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화장실로 가 온 매무새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이런 장면이 펼쳐질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운도 없지.온하랑은 마음속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자리를 떴다.온하랑의 뒷모습을 보자 부승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뒤따라 갔다. “부승민!”오미연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부승민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지만 이내 매정하게 내팽개쳐졌다.…“누나, 돌아오셨군요.”로비 휴게실에 있던 민지훈은 온하랑의 실루엣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온하랑은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미안해요,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데리러 올 사람 있어요?”“아니요.”민지훈이 몸을 일으키고는 말을 이어나갔다.“그럼 누나, 제가 데려다드릴까요?”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 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긍정의 의사였다.“좋아요.”민지훈은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제가 가서 직원분한테 차 좀 보내 달라고 얘기해볼게요.”“응.”부승민이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목격한 것은 바로 온하랑과 민지훈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연회장을 나가는 모습이었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주위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부승민의 새카만 눈동자가 공허해지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고 으드득 소리를 내었다.“고작 민지훈 주제에 감히 내 것에 손을 대?”…차가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패딩으로 몸을 감싼 온하랑이 차에서 내렸다.온하랑과 함께 민지훈도 차에서 내렸다.“누나, 같이 올라갈까요?”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음에요, 지훈 씨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직원분도 얼른 퇴근하셔야죠.”민지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다.“그럼 저도 먼저 가보겠습니다.”민지훈은 차에 올라타며 빨리 차 한 대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잘 가요.”온하랑이 손을 흔들고는 동네 안으로 들어섰다.1월의 차가운 밤공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어 온하랑
“손놔!”온하랑은 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하랑아, 사랑해. 정말 너무너무 사랑해. 네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걸 보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넌 모를 거야...”온하랑은 가볍게 비웃었다.“부승민, 재밌어? 사랑이 뭔지는 알아? 사랑은 헌신이야. 점유욕이 아니라!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곧 새로운 삶을 살 거야. 그러니까 날 좀 놔주면 안 돼? 내가 재결합하지 않겠다고 하면 영원히 이렇게 매달릴 거야?”부승민은 그대로 굳었다.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혀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그는 시선을 내려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쳐다보았다. 목에는 모래가 가득 찬 것같이 먹먹했다.“민지훈이야?”그녀가 민지훈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민지훈은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맞아.”부승민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드러냈다. 낮게 깐 목소리에는 불쌍함이 가득했다.“하랑아, 제발 날 속이지 말아줘. 네가 민지훈을 좋아한다니.”“하.”온하랑이 차갑게 코웃음 쳤다.“부승민 씨,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난 민지훈을 좋아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젊고 밝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부승민은 심장이 그대로 깨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그 사람이 허명진 같은 사람이면...”“아니. 해외에서 살아온 사람이라서 내 신분을 전혀 모른 채로 나랑 만난 거야.”“전에 물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지금은 마음이 변한 거야?”그의 말투에서 조급함이 드러났다.“말했었지. 내가 왜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매달려야 하냐고.”“하지만 민지훈은 너랑 전혀 어울리지 않아.”“내가 좋아하면 되는 거야. 민지훈한테 날 먹여 살릴 돈이 없다고 해도 내 전남편은 통이 커서 이혼할 때 많은 돈을 줬거든. 그 돈을 쓰면 되지.”부승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었다.“하랑아, 일부러 날
뒤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이내 사라졌다.온하랑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마른 침을 삼킨 후 묵묵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부승민은 사랑한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온하랑은 그 말이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그녀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쳐다보았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부승민은 무조건 계획적으로 다가온 것일 테다.마지막에 그런 말을 하고 떠난 것도 온하랑이 마음 약해지게 하려고 한 게 분명하다.하지만 온하랑은 그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엘리베이터에 선 온하랑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자기가 엘리베이터에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개를 들어보니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1층에 멈춰있었다.그녀가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정말 무슨 정신으로 사는 건지.온하랑은 그제야 버튼을 눌렀다.들어간 그녀는 먼저 패딩을 벗어서 옷장에 건 후 슬리퍼로 갈아신었다.부시아는 아직 잠에 들지 않아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온하랑이 돌아온 것을 본 부시아는 온하랑을 쳐다보면서 말했다.“숙모, 너무 예뻐요!”온하랑이 걸어와서 부시아의 볼을 만지면서 물었다.“세수는 했어?”“네!”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는 자야지. 침대로 가서 기다려. 곧 갈게.”“네.”부시아는 패드를 내려놓고 잠옷을 입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화장을 지우고 씻은 후 머리를 말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를 민지훈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누나, 저 집에 도착했어요.”온하랑은 이모티콘으로 대답한 후 핸드폰을 내려놓고 누웠다.부시아가 포동포동한 얼굴을 그녀의 몸에 기댔다.“숙모, 오늘 정말 너무 예뻐요! 우리 삼촌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온하랑이 진지하게 물었다.“시아야, 네가 좋아하는 건 나야, 아니면 삼촌의 아내야?”“당연히 숙모를
그는 어제 입었던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옷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많이 헝클어졌으며 온몸에서 술 냄새가 세게 났다.부시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쥔 채 부채질을 하면서 입을 삐죽 내밀더니 옆으로 숨었다.“삼촌, 술독에 빠졌다가 왔어요?”“...”“일단 가서 샤워부터 하고 옷 갈아입어요. 이따가 얘기해요.”부승민은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부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물어볼 필요도 없었다.어젯밤 온하랑과 싸우고 나서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간 것이었다.부승민은 옷을 갈아입은 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내려와 부시아 옆에 앉았다.“숙모가 데려다준 거야?”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삼촌 어제 숙모랑 싸웠어요?”부승민은 머리를 말리다가 그대로 굳었다. 눈을 반쯤 감고 생각하던 그가 말했다.“숙모가 뭐라고 했어?”“자기 앞에서 삼촌 얘기를 하면 우리를 싫어할 거래요.”“그럼 숙모 앞에서 내 얘기를 꺼내지 마. 삼촌이 말했었지. 우리 두 사람의 일은 너와 상관이 없어. 네가 숙모를 좋아한다면 계속 좋아하면 돼.”부승민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다가 어젯밤 온하랑이 한 차가운 말이 떠올랐다.“시아야, 넌 모르잖아.”“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삼촌이 숙모를 포기했다는 건 알겠어요. 도와달라고 한 건 삼촌이면서 나보다 먼저 포기하면 어떡해요.”“숙모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그 말라빠진 사람이요? 그 사람은 숙모한테 어울리지 않아요! 삼촌, 삼촌도 본인이 그 남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부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부승민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그런 문제가 아니야. 하지만 콩깍지를 써서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기우는 거야.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잘났던지 말이야.”“숙모가 전에 다른 사람을 좋아한 적은 없어요?”부시아가 호기심에 물었다.부승민은 멈칫하더니 씁쓸하게 대답했다.“있었지.”두 사람이 결
부승민은 부시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러는 부승민의 눈빛은 다소 어두웠다.온하랑이 민지훈을 좋아하는 게 뭐가 대수인가.그녀는 밝고 멋있는, 생기 넘치는 민지훈을 좋아한다. 하지만 민지훈이 다른 여자와 사귄다면 부승민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부승민은 핸드폰을 꺼내 육광태한테 문자를 보냈다.그는 부시아와 함께 오후 내내 놀다가 육광태의 답장을 받았다.메시지를 본 부승민은 핸드폰을 끄고 부시아를 보며 물었다.“저녁에 숙모랑 자고 싶어?”“네!”부시아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부시아는 온하랑과 같이 자는 것을 좋아했다.“그럼 삼촌이 지금 데려다줄까?”부승민이 물었다.한 달은 짧다. 부승민 혼자의 힘으로는 부시아를 붙잡아두기 어려웠다.하지만 온하랑이 있다면 달랐다.게다가 부시아는 매일같이 온하랑과 함께 잤으니 감정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그게 일상이 되면 나중에 온하랑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네!”부승민은 부시아에게 옷을 몇 벌 더 챙겨준 후 온하랑네 집에 데려다주었다.온하랑은 마침 집에 있었다.벨 소리를 들은 그녀는 문 쪽으로 가서 물었다.“누구예요?”“숙모! 나예요!”온하랑이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조그마한 아이가 커다란 가방을 옆에 두고 있었다.부시아는 옆의 큰 가방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숙모가 자기를 만나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해서 혼자 온 거예요. 숙모, 난 오늘도 숙모랑 같이 자고 싶어요.”부시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온하랑은 바닥의 가방을 들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들어와.”“예!”부시아는 다시 한번 온하랑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저녁에 김시연이 돌아와 부시아를 보고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다.온하랑은 김시연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김시연의 멸시의 시선을 받을까 봐였다.하지만 온하랑도 어쩔 수 없었다. 부시아가 너무 귀여운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밥을 먹을 때, 온하랑은 김시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돌아왔을 때는 괜
남자는 육광태를 알지만 부승민은 몰랐다. 그렇다고 아는 체할 수도 없었다.부승민의 시선을 마주한 그는 속으로는 전전긍긍하면서 미소를 띤 채 육광태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다.“이게 이들의 자료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육광태는 보지 않고 바로 부승민에게 건네주었다.“네가 골라.”부승민은 자료를 받아들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심히 지켜보았다.룸 안은 매우 조용했다.분위기도 약간 차가웠다.모든 자료를 다 본 그가 이름을 불렀다.“서수현이 누구지?”한 줄로 선 여자 중에서 왼쪽 두 번째 여자가 흠칫하더니 앞으로 나왔다.“안녕하세요, 제가 서수현입니다.”부승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로 정했어. 다른 사람은 다 나가봐.”그들을 데려온 남자가 물었다.“한 명 더 고르지 않으십니까?”남자 두 명이서 여자 한 명을 데리고 논다는 건가?”“됐어.”“알겠습니다.”남자는 더 묻지 않고 나가면서 얘기했다.“수현아, 두 분을 잘 모셔!”다른 여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룸을 걸어 나갔다.이제 룸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서수현은 부승민과 육광태의 시선 속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소매 속의 주먹을 꽉 쥐었다.“앉아.”부승민은 옆의 소파를 가리켰다.서수현은 부승민을 보면서 옆의 소파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그 단정한 모습은 마치 초등학생 같았다.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갓 부씨 가문에 왔던 온하랑을 떠올렸다. 그때의 온하랑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욱 불안함이 느껴졌다.이게 바로 부승민이 서수현을 고른 원인이었다.“내가 널 왜 부른 건지 알아?”달칵. 부승민은 라이터를 켜고 담배에 불을 피워 깊게 들이켰다. 그리고 라이터를 테이블에 가볍게 던졌다.보통은 성관계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하지만 부승민의 질문은 평범하지 않았다.서수현이 고개를 저었다.“몰라요.”“가서 남자를 유혹해줘.”서수현은 고개를
요즘 날씨가 좋지 않아 도우미의 손자가 감기에 걸려 며칠이나 청가를 맡았다.부승민은 더이상 BX그룹의 대표는 아니지만 다른 사업을 많이 갖고 있었기에 매일 바삐 돌아 채서 부시아랑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부시아는 그래서 당당하게 온하랑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낮에는 온하랑과 밖에서 놀고 저녁에는 온하랑과 같이 잠을 잤다.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목요일에는 김시연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기에 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부시아를 본가로 데려가 주었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고등학교 동창 모임은 오성급 호텔에서 진행되었다.그곳에 가기 전, 김시연은 아주 아름다운 메이크업까지 했다.마친 후 거울을 보던 그녀는 소파에 앉은 온하랑을 보고 자기 얼굴을 가리키더니 흥분해서 물었다.“하랑 씨, 봐요. 어때요?”깔끔한 피부 표현에 자연스러운 색조, 약간 사나워 보이는 눈썹은 정신을 확 차리게 했다.옅은 컬러렌즈 속 드러난 그녀의 검은 눈동자. 그리고 위로 올라간 아이라인. 갈색의 팔레트까지 더해지니 김시연의 큰 눈은 더욱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딥 레드 립스틱까지 바르니 흰 피부가 더욱 하얘 보였다. 마치 겨울에 피어난 매화처럼 예뻤다.김시연이 이상한 표정만 짓지 않는다면, 그냥 무표정으로 있기만 해도 고급진 여왕 같은 매력이 있었다.“예뻐요.”온하랑이 웃으면서 말했다.“시연 씨가 직접 한 메이크업인데 실수가 있을 리 없죠.”김시연은 그녀를 밉지 않게 흘겨보고 머리를 정돈하면서 말했다.“감히 날 도발하다니. 내가 무조건 그놈을 짓밟아버릴 거예요.”헤어까지 스타일링을 마친 김시연은 옷장에서 가장 비싼 옷을 꺼내 입고 천만 원 대의 가방도 가져왔다.모든 준비를 마친 김시연을 보고 온하랑은 엄지를 치켜세웠다.김시연은 거울을 보면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그녀는 온하랑을 거울 앞에 앉혔다.“이젠 하랑 씨 차례에요. 오늘은 기죽으면 안 되는 날이에요.”저녁. 룸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등학교 동창들은 서
김시연은 저녁을 잘 먹으면서 재밌게 대화를 나눴다.그러다가 강혜령이라는 동창이 말했다.“맞다, 시연아. 그거 들었어? 연도진 귀국했다던 거 같은데. 오늘 올 거래.”그 이름을 들은 온하랑은 김시연을 쳐다보았다.연도진. 그게 바로 김시연과 그녀의 라이벌이 같이 짝사랑했던 남자의 이름이다.김시연은 약간 흠칫하더니 얘기했다.“그래? 그럼 오라고 하지.”그녀의 눈은 약간 흐리멍텅했다.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그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명해진다.강혜령이 또 말했다.“오랫동안 못 만났지? 그때 너랑 이슬비가 얼마나 연도진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었냐. 난 너랑 연도진이 사귈 줄 알았어. 그런데 연도진이 해외로 나가니까 이슬비도 나갔더라? 이번은 이슬비가 주최한 동창회라던데 그래서 연도진도 온대.”“그래?”옆의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설마 두 사람 사귀는 건 아니겠지?”강혜령은 김시연을 흘깃 보고 말했다.“글쎄. 두 사람이 해외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으니까. 이슬비도 계속 솔로였고. 딱 봐도 연도진 때문이잖아. 귀국해서 동창회를 연다는 건,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건가?”김시연은 몰래 눈을 흘겼다. 허벅지 위에 놓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다른 여자가 끼어들어 얘기했다.“그래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니까. 마지막 승자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몰라.”김시연은 표정이 굳어서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차갑게 웃었다.“남이 버린 쓰레기를 주워간 것도 이긴 건가?”그 여자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김시연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필 이때 룸의 문이 열렸다.문 앞에는 25세 좌우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키는 180 이상으로 보였다. 그는 목폴라에 정장 바지를 입고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잘생긴 얼굴에 금테 안경까지 더해지니 정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본 후 김시연을 힐긋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 나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