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연은 한 커피숍 창가에 앉아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온하랑이 들어서자, 김시연은 커피 한 잔을 하랑의 앞으로 내밀었다.“방금 하랑씨 몫으로 시킨 거예요. 아직 따뜻해요.”“고마워요.” 온하랑은 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받아 홀짝거리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좀 있다 3층으로 갈까요? 아니면 4층?”3층과 4층 모두 패션코너이다.“3층.” 하랑은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주현이는 왜 안 불렀어요?”김시연은 하하 웃더니 “말도 마요, 걔가 요즘 잔업으로 엄청 바빠요. 주현이가 우리 이 프로젝트만 책임진 것 아니잖아요. 걔가 나한테 추서연 팀이 너무 불평불만이 많다고 구시렁 대더라고요. 가슴이 너무 작아도 안 되고 가슴이 너무 커도 안 되고 귓볼마저 보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귓볼을 동그랗게 복스럽게 보정해야 된다나. 요즘 바빠서 죽으려고 하거든요.”하랑이가 피식하고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웃지 마요, 진짜에요. 주현이가 가엽지. 그런데 추서윤의 가슴은 정말 작단 말이야.”말하면서 김시연은 눈길을 하랑의 몸으로 돌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하랑씨는 틀리지. 이제 애 낳으면 그 아이는 참 복 받은 아이예요.”변태같은 자식.하랑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왜 쓸데 없는 소리에요. 하랑 씨. 나한테 비법을 전수 해 줘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풍만할 수 있을까요?”“안 알려줌.” 하랑이는 컵을 내려놓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전에는 확실히 이렇게까지 풍만하지 않았는데 결혼 뒤 차츰 풍만해졌다. 두 사람은 커피를 다 마시고 팔짱을 끼고 커피숍에서 나와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점원은 두 사람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더니 웃음꽃을 피우면서 열성스럽게 신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온하랑과 김시연은 각 두 벌씩 골라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역시 우리 하랑 씨는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너무 예쁘잖아요.” 김시연은 오버하면서 말했다. 점원도 곁에서 끝없이 부추겼
부승민과 함께 있는 추서윤을 보는 순간 온하랑은 숨이 턱 막히더니 급히 눈을 돌려 김시윤을 잡아당겼다.김시윤도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두 남녀를 보더니 웃음기를 싹 빼고 비웃음으로 장착했다. 두 사람은 부승민 앞으로 다가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부사장님.”부승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이 오늘 만난다는 사람은 그녀의 애인이 아니라 김시연이었다.“하랑이 하고, 여긴 김시연 씨.” 추서연은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급히 하랑을 향해 말했다. “하랑 씨도 여기 있었네. 미안해, 승민 씨랑은...”부승민은 어쩔 바를 몰라하는 추서윤을 보고 금방 귀국했을 때의 밝은 모습의 정상인과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추서윤의 모든 변화는 추서윤이 부승민의 결혼 소식을 알고나서부터였다.추서윤은 부승민과 헤어지기 싫지만 부승민이 이미 결혼 한 몸이라 자신은 엄연히 내연녀인 셈이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그녀의 병세는 악화한 것이다. “괜찮아요. 다 알고 있어요. 볼일 보세요. 저희는 이만.”온하랑은 김시연의 손을 잡아끌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김시연은 돌부처처럼 끄떡하지 않고 웃으면서 묻는다. “서윤 씨, 오늘 화장은 누가 해준 거예요? 화장이 너무 잘됐네요.”추서윤은 의아한 얼굴로 “제가 한 건데요.”“서윤 씨 대단하다. 직접 화장도 하고. 그 세리 씨가 한 것보다 더 예쁘잖아요. 서윤 씨 안 그래요?”추서윤은 얼어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 씨 미적 감각이 모자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듣고 그래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믿지 말고요. 그러다 잘못되면 죄 없는 사람만 욕먹게 된다고요.”추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러버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랑 씨, 우리 가요..” 김시연은 하랑이를 끌고 가버렸다. 추서윤은 몸을 돌려 부승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울면서 말한다. “승민 씨,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이런 일이 생길 줄 정말 몰랐어. 그날은 오미연이 컨설팅을 담당했고 나도 그럴
부승민이 전에 말했었다. 출장 갔다 돌아오면 이혼 수속을 마치자고.출장 갔다 돌아온 뒤 부승민이 아무 말이 없기에 온하랑도 말하지 않았다.온하랑의 마음 같아서는 이 결혼을 어떻게라도 좀 더 끌어가고 싶었고 심지어 부승민이 영원히 이 일을 잊어버리길 바랐다.하지만 착각은 영원히 착각일 뿐이다.부승민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잠시 잊었다 쳐도 언젠가는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고 두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온하랑은 잠깐 착각했었던 적이 있다. 만일 추서윤이 없다면 날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그녀의 착각에 대한 정답을 온하랑은 들어버리고 말았다. 추서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부승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다른 점원이 다가와서 말한다.“사모님 혹시 카드 찾으러 오신 건가요? 방금 사모님이 나가실 때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을 제가 봤어요.”점원은 카드를 하랑이에게 돌려주었다.온하랑은 카드를 받아서 점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부승민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온하랑의 외롭고 결연한 뒷모습만 보였다. 그는 갑자기 몸이 불편한 듯 느껴졌다. “승민 씨,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부승민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온하랑은 되 찾은 블랙카드를 손에 꼭 쥐고 큰 결심을 한 듯 김시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시연 씨, 우리 딴 데 가 볼까요?”두 사람은 4층에서 가방과 액세사리를 샀다. 지친 두 사람은 5층에서 식당 하나 찾아 대충 밥을 먹고 6층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김시연의 요구에 따라 샤부샤부를 먹었다. 고기를 데치면서 하랑이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기름방울이 손등에 튕기는 줄도 몰랐다. 통감을 잃은 듯하다. “하랑 씨, 하랑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김시연은 티슈 한 장으로 급히 온하랑의 손등에 튕긴 기름을 닦아냈다. 온하랑이의 손등은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
온하랑은 옷깃을 꽉 잡았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씁쓸함이 피어오른다. 추서윤의 말이 맞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사모한다. 부씨 집안에 갓 왔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본가에 오면 탁자 곁에 서서 조심스레 쳐다보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당시 부승민의 곁에 보란 듯이 서있었던 사람이 바로 추서윤이다.“그 뒤 그 어떤 사건 때문에 나는 이별을 선택하고 승민 씨랑 헤어지기로 했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라고 하랑 씨는 생각 못 했을 거야. 단지 승민 씨가 안 받아들였던 거야. 매년 7월이 되면 승민 씨가 꼭 출장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를 만나러 오는 거야. 왜냐면 7월은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의 계절이거든.”온하랑은 숨을 참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간다. 가슴이 떨려온다. 온하랑은 추서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는 반박할 수가 없다.추서윤의 말한 모든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부승민이랑 결혼한 첫해부터 부승민은 매년 7월이면 꼭 출장을 갔으며 시간도 각별히 길었다. 온하랑은 두 사람이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 얼마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연락을 해왔다.이렇듯 정 깊은 남자였었구나. 매년 옛 애인을 만나러 해외로 갔고 해외로부터 돌아오면 다시 온하랑의 좋은 남편으로 변신하고...부승민 씨, 당신 너무 잔인한 것 아니에요?그렇다면 이 3년 동안의 결혼생활 속의 나는 뭐가 되는 거예요?온하랑은 그동안의 자신이 꼭두각시 같았다. 나의 결혼은? 내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 3년은? 모든 것이 거짓이고 사기이다. “당신들 결혼기념일이 9월이지? 9월 20일. 사실 그날이 나의 생일이야.”추서윤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으로부터 들려오는 저주와도 같았다. 온하랑은 믿을 수가 없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을 일도 아니지. 승민 씨한테 물어보든가.” 추서윤이 비웃었다.온하랑은 삽시에 온몸이 얼어붙으면서 이가 덜덜 떨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을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진실한 것이다.그녀와는 다르다. 온하랑이 가졌던 그녀가 제일 아껴왔던 3년의 결혼생활은 어떤 사람이 교묘하게 짜 놓은 한판의 굿과도 같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가짜이다.모든 것이 가짜이기에 그는 그렇게 빈틈이 없었다. 온하랑은 온몸이 으스스 떨려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전화벨이 울렸다. 김시연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시연 씨, 방금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느라 늦었어요. 지금 가요.”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어렵게 계단을 올라 식당으로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온하랑은 옆에 놓인 쇼핑백들을 보았다. 부승민의 블랙카드로 계산한 것들이다.“시연 씨, 밥 먹고 이것들은 환불해야겠어요.”“환불요? 왜 환불하는데요?” 김시연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실은 이 블랙카드가 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거예요. 도둑질해서 쓴 것을 알면 그 사람한테 혼날까 봐서요. 가서 환불해요.”“그래요,그럼 같이 가요.”온하랑의 소비 능력을 알고 있는 점원은 예의 바르게 재빠르게 환불처리를 해주었다.환불한 뒤, 온하랑은 다시 자신의 카드를 꺼내 환불한 옷들을 계산하였다.김시연은 구시렁거린다. “귀찮게 하네요. 들아가서 돈을 이체해 주면 되잖아요.”온하랑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그때는 이미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온하랑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택시를 타고 대극장으로 향했다.할머니와 약속했던 것이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기로 했다. 온하랑은 가기로 결심했지만 부승민이 올지는 모른다.대극장은 사람들로 북적이었고 빈자리 하나 없었다. 온하랑의 좌석은 앞 열에 위치해있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옆을 보니 옆 좌석은 비어있었다. 7시 반, 극장 안의 불빛이 어두워지고 무대를 비추는 등만 남았다.어수선하던 관중석도 조용해지고 소곤거리는 작은 말소리만 들려왔다. MC가 무대 위로 올라가 한바탕 떠들어대면서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온하랑은 옆의 빈 좌석을 보면서 눈을 몇 번 깜빡이었다.역시 그는
기사가 밖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차 왼쪽으로 가서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기사는 앞만 보고 달렸다.창밖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자동차 경적이 귓전으로 들려왔지만 차 안의 조용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이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암담한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내가 준 카드로 계산했으면서 왜 또 환불하고 다시 계산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환불 메세지를 확인했었는데 그 물품들이 온하랑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은 그녀가 다시 자신의 카드로 계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온하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카드로 계산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내가 추서윤이랑 함께 있어서 화 난거야?”“당신이 추서윤에게 해 준 게 어디 한두 가지야? 같이 쇼핑한 게 내가 화날만한 일이야?”하랑은 비웃음이 찬 얼굴로 웃더니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럼 왜 그러는 거야?”“내가 뭘 어쨌는데?”그녀도 알고 싶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오면서 마음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동력을 잃은 기계처럼 운행을 멈췄고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처럼 전원이 끊겨버렸다. 전에는 하랑은 결혼 3년 동안 부승민이 그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안했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부승민을 보는 순간 뇌리에 추서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랑은 그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추서윤을 사랑하면서 잊지 못할 거면서 왜 자기랑 결혼했냐고?“손은 또 왜 그래?” 부승민은 벌겋게 부어오른 온하랑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밥 먹을 때 데었어.”“처치를 안 했어? 아저씨, 병원으로 가줘요.”온하랑은 눈을 뜨고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온하랑은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웠다. 그녀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부승민의 이런 모습을 전에 봤을 때는 온하랑은 몹시 설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녀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울어본 적이 없다.그녀는 외롭고 예민하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기에 항상 두꺼운 껍데기로 자신을 무장하곤 한다. 그녀는 일개 일반인으로 행운이라면 부씨 집안에 입양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녀는 항상 조심스럽게 전전긍긍하면서 눈치를 봐가면서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제외한 부씨 집안의 사람들은 그녀를 무시해 왔다. 그중 부승민만이 그녀에게 가끔 관심을 보여주곤 했다. 온하랑은 간혹 부승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고 그동안 쌓아 온 정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 크나큰 착각이다.만일 부승민이 자신을 가족으로나마 생각했다면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로 놓고 말하면 타인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그는 부 씨 가족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그 사람들보다 더 냉혹하다. 단지 부승민은 자신의 기분을 감추고 겉으로만 예절 바르게 행동하면서 그녀를 속여왔다. 차 안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다.부승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눈물범벅이 된 온하랑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파왔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의 온하랑을 본 적이 없다.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의 온하랑을 보자 부승민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부승민은 정적을 깨고 말한다. “내가 정말 미안해.”또 사과야? 무슨 일이 발생했든 간에 그는 일괄 사과로 모면하려 한다.“미안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이제야 알겠지만 당신은 얼음같이 냉정한 사람이야.”온하랑은 기분을 가다듬으려고 크게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보상해 줄게.”하랑은 웃으면서 묻는다.“하하, 보상? 또 보상인가? 어떻게 보상 해줄 셈이었어? 이혼을 취소하는 거야? 아니면 나보고 사직하고 여길 떠나라는 거야? 내가 갖고 싶은 걸 당신은 줄 수 없는데 무엇으로 날 보상해 줄 거야?”부승민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온하랑은 더
“이혼 합의서에 대해 다시 너랑 논의하고 싶어서 말이야. 서재로 들어와.”“그래, 알겠어.”온하랑은 수건을 내려놓고 부승민을 따라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부승민은 이혼 합의서 원본파일을 찾아 거기에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추가했다. 그러고는 화면을 온하랑에게 보여주며 그녀더러 오라고 손짓하였다.“여기에 와서 내가 새로 추가한 내용 좀 봐봐.”온하랑은 한 손으로 테이블을 받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화면 속에 빨간색으로 표기된 글들을 읽어봤다.새로 추가한 첫 번째 사항은, 서로 이혼하되 집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이혼 합의서를 서로 체결한 후에도 여전히 더원 파크힐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여자 측은 남자 측 부모님에게 이혼 사실을 속여야 하며, 필요시 남자 측과 쇼윈도 부부행세를 하며 남자 측 가족이 이혼 사실을 눈치챌 때까지 효도해야 했다.두 번째 사항은, 남녀 쌍방은 집 밖에서 둘의 결혼과 이혼 사실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세 번째 사항은, 둘이 더원 파크힐에 같이 살면서 남자 혹은 여자를 여기에 데려와 밤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이것 외에 또 다른 변화된 부분은 재산 분할이었다.온하랑이 원래 분할 받을 재산은 40억에 빌라 2채, 고급 자동차 2대였다.현재는 변화된 내용을 보면, 60억에 빌라 2채, 그리고 고급 자동차 2대였다.온하랑은 새로 추가된 이 몇 가지 조항을 순서대로 읽어보았다.“나 첫 번째 조항에 의의 있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이혼 사실을 아실 때까지 우리가 더원 파크힐에 같이 살아야 한다고 쓰여 있는데, 그럼 만약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신다면 우리는 계속 더원 파크힐에 같이 살아야 하잖아? 당신도 당당하게 추서윤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이고 말이야. 그럴 거면 이 이혼에 뭔 의미가 있어? ”“그러면 여기에 시간제한을 두는 건 어때?”그 말에 온하랑은 시간을 계산해 보며 답했다.“두 달. 이혼하고 두 달 내에 우리가 이혼한 사실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알게 해야 해.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