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아주머니.”깜짝 놀란 진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언제 오셨어요? 연락이라도 해주시지.”온하랑은 그제야 임가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아한 옷차림으로 최국환의 곁에 있었고 두 사람이 대화는 나누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최국환을 훑어보았다.비록 이미 쉰 살이 넘었지만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고 균형 잡힌 몸매와 반듯한 미모를 보니 40대 중반의 잘생긴 아저씨나 다름없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잘나갔을지 상상이 되었고 부선월이 줄곧 잊지 못하는 데는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부승민과 최동철의 카리스마는 그를 닮은 게 틀림없다.온하랑은 진도원과 대화를 나누는 최국환이 은연중에 부승민 쪽을 힐끗 쳐다본 걸 알아챘다.그러나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눈빛에서는 언짢음이 느껴졌다.최국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넘어온 김에 며칠만 놀다가 가려고. 네가 바쁠 것 같아서 따로 연락 안 했어.”“아주머니는 점점 더 젊어지시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그런 농담은 넣어둬.”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진도원은 정식으로 소개했다.“이분은 동철이의 아버지인 최국환 씨, 그리고 곁에는 아내분인 임가희 씨야.”“벨라는 제 여자 친구예요. 이분은 온하랑이고 저희 모두 친구예요. 그리고 이쪽은 하랑이의 남편분이요.”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벨라와 함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임가희와 그녀의 관계는 아슬아슬했기에 지금 이 순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진도원만 난처하게 된다.그러니 온하랑은 임가희와 모르는척했고 임가희 역시나 공식석상에서 온하랑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소개받은 최국환은 온하랑을 힐끗 쳐다보더니 곧이어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도원아, 너 요즘 잘나가네.”진도원이 웃으면서 말하려던 찰나 최국환이 말머리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이런 우연이. 부 회장님도 필라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부승민은 그
부선월은 운전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레스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표정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어 어느새 피범벅이 되었다.최국환과 임가희, 부승민과 온하랑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너무도 화목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부선월은 두 눈이 뒤집혔다.자신의 아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최국환, 임가희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임가희가 앉은 저 자리... 원래는 내꺼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지금 같이 밥을 먹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최국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야지. 왜 임가희랑 붙어먹은 거냐고 따져야지.’부선월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는데 이 모든 게 온하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온하랑의 존재로 인해 부승민이 점점 다른 길로 빠진 거라며 확신했고 이대로 가다간 버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이성을 잃은 부선월은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이 울리자 최국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이를 본 임가희가 물었다.“왜 안 받아요?”“스팸 전화야.”최국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 시각 차 안의 부선월은 뚝 끊긴 통화를 보고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이를 악문채 최국환을 노려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최국환은 여전히 전화를 끊었다.곧이어 부선월이 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꺼져있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지금 거신 번호는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부선월은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을 내던졌다.부승민도 짜증이 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사실 우연히 최국환의 발신자 번호를 언뜻 보았는데 너무도 익숙한 번호였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아니나 다를까 부선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부승민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침 그의 표정을 가렸다.부선월은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마치 악령에 빙의된 사람처럼 원수를 보듯 부승민을 노리더니 고함을 질렀다.“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자식. 애초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 그럼 지금까지 외롭게 홀로 해외에서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야.”며칠 전 부선월은 최국환이 필라시로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연출하려고 데이트 당시 입었던 드레스와 나이에 맞지 않는 메이크업을 하고선 필라시로 향했다. 그렇게 오는 길 내내 최국환이 다시 한번 본인에게 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최국환의 행방을 알아내 급히 레스토랑에 달려간 그녀는 임가희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심지어 최국환은 손수 스테이크를 썰어 임가희에게 건네주는 자상함을 보였다.잔뜩 기대하며 달려온 부선월의 얼굴은 한순간에 갈라졌다.그 후 며칠 동안 최국환의 뒤를 따라다닌 부선월은 그가 임가희와 함께 쇼핑하며 이것저것 사주는 걸 보게 되었다.고통이 밀려오고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부선월은 이 미련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시궁창 속의 바퀴벌레처럼 빛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들의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국환의 곁이 있는 사람이 본인이기를 바랐다.실망이 커질수록 임가희에 대한 질투심도 점점 더 커졌다.부선월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임가희를 지금껏 방치해둔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쌓아온 모든 감정은 그들 여섯 명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 최고조에 달했고, 점점 한계점까지 쌓여 마침내 폭발했다.부승민은 제정신이 아닌 부선월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미쳤네요.”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부승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이를 본 부선월은 흠칫하고선 목 놓아 소리쳤다.“멈춰. 당장 멈추라고. 넌 엄마가 안중에도 없니?”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건
온하랑이 연고를 다 바를 때쯤 부승민이 입을 열었다,“이제는 완전히 미쳤어.”그 말투에는 무기력함과 짜증이 가득했다.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식사 자리에서 회장님한테 전화한 것도...”“맞아.”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무슨 마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응? 뭔데?”“이미 회장님한테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어. 여기서 손을 놓는 건 수십 년의 시간을 포기한 셈이잖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면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걸 증명하기 위해 목숨도 바칠거야.”번호를 저장한 것도 아닌데 최국환은 일련의 숫자만 보고 부선월인 걸 알았다. 그 말인즉 두 사람은 예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고 최국환은 부선월의 번호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더 이상 부선월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번호를 차단했을 텐데 최국환은 그게 아닌 핸드폰을 꺼버렸다.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온 부승민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의 품에 안겼다.“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온하랑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타일렀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생각하고 일찍 자자.”그 시각 또 다른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밤이 깊어가자 임가희는 어느새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최국환이 관계자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임가희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이제 그만하고 얼른 쉬어요.”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인 후 화장실로 가려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보는 건... 지금요? 알겠어요. 바로 나갈게요.”누우려던 임가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왜요? 지금 또 나가봐야 하는 거예요?”“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최
최국환은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재빨리 부선월을 밀어냈다.“그만해요.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래요.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부선월은 최국환을 있는 힘껏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아니요. 그동안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세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뿐인 인생을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갈 수는 없잖아요? 저 국환 씨 좋아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한테 손가락질해도 절대 후회 안 할 자신있어요. 국환 씨는 절 이해해 줄 거죠?”부선월은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매우 진지하고 집요했다.예전과 마찬가지로 부선월의 두 눈에는 온통 최국환뿐이었다.최국환은 흔들린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그녀를 밀어냈다.그 반응을 본 부선월은 이때다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그래도 이성이 남아있었던 최국환은 정신을 다잡고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지금 많이 취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말을 마친 그는 부선월이 뭐라고 하든 무작정 끌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실은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사고가 생길 것 같아 회피하는 중이었다.“국환 씨, 왜 내 두 눈을 못 보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요?”부선월은 최국환에게 끌려가며 물었다.최국환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어느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말 돌리지 말고요.”부선월을 재빨리 최국환의 앞을 가로막았다.“국환 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마음속에 아직도 제가 있잖아요. 남은 인생을 후회하며 살 거예요?”“제발 그만 좀 해요. 어디 살고 있는지부터 말해요.”“국환 씨 옆방이요.”최국환이 걸음을 멈추자 부선월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왜요? 아내분한테 들킬까 봐 겁나요?”최국환은 묵묵히 그녀를 계속 끌고 내려갔다.“어지러우니까 부축해 줘요.”부선월은 술에 취한 듯 그에게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밀
눈을 뜨고 소파에서 일어나 앉은 부선월은 불안해하는 최국환을 바라봤다.“누구예요?”최국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정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가희?”부선월은 할 말을 잃었다.“응. 회사에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어. 금방 돌아갈게.”대화를 엿들은 부선월은 최국환이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본인을 만나러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최국환은 전화를 끊자마자 싸늘한 표정으로 부선월을 바라봤다.“이제 가봐야 해.”“국환 씨...”이번에는 부선월이 따라잡기도 전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마치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것마냥 부랴부랴 도망쳤다.굳게 닫혀진 문짝을 바라보던 부선월은 살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버텼으면 성공인데... 임가희...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최국환은 옥상에서 30여 분 동안 찬 바람을 쐬고 나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잠이 옅었던 임가희는 인기척을 듣고 깬 듯 졸린 두 눈으로 물었다.“왔어요? 일은 해결됐어요?”“응.”최국환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옷을 벗었다.그가 침대에 눕자 은은한 술 냄새가 느껴진 임가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최국환의 품에 안겼다.“도원이는 하랑이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도원이를 통해서 하랑이랑 식사 자리 한번 만드는 게 어때요? 관계도 풀 겸.”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진도원은 온하랑이 임가희와 전남편 사이의 딸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데 지금껏 풀지 못해서 어제도 모른척했다고 말하자 진도원은 망설임 없이 도와주겠다고 했다.임가희가 딸인 온하랑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씨 가문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최씨 가문의 지원이 필요하여 승낙한 것도 있다.부승민이 떠난 후 온하랑은 스튜디오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진도원의 연락을 받게 되었
온하랑이 고민에 잠긴 그때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이번 출장 촬영은 전부 마무리 되었고 이제 편집만 남았으니 각자 작업하고 최종본을 제출하라고 했다. 편집은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그 말인즉 귀국해도 된다는 얘기였다.하지만 곧이어 편집장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 금융잡지사에서 인터뷰 관련하여 긴급 촬영이 잡혔는데 사진작가가 필요하다고 했다.“페이, 이번 한 번만 도좌워. 시간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취재하는 전문 기자들도 있고 화이트도 그 자리에 있으니까 넌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끝나.”온하랑은 흔쾌히 동의했다.편집장은 끊임없이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인터뷰 대상자의 정보와 촬영 주소를 보내왔다.이번 촬영은 스튜디오가 아닌 인터뷰 대상자의 사무실인 비어 빌딩 15층이었다.인터뷰 대상자의 이름은 빈센트 윌슨이고 어느 한 회사의 회장님이라고 한다.온하랑은 그 이름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상은 역시나 너무 좁았다.빈센트 윌슨이 곧 부시아의 외할아버지인 그 윌슨이었다.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교로운 상황에 온하랑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지금이라도 못한다고 연락해 볼까?’아침 식사 후 온하랑은 화이트 일행을 만나 비어 빌딩으로 향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는 온하랑의 모습을 본 금융 잡지 편집장 화이트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 찰스 인터뷰에 무례함을 범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이번에도 함부로 행동하여 윌슨을 언짢게 만든다면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비어 빌딩에 도착하자 프런트 직원과 윌슨의 여비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여비서는 그들은 대기실로 안내하며 다짜고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답했다.비서는 커피를 그들에게 타 주고선 재빨리 사무실로 가서 다른 비서에게 물었다.“에리브릴, 오늘 일정 회장님께 말씀드렸어요?”윌슨이 Z 국 출장을
“우웩...”거절하고 싶은 건 부시아가 아니라 앨런이었다.부시아는 고통스러워하는 앨런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앨런 삼촌이 몸 안 좋으니까 저도 갈래요.”“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회사로 갈까? 일 끝나면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노는 거야.”“얼마나 걸려요?”“오래 안 걸려. 30분 정도?”“그럼 같이 갈래요.”부시아는 윌슨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오매불망 윌슨을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는 그를 보자마자 감격을 금치 못했다.“회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인터뷰 관계자분이 꽤 오랜 시간 기다리셨어요.”그 시각 온하랑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30분 넘게 기다렸다. 그들은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수차례 조정하고 인터뷰 원고를 수십번 외웠지만 윌슨은 나타나지 않았다.기다리다 못한 화이트가 비서에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시찰 나갔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차마 손녀랑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윌슨은 사무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시간은 30분이라고 미리 얘기했지? 그동안 카롤이랑 라운지에서 놀고 있어. 간식이랑 아이패드도 챙겨가고.”“알겠습니다.”부시아는 에이브릴과 함께 라운지로 향했고 여비서는 대기실로 들어가 온하랑과 기타 관계자분들을 안내했다.“회장님께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한 무리의 사람이 비서를 따라 사무실로 걸어갔고 그 와중에 비서는 잊지 않고 강조했다.“30분밖에 시간이 없으니 인터뷰는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말을 이었다.“촬영이 끝나고 회장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는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다.”“아쉽게 됐네요.”그 시각 윌슨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상체는 금방 갈아입은 셔츠와 정장 차림이었는데 하체는 캐주얼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비서는 기자들을 안내하며 화이트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그럼 시작하시죠.”기자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윌슨 옆 소파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안녕하세요. 이번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