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도 자신의 손이 이미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그는 꽉 잡고 있던 온하랑의 손목을 놓아주었다.온하랑은 드디어 부승민이 자신을 놓아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승민이 온하랑의 일자넥으로 된 하이엔드 드레스의 옷깃을 손으로 잡아 찢어버렸다. 그는 큰 손으로 온하랑의 가슴을 주물렀다.정말 말랑하네.“… 읍, 으응…”막아낼 틈도 없이 들어온 손길에 온하랑의 목에서는 의도치 않은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그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화장실 문 앞에 멈춰 섰다.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밖의 남자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안에 사람 있나요? 문 좀 열어주세요.”부승민의 어깨를 밀어내던 온하랑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고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부승민 역시 동작을 멈추더니 끊겼던 이성을 빠르게 되찾았다.그는 다급히 눈을 떠 온하랑과 눈을 마주쳤다.맑게 빛나던 그녀의 진한 눈동자는 물속에 잠겨있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포개어지고 호흡이 뒤섞였지만 둘 중 그 아무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문밖의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자 포기하고 돌아섰다.부승민이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온하랑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미안해, 내가 너무 충동적이었어.”온하랑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고개만 숙였다.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부승민은 온하랑의 시선 끝에 자신의 큰 손이 있어서는 안 될 위치에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그는 데이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떼어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온하랑에게서 등을 돌렸다.“우선 너 옷 정리부터 해.”온하랑은 부승민이 흐트러트린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문의 잠금장치를 풀어 밖으로 나갔다.화장실에 남겨진 부승민은 몸에 남아있는
온하랑은 화장실로 가 온 매무새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질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운도 없지.온하랑은 마음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온하랑의 뒷모습을 보자 부승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뒤따라 갔다. “부승민!”오미연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부승민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지만 이내 매정하게 내팽개쳐졌다.…“누나, 돌아오셨군요.”로비 휴게실에 있던 민지훈은 온하랑의 실루엣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온하랑은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미안해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데리러 올 사람 있어요?”“아니요.”민지훈이 몸을 일으키고는 말을 이어나갔다.“그럼 누나, 제가 데려다드릴까요?”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긍정의 의사였다.“좋아요.”민지훈은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가서 직원분한테 차 좀 보내 달라고 얘기해볼게요.”“응.”부승민이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목격한 것은 바로 온하랑과 민지훈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연회장을 나가는 모습이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주위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부승민의 새카만 눈동자가 공허해지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으드득 소리를 내었다.“고작 민지훈 주제에 감히 내 것에 손을 대?”…차가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패딩으로 몸을 감싼 온하랑이 차에서 내렸다.온하랑과 함께 민지훈도 차에서 내렸다.“누나, 같이 올라갈까요?”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음에요, 지훈 씨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직원분도 얼른 퇴근하셔야죠.”민지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민지훈은 차에 올라타며 빨리 차 한 대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잘 가요.”온하랑이 손을 흔들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1월의 차가운 밤공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온하랑
“손놔!”온하랑은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랑아, 사랑해. 정말 너무너무 사랑해. 네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걸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를 거야...”온하랑은 가볍게 비웃었다.“부승민, 재밌어? 사랑이 뭔지는 알아? 사랑은 헌신이야. 점유욕이 아니라!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곧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러니까 날 좀 놔주면 안 돼? 내가 재결합하지 않겠다고 하면 영원히 이렇게 매달릴 거야?”부승민은 그대로 굳었다.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혀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그는 시선을 내려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 목에는 모래가 가득 찬 것같이 먹먹했다.“민지훈이야?”그녀가 민지훈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민지훈은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맞아.”부승민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드러냈다. 낮게 깐 목소리에는 불쌍함이 가득했다.“하랑아, 제발 날 속이지 말아줘. 네가 민지훈을 좋아한다니.”“하.”온하랑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부승민 씨,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난 민지훈을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젊고 밝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부승민은 심장이 그대로 깨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그 사람이 허명진 같은 사람이면...”“아니.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이라서 내 신분을 전혀 모른 채로 나랑 만난 거야.”“전에 물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지금은 마음이 변한 거야?”그의 말투에서 조급함이 드러났다.“말했었지. 내가 왜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매달려야 하냐고.”“하지만 민지훈은 너랑 전혀 어울리지 않아.”“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야. 민지훈한테 날 먹여 살릴 돈이 없다고 해도 내 전남편은 통이 커서 이혼할 때 많은 돈을 줬거든. 그 돈을 쓰면 되지.”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었다.“하랑아, 일부러 날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이내 사라졌다.온하랑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마른 침을 삼킨 후 묵묵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부승민은 사랑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온하랑은 그 말이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그녀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쳐다보았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부승민은 무조건 계획적으로 다가온 것일 테다.마지막에 그런 말을 하고 떠난 것도 온하랑이 마음 약해지게 하려고 한 게 분명하다.하지만 온하랑은 그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엘리베이터에 선 온하랑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자기가 엘리베이터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개를 들어보니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1층에 멈춰있었다.그녀가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정말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온하랑은 그제야 버튼을 눌렀다.들어간 그녀는 먼저 패딩을 벗어서 옷장에 건 후 슬리퍼로 갈아신었다.부시아는 아직 잠에 들지 않아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온하랑이 돌아온 것을 본 부시아는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숙모, 너무 예뻐요!”온하랑이 걸어와서 부시아의 볼을 만지면서 물었다.“세수는 했어?”“네!”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는 자야지. 침대로 가서 기다려. 곧 갈게.”“네.”부시아는 패드를 내려놓고 잠옷을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화장을 지우고 씻은 후 머리를 말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를 민지훈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누나, 저 집에 도착했어요.”온하랑은 이모티콘으로 대답한 후 핸드폰을 내려놓고 누웠다.부시아가 포동포동한 얼굴을 그녀의 몸에 기댔다.“숙모, 오늘 정말 너무 예뻐요! 우리 삼촌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온하랑이 진지하게 물었다.“시아야, 네가 좋아하는 건 나야, 아니면 삼촌의 아내야?”“당연히 숙모를
그는 어제 입었던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옷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많이 헝클어졌으며 온몸에서 술 냄새가 세게 났다.부시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쥔 채 부채질을 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더니 옆으로 숨었다.“삼촌, 술독에 빠졌다가 왔어요?”“...”“일단 가서 샤워부터 하고 옷 갈아입어요. 이따가 얘기해요.”부승민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부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물어볼 필요도 없었다.어젯밤 온하랑과 싸우고 나서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간 것이었다.부승민은 옷을 갈아입은 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내려와 부시아 옆에 앉았다.“숙모가 데려다준 거야?”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삼촌 어제 숙모랑 싸웠어요?”부승민은 머리를 말리다가 그대로 굳었다. 눈을 반쯤 감고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숙모가 뭐라고 했어?”“자기 앞에서 삼촌 얘기를 하면 우리를 싫어할 거래요.”“그럼 숙모 앞에서 내 얘기를 꺼내지 마. 삼촌이 말했었지. 우리 두 사람의 일은 너와 상관이 없어. 네가 숙모를 좋아한다면 계속 좋아하면 돼.”부승민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어젯밤 온하랑이 한 차가운 말이 떠올랐다.“시아야, 넌 모르잖아.”“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삼촌이 숙모를 포기했다는 건 알겠어요. 도와달라고 한 건 삼촌이면서 나보다 먼저 포기하면 어떡해요.”“숙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그 말라빠진 사람이요? 그 사람은 숙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삼촌, 삼촌도 본인이 그 남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부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부승민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그런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콩깍지를 써서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기우는 거야.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났던지 말이야.”“숙모가 전에 다른 사람을 좋아한 적은 없어요?”부시아가 호기심에 물었다.부승민은 멈칫하더니 씁쓸하게 대답했다.“있었지.”두 사람이 결
부승민은 부시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는 부승민의 눈빛은 다소 어두웠다.온하랑이 민지훈을 좋아하는 게 뭐가 대수인가.그녀는 밝고 멋있는, 생기 넘치는 민지훈을 좋아한다. 하지만 민지훈이 다른 여자와 사귄다면 부승민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부승민은 핸드폰을 꺼내 육광태한테 문자를 보냈다.그는 부시아와 함께 오후 내내 놀다가 육광태의 답장을 받았다.메시지를 본 부승민은 핸드폰을 끄고 부시아를 보며 물었다.“저녁에 숙모랑 자고 싶어?”“네!”부시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부시아는 온하랑과 같이 자는 것을 좋아했다.“그럼 삼촌이 지금 데려다줄까?”부승민이 물었다.한 달은 짧다. 부승민 혼자의 힘으로는 부시아를 붙잡아두기 어려웠다.하지만 온하랑이 있다면 달랐다.게다가 부시아는 매일같이 온하랑과 함께 잤으니 감정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게 일상이 되면 나중에 온하랑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네!”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옷을 몇 벌 더 챙겨준 후 온하랑네 집에 데려다주었다.온하랑은 마침 집에 있었다.벨 소리를 들은 그녀는 문 쪽으로 가서 물었다.“누구예요?”“숙모! 나예요!”온하랑이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조그마한 아이가 커다란 가방을 옆에 두고 있었다.부시아는 옆의 큰 가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숙모가 자기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해서 혼자 온 거예요. 숙모, 난 오늘도 숙모랑 같이 자고 싶어요.”부시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온하랑은 바닥의 가방을 들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들어와.”“예!”부시아는 다시 한번 온하랑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저녁에 김시연이 돌아와 부시아를 보고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다.온하랑은 김시연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김시연의 멸시의 시선을 받을까 봐였다.하지만 온하랑도 어쩔 수 없었다. 부시아가 너무 귀여운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밥을 먹을 때, 온하랑은 김시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돌아왔을 때는 괜
남자는 육광태를 알지만 부승민은 몰랐다. 그렇다고 아는 체할 수도 없었다.부승민의 시선을 마주한 그는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 미소를 띤 채 육광태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다.“이게 이들의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육광태는 보지 않고 바로 부승민에게 건네주었다.“네가 골라.”부승민은 자료를 받아들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심히 지켜보았다.룸 안은 매우 조용했다.분위기도 약간 차가웠다.모든 자료를 다 본 그가 이름을 불렀다.“서수현이 누구지?”한 줄로 선 여자 중에서 왼쪽 두 번째 여자가 흠칫하더니 앞으로 나왔다.“안녕하세요, 제가 서수현입니다.”부승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로 정했어. 다른 사람은 다 나가봐.”그들을 데려온 남자가 물었다.“한 명 더 고르지 않으십니까?”남자 두 명이서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논다는 건가?”“됐어.”“알겠습니다.”남자는 더 묻지 않고 나가면서 얘기했다.“수현아, 두 분을 잘 모셔!”다른 여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룸을 걸어 나갔다.이제 룸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서수현은 부승민과 육광태의 시선 속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소매 속의 주먹을 꽉 쥐었다.“앉아.”부승민은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서수현은 부승민을 보면서 옆의 소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 단정한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같았다.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갓 부씨 가문에 왔던 온하랑을 떠올렸다. 그때의 온하랑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안함이 느껴졌다.이게 바로 부승민이 서수현을 고른 원인이었다.“내가 널 왜 부른 건지 알아?”달칵. 부승민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피워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가볍게 던졌다.보통은 성관계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하지만 부승민의 질문은 평범하지 않았다.서수현이 고개를 저었다.“몰라요.”“가서 남자를 유혹해줘.”서수현은 고개를
요즘 날씨가 좋지 않아 도우미의 손자가 감기에 걸려 며칠이나 청가를 맡았다.부승민은 더이상 BX그룹의 대표는 아니지만 다른 사업을 많이 갖고 있었기에 매일 바삐 돌아 채서 부시아랑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부시아는 그래서 당당하게 온하랑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낮에는 온하랑과 밖에서 놀고 저녁에는 온하랑과 같이 잠을 잤다.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목요일에는 김시연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기에 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부시아를 본가로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고등학교 동창 모임은 오성급 호텔에서 진행되었다.그곳에 가기 전, 김시연은 아주 아름다운 메이크업까지 했다.마친 후 거울을 보던 그녀는 소파에 앉은 온하랑을 보고 자기 얼굴을 가리키더니 흥분해서 물었다.“하랑 씨, 봐요. 어때요?”깔끔한 피부 표현에 자연스러운 색조,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썹은 정신을 확 차리게 했다.옅은 컬러렌즈 속 드러난 그녀의 검은 눈동자. 그리고 위로 올라간 아이라인. 갈색의 팔레트까지 더해지니 김시연의 큰 눈은 더욱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딥 레드 립스틱까지 바르니 흰 피부가 더욱 하얘 보였다. 마치 겨울에 피어난 매화처럼 예뻤다.김시연이 이상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그냥 무표정으로 있기만 해도 고급진 여왕 같은 매력이 있었다.“예뻐요.”온하랑이 웃으면서 말했다.“시연 씨가 직접 한 메이크업인데 실수가 있을 리 없죠.”김시연은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 머리를 정돈하면서 말했다.“감히 날 도발하다니. 내가 무조건 그놈을 짓밟아버릴 거예요.”헤어까지 스타일링을 마친 김시연은 옷장에서 가장 비싼 옷을 꺼내 입고 천만 원 대의 가방도 가져왔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시연을 보고 온하랑은 엄지를 치켜세웠다.김시연은 거울을 보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그녀는 온하랑을 거울 앞에 앉혔다.“이젠 하랑 씨 차례에요. 오늘은 기죽으면 안 되는 날이에요.”저녁. 룸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들은 서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