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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Author: 고운
차가 병원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섰다. 부승민은 주차 자리에 차를 세우고 익숙한 듯 심리 상담의사의 진료실로 노크하고 들어섰다.

“오셨어요? 서윤 씨의 오늘 진료는 끝났습니다.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조금 전에 진정제를 투입하고 잠들었습니다.”

부승민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부승민 씨, 제가 바라건대 꼭 이 일에 대해서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서윤 씨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급격히 악화되어 무척 안 좋은 상태입니다. 중증 우울증으로 악화되면 진료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네.”

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서윤은 부승민의 결혼 소식에 쇼크를 받아 상태가 악화된 것이다.

침대 곁으로 다가간 부승민은 추서윤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무척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렇게 온화하고 활달하던 아이가 그로 인하여 심리 질병을 앓게 되었고 성격은 백팔십도로 변하더니 몇 번이나 자살시도를 하였으니 부승민은 절대로 그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부승민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얼마 지나서 추서윤은 어렴풋이 눈을 뜨더니,

“승민 씨? 승민 씨 맞아? 꿈 아니지? 당신이 여기에 왜 있어?”

“서윤아, 나 맞아, 너 보러 왔어.”

부승민은 그녀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추서윤은 얼굴을 들어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

“승민 씨 내일 쉬니깐 나랑 같이 쇼핑 가주면 안 돼?”

“그래.”

경찰서에서 돌아온 온하랑은 곧장 회사로 들어갔다.

줄곧 바깥만 보고 있던 오미연은 온하랑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점심쯤, 할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하랑이 어땠냐? 어젯밤 자선모임은 참석했었냐? 기분이 어떠냐?”

할머니의 말투를 봐서는 할머니는 추서윤도 자선모임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주 좋았어요. 디저트도 엄청 맛있고요.”

할머니는 허허 웃으시면서 말했다.

“디저트만 먹고 왔더냐? 승민이 보고 액세사리라도 사달라고 하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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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태로운 제안   제57화

    부승민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거절하면 되잖아?”“이혼을 제기한 사람이 내가 아닌데 왜 내가 그 ‘나쁜 사람’을 자처해야 해?”“너도 이혼하고 싶은 것 아니었어? 뭐가 다른데?”“...”온하랑은 더는 변명을 하지 않고 다른 화제로 넘겼다. “내일 나 약속 있으니깐 시간 맞춰서 대극장으로 와.”“맘대로 해.”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서 더는 말이 없다.차는 별장으로 들어가서 멈췄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사장님, 사모님, 들어오셨어요?”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반긴다. 이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아주머니도 눈치챘고 둘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본 지 오래됐다. “아주머니, 오늘 저녁 메뉴는 뭐예요?” 온하랑이 물었다.“오늘 시장에서 닭 한 마리 샀는데 아주 신선하고 좋아요. 닭죽하고 장조림하고 찐 만두예요. 금방 돼요.”“네.”부승민은 위로 올라갔고 온하랑은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티브이 보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거실에 티브이를 켜두면 그래도 사람 냄새가 풍기는 듯하다. 좀 있으니 부승민이 계단에서 내려왔다.온하랑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부승민은 편한 옷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살짝 헝클어진 앞머리는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면도를 한 얼굴에는 소년미가 아직 남아있다. 1인 소파로 향하던 부승민은 주먹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하랑을 보더니 발걸음을 돌려 그녀의 등 뒤로 가서 물었다. “요즘 많이 피곤해?”“어.” 하랑은 고개를 끄덕인다.부승민의 큰 손이 하랑의 어깨에 닿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양성우가 요즘 교외에 별장 재개발을 하는데 바쁜 시간이 지나면 가서 며칠 쉬다 올래?”“그때 가서 봐.”그때 되면 이미 이혼한 뒤일 것이다. 부승민은 말없이 하랑의 어깨를 좀 더 주무르다 묻는다. “좀 괜찮아졌어?”“어.”부승민의 안마 기술은 끝내준다.아마도 이 3년 동안 연마해 온 결과일 것이다.아주머니는 금방 저녁상을 차렸다. 의자에 앉더

  • 위태로운 제안   제58화

    부승민이 방문을 갑자기 열어젖히는 바람에 온하랑은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천천히 걸어들어오면서 문을 닫고 묻는다. “왜 이 방에 있는 거야?”“다른 침대로 바꿔보려고, 후에 다시 옮길 거야.”온하랑이 물었다. “왜 찾았는데?”온하랑의 말투를 들은 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블랙카드를 꺼내 침대 머리에 놓인 탁자에 놓더니 온하랑의 앞으로 밀었다. “좋아하는 것 있으면 사.”온하랑이 카드를 힐끗 보더니 말한다. “괜찮아, 도로 갖고 가, 내가 손해 본 것도 없잖아.”“내가 약속을 못 지켰으니 내가 마땅히 보상을 해줘야지.”온하랑은 입술을 깨물더니 묻는다., “괜찮다니깐.”“사양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날 의식적으로 멀리한다는 것 나도 알아. 안 그래도 돼. 이혼해도 넌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일 예뻐하는 손녀일테니 우리가 영원히 안 볼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 편하게 받아들이자.”편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부승민이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승민은 온하랑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남자랑 추서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온하랑은 그렇지 못하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리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거기에 두면 돼.”“잘 자.”“잘 자.”부승민은 몸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토요일 아침, 부승민은 아침 일찍 조깅하러 나가려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아주머니는 거실에서 청소하다 부승민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부른다. “사장님.”문가로 걸어가던 부승민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물었다. “사모님이 언제 침실을 옮겼는지 알고 계셨어요?”“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화요일에 누가 택배를 보내왔는데 그 택배를 받아보고 사모님이 엄청 놀라셨어요. 안에는 악취가 풍기는 물건이 들어있었는데 침구랑 바닥을 더럽혀서 사모님이 그 방에서 나오셔서 다른 방으로 옮기셨어요.”부승민은 깜짝 놀라면서 묻는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요?”“사장님께서 그때 출장

  • 위태로운 제안   제59화

    김시연은 한 커피숍 창가에 앉아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온하랑이 들어서자, 김시연은 커피 한 잔을 하랑의 앞으로 내밀었다.“방금 하랑씨 몫으로 시킨 거예요. 아직 따뜻해요.”“고마워요.” 온하랑은 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받아 홀짝거리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좀 있다 3층으로 갈까요? 아니면 4층?”3층과 4층 모두 패션코너이다.“3층.” 하랑은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주현이는 왜 안 불렀어요?”김시연은 하하 웃더니 “말도 마요, 걔가 요즘 잔업으로 엄청 바빠요. 주현이가 우리 이 프로젝트만 책임진 것 아니잖아요. 걔가 나한테 추서연 팀이 너무 불평불만이 많다고 구시렁 대더라고요. 가슴이 너무 작아도 안 되고 가슴이 너무 커도 안 되고 귓볼마저 보정해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귓볼을 동그랗게 복스럽게 보정해야 된다나. 요즘 바빠서 죽으려고 하거든요.”하랑이가 피식하고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웃지 마요, 진짜에요. 주현이가 가엽지. 그런데 추서윤의 가슴은 정말 작단 말이야.”말하면서 김시연은 눈길을 하랑의 몸으로 돌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하랑씨는 틀리지. 이제 애 낳으면 그 아이는 참 복 받은 아이예요.”변태같은 자식.하랑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쓸데 없는 소리 그만.”“왜 쓸데 없는 소리에요. 하랑 씨. 나한테 비법을 전수 해 줘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풍만할 수 있을까요?”“안 알려줌.” 하랑이는 컵을 내려놓으면서 시선을 돌렸다. 결혼 전에는 확실히 이렇게까지 풍만하지 않았는데 결혼 뒤 차츰 풍만해졌다. 두 사람은 커피를 다 마시고 팔짱을 끼고 커피숍에서 나와 3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점원은 두 사람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더니 웃음꽃을 피우면서 열성스럽게 신상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온하랑과 김시연은 각 두 벌씩 골라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역시 우리 하랑 씨는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너무 예쁘잖아요.” 김시연은 오버하면서 말했다. 점원도 곁에서 끝없이 부추겼

  • 위태로운 제안   제60화

    부승민과 함께 있는 추서윤을 보는 순간 온하랑은 숨이 턱 막히더니 급히 눈을 돌려 김시윤을 잡아당겼다.김시윤도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두 남녀를 보더니 웃음기를 싹 빼고 비웃음으로 장착했다. 두 사람은 부승민 앞으로 다가가면서 인사를 건넸다. “부사장님.”부승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이 오늘 만난다는 사람은 그녀의 애인이 아니라 김시연이었다.“하랑이 하고, 여긴 김시연 씨.” 추서연은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얼굴로 급히 하랑을 향해 말했다. “하랑 씨도 여기 있었네. 미안해, 승민 씨랑은...”부승민은 어쩔 바를 몰라하는 추서윤을 보고 금방 귀국했을 때의 밝은 모습의 정상인과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추서윤의 모든 변화는 추서윤이 부승민의 결혼 소식을 알고나서부터였다.추서윤은 부승민과 헤어지기 싫지만 부승민이 이미 결혼 한 몸이라 자신은 엄연히 내연녀인 셈이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그녀의 병세는 악화한 것이다. “괜찮아요. 다 알고 있어요. 볼일 보세요. 저희는 이만.”온하랑은 김시연의 손을 잡아끌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했지만 김시연은 돌부처처럼 끄떡하지 않고 웃으면서 묻는다. “서윤 씨, 오늘 화장은 누가 해준 거예요? 화장이 너무 잘됐네요.”추서윤은 의아한 얼굴로 “제가 한 건데요.”“서윤 씨 대단하다. 직접 화장도 하고. 그 세리 씨가 한 것보다 더 예쁘잖아요. 서윤 씨 안 그래요?”추서윤은 얼어붙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 씨 미적 감각이 모자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많이 듣고 그래요. 근거 없는 자신감만 믿지 말고요. 그러다 잘못되면 죄 없는 사람만 욕먹게 된다고요.”추서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러버리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랑 씨, 우리 가요..” 김시연은 하랑이를 끌고 가버렸다. 추서윤은 몸을 돌려 부승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울면서 말한다. “승민 씨, 난 정말 모르는 일이야. 이런 일이 생길 줄 정말 몰랐어. 그날은 오미연이 컨설팅을 담당했고 나도 그럴

  • 위태로운 제안   제61화

    부승민이 전에 말했었다. 출장 갔다 돌아오면 이혼 수속을 마치자고.출장 갔다 돌아온 뒤 부승민이 아무 말이 없기에 온하랑도 말하지 않았다.온하랑의 마음 같아서는 이 결혼을 어떻게라도 좀 더 끌어가고 싶었고 심지어 부승민이 영원히 이 일을 잊어버리길 바랐다.하지만 착각은 영원히 착각일 뿐이다.부승민이 다시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잠시 잊었다 쳐도 언젠가는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실이고 두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온하랑은 잠깐 착각했었던 적이 있다. 만일 추서윤이 없다면 날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그녀의 착각에 대한 정답을 온하랑은 들어버리고 말았다. 추서윤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부승민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다른 점원이 다가와서 말한다.“사모님 혹시 카드 찾으러 오신 건가요? 방금 사모님이 나가실 때 호주머니에서 흘러나온 것을 제가 봤어요.”점원은 카드를 하랑이에게 돌려주었다.온하랑은 카드를 받아서 점원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부승민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온하랑의 외롭고 결연한 뒷모습만 보였다. 그는 갑자기 몸이 불편한 듯 느껴졌다. “승민 씨,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부승민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저었다. 온하랑은 되 찾은 블랙카드를 손에 꼭 쥐고 큰 결심을 한 듯 김시연의 앞으로 다가갔다. “시연 씨, 우리 딴 데 가 볼까요?”두 사람은 4층에서 가방과 액세사리를 샀다. 지친 두 사람은 5층에서 식당 하나 찾아 대충 밥을 먹고 6층에 가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오후 5시까지 돌아다니다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김시연의 요구에 따라 샤부샤부를 먹었다. 고기를 데치면서 하랑이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기름방울이 손등에 튕기는 줄도 몰랐다. 통감을 잃은 듯하다. “하랑 씨, 하랑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김시연은 티슈 한 장으로 급히 온하랑의 손등에 튕긴 기름을 닦아냈다. 온하랑이의 손등은 금세 벌겋게 부어올랐다.

  • 위태로운 제안   제62화

    온하랑은 옷깃을 꽉 잡았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씁쓸함이 피어오른다. 추서윤의 말이 맞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사모한다. 부씨 집안에 갓 왔을 때 그녀는 부승민이 본가에 오면 탁자 곁에 서서 조심스레 쳐다보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당시 부승민의 곁에 보란 듯이 서있었던 사람이 바로 추서윤이다.“그 뒤 그 어떤 사건 때문에 나는 이별을 선택하고 승민 씨랑 헤어지기로 했어.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라고 하랑 씨는 생각 못 했을 거야. 단지 승민 씨가 안 받아들였던 거야. 매년 7월이 되면 승민 씨가 꼭 출장을 간다는 것을 알고 있지? 나를 만나러 오는 거야. 왜냐면 7월은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의 계절이거든.”온하랑은 숨을 참았다. 머릿속은 하얗게 질려간다. 가슴이 떨려온다. 온하랑은 추서윤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는 반박할 수가 없다.추서윤의 말한 모든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부승민이랑 결혼한 첫해부터 부승민은 매년 7월이면 꼭 출장을 갔으며 시간도 각별히 길었다. 온하랑은 두 사람이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 얼마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연락을 해왔다.이렇듯 정 깊은 남자였었구나. 매년 옛 애인을 만나러 해외로 갔고 해외로부터 돌아오면 다시 온하랑의 좋은 남편으로 변신하고...부승민 씨, 당신 너무 잔인한 것 아니에요?그렇다면 이 3년 동안의 결혼생활 속의 나는 뭐가 되는 거예요?온하랑은 그동안의 자신이 꼭두각시 같았다. 나의 결혼은? 내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그 3년은? 모든 것이 거짓이고 사기이다. “당신들 결혼기념일이 9월이지? 9월 20일. 사실 그날이 나의 생일이야.”추서윤의 목소리는 마치 지옥으로부터 들려오는 저주와도 같았다. 온하랑은 믿을 수가 없다. “아니야. 그럴 수 없어...”“그럴 수 없을 일도 아니지. 승민 씨한테 물어보든가.” 추서윤이 비웃었다.온하랑은 삽시에 온몸이 얼어붙으면서 이가 덜덜 떨렸다.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을

  • 위태로운 제안   제63화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진실한 것이다.그녀와는 다르다. 온하랑이 가졌던 그녀가 제일 아껴왔던 3년의 결혼생활은 어떤 사람이 교묘하게 짜 놓은 한판의 굿과도 같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가짜이다.모든 것이 가짜이기에 그는 그렇게 빈틈이 없었다. 온하랑은 온몸이 으스스 떨려오면서 숨을 쉴 수가 없다.전화벨이 울렸다. 김시연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시연 씨, 방금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느라 늦었어요. 지금 가요.”온하랑은 핸드폰을 끄고 어렵게 계단을 올라 식당으로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온하랑은 옆에 놓인 쇼핑백들을 보았다. 부승민의 블랙카드로 계산한 것들이다.“시연 씨, 밥 먹고 이것들은 환불해야겠어요.”“환불요? 왜 환불하는데요?” 김시연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실은 이 블랙카드가 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거예요. 도둑질해서 쓴 것을 알면 그 사람한테 혼날까 봐서요. 가서 환불해요.”“그래요,그럼 같이 가요.”온하랑의 소비 능력을 알고 있는 점원은 예의 바르게 재빠르게 환불처리를 해주었다.환불한 뒤, 온하랑은 다시 자신의 카드를 꺼내 환불한 옷들을 계산하였다.김시연은 구시렁거린다. “귀찮게 하네요. 들아가서 돈을 이체해 주면 되잖아요.”온하랑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그때는 이미 7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온하랑은 잠깐 생각을 하다가 택시를 타고 대극장으로 향했다.할머니와 약속했던 것이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기로 했다. 온하랑은 가기로 결심했지만 부승민이 올지는 모른다.대극장은 사람들로 북적이었고 빈자리 하나 없었다. 온하랑의 좌석은 앞 열에 위치해있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 옆을 보니 옆 좌석은 비어있었다. 7시 반, 극장 안의 불빛이 어두워지고 무대를 비추는 등만 남았다.어수선하던 관중석도 조용해지고 소곤거리는 작은 말소리만 들려왔다. MC가 무대 위로 올라가 한바탕 떠들어대면서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온하랑은 옆의 빈 좌석을 보면서 눈을 몇 번 깜빡이었다.역시 그는

  • 위태로운 제안   제64화

    기사가 밖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차 왼쪽으로 가서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기사는 앞만 보고 달렸다.창밖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자동차 경적이 귓전으로 들려왔지만 차 안의 조용한 분위기와는 정반대이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암담한 얼굴을 보면서 물었다.“내가 준 카드로 계산했으면서 왜 또 환불하고 다시 계산했어?”부승민은 온하랑의 환불 메세지를 확인했었는데 그 물품들이 온하랑의 손에 들려있다는 것은 그녀가 다시 자신의 카드로 계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온하랑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카드로 계산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내가 추서윤이랑 함께 있어서 화 난거야?”“당신이 추서윤에게 해 준 게 어디 한두 가지야? 같이 쇼핑한 게 내가 화날만한 일이야?”하랑은 비웃음이 찬 얼굴로 웃더니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럼 왜 그러는 거야?”“내가 뭘 어쨌는데?”그녀도 알고 싶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오면서 마음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동력을 잃은 기계처럼 운행을 멈췄고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처럼 전원이 끊겨버렸다. 전에는 하랑은 결혼 3년 동안 부승민이 그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자기 자신을 위안했었다.하지만 지금 눈앞의 부승민을 보는 순간 뇌리에 추서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랑은 그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추서윤을 사랑하면서 잊지 못할 거면서 왜 자기랑 결혼했냐고?“손은 또 왜 그래?” 부승민은 벌겋게 부어오른 온하랑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밥 먹을 때 데었어.”“처치를 안 했어? 아저씨, 병원으로 가줘요.”온하랑은 눈을 뜨고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온하랑은 왠지 그 모습이 우스웠다. 그녀는 손을 빼면서 말했다. “괜찮아. 별 것 아니야.”부승민의 이런 모습을 전에 봤을 때는 온하랑은 몹시 설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Pinakabagong kabanata

  • 위태로운 제안   제1357화

    그때는 어린 마음에 부모님의 무관심이 좋기만 했는데 클수록 오재원은 그게 다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은 은연중에 자신과 형을 비교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집안의 무게는 형이 다 짊어지니 마음대로 살 수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모두가 내놓은 자식이라 해서 정말 그렇게 사니 부모님은 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했다.그런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임연지만이 오재원을 인정해주었다.오재원의 우수함을 발견하지 못한 건 오승은과 오형일이 부모 노릇을 잘 못 했기 때문이라며, 오재원이 이렇게 된 것도 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 때문에 엇나간 거라며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노력만 하면 절대 형한테 뒤지지 않을 거라는 그 한마디가 오재원의 가슴을 울렸고 오재원은 그때부터 임연지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오재원도 자신이 형보다 못 한 게 아니라 형이 받았던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재원아,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결혼생활은 오래갈 수 없는 거야. 넌 아주머니, 아저씨 자식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 화살이 올 거야. 그러면 날 더 싫어하시겠지.”“나도... 떳떳하게 너랑 결혼하고 싶은데...”임연지가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자 오재원은 그녀를 향해 무턱대고 약속부터 했다.“걱정 마 연지야. 내가 부모님 설득해볼게. 네가 내 아이까지 임신했으니까 부모님도 어쩌진 못하실 거야.”“고마워 재원아...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너무 든든하다.”오재원은 눈물을 글썽이는 임연지를 꼭 껴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당연한 일인데 뭐. 넌 나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내가 너만은 꼭 지킬 거야.”“우리 부모님은 아직 내가 귀국한 거 모르셔. 내일 집에 가서 너랑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너희 집 가서 의논할 거니까 너도 고모랑 고모부한테 미리 말해놔.”“응. 아주머니, 아저씨랑 싸우지 마.”“알겠어.”...리우그룹 대표 사무실.“나가 봐.”보고도 끝난 마당에 최동철

  • 위태로운 제안   제1356화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임연지는 이튿날 아침 바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청초함이 돋보일 수 있게 화장도 연하게 한 뒤 오재원에게 문자를 보냈다.[재원아,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우리 자주 보던 카페에서 볼까?]역시나 문자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오재원이 답장을 보내왔다.[알겠어, 바로 갈게.]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임연지는 그의 답장에 입꼬리를 올렸다.30분 뒤, 카페에 도착한 오재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구석에 앉아있는 임연지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오재원은 걱정스레 물었다.“연지야, 왜 그래? 너 무슨 일 있어?”오재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임연지는 빨개진 눈시울을 하고 천천히 말했다.“재원아, 나... 나 임신 한 것 같아.”“진짜? 연지야, 이거 진짜야?”잠시 당황하던 오재원이 펄쩍 뛰며 좋아하자 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생리가 5일이나 밀려서 아침에 테스트기 해봤는데... 두 줄이더라.”두 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오재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임연지의 손을 맞잡았다.“너무 잘됐다! 우리한테 드디어 아이가 생긴 거잖아!”그에 똑같이 기뻐하며 손을 맞잡던 임연지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너무 기쁜 마음에 임연지의 이마와 볼에 뽀뽀를 하며 희열을 만끽하던 오재원도 그제야 그녀의 굳은 표정을 발견하고 물었다.“연지야, 표정이 왜 그래? 우리한테 아이가 생긴 건데 너는 안 기뻐?”“기쁘지.”임연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그냥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서. 감금 피하려고 임신한 애를 미혼모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는 게...”“너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잖아. 네 탓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만 하면 미혼모 가정도 아니잖아. 나랑 결혼하자 연지야.”“싫어.”임연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재원을 외면했다.“왜 싫은데?”임연지가 침묵만 유지하자 조급해 난 오재원은 자리까지 옮기며 물었다.“연지야,

  • 위태로운 제안   제1355화

    한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임연지는 혼자서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설윤과 최씨 집안의 원한 관계를 짤막하게 설명해준 임연지는 설윤에게 파렴치하고 가증스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들어오는 꼴 못 보겠어. 무슨 방법 없을까?]계속 답장이 없는 한진에 임연지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그녀가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니 한진이 그제야 답장을 보내왔다.[네 고모가 이런 수모를 당한 게 아무래도 집안에서 발언권이 너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사촌 동생도 많이 어리니까 더 그렇지.][그럼 어떻게 해야 발언권이 좀 생길까?][옛날 역사를 보면 말이야 그때도 과거제도가 있었거든. 뭐 정시, 별시, 식년 아무튼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그때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꿰찼었어. 왕조가 망해도 권세가들은 그 부귀영화를 계속 이어갔지. 그런 집안들이 좀 되는데 나열하자면 많아.][...][그런 권세가들이 세력이 전부 다 조상들 덕분만은 아니거든. 중요한 건 혼인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정략결혼을 해서 자신들의 세력을 늘려나간 거지.][결혼을 시키라고? 그러기엔 동림이가 너무 어리잖아. 그리고 걔 결혼문제는 고모부가 나설 텐데 고모가 어떻게 끼어들어.][너 바보냐? 너 말하는 거잖아 너!][나?][그래.][그런데... 내 상황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랑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어?][오재원 있잖아. 너만 바라보는 놈.][!]생각해보니 오재원이라는 좋은 신랑감이 있긴 했다.한진의 말대로 오재원을 휘어잡다 보니 그는 이미 임연지 말에 따라 움직이는 개가 되어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걸림돌은 있기 마련이었다.[그런데 그 집에서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그게 무슨 상관이야. 오재원이 너 아니면 죽는다는데.][네가 오씨 집안 사람이 돼서 고모 도와주면 고모부도 이런 일로 이혼하자고 하지는 못할걸.][그리고 정말 백만 번 양보해서 이혼한다고 해도 넌 오씨 집안 사람이니까 당당하게 네 동생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잖아

  • 위태로운 제안   제1354화

    “...”최동철이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자 최국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경계했다.“나중에 말 바꾸지 마.”“당연하죠. 설윤 씨 배속에... 제 동생이 있는 건데.”“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먼저 나가볼게요.”웃으며 방을 나선 최동철은 문을 닫자마자 미소를 싹 지웠다.이어서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복도에 울려 퍼졌다.임가희도 없는 거실을 지나 최동철은 밖으로 나갔다.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차에 탄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특유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설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봐.”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에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어두운 상사의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던 기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저택으로 모실까요 대표님?”“네.”...최씨 집안 방.임연지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임가희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고모, 진짜 그년 집에 들일 거예요?”“응.”“하지만!”이미 모든 걸 받아들인 임가희는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임연지는 그 더러운 내연녀의 얼굴을 집안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파렴치하게 최씨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모가 상간녀가 남편의 자식을 낳는 것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더 이상 방법이 없어 연지야.”“일을 좀 더 철저하게 못 한 내 잘못이지. 내가 설윤 그 년한테 도망갈 기회를 준 거야.”임연지는 한숨만 푹푹 내쉬는 고모를 보며 조급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오면 너도 괜히 시비 걸지 마.”짜증 난다는 듯 대충 대답하던 임연지는 갑자기 무슨 수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였다.“고모, 일단 집에 들이고 그다음에 다시 처리...”“아니, 난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임가희는 임연지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럼 진짜 그 년이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애 낳아봤자 재산 조금 받는 것뿐이야. 그런데 난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지는 거잖아.”아직 어린 동림이를 두고 이혼한다면 최씨 집

  • 위태로운 제안   제1353화

    최동철은 차분한 표정으로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움직였다.“네. 얼마 전에 경주 떴다고 알고 있습니다.”‘어디 보기만 했을까, 잠도 잤는데.’“가희가 연지 데리고 사과하러 갔는데 설윤이 거절하고 가희를 다치게 했대. 그리고 그 책임을 물을까 봐 도망갔다던데 그때는 가희 몸에 상처도 나 있어서 그 말을 믿었거든.”여기까지는 최동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그래서...”“그런데 오늘 설윤이가 초라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알아보니까 설윤이 임신 사실을 가희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내쫓은 거더라고.”최국환의 말을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최동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설윤... 설윤 씨가 혼자 경주로 돌아왔다고요?”임가희한테 쫓겨나기 전에 임신을 했다는 것 못지않게 다움시에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도 놀라웠다.하지만 최국환은 설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동철의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나갔다.“응... 회사 주위를 맴돌다가 직원한테 발견된 거야. 울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려주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애도 유산될뻔했대.”그 말에 최동철은 입꼬리를 올렸다.돌아오기 전에 최동철이 같이 가겠냐고 물었을 때도 거절하던 설윤이었다.다움시에서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인터넷쇼핑까지 하던 사람이 힘들게 살았다니.최동철도 떠나기 전 설윤에게 몇억을 주고 왔었는데 수중에 돈이 남으면 남았지 모자랄 리는 없었을 것이다.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노인네에게 달라붙은 것도, 아이를 잃을뻔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두 우스워서 최동철은 냉소를 흘렸다.매일 밤 잠자리를 가질 때는 신경도 안 쓰던 아이가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아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낯부끄러웠던 최국환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가희가 잘못했다고 하면서 설윤이 다시 데려오겠대. 아이 낳을 때까지 잘 보살펴주겠다고 해서 나도 동의했고.”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재벌가에서 첩을 들이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어떤 본처는 첩을 데리고 쇼핑도 하면서 아이

  • 위태로운 제안   제1352화

    최동철은 사색에 잠긴 듯 한동안 임가희를 바라보았다.빨갛게 부어오른 눈과 눈물이 말라붙은 볼 때문에 사람이 유독 초췌해 보였다.설윤을 쫓아낸 일이 들통난 건지 임가희는 최국환 앞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넌 서재로 가 있어.”“... 제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하시게요?”최동철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하자 최국환의 눈치를 보던 임가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옷자락을 꼭 쥐는 임가희와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최국환을 번갈아 보던 최동철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서재에 가 있을게요.”최동철이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온 거실을 가득 채웠다.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내며 집안의 장식들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최동철을 올려보낸 최국환은 금세 표정을 굳히더니 임가희를 보며 말했다.“당신 입으로 뱉은 말 지켜. 당장 다시 데려와서 치료부터 음식까지 당신이 다 책임져. 가희야, 넌 똑똑하니까 알 거야. 설윤이랑 걔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임가희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 설윤 씨 아이 낳을 때까지 내가 잘 보살필게요.”설윤이 도망가버린 뒤로 임가희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사실 매일 밤을 불안 속에서 지새우고 있었다.사람을 시켜 알아보던 설윤의 행적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됐을 때는 그 불안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찌르고 할퀴었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경계심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하필 이때 최국환이 모든 걸 알게 된 것이다.모든 거리의 CCTV, 간하림을 포함한 직원들의 증언 그리고 설윤의 임신 검사결과보고서까지 수많은 증거를 들이미니 임가희도 차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최국환 앞에서는 설윤의 존재를 흔쾌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본처 연기를 하며 임연지 더러 사과까지 하게 하고 선물도 전해줬었는데 뒤에서 이런 모진 짓을 했다는 게 들켜버리는 고개를 들기도 힘들었다.임신 사실을 뻔히 알

  • 위태로운 제안   제1351화

    “알겠어요.” 부시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연도진은 부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보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병원 병실.연도진이 부시아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오빠.” 이엘리아는 연도진 뒤에 서 있는 부시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시아 왔구나. 엄마한테 와 봐.”부시아는 다가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삼촌이 말한 대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아요?”“천천히 회복 중이야.”“그렇군요.” 부시아는 고개를 돌려 연도진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삼촌, 저 하루 종일 비행기만 타고 있었더니 너무 피곤해요. 이제 집에 가요.”이엘리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연도진은 이엘리아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시아 데리고 먼저 갈게.”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엘리아의 눈빛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경주. 밤이 깊어가며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거리에는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네온사인 불빛이 창문에 비쳐 그 빛과 그림자가 뒤엉켰다.최동철은 하루의 바쁜 일정을 마친 뒤 차 뒷좌석에 앉아 피곤에 지쳐 좌석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있었다.기사는 익숙하게 차를 시동 걸고 천천히 차들 사이로 움직였다.최동철은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비비고 무심코 창밖을 훑어보다가 갑자기 익숙한 인물을 보았다그 인물은 바로 한 여인이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긴 머리를 풀어놓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최동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바로 세운 뒤 그 방향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그는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설윤 씨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그는 다시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머릿속엔 설윤의 얼굴과 민박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떠올랐다.다움시에서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더

  • 위태로운 제안   제1350화

    필라시 국제공항.공항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방송에서는 항공편 정보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연도진은 도착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 속을 살피며 부승민과 부시아를 찾고 있었다.그는 잘 맞춘 짙은 색 정장을 입고 차분한 표정으로 가끔씩 시계를 확인하며 여유 있게 서 있었다.잠시 후, 부승민이 짐 수레를 밀고 통로를 지나 나오고 부시아는 짐 수레 위에 앉아 손에 봉제 인형을 안고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어린 소녀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두 개의 작은 땋은 머리를 한 채로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삼촌!” 부시아는 멀리서 연도진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짐 수레에서 뛰어내리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왔다.연도진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아이를 맞아 안았다.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시아야, 돌아온 거 환영해.”부시아는 연도진의 품에 안겨 목을 감싸며 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었어요.”부승민은 부시아를 보고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네.’부시아는 혀를 내밀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도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도 너 정말 보고 싶었어. 이번에 삼촌이랑 많이 놀자.”부승민은 짐 수레를 밀고 다가오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연도진 씨, 오랜만입니다.” 연도진은 일어난 후 부승민과 악수를 나누며 차분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시아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연도진은 눈길을 부시아에게 돌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시아야, 피곤하지 않아?” 부시아는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안 피곤해요. 비행기에서 만화도 보고 잠도 자고 왔어요.” 연도진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부승민에게 말했다. “이엘리아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아직 병원에 있어요. 시아를 데리고 이엘리아를 보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그

  • 위태로운 제안   제1349화

    이엘리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엘리샤, 우리 집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엘리샤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벌써 6년이 되었어요. 아가씨.” “6년이라...”이엘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감탄했다. “시간 참 빠르네. 처음 왔을 때는 수줍음 많던 소녀였는데 이제는 제법 어른스러워졌구나.” 엘리샤는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가씨.” “고마워할 것까진 없어. 넌 요 며칠 동안 날 성심껏 돌봐줬잖아. 그 보답으로 네게 아파트 한 채를 선물하려고 해.” 엘리샤는 순간 귀를 의심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아치 거리 쪽에 있는 곳이야. 내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당장 처리하긴 어렵지만 퇴원하면 함께 소유권 이전을 하러 가자.” 이엘리아는 엘리샤의 놀란 표정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는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우리 집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줬어. 이건 당연히 네가 받을 자격이 있는 보상이야.” 엘리샤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 “아가씨... 너무 과분한 선물이에요. 어떻게 받아야 할지...”이엘리아는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안심시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 갖지 마. 내겐 그저 작은 선물일 뿐이지만 네겐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잖아. 난 늘 너한테 감사하고 있었어.” 엘리샤는 두 손을 꼭 모으며 감정이 북받친 듯 말했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일해서 아가씨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엘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똑똑한 아이야. 난 항상 널 높이 평가해왔어. 앞으로도 내 곁에서 충성심을 잃지 않는다면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엘리샤는 감동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평생 윌슨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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