아온 뒤 부승민이 아무 말이 없기에 온하랑도 말하지 않았다.온하랑의 마음 같아서는 이 결혼을 어떻게라도 좀 더 끌어가고 싶었고 심지어 부승민이 영원히 이 일을 잊어버리길 바랐다.하지만 착각은 영원히 착각일 뿐이다.부승민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잠시 잊었다 쳐도 언젠가는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고 두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온하랑은 잠깐 착각했었던 적이 있다. 만일 추서윤이 없다면 날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그녀의 착각에 대한 정답을 온하랑은 들어버리고 말았다. 추서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부승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다른 점원이 다가와서 말한다.“사모님 혹시 카드 찾으러 오신 건가요? 방금 사모님이 나가실 때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을 제가 봤어요.”점원은 카드를 하랑이에게 돌려주었다.온하랑은 카드를 받아서 점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부승민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온하랑의 외롭고 결연한 뒷모습만 보였다. 그는 갑자기 몸이 불편한 듯 느껴졌다. “승민 씨,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부승민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온하랑은 되 찾은 블랙카드를 손에 꼭 쥐고 큰 결심을 한 듯 김시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시연 씨, 우리 딴 데 가 볼까요?”두 사람은 4층에서 가방과 액세사리를 샀다. 지친 두 사람은 5층에서 식당 하나 찾아 대충 밥을 먹고 6층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김시연의 요구에 따라 샤부샤부를 먹었다. 고기를 데치면서 하랑이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기름방울이 손등에 튕기는 줄도 몰랐다. 통감을 잃은 듯하다. “하랑 씨, 하랑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김시연은 티슈 한 장으로 급히 온하랑의 손등에 튕긴 기름을 닦아냈다. 온하랑이의 손등은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
온하랑은 옷깃을 꽉 잡았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씁쓸함이 피어오른다. 추서윤의 말이 맞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사모한다. 부씨 집안에 갓 왔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본가에 오면 탁자 곁에 서서 조심스레 쳐다보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당시 부승민의 곁에 보란 듯이 서있었던 사람이 바로 추서윤이다.“그 뒤 그 어떤 사건 때문에 나는 이별을 선택하고 승민 씨랑 헤어지기로 했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라고 하랑 씨는 생각 못 했을 거야. 단지 승민 씨가 안 받아들였던 거야. 매년 7월이 되면 승민 씨가 꼭 출장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를 만나러 오는 거야. 왜냐면 7월은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의 계절이거든.”온하랑은 숨을 참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간다. 가슴이 떨려온다. 온하랑은 추서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는 반박할 수가 없다.추서윤의 말한 모든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부승민이랑 결혼한 첫해부터 부승민은 매년 7월이면 꼭 출장을 갔으며 시간도 각별히 길었다. 온하랑은 두 사람이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 얼마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연락을 해왔다.이렇듯 정 깊은 남자였었구나. 매년 옛 애인을 만나러 해외로 갔고 해외로부터 돌아오면 다시 온하랑의 좋은 남편으로 변신하고...부승민 씨, 당신 너무 잔인한 것 아니에요?그렇다면 이 3년 동안의 결혼생활 속의 나는 뭐가 되는 거예요?온하랑은 그동안의 자신이 꼭두각시 같았다. 나의 결혼은? 내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 3년은? 모든 것이 거짓이고 사기이다. “당신들 결혼기념일이 9월이지? 9월 20일. 사실 그날이 나의 생일이야.”추서윤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으로부터 들려오는 저주와도 같았다. 온하랑은 믿을 수가 없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을 일도 아니지. 승민 씨한테 물어보든가.” 추서윤이 비웃었다.온하랑은 삽시에 온몸이 얼어붙으면서 이가 덜덜 떨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을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진실한 것이다.그녀와는 다르다. 온하랑이 가졌던 그녀가 제일 아껴왔던 3년의 결혼생활은 어떤 사람이 교묘하게 짜 놓은 한판의 굿과도 같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가짜이다.모든 것이 가짜이기에 그는 그렇게 빈틈이 없었다. 온하랑은 온몸이 으스스 떨려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전화벨이 울렸다. 김시연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시연 씨, 방금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느라 늦었어요. 지금 가요.”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어렵게 계단을 올라 식당으로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온하랑은 옆에 놓인 쇼핑백들을 보았다. 부승민의 블랙카드로 계산한 것들이다.“시연 씨, 밥 먹고 이것들은 환불해야겠어요.”“환불요? 왜 환불하는데요?” 김시연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실은 이 블랙카드가 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거예요. 도둑질해서 쓴 것을 알면 그 사람한테 혼날까 봐서요. 가서 환불해요.”“그래요,그럼 같이 가요.”온하랑의 소비 능력을 알고 있는 점원은 예의 바르게 재빠르게 환불처리를 해주었다.환불한 뒤, 온하랑은 다시 자신의 카드를 꺼내 환불한 옷들을 계산하였다.김시연은 구시렁거린다. “귀찮게 하네요. 들아가서 돈을 이체해 주면 되잖아요.”온하랑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그때는 이미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온하랑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택시를 타고 대극장으로 향했다.할머니와 약속했던 것이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기로 했다. 온하랑은 가기로 결심했지만 부승민이 올지는 모른다.대극장은 사람들로 북적이었고 빈자리 하나 없었다. 온하랑의 좌석은 앞 열에 위치해있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옆을 보니 옆 좌석은 비어있었다. 7시 반, 극장 안의 불빛이 어두워지고 무대를 비추는 등만 남았다.어수선하던 관중석도 조용해지고 소곤거리는 작은 말소리만 들려왔다. MC가 무대 위로 올라가 한바탕 떠들어대면서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온하랑은 옆의 빈 좌석을 보면서 눈을 몇 번 깜빡이었다.역시 그는
기사가 밖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차 왼쪽으로 가서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기사는 앞만 보고 달렸다.창밖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자동차 경적이 귓전으로 들려왔지만 차 안의 조용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이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암담한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내가 준 카드로 계산했으면서 왜 또 환불하고 다시 계산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환불 메세지를 확인했었는데 그 물품들이 온하랑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은 그녀가 다시 자신의 카드로 계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온하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카드로 계산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내가 추서윤이랑 함께 있어서 화 난거야?”“당신이 추서윤에게 해 준 게 어디 한두 가지야? 같이 쇼핑한 게 내가 화날만한 일이야?”하랑은 비웃음이 찬 얼굴로 웃더니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럼 왜 그러는 거야?”“내가 뭘 어쨌는데?”그녀도 알고 싶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오면서 마음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동력을 잃은 기계처럼 운행을 멈췄고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처럼 전원이 끊겨버렸다. 전에는 하랑은 결혼 3년 동안 부승민이 그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안했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부승민을 보는 순간 뇌리에 추서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랑은 그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추서윤을 사랑하면서 잊지 못할 거면서 왜 자기랑 결혼했냐고?“손은 또 왜 그래?” 부승민은 벌겋게 부어오른 온하랑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밥 먹을 때 데었어.”“처치를 안 했어? 아저씨, 병원으로 가줘요.”온하랑은 눈을 뜨고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온하랑은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웠다. 그녀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부승민의 이런 모습을 전에 봤을 때는 온하랑은 몹시 설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녀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다.그녀는 외롭고 예민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기에 항상 두꺼운 껍데기로 자신을 무장하곤 한다. 그녀는 일개 일반인으로 행운이라면 부씨 집안에 입양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녀는 항상 조심스럽게 전전긍긍하면서 눈치를 봐가면서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제외한 부씨 집안의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해 왔다. 그중 부승민만이 그녀에게 가끔 관심을 보여주곤 했다. 온하랑은 간혹 부승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고 그동안 쌓아 온 정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크나큰 착각이다.만일 부승민이 자신을 가족으로나마 생각했다면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로 놓고 말하면 타인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그는 부 씨 가족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그 사람들보다 더 냉혹하다. 단지 부승민은 자신의 기분을 감추고 겉으로만 예절 바르게 행동하면서 그녀를 속여왔다. 차 안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다.부승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눈물범벅이 된 온하랑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파왔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의 온하랑을 본 적이 없다.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의 온하랑을 보자 부승민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부승민은 정적을 깨고 말한다. “내가 정말 미안해.”또 사과야? 무슨 일이 발생했든 간에 그는 일괄 사과로 모면하려 한다.“미안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이제야 알겠지만 당신은 얼음같이 냉정한 사람이야.”온하랑은 기분을 가다듬으려고 크게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보상해 줄게.”하랑은 웃으면서 묻는다.“하하, 보상? 또 보상인가? 어떻게 보상 해줄 셈이었어? 이혼을 취소하는 거야? 아니면 나보고 사직하고 여길 떠나라는 거야? 내가 갖고 싶은 걸 당신은 줄 수 없는데 무엇으로 날 보상해 줄 거야?”부승민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온하랑은 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