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아주머니.”깜짝 놀란 진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언제 오셨어요? 연락이라도 해주시지.”온하랑은 그제야 임가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아한 옷차림으로 최국환의 곁에 있었고 두 사람이 대화는 나누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최국환을 훑어보았다.비록 이미 쉰 살이 넘었지만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고 균형 잡힌 몸매와 반듯한 미모를 보니 40대 중반의 잘생긴 아저씨나 다름없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잘나갔을지 상상이 되었고 부선월이 줄곧 잊지 못하는 데는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부승민과 최동철의 카리스마는 그를 닮은 게 틀림없다.온하랑은 진도원과 대화를 나누는 최국환이 은연중에 부승민 쪽을 힐끗 쳐다본 걸 알아챘다.그러나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눈빛에서는 언짢음이 느껴졌다.최국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넘어온 김에 며칠만 놀다가 가려고. 네가 바쁠 것 같아서 따로 연락 안 했어.”“아주머니는 점점 더 젊어지시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그런 농담은 넣어둬.”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진도원은 정식으로 소개했다.“이분은 동철이의 아버지인 최국환 씨, 그리고 곁에는 아내분인 임가희 씨야.”“벨라는 제 여자 친구예요. 이분은 온하랑이고 저희 모두 친구예요. 그리고 이쪽은 하랑이의 남편분이요.”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벨라와 함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임가희와 그녀의 관계는 아슬아슬했기에 지금 이 순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진도원만 난처하게 된다.그러니 온하랑은 임가희와 모르는척했고 임가희 역시나 공식석상에서 온하랑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소개받은 최국환은 온하랑을 힐끗 쳐다보더니 곧이어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도원아, 너 요즘 잘나가네.”진도원이 웃으면서 말하려던 찰나 최국환이 말머리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이런 우연이. 부 회장님도 필라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부승민은 그
부선월은 운전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레스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표정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어 어느새 피범벅이 되었다.최국환과 임가희, 부승민과 온하랑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너무도 화목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부선월은 두 눈이 뒤집혔다.자신의 아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최국환, 임가희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임가희가 앉은 저 자리... 원래는 내꺼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지금 같이 밥을 먹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최국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야지. 왜 임가희랑 붙어먹은 거냐고 따져야지.’부선월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는데 이 모든 게 온하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온하랑의 존재로 인해 부승민이 점점 다른 길로 빠진 거라며 확신했고 이대로 가다간 버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이성을 잃은 부선월은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이 울리자 최국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이를 본 임가희가 물었다.“왜 안 받아요?”“스팸 전화야.”최국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 시각 차 안의 부선월은 뚝 끊긴 통화를 보고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이를 악문채 최국환을 노려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최국환은 여전히 전화를 끊었다.곧이어 부선월이 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꺼져있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지금 거신 번호는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부선월은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을 내던졌다.부승민도 짜증이 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사실 우연히 최국환의 발신자 번호를 언뜻 보았는데 너무도 익숙한 번호였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아니나 다를까 부선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부승민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침 그의 표정을 가렸다.부선월은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마치 악령에 빙의된 사람처럼 원수를 보듯 부승민을 노리더니 고함을 질렀다.“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자식. 애초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 그럼 지금까지 외롭게 홀로 해외에서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야.”며칠 전 부선월은 최국환이 필라시로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연출하려고 데이트 당시 입었던 드레스와 나이에 맞지 않는 메이크업을 하고선 필라시로 향했다. 그렇게 오는 길 내내 최국환이 다시 한번 본인에게 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최국환의 행방을 알아내 급히 레스토랑에 달려간 그녀는 임가희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심지어 최국환은 손수 스테이크를 썰어 임가희에게 건네주는 자상함을 보였다.잔뜩 기대하며 달려온 부선월의 얼굴은 한순간에 갈라졌다.그 후 며칠 동안 최국환의 뒤를 따라다닌 부선월은 그가 임가희와 함께 쇼핑하며 이것저것 사주는 걸 보게 되었다.고통이 밀려오고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부선월은 이 미련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시궁창 속의 바퀴벌레처럼 빛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들의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국환의 곁이 있는 사람이 본인이기를 바랐다.실망이 커질수록 임가희에 대한 질투심도 점점 더 커졌다.부선월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임가희를 지금껏 방치해둔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쌓아온 모든 감정은 그들 여섯 명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 최고조에 달했고, 점점 한계점까지 쌓여 마침내 폭발했다.부승민은 제정신이 아닌 부선월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미쳤네요.”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부승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이를 본 부선월은 흠칫하고선 목 놓아 소리쳤다.“멈춰. 당장 멈추라고. 넌 엄마가 안중에도 없니?”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건
온하랑이 연고를 다 바를 때쯤 부승민이 입을 열었다,“이제는 완전히 미쳤어.”그 말투에는 무기력함과 짜증이 가득했다.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식사 자리에서 회장님한테 전화한 것도...”“맞아.”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무슨 마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응? 뭔데?”“이미 회장님한테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어. 여기서 손을 놓는 건 수십 년의 시간을 포기한 셈이잖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면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걸 증명하기 위해 목숨도 바칠거야.”번호를 저장한 것도 아닌데 최국환은 일련의 숫자만 보고 부선월인 걸 알았다. 그 말인즉 두 사람은 예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고 최국환은 부선월의 번호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더 이상 부선월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번호를 차단했을 텐데 최국환은 그게 아닌 핸드폰을 꺼버렸다.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온 부승민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의 품에 안겼다.“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온하랑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타일렀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생각하고 일찍 자자.”그 시각 또 다른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밤이 깊어가자 임가희는 어느새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최국환이 관계자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임가희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이제 그만하고 얼른 쉬어요.”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인 후 화장실로 가려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보는 건... 지금요? 알겠어요. 바로 나갈게요.”누우려던 임가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왜요? 지금 또 나가봐야 하는 거예요?”“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최
최국환은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재빨리 부선월을 밀어냈다.“그만해요.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래요.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부선월은 최국환을 있는 힘껏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아니요. 그동안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세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뿐인 인생을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갈 수는 없잖아요? 저 국환 씨 좋아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한테 손가락질해도 절대 후회 안 할 자신있어요. 국환 씨는 절 이해해 줄 거죠?”부선월은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매우 진지하고 집요했다.예전과 마찬가지로 부선월의 두 눈에는 온통 최국환뿐이었다.최국환은 흔들린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그녀를 밀어냈다.그 반응을 본 부선월은 이때다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그래도 이성이 남아있었던 최국환은 정신을 다잡고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지금 많이 취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말을 마친 그는 부선월이 뭐라고 하든 무작정 끌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실은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사고가 생길 것 같아 회피하는 중이었다.“국환 씨, 왜 내 두 눈을 못 보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요?”부선월은 최국환에게 끌려가며 물었다.최국환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어느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말 돌리지 말고요.”부선월을 재빨리 최국환의 앞을 가로막았다.“국환 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마음속에 아직도 제가 있잖아요. 남은 인생을 후회하며 살 거예요?”“제발 그만 좀 해요. 어디 살고 있는지부터 말해요.”“국환 씨 옆방이요.”최국환이 걸음을 멈추자 부선월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왜요? 아내분한테 들킬까 봐 겁나요?”최국환은 묵묵히 그녀를 계속 끌고 내려갔다.“어지러우니까 부축해 줘요.”부선월은 술에 취한 듯 그에게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밀
눈을 뜨고 소파에서 일어나 앉은 부선월은 불안해하는 최국환을 바라봤다.“누구예요?”최국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정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가희?”부선월은 할 말을 잃었다.“응. 회사에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어. 금방 돌아갈게.”대화를 엿들은 부선월은 최국환이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본인을 만나러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최국환은 전화를 끊자마자 싸늘한 표정으로 부선월을 바라봤다.“이제 가봐야 해.”“국환 씨...”이번에는 부선월이 따라잡기도 전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마치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것마냥 부랴부랴 도망쳤다.굳게 닫혀진 문짝을 바라보던 부선월은 살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버텼으면 성공인데... 임가희...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최국환은 옥상에서 30여 분 동안 찬 바람을 쐬고 나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잠이 옅었던 임가희는 인기척을 듣고 깬 듯 졸린 두 눈으로 물었다.“왔어요? 일은 해결됐어요?”“응.”최국환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옷을 벗었다.그가 침대에 눕자 은은한 술 냄새가 느껴진 임가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최국환의 품에 안겼다.“도원이는 하랑이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도원이를 통해서 하랑이랑 식사 자리 한번 만드는 게 어때요? 관계도 풀 겸.”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진도원은 온하랑이 임가희와 전남편 사이의 딸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데 지금껏 풀지 못해서 어제도 모른척했다고 말하자 진도원은 망설임 없이 도와주겠다고 했다.임가희가 딸인 온하랑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씨 가문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최씨 가문의 지원이 필요하여 승낙한 것도 있다.부승민이 떠난 후 온하랑은 스튜디오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진도원의 연락을 받게 되었
온하랑이 고민에 잠긴 그때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이번 출장 촬영은 전부 마무리 되었고 이제 편집만 남았으니 각자 작업하고 최종본을 제출하라고 했다. 편집은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그 말인즉 귀국해도 된다는 얘기였다.하지만 곧이어 편집장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 금융잡지사에서 인터뷰 관련하여 긴급 촬영이 잡혔는데 사진작가가 필요하다고 했다.“페이, 이번 한 번만 도좌워. 시간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취재하는 전문 기자들도 있고 화이트도 그 자리에 있으니까 넌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끝나.”온하랑은 흔쾌히 동의했다.편집장은 끊임없이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인터뷰 대상자의 정보와 촬영 주소를 보내왔다.이번 촬영은 스튜디오가 아닌 인터뷰 대상자의 사무실인 비어 빌딩 15층이었다.인터뷰 대상자의 이름은 빈센트 윌슨이고 어느 한 회사의 회장님이라고 한다.온하랑은 그 이름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상은 역시나 너무 좁았다.빈센트 윌슨이 곧 부시아의 외할아버지인 그 윌슨이었다.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교로운 상황에 온하랑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지금이라도 못한다고 연락해 볼까?’아침 식사 후 온하랑은 화이트 일행을 만나 비어 빌딩으로 향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는 온하랑의 모습을 본 금융 잡지 편집장 화이트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 찰스 인터뷰에 무례함을 범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이번에도 함부로 행동하여 윌슨을 언짢게 만든다면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비어 빌딩에 도착하자 프런트 직원과 윌슨의 여비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여비서는 그들은 대기실로 안내하며 다짜고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답했다.비서는 커피를 그들에게 타 주고선 재빨리 사무실로 가서 다른 비서에게 물었다.“에리브릴, 오늘 일정 회장님께 말씀드렸어요?”윌슨이 Z 국 출장을
“우웩...”거절하고 싶은 건 부시아가 아니라 앨런이었다.부시아는 고통스러워하는 앨런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앨런 삼촌이 몸 안 좋으니까 저도 갈래요.”“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회사로 갈까? 일 끝나면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노는 거야.”“얼마나 걸려요?”“오래 안 걸려. 30분 정도?”“그럼 같이 갈래요.”부시아는 윌슨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오매불망 윌슨을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는 그를 보자마자 감격을 금치 못했다.“회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인터뷰 관계자분이 꽤 오랜 시간 기다리셨어요.”그 시각 온하랑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30분 넘게 기다렸다. 그들은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수차례 조정하고 인터뷰 원고를 수십번 외웠지만 윌슨은 나타나지 않았다.기다리다 못한 화이트가 비서에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시찰 나갔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차마 손녀랑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윌슨은 사무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시간은 30분이라고 미리 얘기했지? 그동안 카롤이랑 라운지에서 놀고 있어. 간식이랑 아이패드도 챙겨가고.”“알겠습니다.”부시아는 에이브릴과 함께 라운지로 향했고 여비서는 대기실로 들어가 온하랑과 기타 관계자분들을 안내했다.“회장님께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한 무리의 사람이 비서를 따라 사무실로 걸어갔고 그 와중에 비서는 잊지 않고 강조했다.“30분밖에 시간이 없으니 인터뷰는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말을 이었다.“촬영이 끝나고 회장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는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다.”“아쉽게 됐네요.”그 시각 윌슨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상체는 금방 갈아입은 셔츠와 정장 차림이었는데 하체는 캐주얼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비서는 기자들을 안내하며 화이트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그럼 시작하시죠.”기자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윌슨 옆 소파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안녕하세요. 이번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